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녀왔어."
"오빠! 왜 이리 늦었어!"
현관문을 들어서자 설탕같이 달달한 표정으로 나를 맞이하는 여동생.
나는 입가에 감출 수 없는 미소를 띠며 그녀를 살갑게 반겼다.
"미안, 오늘 약속이 좀 있어서. 배 많이 고프지 은지야? 오빠가 밥 차려줄게."
나는 선량한 말투는 내 동생 은지의 마음을 안도와 따스함으로 채워 넣었다.
"응, 배고파. 계속 기다렸으니까 맛있게 해줘야 돼."
부드러운 미소를 입가에 머금으며 나에게 말한 은지, 그녀를 보며 나는 다시 한번 다짐을 한다.
"그래. 맛있어서 기절하지 마."
내 여동생은 몇 달 전, 백혈병에 걸렸다.
"그보다 무슨 약속이야? 오빠 설마 운동 다시 시작하는 거야? 난 복싱하는 오빠 모습이 참 좋았는데 아쉽더라..."
아버지가 사고로 돌아가시고 아르바이트로 번 돈으로 생활 중인 두 명의 아이 중 장남인 나 유철준은 독을 품어가며 돈을 모으고 있었다.
"그건 아니야, 친구를 좀 만나고 왔어. 그 친구가 우리를 도와주겠대."
그럼에도 턱없이 부족했던 수술비를 벌어야 했었다.
손에 물집이 잡히고, 그 물집이 터지고, 꿈을 꾸고, 그 꿈을 버리고. 하루하루가 고달프고 그런 세상이 미웠다.
"미안해 오빠... 내가 많이 약해서. 도움이나 받아야 되고, 솔직히 오빠도 그것 때문에 운동 그만둔 거잖아! 내 곁에 있어준다면서..."
어떻게 하면 우리 둘이 행복하게 지낼 수 있을까, 왜 우리는 행복할 수 없는 걸까, 전생에- 죄라도 지은 걸까.
"아니야, 공부는 해야 한다고 중학교 선생님께 들었어. 그리고 나보다 복싱을 하는 사람은 셀 수 없이 많고, 그중에서 성공하는 건 손에 꼽을 정도야."
복싱 학원비조차 동생의 수술비로 보탰다.
알 수 없는 의학 용어, 끝나지 않는 검사, 입원과 큰 수술, 지식이 없어 하라는 대로 하는 수밖에 없었다.
완치가 가능한지 아닌지 알 도리는 없었고, 터무니없는 금액만이 내 손으로 날아온다는 걸 들었다.
"오빠... 그럼 도와준다는 사람은 누군데? 왜 우리를 도와주는 거야?"
얼마 전, 같은 반 친구에게 우리 학교에 있는 불량 학생들이 늘어나고 있는 원인이 거액의 돈을 후원받기로 했다는 정보를 들었다.
난 최대한 조직의 복종하여 조직 설립자의 보좌가 되었다.
하지만 날이 거듭될수록 단서는 적어지고 의문만 늘어난 채 하루를 마칠 경우가 많았다.
결국 타인을 괴롭혀 영웅의 출현을 목표로 하는 계획을 시행하자 양심의 가책이 멈추질 않았다.
"그 사람은 말이야. 보이지 않지만 우리 동네의 영웅이자, 내 영웅이고, 곧 너의 영웅이 될 사람이야. 모든 것을 알고 있고 절대로 도망치거나 겁을 먹지 않는 천하무적의 영웅..."
난 말 끝을 흐리며 말을 마쳤다.
마지막 문장이 그리 실질적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사람한테 미안하다고 전해줘."
얼굴에 자괴감을 띤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좋아서 그렇게 태어난 것도, 건강한 게 싫어서 이렇게 된 것도 아닌데 그녀는 계속 자신을 벼랑 끝으로 밀고 스스로 자멸하려 한다.
"다시는 그런 말 입에 담지 말고 생각도 하지 마. 이거 먹고 자자."
난 접시에 담긴 볶음밥과 그녀의 자괴감에 대한 멸시를 식탁에 놓았다.
"응 오빠. 미안해."
은지는 조용히 숟가락을 들어 올려 볶음밥을 먹기 시작한다.
한 입 먹더니 얼굴에 미소가 번지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도무지 자리를 뜰 수 없었다.
여태까지 계속 혼자 집을 보고 있었을 그녀를 앞에 두고 피곤하다는 이유로 쉬다니 염치가 없는 행동이었다.
난 은지가 쌀 한 톨 남김없이 전부 먹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끝내 내 마음이 자리를 뜨는 것을 용납해 주었다.
"설거지는 내가 내일 할 테니까 건들지 마."
"응 오빠."
간단하게 샤워를 마치고 난 동생의 잠자리를 지켰다.
예전보다 머리가 점점 빠져가고, 입술이 부르트고, 피부가 갈라지는 여동생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만 봐야 했다.
"은지야, 내가 꼭 건강하게 만들어 줄게. 꼭... 꼭..."
무엇보다 돈이 필요했다.
언제였을까, 사고로 아버지를 잃은 뒤로부터 먼 미래보다 코앞의 현재를 걱정하기 시작했던 게.
난 막 꿈속으로 들어간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도 그녀가 꾸고 있는 꿈으로 머지않아 들어갔다.
그 속에서는 우리 가족 모두가 행복하길 바라며, 적어도 모두가 한 곳에 모이기를 바라며 눈을 감았다.
"철준아, 너 투명인간이랑 만났다며! 역시 내 담당 보좌야!"
다음 날 오후 1시 학교의 옥상.
옥상이 출입 금지인 평범한 고등학교와는 달리 인홍고등학교는 자유롭게 출입이 가능했다.
책상과 의자가 난무하는 것은 아예 쉼터로써 자리 잡았음을 의미했다.
그곳에서 소스라치게 놀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 한 남자. 그의 이름은 김시훈이며 인홍고등학교 불량학생 조직의 창설자 중 한 명이다.
긴 앞머리를 이용한 올백머리가 잘 어울리는 짙은 눈썹과 눈동자, 철준을 대하는 자상한 태도가 훈남을 연상시키지만 왜 이런 조직을 만들었는지 의문투성이인 남자다.
"과찬이십니다 형님. 그리고 그리 좋아하시기에는 아직 이릅니다."
난 고개를 살짝 숙이며 겸손을 표했다.
"편하게 형이라고 부르라니까 아직도 그러네, 너무 긴장하는 거 아니야? 아니면 나랑 이런 관계가 싫으려나."
그는 책상에 다리를 올리고 발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의아해했다.
"아닙니다 형님. 제가 정한 법칙입니다. 너무 편하게 대하면 형님이라는 개념이 상실되고, 그렇게 된다면 제 행동에 지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시훈은 손뼉을 치며 박장대소하였다.
"정말 훌륭해! 역시 널 내 보좌로 두길 정말 잘한 것 같아."
"저도 형님의 보좌여서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시훈은 내가 눈치채지 못한 책상다리 구석에서 봉투 하나를 집어 내게 건넸다.
"자, 일당이다."
난 의아해하며 말했다.
"여태까지 일당은 없지 않았습니까? 어디서 이런 돈이..."
그는 책상에서 일어나 내 곁으로 오더니만 등을 세게 한 번 치고 웃으며 말했다.
"일주일 전에 너는 다른 부하들을 제치고 내 보좌로 임명됐지. 그래서 아직 조직에 대한 정보를 잘 모를 수밖에."
"그게 무슨 의미죠?"
시훈은 책상에 다시 앉아 턱을 괴며 내게 말했다.
"알다시피 우리 조직은 어느 한 사람에게 후원받고 있지. 의뢰가 완수되면 5억을 받는다는 건 우리 부하들 전원과 심지어 일반 학생도 알고 있지. 그렇지만 의뢰하는 도중 지원금이 있다는 건 창립 멤버와 상위 멤버, 그들의 보좌밖에 모르는 사실이야."
시훈은 그렇게 말하며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의 눈에 거짓은 담겨 있지 않았고, 그것을 본 난 고개를 숙였다.
"저에게 말을 하지 않으셨더라면 독점도 가능하셨을 텐데, 형님은 정말 인자하십니다."
진지한 기색이 어려 있는 얼굴을 한 시훈이 깊은 눈동자로 내 눈을 응시하며 내게 말했다.
"여동생이 아프잖아. 내 밑에 있는 애들에게 들었다. 그래서 네가 죽어라 조직에게 복종하며 올라왔다며. 실력도 출중하고 사람이 좋은 걸 보아 내 보좌로 두었지."
코 끝이 찡했지만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보좌로 올라오자 시훈은 뒷조사를 했다는 거고, 내 사정을 아는 녀석들이 좋게 보이려고 입을 열었으니까.
그렇지만 이해했다. 이쪽은- 그렇게 살아남아야 했으니까.
"감사히 받겠습니다. 형님."
난 봉투를 마이 안쪽 깊숙이 집어넣고 그 봉투를 한 번 세게 쥐어 화풀이를 했다. 그렇게라도 화를 풀어야 했다.
"저기 형님, 왜 형님은 이런 일을 하시는 겁니까? 들은 바로는 공부도 하시고 나름대로 모범적이라고 들었는데..."
살며시 웃으며 다가오라며 손짓을 하는 시훈, 내가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하긴, 너도 이제 내 보좌인데 알 건 알아야지."
시훈은 양손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나와 신해준은 위험하게 만났어. 나는 그가 어떤 행동을 저지를지 모르기 때문에 계속 곁에 있었어. 그래서 나는 신해준을 몰래 감시하면서 큰 사건을 만들지 못하게 하고 있는 거야."
잘 모르겠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이쯤 되면 도착하겠지?"
"네? 누가 도착한다는 말씀이십니까?"
고요한 옥상에 쉼터로 자리 잡은 듯이 나뒹구는 책상과 의자들 사이로 매섭게 부는 칼바람, 그와 동시에 옥상의 문이 열렸고.
"소개할게, 나를 제외한 우리 조직의 창립자와 상위 멤버 둘이다."
그들이 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