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시간이 다 되어가는 여주는 마무리 작업을 하며 퇴근 시간만을 기다렸다. 요즘 매일 같이 칼퇴근하다 보니 칼퇴근에 맛이 들인 것이다. 6시 정각, 부장실에서 나온 두준이 손뼉을 치며 시선을 끌었다.
"요즘 한가하지? 야근 자주 하는 여주도 칼퇴근하고."
"네애-"
"오늘 회식이나 할까?"
두준이의 말에 사무실에 있는 사람들은 한 명도 빠지지 않고 환호를 했다. 그중 여주도 빠지지 않았다. 일제히 소고기를 외치는 직원들에 카드에서 개인카드를 꺼내든 그는 보라에게 내밀었다.
"매번 가는데 맞죠?"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부장실로 들어가 버렸다. 저마다 멋있다며 소리치던 사원들은 짐을 챙겼다. 윤오는 쭈뼛거리며 보라에게 다가갔다.
"왜, 오늘 참석 못 해요?"
"아뇨, 제 차로 같이 가도 될까 해서.."
"윤오 씨는 뭐가 그렇게 어려워요?"
옆에 앉아있던 여주가 묻자 잔뜩 긴장한 윤오가 손톱을 만지작거리며 대답해왔다. 그 언젠가 저도 한번 들었을 법한 질문을 그에게 했다. 대답이 궁금했다. 저로서는 도저히 결론을 낼 수 없는 질문이었다. 머뭇거리는 사이 둘 사이에 진리가 끼어들며 대답은 들을 수 없었다.
"여주, 누구 차 탈 거야?"
"윤오 씨 차 타고 가요."
조수석에 올라탄 여주는 창밖 사람들을 빤히 바라봤고 그런 그녀를 의식하며 운전하는 윤오였다. 당사자는 모르고 뒤에 앉은 보라와 진리만이 그런 그를 알아챘다.
"윤오 씨는 여자친구 없어?"
"예? 예.."
"젊은 사람이 왜?"
"젊다고 다 애인 있나요. 나도 한참 없었는데 뭘."
"그건 네가 이상한 거라니까?"
창밖 보기를 포기한 여주가 보라의 말에 대꾸하자 진리가 타박했다. 조금은 서운한 듯 입술을 비죽 내민 여주가 자신을 빤히 내려다보는 윤오에게 운전에 집중하라며 핀잔을 주곤 고개를 돌렸다.
"윤오 씨는 좋아하는 사람 있어?"
"예, 있습니다."
"뭐야, 여주가 더 이상한 거였어."
"아, 언니!"
큰소리 내기는.. 작게 중얼거린 진리가 윤오의 어깨를 건들며 여자를 소개해준다며 이야기를 꺼냈다. 그 말에 호들갑을 떠는 건 여주였다.
"좋아하는 분이 계세요. 마음만 받겠습니다."
"그 여자 임자 있잖아, 너."
정적이 흘렀다. 진리의 말에 아차 싶은 여주는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조금 무례한 말인데도 윤오는 그저 소리 없이 웃을 뿐이었다. 바보 같다고 느낀 여주는 진리를 째려보곤 기어에 올려진 윤오의 손을 다독였다.
"언니 못됐다. 그죠?"
엉겁결에 같은 테이블에 앉은 윤오는 잔뜩 당황스러웠다. 제 마음을 들킨 것 같아 불안한 데다가 이렇게 마주 보고 앉아있자니 눈 둘 곳을 잃었다.
"임자 있는 여자 좋아할 수도 있지 뭘 그래?"
굳어있는 윤오 쪽 테이블을 두드리며 낮은 소리로 말하는 진리였다. 크게 움찔하는 그였지만 아무도 그런 그를 신경 쓰지는 않았다. 물론 여주는 답답함을 느꼈지만 말이다.
"너무해."
"뭐가 너무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에 여주는 맥없이 소주를 들이켰다. 민석이가 정말 싫어하면서도 좋아하는 모습이다. 술을 정말 잘 마시긴 하는데 술만 들어가면 방심하는 모습 말이다. 바로 이렇게.
"여주야, 오늘 몇 시까지 들어갈 거야?"
"들어갈 거야? 난 더 놀고 싶은데?"
2병 이상 마신 여주는 집에 들어가길 거부한다. 물론, 아주 멀쩡한 얼굴로 3, 4차를 외치고선 이동 중엔 아무에게나 기대거나 팔짱을 끼는 둥 평상시 볼 수 없는 애정이 넘치는 행동을 난무했다. 그 모습을 가장 좋아하면서도 두려워하는 민석이었고 지금 옆에서 걷는 윤오도 그랬다.
"취하신.."
"제가요?"
받아치는 그녀에 할 말을 잃은 윤오는 쩝 입맛을 다셨다. 취하면 취할수록 발음이 더 똑 부러지는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한마디를 뱉으면 바로 납득이 가니 뭐 말릴 수도 없다.
"아니, 여주네는 아버님이 주당이셔?"
"아뇨, 맥주만 마셔도 취하세요."
"그럼 어머님이?"
"소주 한 병?"
"그렇게 잘 드시는 것도 아니네. 그럼 누구 닮은 거야?"
"할아버지요.“
물을 마시듯 소주를 털어 넣고선 덤덤하게 뱉어진 말에 모두가 웃었다. 사실 저렇게 청순하게 생겨선 말투도 행동도 너무 털털하지 않은가. 곧장 자신의 빈 잔에 술을 채우는 모습에 윤오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자, 윤오 씨도 많이 마셔요. 대리 꼭 부르고~"
친절히 윤오의 잔까지 채워준 여주는 두준의 옆으로 자리를 옮겨 술을 따르며 콧노래까지 흥얼거렸다. 저 여자 위험하다.
*
*
아영이에게 전화를 받은 지 벌써 일주일이 흘렀다. 답장을 보내긴 해야겠는데 차마 예림과 마주 앉아 식사를 할 자신은 없었다. 한참 생각하는 그녀의 위로 그림자가 졌다. 보나 마나 진리임을 알아챈 여주는 중얼거렸다.
"언니, 나 어떻게 하죠."
용기를 내 약속 시각을 미루려는 여주의 계획은 무너지고 말았다. 낯선번호, 예림이에게서 온 전화 때문이었다.
"여주니?"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만으로도 바짝 긴장하게 만드는 목소리에 침을 꼴깍 삼킨 여주는 혹여나 불호령이 떨어질까 긴장했다. 날카로운 목소리 톤은 그녀가 원래 그런 목소리임을 느낄 수 있도록 여전히 날이 서 있다. 평소와 다를 바가 없는 목소리였다.
"네, 안녕하세요."
"응, 그래 안녕하고 다른 게 아니라 우리 언니가 민석이 오기 전에 셋이서 밥 먹자는 이야기를 했는데 아직 답이 없다길래 전화했어."
"아, 네네. 그 언제가 편하세요?"
"난 7시 이후로."
"네, 그럼 아영언니랑 통화하고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여주는 휴게실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제발 시간이 가지 않길 빌었다. 퇴근을 하는데 정말 오랜만에 민석이에게 전화가 왔다. 사실 반갑기도 했지만 부탁할게 있어 영 시원치 않은 표정으로 화면에 뜬 초록색 전화 버튼을 옆으로 밀었다.
"여보세요?"
"여주! 퇴근하고 있어?"
"으응, 너는?"
"나도 이제 퇴근하려고. 무슨 일 없어?"
"응? 무슨 일?"
마치 다 아는듯한 목소리에 눈을 크게 떤 여주가 묻자 건너편에서는 한참이나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잠자코 있던 여주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려 했으나 어울리지 않게 뜸을 들였다.
"누나들이 밥 먹자고 했다며."
"아, 그게."
"나 없이."
"응."
"여주야, 부담스럽잖아. 내가 이야기 잘 해볼게."
"그래도,"
"응, 무슨 말 하고 싶은지 잘 아는데 괜히 무리해서 사이가 더 애매해지는 건 내가 원하지 않아. 너도 그렇지?"
"응."
"그래, 카톡 할게."
전화를 마친 여주는 괜히 코끝이 찡해 코를 훌쩍였다. 철딱서니 없다고 동생 같다며 항상 구박만 했던 그였는데 이렇게 어른스럽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여주가 괜히 차창 밖만 바라볼 때 보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거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