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작업 그만할까요?"
평소라면 졸려도 여주의 페이스에 맞추려는 그가 졸린 눈을 애써 뜨며 작업하는 게 눈에 보였는지 먼저 말을 꺼냈다. 아니라며 피곤하면 먼저 들어가 보라는 말을 하며 고개를 내젓던 여주였다.
"많이 피곤해 보이는데요."
"난 괜찮으니까 먼저 들어가요."
사실 피곤한 건 사실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버티는 이유는 다 민석이 때문이었다. 아침 퇴근길에 오늘도 새벽까지 작업하면 인도네시아 시간으로 12시 한국시간으로는 2시에 전화를 달라고 부탁을 했다. 아직 1시간이나 남은 시간 감기는 눈을 억지로 뜨며 버티고 있었다.
"안 들어가요?"
"조금 자요, 깨워줄게."
잠시 고민하던 여주는 그럼 2시 전에 깨워달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까무룩 잠이 들었다. 많이 피곤했던 건지 금세 새근새근 잠이 든 모습에 윤오는 한참을 내려다봤다. 앳돼 보이는 얼굴로 사회생활을 씩씩하게 처리하는 모습에 신기하기도 했다. 살짝 뒤척이자 잘 넘겨놓은 여주의 머리카락이 그녀의 얼굴을 가렸다. 아쉬움이 느껴지는지 쩝, 하는 소리를 낸 윤오는 한참을 앉은자리에서 바라봤다. 몸을 흔드는 느낌에 붉게 충혈된 눈을 뜨자 보이는 건 말간 얼굴이 보였다.
"으음, 몇 시예요?"
"1시 50분이요."
"아, 고마워요. 들어가 보세요. 전 더 있다가 갈게요."
주섬주섬 짐을 챙겨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배려였다. 편하게 통화할 수 있도록. 윤오가 문을 닫고 나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통화버튼을 눌렸다. 신호음이 꽤 길었고 들려야 하는 민석이의 목소리 대신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소리가 들렸다. 삐, 소리가 난 후에야 홀더를 누른 여주는 뭐가 그리 초조한지 손톱을 깨물었다. 한 번도 전화를 안 받은 적이 없는데 걱정이 되지 않을 수가 없다.
"왜 전화를 안 받지."
벌써 세 번째다. 이번에도 안 받으면 어쩌나 걱정하는데 곧 나른한 민석이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태연하기만 한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화가 치밀어올랐다.
"뭐 하느라 전화를 이제 받아?"
"잤어."
"...알겠어."
울컥하는 마음에 통화를 먼저 끊고 책상에 머리를 박고 엎드렸다. 속이 상했다. 분명 예전과 달라진 듯한 모습에 서운하기도 했다. 그리고 걱정을 하던 자신이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울적한 기분에 한참을 엎드려있었다.
"일 마쳤어요?"
"아, 아직 퇴근 안 했어요?"
"이걸 놓고 가서요."
유유히 들어와 노트북을 들고 웃어 보이는 윤오에 여주는 다시 고개를 묻었다. 곁에 한참이나 서 있던 그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안 귀찮으면 집에 데려다 드릴까요?"
"그건, 제가 아니라 윤오 씨가 귀찮은 거 아닌가요?"
"저는 괜찮아서요."
"그냥 한두 시간 더 자다가 첫차 타고 나가도 돼요."
"귀찮으시구나."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들은 여주는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그리곤 시무룩하게 서 있는 윤오를 바라보며 말했다.
"뭐해요, 안 가요?"
*
*
[2015.08.01. 토]
너 짜증나 ← 김여주
김민석 → ?
됐다 ← 김여주
자
김민석 → 응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온 여주는 우울하기 짝이 없었다. 새벽에 그렇게 카톡을 하고 나서는 연락 한 통이 없었기 때문이다. 쌀쌀맞기만 한 그가 너무 낯설었다.
"누나 무슨 일 있어?"
"전혀."
"나랑 영화 보러 갈래?"
"혼자 있고 싶어."
방 밖으로 밀어내는 손길에 태형이는 잔뜩 뾰로통해졌다. 오랜만에 집에 와놓고선 근처에도 못 가게 하니.
"누나 미워!"
"쟤는 나이가 몇인데."
구시렁거리며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아무 생각도 아무것도 하기가 싫었다. 그래도 자꾸만 떠오르는 그의 생각에 죄 없는 그가 야속하기만 했다. 한편, 방밖에서는 삐친 태형이는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달려 나갔다.
"누구세요?"
"문 열어!"
"아, 수정이누나?"
문을 열자 노랗게 머리를 염색한 수정이 다짜고짜 집으로 들어왔다. 당황해서 머뭇거리는 녀석에게 추궁을 시작했다.
"여주는? 집에 안 왔어?"
"새벽에 왔어."
"근데 왜 전화 안 받아? 자?"
"아까 깨어있긴 했는데 완전 저기압이야."
"영화 보자고는?"
"해봤지."
"민석오빠 때문인가."
"그게 누군데? 설마, 그 나이 많은 영감탱이?"
"영감탱이라니! 이게 어디 형한테."
문밖에서 나는 소란스러움에 잔뜩 신경질적으로 방문을 열었다. 큰소리에 그대로 굳어버린 녀석들을 노려봤다. 조용히 하고 이 집에서 나가라는 의미였다.
"휴대폰 안 봐?"
"나 혼자 있고 싶다. 제발 나가라. 김태형 너도 나갈래?"
잔뜩 날이 선 목소리에 그제야 상황 판단이 되는지 태형이는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혼자남은 수정이만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
"넌 안 나갈래?"
"응, 나랑 밥 먹자."
"혼자 있고 싶다고."
"민석오빠 때문이지?"
방으로 걸어가던 여주의 발걸음이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