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면이 사라진 이후로 부쩍 말이 없어진 여주에 민석이는 식은땀을 흘렸다.
"그 저번에 밥 먹으러 자주 다닌다던,"
"뭐야, 그게 더 이상해!"
비명을 지르다시피 말하는 그녀에 더욱 당황해버렸다. 그런데도 뭐가 웃긴 지 갑자기 뒤로 넘어가다시피 웃는 그녀였다. 민석이는 그저 환장할 따름이었다.
"장난이야, 장난. 근데 왜 이렇게 당황해? 수상한데?"
"아니라니까!"
"알겠어, 알겠어. 성질하고는."
솔직히 누가할 소리인데 자기가 하고 있다. 밉지 않게 노려보던 민석을 새침하게 바라보던 여주는 곧 시끄럽게 울리는 제 휴대폰에 고개를 돌렸다. 김태형, 저의 동생이었다. 이번엔 무슨 잔소리를 하려는지 받지 말까 한참 고민하다 손을 놀렸다.
"왜."
"오늘 집 와?"
"아까 집에 간다고 아침에 통화했다, 우리."
"아, 그렇지? 그럼 누나 올 때 피자 사와."
"안 돼."
"아, 왜. 오랜만에 집에 오잖아."
"오랜만이면 뭐 사가야 되냐?"
"진짜 치사하게 이럴래?"
"진짜 때리고 싶게 이럴래?"
여느 남매들과 다르지 않게 티격태격하며 전화를 마쳤다. 뾰로통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대충 쑤셔 넣는 여주의 얼굴로 제 얼굴을 들이밀었다. 깜짝 놀란 여주는 얼굴을 손바닥으로 밀쳤다. 생각보다 크게 난 소리에 움찔한 그녀였다.
"미안."
"아냐, 내가 놀라게 한 건데 뭘. 근데 동생이 뭐래?"
"뭘, 뭐래 쓸데없는 이야기하지."
"아, 그래?"
시큰둥하게 말하는 여주의 얼굴을 두 손을 뻗어 잡았다. 포동포동한 볼살에 붕어 입술이 된 여주가 놓으라며 투덜거렸다. 한껏 귀여워진 얼굴에 민석이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었다.
"여주, 뽀뽀해도 돼?"
"꺼뎌."
"왜, 귀여운데?"
"발료 찬댜?"
인상까지 쓰며 말하자 그제야 마지못해 손을 뗀 민석이는 자그마한 몸을 품에 짧게 안았다 떨어졌다. 자기가 덥석 안아놓곤 보기 좋게 붉게 물든 귀를 숨겼다.
"뭐야, 바보야?"
"바보라니!"
"에이, 바보 맞는데?"
설레던 게 언제라고 지금은 또 티격태격하기 바쁘다. 얼마 걷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다다른 여주의 집 앞에 민석이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아쉬움이 남는 그는 여주의 손을 붙잡고 한참이나 바라봤다.
"가야 해?"
"응, 배고파."
"에휴- 오랜만에 왔으니까 가족들이랑 밥 먹어야지."
"응, 잘 가."
"너 너무 미련 없이 보내는 거 아니야?"
"그럼 눈물이라도 흘릴까?"
"아니야, 우리 여주 울면 내가 마음이 아프지."
"아, 뭐래. 꺼져!"
발길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 듯 자꾸만 멈춰서는 그가 골목 어귀를 돌아 사라질 때까지 여주는 집 앞에 서 있었다. 실상은 민석이가 골목 어귀를 돌아 여주가 집으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다 집으로 향했지만 말이다. 집으로 들어가자 왜 피자를 안 사 왔냐며 칭얼거리는 태형이가 있었다.
"애새끼야? 징징대지 마."
"아, 사 오라고 했잖아."
"내가 사 온다고 한 적 있어? 애새끼처럼 굴 거면 나가."
단호하게 말한 여주에 삐쭉 입을 내민 태형이 쿵쾅대며 방을 나갔다. 아직 아기 같은 행동에 여주는 이마를 짚었다. 유치한 놈이라고 혼자 한참을 욕하고 있었을까 갑자기 울리는 전화기에 화들짝 놀랐다.
"여보세요?"
"집에 잘 들어갔어?"
"그건 내가 물어야 하는 거 아닌가?"
"헿, 그런가?"
"바보네, 바보야."
"맨날 바보래. 지금 잠깐 현관문으로 나가봐."
"왜?"
"아, 그냥 좀 해주라 좀!"
칭얼대는 그에 못 이기는 척 현관문을 열자 현관 문고리에 달린 봉투가 보였다. 뭐냐고 묻기도 전에 집안을 가득 메운 피자 향기에 텔레비전에만 시선 고정한 태형이가 고개를 돌려 여주를 바라봤다.
"뭐야, 이거?"
"선물, 동생이랑 맛있게 먹어. 사랑해."
부끄러운지 대답할 새도 주지 않고 전화를 끊어버리는 그였다. 덩달아 부끄러워진 여주는 붉어진 얼굴로 현관문을 닫고 태형이에게 피자를 건넸다.
**
"정말 괜찮겠어?"
"뭐가?"
"퇴근하고 바로 온 거잖아."
"왜 구질구질해 보여?"
방금 퇴근해서 블라우스에 정장 치마차림이고 항상 푸른 머리는 묶여 단정했고 얼굴에는 제 얼굴만 한 안경을 쓰고 있었다. 뽀얗고 말간 민석이의 얼굴을 보자니 그제야 자신이 너무 신경 안 썼다는걸 깨닫고 괜히 안경이라도 벗고 올걸 자책 중이었다.
"꾸질 하긴, 난 좋아."
자신보다 한 뼘 이상 작은 여자에게 덥석덥석 안기는 꼴이 퍽 우스웠다. (하지만 누가 봐도 여주가 민석이한테 안긴 꼴.) 어이가 없는지 실실 웃던 여주가 민석의 품에서 나오며 주위를 살폈다.
"누나는?"
"아, 요즘 연애하시느라 바쁘시대. 집에 있는 꼴을 못 봤다."
"뭐야, 질투하는 거야?"
"아니, 결혼 못할 줄 알았는데 성질이 워낙 고약해야지. 유치원 교사인 게 미스터리야."
"진짜 뭐래. 내 성질도 한 고약하는데 같이 까는 거지?"
"아니이! 한 번도 그런 생각한 적 없는데?"
버럭버럭 하는 걸 봐선 의심스러웠지만 떨떠름한 표정으로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불편한 차림새에 민석이의 등을 떠밀며 편한 옷을 달라고 졸랐다.
"여주, 너무 방심하는 거 아니야?"
"뭐야, 날 어떻게 할 샘이야?"
"그건 아닌데 너무 아무렇지 않잖아."
아무렇지 않게 예림이의 옷장을 뒤적거리다 꺼내주는 옷가지들이 참 능숙해 보인다. 민석이야말로 여자친구를 집에 데려온 게 처음인지 의문이다.
"오빠."
"어?"
"오빠야말로 여자친구 집에 데려온 거 처음 맞아?"
"맞지, 그럼."
"아닌 것 같은데."
"맞는데?"
단호한 그에 할 말이 없어진 여주는 그냥 거실 소파에 누웠다. 밤샘 작업을 하고 바로 와서 그런지 잔뜩 피곤해진 그녀는 금방 잠이 들었다. 아침도 안 먹었을 그녀에게 라면이라도 끓여줄까 싶어 부엌으로 들어갔던 민석이는 까무룩 잠이든 여주를 눈치채곤 조심스레 다가갔다. 요즘 피곤한지 피부도 까칠해 보이는 게 속이 상했다. 소파가 불편한지 이리저리 뒤척이는 바람에 얼굴을 반쯤 덮은 머리칼을 넘기며 얼굴을 빤히 내려다봤다.
"여주, 방에 들어가서 자."
"으응,"
"대답만 하지 말고."
"으응,"
"내가 안아서 옮겨?"
"....일어날꺼야."
"단호하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