높다란 처마와 쭉 뻗은 기와는 하늘을 가리고 있고,
참나무를 원통형으로 매끄럽게 다듬어 새빨간 인주를 발라 기둥을 세웠다.
바깥에서 오는 사악한 기운을 멸하기 위해
북쪽으로 지은 경화문의 모습이다.
그 가운데 문을 활짝 열고 성큼성큼 들어오는 한 인영이 있었으니,
풍기는 기세만 보면 개선장군처럼 보였으나
어찌 보면 의장이 흐트러져 장군이 아닌 거리의 취객처럼 보였다.
심지어 몸에 걸치고 있는 겉옷은 땅에 질질 끌렸는데,
예를 중시하는 문인들에게는 눈이 찌푸려지는 모습이었다.
“관과 용포를 벗으라”
근정전 최고봉의 자리에 앉아 명령을 내리는 부왕의 모습은
날을 잘 세운 칼처럼 서늘했고,
반대편에서 취객처럼 보였던 인물은 온몸에서 기이한 열기가 번들거렸는데
바로 부왕이 정비가 아닌 후궁에게서 낳은 둘째 아들 이산군이었다.
성큼성큼 다가와 대전의 정중앙에 위치한 이산군은 살며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하나 둘 관과 의복을 벗기 시작했는데,
옷 안에는 상복이 드러나 맞은편에 위치한 부왕의 코끝이 씰룩거렸다.
“너··· 상복을 입고 온 이유가 무엇이냐?
애비인 내가 죽었으면 하여 입고 온 것이냐?”
“어머님의 기일이 다가와 입은 상복입니다.“
“기일이 언제인데! 그 따위 변명을 하느냐··· 심지어 시마緦魔라니.."
이산군의 상복으로 인해 주변 내관들의 수군거림은 커져만 갔다.
상복에는 삼베 올의 굵고 얇음에 따라 슬픔의 단계를
간접적으로 나타내는데 가장 큰 슬픔인 참최부터
가장 낮은 슬픔을 나타내는 시마까지 여러 단계가 있었다.
그 중에 부모와 자식간의 상에는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참최를 입는 것이 예의였는데,
어미의 상복이라면서 가장 낮은 단계인 시마의 상복을 입고 온 이산군의 모습은 모순이었고,
오히려 그를 조롱하고자 하는 의미가 담긴 것을 부왕은 눈치챘다.
“네놈이 이틀 전 비가 내린 그 야심한 시각에,
칼을 들고 내 침전 앞까지 다가온 것을 내 잊을 수가 없다!”
“···..”
그 당시 세자인 이산군은 술에 만취한 상태로 칼을 들고
부왕의 침전인 강녕전까지 찾아왔었다.
전부터 간간히 발생하던 울화증이 또 도진 것이었는데,
강녕전으로 향하는 그를 말리려던 내관들과 궁녀들이
이산군의 칼질 한 번에 한 명씩 유명을 달리했다.
그렇게 피를 묻히며 침전 앞에 도착한 그는 한 시진동안 꿈쩍도 안하고 목 놓은 채 울고만 있었는데,
장대비처럼 내리는 소나기에 묻혀 들리지 않을 것이라 여겼던 그의 울음이 부왕의 귓가에 닿았나보다.
“너같이 못난 놈은 애비인 내가 죽어도 눈 하나 깜짝 안하겠지!”
대전 안을 울리는 부왕의 쩌렁쩌렁한 호통에
대신들은 숨을 들이킨 채 눈치만 보았고,
적막한 대전 속 본인의 숨소리만이 거칠게 울리자 부왕은 머리를 부여잡으며 칼칼한 목소리를 토해냈다.
“이것은 역모이니라! 김내관은 칼을 가져와라!”
김내관이 갑작스러운 명에 허리를 숙이며 반응하기도 전
부왕은 가슴이 답답했는 지 성큼성큼 우측에 있는 내금위에게로 다가가 칼을 빼앗었다.
그리고는 이산군을 향해 걸어갔고,
그의 분노가 커지는 만큼 이산군과의 거리도 순식간에 접어들었다.
“무릎을 꿇으라”
이산군은 바닥에서 올라오는 한기를 느끼며 무릎을 꿇고는 부왕을 올려다보았다.
부왕 또한 이산군 앞에 당도한 채 차디찬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는데···
“이제야 저를 제대로 바라봐 주십니다 상감.”
눈이 마주친 부왕은 순간 흠칫했고,
그가 마주한 이산군의 얼굴은 자기가 매일 조식경에 바라보는 수경 속 얼굴과 너무나도 흡사해 소름이 돋았다.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이냐···”
“제 표정이 어떻습니까.”
“···..”
공기마저 단칼에 베일정도로 살얼음이 판치는 분위기 속
아버지인 부왕과 아들인 이산군은 처음으로 한 보폭도 안되는 거리에서
서로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웃고 있는 거라면 두려움에 미친 것이고,
울고 있는 거라면 두려움에 떠는 것이겠지요···”
이산군의 표정은 기괴해 칼을 들고 있는 부왕마저도 주저하게 만들었다.
“본디 인간의 얼굴은 그 사람의 마음을 나타내는 창窓과도 같다 하였는데··· 제 마음이 보이십니까?”
부왕은 노쇠한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건장한 체격을 자랑했는데,
이산군과 마주한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덩치가 무색하게 떠는 것 같았다.
“못난 놈”
부왕은 결국 칼을 바닥에 내팽개친 채 한 차례 심호흡을 하였고,
이내 숨을 내쉬는 그의 눈빛은 언제 떨렸냐는 양 빈틈이 없었다.
“평소에 그리 죽고 싶어 안달을 하니
내 이 기회에 너의 소원을 들어주마··· 자결하라!”
부왕이 칼을 내팽개치자 안도하였던 내관들의 등골을 다시금 솟게 만드는 말이었다.
“차라리 참형이나 교형을 내리십시오”
부왕의 냉기어린 말에도 오히려 독한 말을 내뱉으며
이산군은 부딪혔는데 참형과 교형이란 단어가 나올 때마다 듣고 있는 신하들의 입은 경악한 채 다물어지지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조선의 국법상 가족 중 한 명이 죄인이면
그 집안의 가족들마저 모두 죄인이 되는 꼴이니,
자기에게 형벌을 주라 말하는 이산군의 말은
반대로 말하면 왕마저 죄인으로 만들겠다는 의미를 품고 있었다.
“네 이놈! 이것은 나랏일이 아니라 집안일이다.”
오랜 시간 한기에 노출 되 움츠려들만도 하것만
이산군의 눈은 불타오르고 있었고,
부왕의 목소리가 커짐에 따라 그의 심장 또한 방망이질 치듯 거세게 뛰고 있었다.
“나는 지금 가장으로써, 애비를 죽이려고 한 자식을 처분하는 것이야!”
“언제! 도대체 언제부터 나를 자식으로 생각했단 말입니까!”
부지불식간에 터져나온 이산군의 외침에 좌중은 놀랐고,
울분을 쏟아내 듯 목에 핏줄이 솟은 채 말하는 그의 모습은
가슴에 맺힌 한이 얼마나 깊은지 절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이 세상 천민이든 양반이든··· 어느 자식 중에 애비없이 태어난 자식이 있소!
나는 태어나.. 아버지 얼굴도 모른 채 10년을 살았고,
아버지가 있다하여 얼굴을 보러 갔을 때... 그때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았소···”
울먹이며 말을 잇는 이산군의 눈은 뿌옇게 흐려져 있었다.
“당신은··· 당신은 나를 진정 한번이라도 아들로 생각한 적이 있으십니까...?”
왕을 포함하여 대전 내 모든 인원들이 침묵했고,
어느 누구 하나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상감 잘 보시오...”
고함과 함께 칼을 높이 집어 든 이산군은 본인의 가슴을 찌르려 했으나
뒤에서 달려든 차내관의 저지에 막혔고,
이내 괴성을 지르며 발광하기 시작했다.
“놔라 놔! 이거 놓으란 말이다 이 놈들아!”
“못 놉니다 저하! 제발 고정하십시오! 어서 뭣들 하느냐, 세자저하를 막지 않고!”
차내관의 끈질긴 저항과 호통에 주변 내관들도 달라붙어
이산군의 몸부림을 막느라 애썼고,
그 사이에 칼을 막느라 흘린 차내관의 손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내 마음대로 안 되는구나...”
혼란스러운 상황 속 그 작은 중얼거림을 그 누가 들었으랴,
오로지 이산군의 몸을 붙잡으려 밀착해 있던
차내관만이 그 말을 들을 수 있었고,
차내관은 눈시울이 벌게지는 것이 칼에 베인 손 때문이 아니라
찌르르 울리는 가슴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후우우··· 꼴도 보기 싫다.”
몸을 돌린 부왕은 따라나서는 내관들을 물리며 안으로 들어갔는데,
그의 모습은 처음 대전을 나섰을 당시의 기개는 사라지고
오로지 초췌한 기색만이 남아 쓸쓸히 돌아가는 그의 등을 비추고 있었다.
1762년 5월13일 영조 나이 60세
영조의 둘째 아들로 15살에 세자에 책봉된 이산군은
그 동안의 광기와 횡포로 수십의 궁인들을 무참히 살해하였으며,
한 밤중에 수시로 월담하여 유곽 기생과 놀아나는 점
그리고 대군으로써의 기품을 잃고 왕가의 체통을 면밀히 손상시켰던 점 등 예하 10조목의 죄를 빌어 서인으로 강등시키고, 8일간 식음을 전폐한 채 뒤주에 갇혀 지내도록 한다.
이는 어명이며 그 누구라도 거역할시에는 반역으로 처단하겠다.
부왕으로부터 내려진 교지와 함께 그날 이산군은 목재로 만들어진 뒤주에 갇혔다.
8일간 물 한 모금 없이 그는 지옥과도 같은 나날을 보냈으며
8일에서 9일째 넘어가는 날,
싸한 그늘이 뒤주를 덮으며 숨이 마침내 끊어졌다.
지난 8일간 그의 끙끙 앓는 소리가 사라지자 마자
그 이변을 바로 눈치챈 자는 그의 아내이자 세자비인 혜경궁 홍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