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1.
쏴아아...
"물이 생각보다 좋네"
루한은 샤워기 앞에 머리를 갖다댄채 몸을 문질렀다.
시원하게 떨어지는 물방울은 루한의 몸을 훑고지나갔다.
"그나저나..."
우웅.
루한의 귀 뒤에 박힌 푸른 보석이 빛을 내기 시작했다.
"물의 원석이 반응을 하다니."
루한은 자신의 귀 뒤에 박힌 마석이 반응을 하는 것을 보면서 낮게 중얼거렸다.
2.
달칵.
루한은 머리를 털며 화장실을 나왔다.
흰 샤워가운을 입고 나온 루한의 머리 끝에서는 물이 툭.하고 떨어졌다.
"유리야. 나 씻고 나왔...."
루한은 말을 하다 멈춘 채로 유리를 응시했다.
그녀를 응시하던 루한의 눈매는 서서히 가늘어졌다.
그새 깬 유리가 가벼운 하얀 나시에 반바지를 입은채 자신의 알을 닦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리의 알은 금색으로 반짝거리며 아름다운 빛을 자랑하고 있었다.
용의 알은 껍데기는 최상급의 금으로 이루어져 있었기에 유리의 반 이름도 '아우름(Aurum)'인 것도 어쩌면 당연한 순리였다.
그녀가 포근히 안고있는 알에서는 곧 금룡이 태어날 예정이었다.
남들은 되고자 발악을 해도 될 수 없는 용의 주인.
그 문 바로 앞에 서 있는 여자.
그게 자신의 약혼녀였으니깐.
루한은 매혹적인 약혼녀를 그저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사이 화장실의 문이 달칵하고 열리는 걸 들은 유리는 고개를 들어 감사인사를 전하려고 했다.
"레아야. 여기까지 데려다줘서 고마...."
'.....어째서...?'
탁 막히는 음성.
그와 동반된 정적.
분명히 스피나제국에 있어야 하는 오빠가 왜 여기에 았는거야?
당연히 레아가 데려다 주었을 줄 알았는데...
유리의 머릿속에서는 수만가지 생각이 들며 혼란스러워졌다.
그런 유리를 보면서 루한은 새삼 유리가 여자가 되었음을 실감했다.
기다랗게 웨이브진 그녀의 금발이 한묶음으로 묶어져 그녀의 목선을 드러냈고.
목선을 따라 쭉 그녀를 훑던 루한은 검으로 단련된 탄탄하고 매끄러운 그녀의 몸을 직시하였다.
"벌써 술에 깼네...?"
자안가의 사람들은 대부분 신체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에 유리가 벌써 술에서 깨어난 것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루한은 괜히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
"음.... 나 방금 너 데려다주고 찝찝해서 씻은거야."
어색한 분위기를 비집고 들어간 루한은 바보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유리의 긴장감을 풀어주려고 애썼다.
"....오빠가 왜 여기있는거야?"
하지만 되돌아오는 것은 유리의 날카로운 질문뿐.
"....나 여기 입학했거든..."
루한은 괜히 긴장이 돼 주먹을 꾹 쥐었다.
부르르 떨리는 유리의 입술을 보면서 루한은 그저 속으로 가만히 되뇌었다.
'널 데리러 왔어. 내 곁에서 도망간 너의 곁에 가려고.'
"오빠는 스필리온대학에 잘 다니고 있었잖아. 근데 왜?"
"그야... 내 약혼녀는 너고. 난 너의 곁에 있어야 하는 사람이니까."
루한은 붉어진 뒷통수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난 니 옆에서 대학을 다니고 싶었는걸..."
그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나를 좀 바라봐주세요.'하는 울먹이는 강아지.
그게 유리가 기억하는 루한이었고 루한은 그 사실을 알고있었으니깐.
그는 유리를 애처롭게 쳐다보면서 그녀에게 다가갔다.
"오...오지마...!"
유리는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일단 오빠 방으로 돌아가."
"한 번만....한 번만 안아주면 안돼?"
애처로운 루한의 목소리와 단있는 유리의 목소리가 얽혔다.
그는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유리에게 다가갔다.
포옥.
루한은 유리를 꼭 안은 채로 말했다.
루한의 몸에 덮힌 유리는 그저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너무 보고싶었어."
"난 오빠가 여기까지 따라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루한은 유리의 목덜미에 자신의 머리카락을 부볐다.
"..."
그의 대답없는 반응에 유리는 한숨을 쉬었다.
"오빠가 자꾸 그러면 내가 오빠 다시 스필리온대학으로 보내버릴꺼야."
유리가 그 말을 하는 순간, 방에서는 싸한 한기가 돌기 시작했다.
뭐야...왜 이렇게 소름이..
유리가 몸에 돋은 닭살에 얼떨떨해하고 있을 때,
"....니가 무슨 수로?"
루한은 차갑게 질문했다.
얼음장같은 목소리.
유리는 가끔 루한이 그럴 때면 숨이 턱하고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니가 무슨 수로 나를 떼어낼 건데?
그녀를 바라보는 시린 눈동자가 그녀를 오싹하게 만들었다.
"오빠 아버님한테 편지를 써야지. 오빠가 스필리온 대학으로 안돌아가면 약혼 깨겠다고."
그런 유리의 허리에 팔을 두른 루한은 팔을 더 세게 당겼다.
"어짜피 약혼 못깨. 너도 알잖아."
루한의 말투에서는 서리가 끼쳤다.
"오빠. 난 아빠랑 공작님이 모두 반대해도 이 학교에 왔어."
유리는 딱 달라붙은 루한을 살짝 밀어내며 말했다.
루한은 허리에만 팔을 감쌌기 때문에 그녀가 자신의 가슴을 뒤로 밀어내자 유리와 루한의 머리 사이엔 공간이 생겼다.
자신을 꼭 안고 놓아주지 않는 루한을 보면서 유리는 살며시 루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니깐...약혼 깨고싶지 않으면 놔."
루한은 급속도로 뾰루퉁한 얼굴로 바뀌었다.
"....싫어."
3.
결국 유리는 루한을 떼내야겠다는 생각을 포기하고 그에게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오빤 그럼... 사피아노 커런덤으로 들어온거야?"
끄덕끄덕.
루한은 유리의 쇄골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끄덕거렸다.
"그럴 줄 알았어."
솔리네대학의 지능을 담당하는 반. 사피아노 커런덤(Spiano corundum).
솔리네대학에 입학통지서를 받고 나서 원하는 사람을 기준으로 '입학시험'을 보게 되는데, 그 시험에서 붙은 사람들만 갈 수 있는 반이 바로 사파아노 커런덤이었다.
솔리네 대학의 총 4개의 반은 각자의 특징이 있었다.
용을 다루는 아우름(Aurum).
정령을 다루는 플래티넘(Platinum).
마검사와 마법사를 키우는 루베르 커런덤(Ruber Corundum).
지능형 마법사를 키우는 사피아노 커런덤(Spiano Corundum).
각 반은 그 반의 개성에 맞는 수업을 배우게 되어 있었다.
루한은 허리를 풀고나서 자신의 손을 자신의 머리 위로 옮겼다.
"...그럼 설마 진짜로 1학년으로 들어온거야?"
"응."
루한은 자신의 볼을 유리의 어깨에 부비거리며 대답했다.
그는 자신의 머리 위에 있는 유리의 손을 잡고는 자신의 볼로 갔다 대며 중얼거렸다.
"난 너가 이렇게 고집쟁이 약혼녀가 될 줄 몰랐는데."
"나도 오빠가 이렇게 말썽쟁이 약혼남이 될 줄 몰랐는걸."
유리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4.
루한은 자꾸만 풀리는 자신의 눈동자를 조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를 여동생이 아닌 반려로 보게 된 계기가 그녀의 눈물 때문이었다면
그녀를 여동생이 아닌 여자로 보게 된 계기는 그녀의 웃음 때문이었을거다.
자신의 머리에 꽃을 꺽어다 꽂아주며 웃어주었던 유리에게 반하고.
책을 읽느라 파묻혀 있던 자신의 손에서 책을 덮어주며 웃었던 유리에게 반하고.
혼자서 생일축하를 받고 있을 때 자신이 만든 케이크를 들고오면서 웃었던 유리에게 반했던.
그런 자신이 떠올라 루한은 괜히 또 부끄러워졌다.
"...웃지말라니깐."
"그럼 울라고?"
"울지도 마."
"그럼 어쩌라고."
유리의 짜증섞인 목소리.
근데 난 그것도 좋은데...
"나도 모르겠어."
도리도리.
루한은 고개를 돌리다가 유리의 손을 볼 위에서 계속 잡은 채로, 자신의 머리를 유리의 쇄골에 떨어뜨렸다.
유리는 얼이 빠진 표정으로 그런 루한을 쳐다보았다.
언제부터 이렇게 오빠가 변한건지.
유리의 입장에서는 당최 알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루한은 유리를 끌어안은 채 침대를 향해 걸어갔다.
루한이 앞으로 한발 한발 걸어갈 때마다 유리는 뒤로 한발씩 밀려났다.
"어...어.?"
여기로 계속 가면...
유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
털썩.
유리는 자신의 침대에 거꾸러진 상태로 위에 있는 루한을 바라보았다.
"유리야."
"..."
"유리야..."
루한은 다정한 목소리로 유리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넘기며 이름을 불렀다.
홀릴 것 같은 그의 손짓은 유리에겐 너무나 낯선 무언가였다.
뭔가 뇌쇄적이고, 야릇한 느낌.
그런 루한에 당황한 유리는 황급히 침대 위로 올라가 일어서려 했다.
탁.
루한은 그렇게 도망가는 유리의 팔목을 잡았다.
그러고는 자신의 품으로 끌어안았다.
"이제 자자."
루한은 자연스럽게 유리의 허리를 안으며 이불을 끄집어 올렸다.
유리의 침대에에 있던 부드러운 이불이 유리와 루한을 덮었다.
그리고 어떻게 한건지, 방의 불이 툭하고 꺼졌다.
"....어... 어떻게?"
"이제 자자."
부비부비.
루한은 꼭 껴안은 유리의 머리카락을 만지작 거리며 유리의 얼굴에 볼을 문질렀다.
"....지금 이러고 자자고?"
"....응."
반쯤 잠긴 목소리.
루한은 유리를 못본 이후로 잠에 잘 들지 못했었기에 유리를 끌어안은 지금. 잠이 몰려들었다.
"그래도...이건 아니지....오빠. 일단...."
유리가 팔로 루한을 빼내려고 했으나 루한은 빼내주지 않았다.
"가만히 있어."
"지금 가만히 있을 수가 있겠어? 아무리 약혼한 사이라고 해도 이제 오빠랑 나는 성인이고..."
"그니까 가만히 있으라고."
아.
그래서 가만히 있으라고...
유리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움직임을 멈추었다.
"...."
"진짜 안고만 있을게."
난 너 많이 아끼니깐 걱정하지 않아도 돼...
루한은 자신의 품에 붉어진채로 가만히 누워있는 유리의 등을 토닥거리며 잠을 청했다.
5.
오빠가 이상한 반응을 보인건 내가 중학생이 되고 나서였던 것 같다.
내가 14살. 오빠가 15살이 되었을 때 오빠는 처음으로 내가 오빠 방에 들어오는 것을 거부했다.
그것도 아주 완강하게.
"안돼."
"왜 안 되냐니깐?"
"너도 이제 알만큼 알만한 나이가 됬잖아....! 이제 너도 나를 좀 배려해줬으면 좋겠어."
쾅.
그때가 아마 처음이었을거다.
날 두고 혼자서 방에 들어간게.
난 이때부터 오빠가 날 좋아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아장아장 걸어다닐 때부터 오빠의 집을 매일 찾아갔는데.
매일 혼자서 공부만 하고 있던 오빠에게 처음 말을 걸어준 것도 나였고.
매일 혼자서 밥을 먹던 오빠에게 처음 같이 밥을 먹어준 것도 나였다.
오빠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늘 오빠의 곁에서 껌딱지처럼 같이 있었던 나는.
오빠의 사소한 변화에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오빠의 감정변화를 쉽게 읽어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다른 사람을 대할 때는 잘 모르겠지만.
어짜피 오빠가 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만 알면 되는거잖아?
그나저나...
"오빠가 사춘기가 시작되면서 본 여자애가 나밖에 없어서 그런건가...."
나는 고개를 까딱거리며 다리 사이에 있던 용의 알을 만지작거렸다.
사춘기에 들어서면서부터 몸도 마음도 부쩍 커버린 오빠를 따라잡기엔 난 너무 어렸던 걸까?
솔직히 나보다 작고 왜소했던 오빠의 급진적인 성장에 나는 그저 놀랄 따름이었다.
늘 내가 검을 들고 연무장에서 연습을 할 때면 오빠는 늘 책을 들고 연무장에 와서 독서를 했었는데...
왜 오빠는 하루종일 책만 읽었으면서 지능 뿐만 아니라 몸매와 체력도 갖추고 있는거야?
유리는 갑자기 살짝 침울해졌다.
난 그렇게 노력해서 얻은건데...
난 스피나 제국에서 가문 그 자체로 검을 의미하는 자안가의 장녀였기에 태어날 때부터 목검을 만지며 자라났었다.
그리고 매일 연무장에 가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연습하며 검을 잡는 힘을 길러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가끔 오빠의 팔에서 못빠져 나올 때가 있었다.
'내가 못빠져나가는게 가능하다고?'
혼신의 힘을 다해 루한의 품에서 빠져나가려고 했었던 고등학생 시절, 그녀의 노력을 무시하듯 그녀는 그의 품에서 벗어나지 못한 적이 있었다.
"여리여리한 책벌레 주제에...."
나중에 루한의 비아룬 조각 중에서 수속성 강화능력인 '남'조각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긴 했었지만...
"...재수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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