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조회있데."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보이는 태연이 실내화로 갈아신으면 말하자 대충 고개를 끄덕인 여주도 신발을 갈아신었다. 복도를 지나 대회의실로 들어가자 스크린에는 월례조회라고 크게 쓰여있었다. 저 큰 스크린으로 영화를 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시답지 않은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간부들이 들어왔다. 맨 뒷줄에 조용히 앉은 여주가 불을 끄자 그제야 지루한 회의가 시작되었다.
"아침에 다들 기사 봤습니까?"
"예, 메르스 말씀하시는 거죠?"
"다들 건강에 각별히 신경을 써주세요. 중동에선 치사율이 40%라는데 신경 써서 나쁠 건 없지 않습니까."
사무실로 들어가자마자 각자 자리에 앉았다. 부장실로 들어가던 두준이 발걸음을 돌려 사무실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아까 이사님 말씀 따라서 되도록 지역으로 나가는 건 자제해. 그리고 내가 마스크, 일단은 알아보고 있으니까 자기들도 퇴근하면서 약국 들려서 마스크 사서 하나씩 끼고."
생각보다 메르스 사태가 심각한 모양이다. 말 들어보니까 지역 출장도 외근도 다 취소됐다고 한다. 물론 여주도 마찬가지였다. 외근 있었는데 취소돼서 할 일이 없어진 여주는 서랍을 뒤져 사탕을 하나 입에 넣은 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도르륵 도르륵, 입안에서 굴리던 사탕을 아그작 씹던 여주가 유리창 너머로 손짓하는 두준에 마지못해 엉덩이 땠다.
"민망하지?"
"네, 그 외근이 취소돼서."
"심부름하나 할래?"
"뭔데요?"
"이거, 저기 앉아서 도장이나 찍어."
"이게 뭔데요?"
"안 작가, 작품 폐기 처리하는 거야."
입사 이래 처음 보는 광경에 눈을 크게 뜬 여주가 두준의 말을 따라 도장을 찍어댔다. 시간이 지날수록 팔이 아파져 와 미간을 좁히며 찍자 지켜보고 있던 두준은 혀를 찼다.
"바보냐? 쉬어가면서 해."
그제야 제가 한 행동이 얼마나 멍청한지 깨닫고 헛웃음을 쳤다. 본인이 생각해도 퍽 웃긴 모양새였나보다.
"커피 한 잔만."
안 그래도 커피나 마실까 생각 중이었는데 마침 커피 타령을 하는 두준에 자리에서 일어나 탕비실로 들어갔다. 한창 열심히 커피를 타고 있을 때 어쩐지 조용하기만 한 휴대폰이 울렸다.
"어, 왜?"
"뭐해?"
"커피 심부름."
"너도 마셔?"
"응, 왜?"
"아침도 안 먹었는데 무슨, 속 버려. 녹차 마셔."
"싫어."
하여간 똥고집은, 짧게 말한 민석에게 여주가 화제를 돌렸다. 왜 전화했냐는 그녀의 물음에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걸었다는 한마디에 몸이 베베 꼬였다. 어쩐지 온몸이 간질거리는 느낌이었다.
"소름 돋으니까 그딴소리할 거면 끊어라."
"어쭈, 오빠한테 이게."
오빠는 무슨, 코웃음을 친 여주가 싱크대에 등을 기대자 오빠라고 불러준다며! 버럭 소리치는 민석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둘 사이에 발전이 있던 날 참 많은 대화를 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여주의 당부가 섞인 대화였지만 말이다. 하루에 전화는 딱 6번만, 불쑥불쑥 나타나지 않기, 무조건 더치페이 등등 그녀의 가치관이 잔뜩 담긴 당부의 말이었다. 그리고 민석이 그날 입을 조심스레 열었다. 자기를 오빠라고 불러주면 안 되겠냐는 말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던 그녀였다.
"오빠는 일 안 해?"
"ㅇ, 어? 해야지."
"나 부장님 커피 드려야 해. 나중에 또 통화하자."
"어, 조금 있다가 다시 전화할게."
여전히 먼저 끊어버리는 그녀지만 사귀기 전보다는 많이 다정해진 모습이다. 휴대폰을 대충 넣고 양손에 커피를 들고 부장실로 총총 걸어 들어갔다. 심각하게 통화하는 모습에 조용히 자리에 앉아 찍던 도장을 마저 찍었다.
"아, 미치겠네."
"무슨 일 있어요?"
"마스크, 메르스가 호흡기로 감염된다는 소문이 나서 지금 마스크 구하기가 힘들데."
"그럼 어떻게 해요?"
"나도 머리 아프다."
퇴근할 시간이 되어도 마스크를 구하지 못한 두준은 머리를 부여잡고 끙끙거렸다. 그래도 디자인부에서 돌리고 남았다는 마스크를 편집부에 돌린 두준이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
퇴근 시간에 맞춰 약속한 시간에 전화를 건 민석에 기분 좋게 전화를 받았다. 뭐가 그렇게 궁금한지 끊임없이 질문해오는 그가 귀찮아 질 때 즈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식사를 하라며 부엌 쪽으로 손짓하는 보라가 보였다.
"오빠, 나 밥."
"아아, 11시에 전화하면 되지?"
"응, 근데 안 피곤해? 오빠, 너 원래 11시면 잠잘 시간이잖아."
"언제 적 이야기를 하는 거야, 아니거든. 조금 있다가 전화할게."
측근인 종인의 말만 들어도 민석, 그가 얼마나 대단한 바른생활 사나이인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학교에 다닐 때부터 워낙 유명했다는 그다. 그 한번 흔한 일탈한 번 없이 초, 중, 고, 대학까지 고생 한 번 없이 일사천리로 마치고 춤을 추느라 돈벌이가 일정치 않은 종인과 다르게 취업도 빠르고 안정적인 수입까지 또래와 비교하면 특별났다. 퇴근 후 6시면 집으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운동을 했고 운동을 마치면 집에 돌아와 씻고 작은누나 저녁을 챙겨주곤 공부를 했고 11시면 잠자리에 드는 게 그의 일상이었다. 그리고 그 일상에 끼어든 여주 때문에 완전했던 그의 패턴은 뭉개져 버렸다. 그걸 아는 여주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저 자신은 꿋꿋하게 제 패턴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식사하면서도 떨쳐낼 수 없는 생각에 어느새 미간에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던 건지 보라의 걱정 섞인 말을 건넸다.
"무슨 일 있어?"
"아뇨, 별건 아닌데.."
말꼬리를 흐리는 모습에 끄응, 하며 앓는 소리가 입에서 절로 나는 보라다. 슬쩍 눈치를 보곤 안방으로 사라지는 남준에 밥을 퍼먹던 숟가락을 내려놓고 맞은편에 앉은 보라를 바라봤다. 말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는 여주를 빤히 바라봤다.
"오빠가 저 때문에 너무 피해 보는 거 같아요."
"무슨 피해?"
"그냥, 너무 자기 시간이 없는 것 같아요. 원래 11시면 자는 사람인데 저랑 통화한답시고 잠도 못 자고 제가 평일에 쉬는 날이면 퇴근하고 저 만난다고 운동도 못 하고."
"그래서 그 사람은 그게 불만이래?"
"아뇨."
"그럼 뭐가 문제인 거지?"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모습에 오히려 당황한 여주는 제 앞에 놓인 숟가락 끝을 만지작거렸다.
"딱히 이상한 게 아니야, 오히려 지극히 평범한 거라고. 좋아하는 사람이랑 한시라도 가까이 함께 하고 싶은 건 당연한 거라고. 무엇보다 그 사람은 널 1년이나 기다렸고 또, 연애 초반이잖아. 아니야?"
선뜻 대답하진 못했지만 보라가 한 말은 전부 사실이었다. 저도 TV나 SNS에 떠도는 영화 예고편만 봐도 그와 같이 함께 가고 싶었던 마음이 들었으니까 말이다.
"정 마음이 불편하면 뭐, 말이라도 해볼 수 있는 거잖아?"
방으로 돌아온 여주는 책상에 앉아 깜깜하기만 한 제 휴대폰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10시 59분, 11시. 요란스레 울리는 휴대폰을 들어 귀로 가져갔다. 언제나 다정다감한 민석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뭐 하고 있었어?"
"그냥, 앉아있어."
"아아, 나는 뭐 하는지 안 궁금해?"
"딱히."
"아, 궁금하다고? 난 작은누나 때문에 집 대청소했어. 아우, 자기는 손끝 하나 안 움직이면서 막돼먹은 마녀 같아."
큭큭, 거리며 웃던 여주가 책상맡에 놓인 마스크를 보자 표정을 굳히곤 강단 있게 말을 뱉었다.
"뉴스 봤지? 메르스. 그것 때문에 당분간 본가 집에 안 들어갈 거야."
"뭐?"
"그니까 나 없는 동안 운동도..아니, 운동하지 마. 괜히 아프지 말고. 그냥, 일찍 자고 해. 바보같이 늦게 자지 말고."
"여주야,"
"너 보기 싫어서 그러는 거 아니니까 서운해하지 말고. 벌써 30분이네, 끊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