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하디흔한 시골 마을 두꺼비.
데자뷔. 실신 후에 느낄 수 있는 첫 촉감은 누런 장판이 깔린 딱딱한 바닥 대신. 몰캉한 어느 지점의 위였다.
따뜻하고 형용할 수 없는 부드러움이 내 푸석한 머리카락을 감싸고 있다. 이건 보나 마나 또…….
“코코아, 너 또 집안일 하기싫어서. 이런 거 해주는 거면. 당장 치워라…….”
코코아의 뻔한 레퍼토리에 질린 내가 눈을 뜨며 무릎베개에서 일어나려는데.
“그랬구나, 오빠. 나 몰래 코코아 언니한테 이런 것도 받았던 거네?”
희미한 삼십촉 백열등 전구 불빛 아래, 더 은은한 미소로 날 내려다보는 건, 코코아가 아니라 겨울이었다.
“……겨울아? 혹시 코코아는 어디 간 거야?”
“왜? 눈 뜨자마자? 코코아 언니가 보고 싶은 거야?”
겨울이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건, 울화가 치미는 걸 꾹 참고 있다는 뜻이었다. 우리 집 서열 1위의 심기를 거슬리게 하는 것만큼은 막아야 한다.
“아닙니다. 지금 제가 보고 싶은 아리따운 풍경은 어여쁜 누이의 얼굴을 올려다보는 거로 충분한걸요. 저는 그저 그 놈팽이한테 일을 시키려고 한 것입니다.”
겨울이가 내 말의 진의를 파악하려는 듯, 흔들리는 내 동공을 바라보다. 피식하고 웃음짓는다.
“코코아 언니라면, 이미 일하러 나갔어.”
“절대 그럴 일 없어. 내가 아는 코코아는 자기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하고 남 부려먹는 거 좋아하는 놈이라고. 내가 두 손 모아 부탁해도 일하는 척만 하는 그 호구마녀가?”
“……마녀?”
“아, 내가 마녀라고 했나?”
똑똑한 내 동생이면, 분명 의심할 텐데. 솔직히, 처음부터 코코아의 신상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지 않은 겨울이가 조금 이상하긴 했다.
겨울이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내가 아는 여자라고는 잘 나가지도 않는 학교의 담임선생님이 전부라는 걸.
“하하하, 오빠도 참, 아무리 코코아언니가 싫다고 해도. 마녀라니. 언니가 들으면 많이 슬퍼할 거야.”
어라, 나 말실수 한 거 맞지?
그런데 겨울아 왜 그렇게 행복한 표정을 짓는 거야? 설마…너 마녀라는 말보다. 그냥 내가 코코아를 깎아내린 거에 대해 더 포커스를 맞춘 거야?
내 시선을 알아차린 겨울이가 당황한 듯, 내 눈을 손으로 가려버린다.
“……겨울아?”
“너무해 오빠. 동생이 이렇게까지 해주는 데도. 계속 코코아 언니 얘기만 하고. 금방 돌아올 거야. 누렁이한테 먹일 쇠꼴만 구하면 돌아온다고 했어.”
겨울이의 손에서 중학교 입학 선물로 받은 은은한 크림냄새가 흘러나왔다.
“쇠꼴이라고?! 걔는 쇠꼴이랑도 상극인 애라고!! 오늘만 해도 동네 애들한테 모은 쇠꼴을 다 갖다 바치기나 하고.”
“내가 집에 쇠꼴이 부족하다고 했어. ‘모자란 나는 쇠꼴을 잘 구하지 못한다고, 엘리트인 언니가 절 좀 도와줄 수 있나요’라고 하니까. 직접 쇠꼴을 먹여준다고 누렁이를 끌고 갔어. 오빠가 깨어나면 전해 달랬어. 엘리트의 머리에서 나온 어메이징한 아이디어에 감사하라고.”
“이 정신 나간 마녀가아아!!!!?!?”
역시 내 동생이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는 시간 만에 엘리트라는 말에 환장하는 코코아를 파악하고 실전에 응용할 줄이야.
더 대단한 건 코코아겠지. 그걸 또 곧이곧대로 당해버릴 줄이야.
헐레벌떡 마당을 박차고 달려나갔다.
거센 기세로 얼굴을 때리는 찬 바람이 아닌, 뒤에서 나지막하게 들려온 겨울이의 마지막 말 때문에 소름이 돋았다.
만족스러운 목소리로 ‘이제 시작일 거야 오빠. 고생해.’라는 말을 환한 얼굴로 내게 전한다. 아니, 경고한다. 아직 자신의 가학이 끝나지 않았다고.
의심할 여지 없이 고의다. 코코아를 밖으로 보낸 것도, 누렁이를 데리고 가는 걸 막지 않는 것도. 누렁이를 컨트롤 하지 못할 걸 알고 코코아를 궁지로 몰기 위한 작전.
하, 전부 내 업보네.
인기 많던 겨울이가 데려왔던 그 곰같이 커다란 놈을 문전에서 쫓아냈을 때부터였나. 호기심 많은 겨울이를 꼬셔내려는 그 나이 어린 늑대 새끼들을 전부 처단했었다.
그런데 그때만 하더라도, 겨울이는 분명 상관없다고 했었다. 그냥, 남자애들이 고백하길래 집에 데려와 본 거라고. 내 말대로 연애는 다 큰 다음에 하겠다고 약속까지 해주었다.
무섭다. 전부 연기라고? 그걸 여태껏 담아둔 채. 복수할 기회를 노려온 거다.
애석하게 내 주변엔 여자가 없어, 똑같이 복수할 기회 자체가 없었을 뿐이었구나.
일단 막아야 한다.
전속력으로 쫓아가면 늦지 않을 것이다. 산어귀를 향해 헐레벌떡 달려가던 와중에 저 멀리 쇠꼴 하이에나 무리가 새로운 사냥감을 찾아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야, 너희들. 소 끌고 가는 누나 못 봤어?”
“응, 봤어. 우리 보고. ‘니들 초딩들한테 뺏길 쇠꼴은 더는 없을 거야’라고 큰소리치면서, 산 쪽으로 가던데. 역시 미X누나가 맞았어. 초딩이라는 이상한 말이나 하고. ”
하던 약탈 짓이나 계속 잘해보라는 말을 남긴 채. 산 쪽으로 달려가려는 찰나, 그들이 큰 소리로 웃으며──
“고생해 이상한 형. 그 누나 소한테 질질 끌려갔었거든.”
……그래. 그랬겠지. 질질 끌려가는 와중에도 태연한 척하면서, 너희들을 깔보는 말이나 툭툭 내뱉었겠지.
겨울이에 이어 벌써 두 번째. 위로 같지 않은 위로의 말을 들었다.
그나마 다행인 일이다. 마주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하늘에서 뚝 떨어진 코코아를 만난 모든 이들은 그녀가 마녀라는 사실을 꿈에도 모른다. 그 대신 머리가 이상한 사람으로 코코아를…. 아, 여자 말이라면 끔벅 죽는 아버지는 제외.
지루하기 짝이 없는 시골 마을이 판타지스러워는 건 옛날부터 상상해온 꿈이지만, 이런 요란 법석한 판타지는 아니었다.
내가 써왔던 용사의 모험조차 적어도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을 유지하려 애썼다. 하지만, 코코아가 온 뒤로, 일어나는 리얼 판타지는 그야말로 《위기-절정-위기-절정》이 전부였다.
“코코아, 괜찮아!?!”
알 수 없는 불안함에 미친 듯이 산어귀까지 달려온 나. 멀리 코코아의 은발이 눈에 들어왔다.
잠시나마 코코아가 환하게 미소지으며 괜찮다고, 무사히 누렁이가 만족할 만큼 쇠꼴을 먹여주었다고 이제 집에 돌아가자고 하는 대답을 바랐다.
“……코코아?”
하지만, 대답 없는 코코아.
음, 《위기》의 단계인가 보네. 그럼 곧 《절정》으로 가는 뻔한 그림이겠구나.
석상처럼 그 자리에서 얼어 붙어있는 코코아의 옆에선 누렁이가 여유롭게 풀을 뜯고 있었고, 맞은 편에는 집채만 한 두꺼비가 서 있었다.
“아하하~~, 코코아한테 옛 친구가 찾아왔었구나. 미안해. 눈치 없이 내가 끼어들었지. 그럼 남은 얘기 느긋하게 마저 하고 와. 나는 누렁이와 함께 집에 먼저 가볼게~~”
황급히 코코아와 거리를 둔 채, 누렁이의 고삐를 잡으려……
“……이거 좀 놓아줄래? 누렁이가 나랑 둘이서만 할 말 있다고 했거든. 제3자가 끼어들 문제가 아니거든 이거.”
내 말에 정신을 차린듯한 코코아가 허겁지겁 내 뒷덜미를 잡아챈다.
“몰라!! 저렇게 못생긴 친구 모른다고!!! 가지 마. 쓰레기처럼 날 혼자 두고 가지마!!”
그런 다음 두꺼비를 가리키며 소리친다. 두꺼비는 아직 그 자리에 서서 우리 둘의 촌극을 바라본다.
“모르긴 뭘 몰라!! 네가 항상 말했던 버스 안을 한가득 채운다는 수많은 친구 중에 하나 맞잖아!! 보라고~!! 저 못생긴 친구가 얼마나 애타는 눈빛으로 너를 기다리는지. 얼마나 너와의 대화를 고대하는지.”
나도 지지 않고 두꺼비를 가리키며 열변을 토한다. 그녀를 어떤 방식으로든 납득시켜 이 자리에 《혼자》 남겨야 한다.
참고로 두꺼비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다.
“김사부는 저게 정말 나와의 대화를 고대하는 것처럼 보여? 그냥 못생긴 두꺼비가 나를 어떻게 능욕하면 좋을지 생각하는 거잖아. 뭐야. 변태의 눈엔 변태가 변태처럼 보이지 않는 거야?”
이제는 두꺼비를 은근슬쩍 가리키지도 않고, 아예 당당히 마주한 채로 자신의 억지논리를 주구장창 쏟아낸다.
“…벼, 변태? 코코아 너 언젠가부터 나를 그쪽 사람으로 매도하는데, 적당히 해라. 내 선량한 눈이 어딜 봐서 저 못생긴 두꺼비랑 똑같을 수가 있냐고!!”
나 또한 관상에 의거한 다소 억지스러운 논리로 그녀의 말에 반박했다.
그럼에도 두꺼비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다.
이 대화 이제 진짜 그만두어야 할 것만 같다…. 정말 위험해질 것만 같은 기분.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코코아도 나도.
“아니!! 똑같아!!! 저 못생긴 눈, 코, 입 저 두꺼비도 분명 김사부와 같은 모쏠일거야. 모쏠.”
“아니!! 완전 다르거든!! 아직 나는 17년 모쏠이잖아. 미래가 창창하다고!! 저 커다란 두꺼비는 최소 몇백 년은 나이를 먹은 것 같으니까. 네가 말했던 진짜 마법사, 아니 대현자 모쏠일 거고!! 비교 하지마. 내가 제일……꾸엑?”
거대한 점액이 총알과 같은 속도로 내 복부를 내리쳤다. 그대로 땅바닥을 뒹굴고 있는 나.
두꺼비님. 먼저 그쪽과 만나고 먼저 그쪽을 건드린 건 코코아인데 왜 저한테 선제공격을 날리는….
“모쏠이 어때서!!! 대현자가 어때서!!! 네놈들이 뭔데!!! 뭔데에!! 내 얼굴 가지고 그러는데!!”
거대한 두꺼비가 어눌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아니, 크고 서러운 소리로 울부짖었다.
내가 내뱉은 대현자라는 말에 뚜껑이 폭발한 모양이었다.
지반을 울리는 쿵쾅거림과 함께 수백 년산 대현자 모쏠 두꺼비가 우리 앞으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