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2017년 서울 남산타워.
만개한 보름달의 은은한 빛이 아니었다면, 새벽 밤의 공기는 아마 더욱 냉랭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내 문제가 아니었다구!!! 이 더러운 나라가 문제였다구!! 됐어, 마녀의 고향으로 돌아갈 거야. 영국에서 다시 시작할거라구.”
일반인은 출입이 불가한. 남산타워의 가장 꼭대기. 송신탑 바로 아래의 철골에서 코코아라는 이름의 마녀가 울분과 파이팅을 동시에 뱉어내고 있었다.
매서운 칼바람이 송신탑의 철골과 자신의 얼굴을 사정없이 내리치고 있었고, 그 덕분에 얼굴이 벌게져 있었음에도 그녀는 굴하지 않는다. 되려 설레는 표정으로 마법 영창을 시작한다.
코코아가 보름달을 향해서 손을 뻗었다. 그 손안에는 조그마한 모래시계 하나가 쥐어져 있다.
“『타임 리와인드(time rewind)』.”
모래시계가 사선으로 회전하기 시작한다. 이윽고, 보석을 갈아 넣은 것 같은 가루들이 한데 어우러지면서 영롱한 빛을 자아낸다.
뒤섞인 빛이 조금씩 모래시계를 빠져 나와 검은 하늘 위로 올라간다. 영롱한 빛들이 서서히 보름달의 빛에 스며들고 있다.
“……크흡”
알바-집-알바-집이라는 뻔하고 지루한 악순환의 고리에서 드디어 벗어난다.
만족스럽게 발동되고 있는 마법을 보니, 왠지 울컥한다. 8년간의 한국생활에서 건진 거라곤 월세를 독촉하는 집주인의 기척을 미리 알아차리고 도망가는 능력과 과도한 아르바이트의 부산물인 푸석한 피부를 관리하는 법 같은 쓰잘머리 없는 게 전부.
“울지마 코코아. 오늘은 좋은 날이잖아. 지금부터 나는 다시 새하얀 도화지를 받는 거야. 갖가지 희망찬 색깔로 그림을 그려나갈 새 기회를─”
굳게 마음먹었음에도 감성 충만한 그녀의 눈물이 새어 나왔고, 그것을 닦아내려 눈을 비비던 참이었다. 때마침 송신탑 위로 불어온 강한 바람은 양보 없는 파일럿이었다. 비켜 갈 생각 없이 곧장 그녀에게로 돌진한다.
“…어?”
기우뚱거리던 가녀린 그림자가 허둥지둥 손을 뻗는다.
“안돼애!!!!!!”
✻✻✻
1983년 삼포. 바다 앞 붉은 대문집.
짙은 밤의 어둠을 내뿜던 박쥐형 괴수, 《웨스페르》. 그 괴수에게 당한 사람은 모두 잘 말려진 명태눈깔처럼 초점 없는 눈으로 평생을 살아야만 했다.
따라서 붙어진 이명. 【눈알사탕맨】
나는 방금 막 한 시간가량의 치열한 전투를 끝낸 참이었다. 마지막에 자신이 지닌 모든 어둠과 함께 자폭한 웨스페르 때문에 아직 자욱하게 깔린 검은 안개 속에서, 나는 용사의 특권인 격렬한 전투 후 이마에 맺힌 송골송골한 땀을 아무렇지 않게 닦아냈다.
“후아~~, 라스트보스는 역시 만만치 않네. 하지만 내가 상대 못 할 정도는 아니었네. 봐봐. 결국, 혼자서 따악!! 그나저나 웨스페르 이 자식. 당연히 눈을 노릴거라 생각했는데. 거기서 내 소중이를 노릴 줄이야.”
이렇게 전투가 끝나면, 자리에 앉아서 차근차근 방금 전투를 복기하는 일이 가장 행복하다.
정말 신기하단 말야. 일기 쓰는 건 질색이지만, 그것이 내 영웅담이라면 얘기가 달라지니깐. 전투했던 날의 날씨, 지형, 그리고 몬스터의 외형과 속성, 그리고 그것의 공격패턴과 그것을 훌륭한 기지로 극복한 나의 이야기를 적는 것.
“오늘도 만족~~, 대만족입니다.”
더할 나위 없는 감정으로 자리에 드러누워 하늘을 바라보았다. 서서히 어둠이 걷히고 푸른 하늘빛이 그 자리를 채운다.
갑작스런 소나기가 몰려오는 여름 하늘도 아닌데, 푸른 하늘 사이로 다시 그늘이 진다.
웨스페르가 다시 깨어난 건 아니다. 거대한 괴수의 단단한 몸과는 차원이 다른, 보드라운 몸이 만들어내는 그늘이었다. 가슴에 격한 반응 때문에 순간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다.
“용사님!! 정말 고마워요!!! 저를 구하려고 웨스페르를 처치해주다니.”
엘프다. 서구적인 몸매의 엘프가 위에서 나를 선망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지금 내가 누워있는 곳은… 황홀한 그늘이었구나. 아흐읏~! 그늘도 좋지만, 역시 두 개의 새하얀 둔덕에 직접 파묻히는 게 더 좋을지도.
“용사님? 왜 침을 꿀떡 삼키는 거예요?”
그녀가 살짝 고개를 갸웃거린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풍만한 가슴도 함께 출렁거린다.
“어어~~~, 그건 말이죠~~, 워낙, 전투가 힘들었거든요. 목이 끊임없이 타들어 갈 만큼 말이죠!!”
그래도 엘프의 호기심 어린 질문 덕분에 정신이 든다. 덕분에 지금껏 찬란한 영광의 둔덕에 고정하고 있던 내 시선을 푸른 하늘 어딘가로 둘 수 있었다.
“어쩜 좋아? 용사님의 얼굴 빨개진 것 좀 봐요. 그러니까 너무 귀엽잖아요.”
이, 이 반응. 분명, 내게 추파 던지는 거 맞는 거지? 내가 잡아주길 바라는 거 맞지?
“미리 말해두지만, 제 연애관은 이런 급전개가 아니… 우읍읍”
뿌뿌뿌, 온몸이 터져버릴 것만 같다. 어느새 내 옆에 나란히 누운 엘프가 내 입을 자신의 검지로 틀어막는다.
봄꽃 향기가 나는 듯했다.
엘프의 손가락은 정말 향긋하구나. 그나저나 어쩐다. 팔베개를 해줘야 할 것만 같은. 신혼부부의 포지셔닝. 17년간 연애경험 전무한 나로선 너무나 강력한 자극이다.
“용·사·님· 저…더는 못 참겠어요”
인내력이 다한 엘프가 이미 반쯤 벗겨진 듯한 옷의 단추를 더 풀어헤친 뒤, 나를 탐하기 시작한다. 아니, 이래도 되는 거야? 반칙 아니야? 이토록 향긋하면서 뜨거운 숨결은!!!
하지만 엘프의 숨결보다 차라리 드래곤브레스를 맞는 게 더 낫겠다는 내 본능에 반하는 생각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움찔, 소중이에 오는 진도 5의 떨림.
“용사님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요?”
주먹을 꽉 쥐게 된다. 귓속을 파고드는 엘프의 간드러지는 목소리. 그냥 말하고 싶다. ‘사실 제가 더!! 더어어~!! 더어어엇~!! 못 참겠거든요!!’ 라고.
내가 이렇게까지 이성의 끈을 유지하는 이유는. 싫었기 때문이다. 후세에 남게 될 대서사시의 한 페이지에. 용사 클라우드는 자신이 구한 여자와 항상 잠자리를 가지는 색마라고. 구제 불능 용사라는 소리를 들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용사님의 몸 너무 뜨거워요.”
어? 어어어? 왜 점점 엘프의 숨결이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거야.
위잉위잉.
머릿속에 울리는 욕망의 붉은 사이렌.
……나 그냥 색마 할래. 구제불능 할래.
“으읏~!, 네 가지세요, 거칠게 다루셔도 됩니다……”
볼품없는 신음을 내는 나. 그래도 설레는 기분은 어쩔 수 없다. 드디어 어른이 되는구나 나. 엘프의 계속된 손길에 갑옷들이 전부 벗겨지고, 드디어 내 몸 위에 남은 팬티 한 장.
“소중이를 꺼낼 시간이에요.”
복숭아 빛으로 물든 새하얀 얼굴의 엘프가 부끄러운 듯 내게 속삭인다.
“너, 너무 직접적인 말투시네요. 저 용사라도 부끄럼 많다고요.”
“소중이를 꺼낼 시간이에요.”
“아하하, 직접 벗으라는 뜻이었구나. 변명이 아니라. 저. 알고 있었어요!! 그렇게 눈치 없는 놈 아니랍니다.”
사각팬티를 단단하게 지탱하던 고무줄의 촉감. 확 내리면 없어 보이겠지? 고무줄 자국이 서서히 드러나게끔. 애태우게끔 아주 천~~천~~히.
“소죽이를 끓일 시간이에요.”
잠깐만, 아무리 급해도 같은 말을 몇 번 반복하는 거야? 그리고 마지막 말은 뭔가 익숙한 말인데?
“…….”
…제발. 아니라고 말해줘요. 엘프누나. 제 소중이를 꺼내 달라는 말, 거짓말 아니라고 말해줘요.
볼썽사납게 엘프의 치맛자락에 매달려서 애원하는 나. 용사 클라우드.
엘프누나가 그런 나를 보며 빙그레 미소지으며 입을 연다.
“소죽 끓일 시간이다!!!”
(❉소죽: 소에게 먹이려고 짚, 콩, 풀 따위를 섞어 끓인 죽. 일반 사료보다 훨씬 흡수력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