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이제부터 뭘 하면 되지 투명인간?"
"일단 너희 조직의 규모와 서열을 말해줘."
조직이라 논한다면 자고로 『석상의 진』과 『장미의 샬롯』이 속한 곳처럼 비밀스럽고 근처에 발을 들이는 것만으로 살이 떨리는 기운이 흘러나오는 그런 곳.
싸움이 일어난다면 그것에 모든 정신과 생명, 지식을 쏟아부어 오로지 승리만을 위해 목을 매며 군더더기 없는 동작과 동선이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상대해본 결과 그들에게는 그저 방탕한 생활만을 즐기며 그것에 쓸모없는 힘자랑이 섞여 있고, 조직이라는 무서운 것에 흥미를 느끼고 동경하는 떨거지에 불과했다.
"먼저 조직의 창시자는 초창기 멤버는 대두목 신해준과 김시훈이야. 너도... 내 질문에 답해줄 수 있지?"
"그래야지, 우리는 이제 팀이야."
내 대답을 들은 철준은 작은 미소를 짓자 알 수 없는 안도감과 안정이 찾아왔다.
"우리 조직은 이 근방에서 위험한 인물을 전부 긁어모아 세력을 키우고 거대한 조직이 됐어. 그리고 투명인간을 잡기 위해 오늘 행했던 『학살』과 『저격』을 계속해서 하고 있지."
"그렇군, 그런데 『학살』이란 건 설마 어제 벌어진 싸움을 말하는 건가?"
철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그래, 그리고 『저격』이란 오늘 본 성시고등학교 학생을 무차별적으로 괴롭히고 폭행하는 것을 의미해."
"알려줘서 고마워. 너희 창시자들의 특징이 궁금한데 알려줄래?"
철준은 무언가를 떠올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두꺼운 나무 막대기를 집고 공터 흙바닥에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우두머리인 신해준과 김시훈이 조직을 창설한 뒤 그들이 맨 처음 한 것은 문신이었지. 손등에 새겨 넣은 호랑이의 머리는 그들이 포식자의 머리를 상징하고 있다고 하더라."
"전부 부질없는 짓이지. 너는 손등에 문신이 없는 것을 보면 상위에 있지 않은 것 같고. 그렇다면 네가 해줄 일은 하나야."
난 철준이 흙바닥에 쓴 이름 옆에 있는 나뭇가지를 주워 여러 선을 하나씩 하나씩 그려 나갔다.
허공에 나뭇가지가 떠다니며 글자를 하나씩 쓰는 모습을 본 철준은 묘한 시선을 감출 수 없었다.
"철준이 네가 해줄 역할은 바로 이거야. 조무래기들에게 소문을 퍼트려서 모두를 모일 만큼 과장이 되었을 때 의뢰인을 부른다. 그리고 너희 조직 창설 멤버 두 명과 나와 싸움을 한다."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그 두 명은 못 이겨! 다른 방법을 찾아봐."
난 단호하게 반박했다.
"그렇다면 조직 전원 소탕해야 돼."
길게 한숨을 내쉰 철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무리 그렇다고 그 두 명과 싸우는 건 위험해."
공터에 혼자 앉아서 흙바닥에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고등학생, 그리고 그의 옆에 떠 있는 나뭇가지 하나. 누군가가 본다면 이런 느낌이겠지.
"그럼 어쩔 수 없네. 다른 방법을 찾아볼 수밖에 없겠다."
그는 졌다는 듯이 피식 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나뭇가지를 버리고, 의심과 두려움을 버리고, 갈피를 잡은 그는 마음을 굳혔고, 일어났며 내게 말했다.
"고마워. 지금 중요한 건 철저한 대비책이야."
철준에게 보이지는 않았겠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일단 늦었으니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아. 자세한 내용은 내일 점심시간에 연락하거나 만나도록 하자."
철준은 내 말의 의미를 파악했는지 주머니 속에 있던 휴대전화를 꺼내어 허공에 떠 있는 나뭇가지 쪽으로 들이밀었다.
나는 그 휴대폰을 받고 내 연락처를 적었다.
"웬만하면 직접 만나보고 싶네. 우리 동네 영웅이 어떤 모습을 하고 나타날지 궁금해서 말이야."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 철준에게는 보이지 않았겠지만.
"되면... 그렇게 하자."
나는 뒤를 돌아 터벅터벅 걸어갔다.
'다행히도 유철준과 동맹을 맺었어.'
그런데, 그런데 왜 이렇게 찝찝할까.
왜 이렇게 잃은 기분인 걸까, 왜 내 손이, 내 입이, 내 몸이 더러워진 기분인 걸까.
"아아아!!!"
한참을 소리 지르고, 달렸을까, 다리의 힘이 풀리고 상처투성이 발바닥에 감각이 사라질 즈음 인적이 드문 거리에 멈춰 외쳤다.
"거짓말이잖아! 뭐가 영웅이야, 뭐가 알고 있다는 거야! 솔직히 말하라고 솔직히! 철준의 여동생이 아프다는 걸 듣고 솔깃했잖아! 쓸만한 정보가 들어왔다고 머리를 굴렸잖아!"
아스팔트에 주먹을 내리 꽂았다.
어둑어둑해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내 주먹에서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은 인지할 수 있었다.
"최대한 내게 유리하게 상황을 만들려고 철준의 짐을, 상처를 이용했잖아!"
나 자신이 미웠다. 하나부터 열까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지우고 싶었다.
쩌렁쩌렁 울리는 내 목소리에 하나둘씩 아파트 복도에 불빛이 켜지고 창문이 열리며 고개를 내미는 사람들.
"으아아!!"
나는 또 쉬지 않고 달렸다.
맞바람에 굴복하지 않으려 안간힘을 짜내었고, 나 자신을 합리화하지 않으려 사고를 멈췄으며 모든 죄를 바람에 털어버리고 싶었다.
"미안해... 역시 난 영웅이라는 개소문과 어울리지 않아. 그저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능력을 쓰고, 사람들을 납치하고, 정보를 캐고, 이용하려 손을 잡는 이기적인 녀석이야."
생각해보면 그래, 난 복수를 위해서 주연과 함께 하는 소중한 시간도 내던지고 밖으로 나왔다.
모든 것을 빼앗기는 게 무서워서, 그래서 그들을 전부 소탕하려 했다.
모든 것을 빼앗기는 게 무서워서, 유철준이라는 죄 없는 학생과 손을 잡아 이번 사건을 해결하려 하고 있다.
'능력이 있으면 뭐해, 개인의 재량이 부족해 그 능력을 활용하지 못한 채 도움만 바라고 있는 신세인데.'
"이러면 안 되잖아... 이러면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잖아... 나도 알고 있잖아."
공터에서 충격을 받고, 집에서 주연과 안정과 기운을 되찾아 다짐을 했는데, 겨우 상황을 정리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왜 다시 절망하고 후회해야 하는 건가.
왜 최고인 현재의 상황을 만끽하지 못하고 있는가.
"간단해. 약속을 어겼으니까 그런 거잖아... "
보이지 않는 손을 들어 올려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역시 보이지 않았다. 주먹에서 흘러내리는 유혈이 윤곽으로 보일 뿐.
"나조차 보이지 않는다 이건가, 지금 나랑 똑같잖아."
그걸 깨닫고, 난 더 뛸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저 터벅터벅 깨진 유리 조각들 위에서 걸어가듯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그 뒤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세월의 흐름이 느껴지는 낡은 아파트, 언제부터 이런 시선을 가지게 되었을까.
아마도 오늘이 이 아파트를 싫어하는 첫날이 되겠다.
그리고 오늘, 나는 특별한 능력 없는 평범한 아이들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주연아, 나 왔어. 그러고 보니 오늘 독서실 같이 가자고 했지?"
격한 환영은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이럴 줄은 몰랐다.
부엌 불 하나만 은은하게 켜져 있었고, 백색 빛이 내려앉은 식탁 위에 놓여 있는 조그만 쪽지 하나.
볼펜으로 작게 쓴 예쁜 글씨로 "냉장고에 반찬 있으니까 꺼내 먹어. 내일 보자."라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쪽지 한쪽 구석에는 웃는 얼굴을 그려 놓았다.
"미안 주연아... 나는 너를 어떻게 지켜야 할지 잘 모르겠어... 위기의 순간이 찾아왔을 때 너를 구하는 건 범죄자가 된 나일 수도..."
그러니까 이제 사건을 해결하는 건 상관없어. 잘 덮을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투명인간은... 이제 없어. 작전도 소탕도 협상도 협력도... 전부 없었던 걸로 하자."
도망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