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역시 눈물 콧물 뺀 여주가 벌건 두 눈을 문댔다. 조금은 과격한 행동에 민석은 두 팔을 뻗어 그녀의 두 눈에 손을 올렸다. 차가운 그의 두 손이 뜨거운 제 눈가에 닿자 따끔거렸지만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오늘도 울었네?"
"이런 영화만 예매하잖아."
"넌 이런 영화 좋아하잖아."
사실이었기에 뚱한 여주는 애꿎은 민석을 팔뚝을 소리 나게 때렸다. 악의가 없는 그녀만의 애교였다. 다 안다는 듯이 두 팔로 여주를 감싼 그가 싱긋 웃었다.
"좀 떨어져 줄래? 쪽팔리거든?"
그제야 버스정류장이라는걸 인식한 건지 허허, 어색하게 웃었다. 언젠가 상상만 했었던 일들이 제 눈앞에 벌어지는 게 마냥 신기하고 좋은 그였다.
"맥주나 한 캔하고 갈까?"
"어디서?"
"우리 처음 만난 편의점에서?"
고개를 끄덕인 여주가 그가 두른 어깨의 팔을 내리며 먼저 버스에 올랐다. 평일임에도 버스에는 사람이 많았다. 그래도 어렵지 않게 자리 잡은 자리에 민석과 여주가 나란히 앉았다.
"너 왜 오빠라고 안 불러?"
"부르는데?"
"아닌 거 같은데."
함께 버스를 탄 다른 커플을 힐끔거리던 민석이 결국 생각하던걸 입 밖으로 내뱉었다. 솔직히 아직 낯간지럽게 느끼는 그녀는 명사를 빼놓고 말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그래 그렇다고 해 줄게."
"해주는 게 아니라 부른다니까?"
"뭐라고."
"어? 부른다고."
"그니까 뭐라고 부르냐고."
"ㅇ, 오빠?"
함박웃음을 지은 민석이 그녀를 덥석 안았다. 사람도 많은 버스에서 이러는 게 창피한지 등을 아프게 두드리자 멍청하게 웃는다. 한두 번 이러는 건 아니지만, 매번 당황스러운 건 여주의 몫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편의점에 자리를 잡을 때까지도 여주는 뾰로통한 표정이다. 당황은 둘째고 많이 민망했을 테니까 말이다.
"여주야."
"뭐, 말 걸지 마."
"내가 창피해?"
"누가 너 창피하데? 너 말고."
"봐봐, 너라고 부르잖아."
"아, 그래! 오빠! 오빠! 됐냐!?"
민망해서 버럭버럭 거리는 꼴이 웃음이 나오는 민석은 맥주캔을 쥐고 고개를 저으며 귀엽다는 말을 반복했다. 하지만 그 이상은 하지 못했다. 아마 했다면 자리에서 일어나 여주가 가버리는 불상사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알겠어, 알겠어. 듣고 싶어서 그랬어."
"알아, 나도 노력하고 있는 거야."
"아이구, 그래쪄?"
"나 갈래."
"미안, 미안. 장난 안칠게."
얼마나 맥주캔을 세게 쥐었으면 맥주가 넘쳤다. 목을 두어 번 가다듬은 민석이 꿀 떨어지는 눈으로 여주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줬다.
"가면 언제 와?"
"빠르면 한 달? 메르스도 잠잠하니까."
티 나지 않게 한숨을 내쉰 여주는 입에 맥주를 가져다 댔다. 표현을 못 하는 그녀지만 이럴 때 보면 서툴러서 더 마음에 들었다. 한참을 맥주만 들이켜는 그녀를 바라보다 시끄럽게 울리는 민석의 휴대폰에 시선을 돌렸다.
"여보세요?"
"어디야?"
"나 지금 편의점."
"누구랑?"
"아, 누나가 무슨 상관이야."
누나란 말에 눈을 크게 뜬 여주가 마시던 맥주캔을 테이블에 올려놓곤 다소곳이 앉았다. 영상통화도 아닌 것이 여주를 무지하게 의식하게 만들었다.
"여자친구랑 같이 있어."
"그, 21살밖에 안 먹었다는 애?"
"무슨 상관이냐고, 끊어."
"무슨 상관은. 어린 계집애가 외간 남자랑 이 시간까지 같이 있는 게 말이 되니? 어?"
"늦긴 뭐가 늦었다고 그래. 이제 11시 조금 넘었는데."
"말대꾸해? 야, 빨리 안 들어와?"
버럭버럭 소리치는 그녀에 민석은 짜증이 난 듯 이를 악물었고 옆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여주는 괜히 고개가 숙여졌다.
"잠이나 자."
"야! 김민,"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은 민석이 크게 한숨을 몰아쉬었다. 뭔가 그와 결혼할 여자가 불쌍해지는 여주였다.
"불쌍해."
"어?"
"오빠랑 결혼할 여자, 너무 불쌍해."
집으로 돌아온 민석은 방에서 얌전히 잠든 예림의 방문을 열어젖혔다. 요란한 소리가 났음에도 세상 편하게 두 눈을 감고 있는 그녀가 너무 짜증스러운 그였지만 누나이기 전에 여자이기에 화를 삭이며 방문을 닫았다. 분명 잠이 들었을 리가 없다. 예림의 짜증스러운 통화 직후 충격적인 말을 내뱉은 여주의 말에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집에 가자며 먼저 일어났기 때문이다.
"누난 도대체 왜,"
말을 잇지 못한 민석은 고개를 떨궜다. 매번 이런 식인 예림에게 화가 났다. 결국 화도 내지 못한 민석은 상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
*
오랜만에 출근한 여주는 가방을 내려놓지도 않고 곧장 부장실로 향했다. 두준도 출근한 지 얼마 안 된 건지 재킷을 벗고 있었다. 들이닥친 여주가 당황스러웠을법한대도 여유 있게 손 인사를 하며 맞이하는 그였다.
"여길 먼저 들어오고 왜일?"
"아, 혹시 저 휴가 쓸 수 있나 해서요."
"진짜 웬일이야? 네가 먼저 휴가 이야길 다 꺼내고?"
탁상달력을 보던 두준이 머리를 긁적이며 난감한 상황을 티 냈다. 메르스도 제법 사그라들고 미뤄졌던 일들이 다시 재개되며 많이 바빠졌기 때문이다.
"음..사유 물어봐도 되나?"
"아니에요, 어려우면 휴가 안 낼게요."
"너 별일 아닌 거 가지고 휴가 낸다는 건 아닐 거 아니야."
"별일 아니었어요. 나가보겠습니다."
부장실 문을 열고 나가자 오랜만이라며 인사하는 윤오가 보였다. 대충 고개를 끄덕이던 여주가 가방을 내려놓고 앉자 진리가 먼저 아는척해왔다. 아무래도 출근하자마자 부장실에서 나오는 여주가 이상해 보였나 보다.
"무슨 일 있어?"
"휴가 여쭤보려고 했는데 바빠서 힘든가 봐요."
어쩔 수 없다는 듯 제 노트북을 켜곤 업무를 해치워 나기는 여주였다. 한편 먼저 휴가 쓴다는 말을 꺼내지 않는 그녀가 휴가 이야기를 먼저 꺼내 신경이 쓰이는 두준이었다. 평소처럼 퇴근 시간이 되자 USB를 빼 가방에 넣고 가방을 들려는데 요란스레 울리는 사내전화에 귀찮다는 표정으로 수화기를 들었다.
"네, 편집부 김여주입니다."
"부장실로 들어와."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