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요?"
전쟁이라 하면 두 국가나 집단 사이에 군사력을 비롯한 각종 수단을 사용해 상대방의 의지를 강제하려 하는 행위일 것인데.
상대방은 집단이 아니며 국가도 아닌 단 한 명의 인간이다.
"성진이는 어제 일어났던 패싸움으로 친한 친구들이 다쳤어. 성진이가 오늘 아침에 그 소식을 듣고 많이 화가 났나 봐."
수정 선배는 잔잔한 목소리로 염려했다.
우울해진 수정 선배를 다독이고 질문했다.
"그렇다면 성진이 형은 이번 싸움에 참여하지 않은 건가요?"
"응, 성진이는 아르바이트로 항상 바빠."
대충 퍼즐은 맞춰졌다.
어제 있었던 싸움은 우리 학교 농구부와 인홍고등학교 학생 한 명이 벌였던 것이고, 성진 선배는 그 장소에 없었다.
우리 학교 스무 명과 싸웠던 한 명이 죽지 않는 인간일 것이다.
나는 죽지 않는 인간을 쫓을 것이고, 성진 선배는 인홍고등하교로 찾아갈 것이다.
"그럼 이제 성진이가 오는 것만 남았네."
수정 선배는 웃으며 손목시계를 보았다.
"설마 바로 만나는 거예요??"
"그럼, 성진이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인걸."
성진 선배의 얘기가 그녀의 입에서 나오자 생기가 넘치는 얼굴을 보였다.
상대방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기쁨이 넘치고, 상대방의 얼굴을 볼 때마다 미소가 번지고, 상대방과 같이 있을 때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관계.
마치 나와 주연처럼.
나는 그녀의 그런 모습에 이끌려 입을 열었다.
"사랑이네요. 둘이 어떻게 만났는지, 성진 선배와 수정 선배의 이야기를 들려주실 수 있나요?"
사랑이란 단어를 듣자 얼굴을 붉히며 손으로 부채질을 하는 수정 선배. 시선은 요동을 치고 있었다.
"사, 사랑이라니까 조금 쑥스럽네... 어흠! 그럼... 들려줄게, 덤으로 숨겼던 내 잘못이랑 성진이가 일진이 됐던 이야기도 말이야."
부우웅.
거칠고 시끄러운 배기음을 내며 도로 위를 쏜살같이 달리는 한 대의 오토바이.
자동차들 사이를 지나치고 신호를 아슬아슬하게 위반하면서까지 갈 곳이 있어 보였다.
손잡이와 안장 부분이 많이 닳은 배달 오토바이 안에 타고 있는 학생은 이제 막 19살이 된 학생이다.
"큰일이네! 배달 늦겠어!"
그는 서두르며 오토바이 핸들을 당겼다.
기어가 점점 높아지며 속도를 올리는 그가 도착한 곳은 한 아파트 단지다.
그곳은 대부분 상류층이라는 사람들이 거주하며 자신의 재산을 보여주며 사치를 강조하는 곳이다.
아파트 입구에는 차단기가 기본적으로 설치해 있었지만 배달을 온 사람들은 아무런 제약 없이 들어올 수 있었다.
"배달이요."
거친 숨을 몰아쉬다 현관문 앞에 들어서자 그는 숨을 최대한 가늘게 쉬었다.
그는 이 아파트에서 예전 땀에 흠뻑 젖은 채 배달에 왔더니 잔돈을 건네는 손이 불결하다며 잔돈을 거부한 적이 있었다.
"힘드실 텐데 수고가 많네 젊은이."
현관 문이 열리자 등장한 사람은 한 노인이었다.
그 노인은 그가 전해주는 배달 음식보다 빨리 그의 손에 음료수 한 병을 쥐어 주었다.
그는 당황했지만 깍듯이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계산을 끝내고 그는 큰 소리로 감사를 표했다.
분명 음식을 구매해서 아르바이트생으로서 감사하다고 말한 것이지만, 평소라면 그래야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는 아파트를 나오고 세워둔 오토바이 근처에서 주머니에 있는 담배 대신에 아까 받은 음료수 병을 열었다.
"하..."
분명 음료수는 시원한데, 분명 맛이 있는데, 분명 기분이 좋을 텐데, 속은 답답했고, 쓴맛이 났으며, 기분이 가라앉기만 하였다.
또다시 한숨이 나오자 그는 가지고 있던 불만을 하늘을 올려다보며 조용히 실토해냈다.
그러나 하늘은 묵묵부답에, 불합리에, 불평등에, 모든 인간들은 똑같은 하늘 아래라고 하지만 이 하늘 밑에 있는 인간들은 전혀 똑같지 않았다.
누군가는 태어나서부터 수도권에 있는 멋진 집에 살고 있고, 누군가는 태어날 때부터 재능이나 지능이나 기술이 타고났다.
그런 반면에 누군가는 죽어가고 있는 마을 속에 살고 있고, 끔찍한 가난을 필두로 재능이 있어도, 지능이 있어도, 기술이 있어도 돋보일 수가 없이 부업과 막노동만을 지속해나갔다.
"이런, 늦겠다!"
그는 오토바이에 올라타 시동을 걸고 시끄러운 배기음과 함께 도로를 달려 나갔다.
매연과 소음이 가득한 도로에 싫증이 난 그는 질색하는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고 속력을 높여 곧장 가게로 향했다.
"오늘은 수고가 많았다! 역시 우리 아르바이트생이 일을 잘해, 그치?"
다른 직원들 앞에서 가게의 사장은 그를 칭찬했다. 그는 별거 아니라며 앞으로도 열심히 하겠다고 겸손하게 손사래를 쳤다.
"내일 월급이니까 잊지 말고, 몸 상하게 하지 말고 조심히 들어가...라고 말해도 다른 아르바이트가 있겠군. 몸조심해야 한다."
"네! 조심해야죠!"
그는 사장에게 정중하게 인사하고 가게를 나왔다.
"공장도 갔다 왔고, 가게도 갔으니 마지막은 편의점이겠네."
그가 이렇게 뼈 빠지게 일하는 이유는 단 하나, 그저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였다.
아침 6시에 일어나 간단한 아침밥을 먹고 공장으로 달려가 단순노동을 5시간 동안 진행 후 공장에서 제공하는 점심을 먹는다.
그 뒤 아버지의 지인이자 그가 머무는 집의 주인인 치킨집 사장님의 가게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곳에서 5시간 배달을 가거나 주방의 보조를 돕고 편의점으로 향한다.
치킨집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위치한 편의점은 근처에는 술에 취한 아저씨나 담배 없이 살아갈 수 없는 불량 학생들이 얼씬거리는 곳.
그곳에서 5시간 동안 계산과 청소, 재고 정리를 한다.
"말보로 세 갑."
"신분증 좀 보여주시겠어요?"
알다시피 담배나 술은 법적으로 미성년자가 구입할 수 없으므로 신분증의 여부가 필수다.
그러나 그는 오랜 기간 동안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성인과 미성년자를 손쉽게 구분이 가능해졌다.
그렇기에 성인은 굳이 신분증의 여부를 묻지 않는다.
만일 그가 묻는다면 필수 절차가 아니라 이 사람이 미성년자라는 걸 알고 있다는 뜻이 되겠다.
"아나, 그런 걸 왜 들고 다녀요? 그냥 저거 한 갑만 달라니까!"
불량 학생은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던 그에게 손을 뻗어 담배를 가져가려 했다.
험악하고 생기 없는 눈, 근처에 찢어진 흉터, 면도를 하지 않아 지저분한 수염이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몸에는 술과 담배 냄새가 배어 있어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카운터에서 불량 학생을 상대하고 있던 그는 매뉴얼에 있었던 웃는 얼굴로 손님이, 불량학생이, 쓰레기가 뻗은 손을 붙잡았다.
"뭐 하는 짓이야 개만도 못한 것아!"
불량 학생의 주먹이 아르바이트생에 의해 무력으로 막히자 신경질을 내며 망설임 없이 주먹을 휘둘렀다.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은 표정을 그대로 유지하며 불량 학생이 휘두르는 주먹을 손바닥으로 무력화시켰다.
있는 힘껏 주먹을 빼내려 했지만 아르바이트생의 악력에 속수무책인 불량학생에게 낮은 어조와 차디찬 눈으로 그는 말했다.
"다짜고짜 주먹을 휘두르는 걸 보면, 개만도 못한 것은 그쪽 아닌가?"
편의점 내부는 냉기가 집어삼켰고, 그 분위기가 점차 강해지자 불량학생은 체념하고 주먹을 내렸다.
주먹을 내리는 불량학생을 본 그도 싸움을 저지했다는 목적을 달성했기에 더는 필요 없는 신경전을 지속하지 않아도 될 거라며 판단했다.
"얼마예요."
불량학생은 딸기맛 풍선껌 하나를 계산대에 툭 던지고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오천 원입니다."
오백 원이지만 그는 0 하나를 더 붙여서 계산했다. 심지어 바코드를 찍어서 상대방이 껌의 가격을 봤는데도 말이다.
불같이 화낼 거라는 아르바이트생의 예상과는 달리 불량학생은 지갑에서 오천 원짜리 지폐를 꺼내 아무 말 없이 건넸다.
"거스름돈 사천오백 원입니다."
불량학생은 그가 건넨 거스름돈을 무덤덤하게 낚아채고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편의점의 문을 박차고 나갔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는 정말로 좋은 알바라고 그는 생각한다.
육체를 혹사시키지 않아도 가능한 업무와 뛰어난 지식을 이용하지 않아도 돈을 벌 수 있다는 점에서였다.
그러나 오늘 같은 날이 느닷없이 찾아올 때면 그는 이 아르바이트의 치명적인 문제점을 떠오른다.
사람을 상대하는 것,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치관과 정의는 개개인마다 다르고 그것 때문에 벌어지는 문제들은 그가 처리하기 까다로웠다.
반복되는 훈련과 학습을 통해 반사적으로 하는 것 뿐이었다.
그가 익숙해지거나 명확한 해결책을 찾은 건 아니었다.
한 시간이 지나고 편의점 안에는 붉은 노을이 들어오는 시각에- 그가 다니던 성시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 찾아왔다.
긴 생머리에, 짙은 쌍꺼풀을 가지고 있었으며, 백옥 같은 피부에, 큰 두 눈의 눈꼬리가 쳐져 있어 착해보이는 인상인 한 여학생.
그는 그녀를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모르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이수정, 학교에서 공부밖에 모르는 모범생이며, 전교 부회장. 조용하고 전교 부회장이라는 명목 때문에 학교 안에서 친구라는 게 거의 없었다.
그런 그녀가 내뱉은 말은 그를 혼란에 빠트렸다.
"말보로 세 갑 주세요."
그의 사고는 순간 정지했고, 그녀는 그의 당황한 기색을 보니 시선이 땅으로 떨어져 올라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네?"
"못 들으셨나요? 말보로 세 갑 주세요."
지금 두 남녀의 학교는 방학, 게다가 이제 고등학교 3학년이면 성인의 모습과 흡사, 교복이 아닌 사복을 걸친 그녀의 외견은 어른과 다를 바 없었지만 그는 그녀의 나이를, 소속을, 이름을 알고 있었다.
"만삼천 원입니다."
신분증을 검사하지 않은 건 그녀가 어떻게든 담배를 사야 하는 상황이라는 점을 염려해서였다.
그녀는 모범생.
담배와 술이란 단어는 그녀에게 어울릴 수가 없을 정도로 순수하고, 깨끗하며 어느 누구도 더럽힐 수 없는 그런 존재.
그렇다면-
더욱 의심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녀는 만 원과 오천 원짜리 지폐를 꺼내 그에게 건넸고, 그는 천오백 원을 거스름돈으로 줬다.
매우 진지하고 의심쩍은 눈으로 말이다.
딸랑.
경쾌한 벨소리를 내며 편의점을 나가는 그녀를 본 그는 그녀가 유리문 너머로 보이지 않자 계산대를 빠져나왔다.
원래라면 안내문을 붙이고 문을 잠가야 하지만 안내문을 붙일 시간이 없어 문만 잠그고 그녀의 발걸음을 뒤쫓아갔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큰 도로 가운데, 누구는 사람들 속에 숨어다니며 한 여자를 쫓고 있었고, 누구는 한숨을 내쉬며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여긴..."
그가 발걸음을 멈춘 곳은 큰 도로에서 샛길로 빠져나오면 보이는 어두운 골목길. 멈춘 이유는 그녀가 이곳으로 들어왔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