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1.
<비아룬어 시험>
또각또각.
구두소리가 강의실 안에 울려퍼졌다.
반의 분위기는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비아룬 조각에서 자신의 영혼을 의미하는 조각의 이름은?'
정답:아신(我神).
'이 세계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쓸 수 있는 마나의 물결은?'
정답:비랑(費浪).
'빛나는 마나의 물결이란 뜻으로, 현재 쓸 수 있는 자가 극히 제한되어 있는 비아룬 조각은?’
정답: 화랑(華浪)
.
.
.
'목속성 비랑이 뭐더라....'
유리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어제 암기했던 비아룬 조각에 대해서 하나하나 곱씹기 시작했다.
'목속성 비랑이 '아'와 '로'
화속성 비랑이 '은'과 '엔'이였고... '
"10분 뒤에 걷겠습니다."
세렌달교수의 목소리가 강의실에 울려퍼졌다.
유리는 급하게 밑에 있는 문제들을 훑어보았다.
유리는 마지막으로 남은 문제를 푼 뒤, 샤프를 책상에 떨어뜨렸다.
아직까지도 사각거리는 학생들의 샤프소리는 강의실에서 끊이질 않았다.
어떤 학생은 손톱을 깨물며 쓰고 있었고,
어떤 학생은 머리카락은 하나씩 뽑았다.
"시간이 종료되었습니다. 뒤에 있는 사람들은 시험지를 걷어 제출해주세요."
냉랭한 교수의 목소리가 끝나자 학생들의 한숨이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왔다.
"망했어."
"그래도 이정도면 괜찮았지 않아?"
"으아... 목속성 비랑에 화속성 비랑을 써버렸어. 어떡해...."
학생들은 다들 저마다 삼삼오오 모여 이번 시험에 대해서 떠들기 시작했다.
그런 학생들을 바라보던 유리는 한숨을 푹하고 내쉬었다.
'이번 시험은 여차저차 잘 넘겼지만 기말고사는 진짜 어려울텐데....'
"유리야!"
그런 걱정을 하던 유리를 툭치며 친구들이 다가왔다.
세아,레번,세한.
어느덧 친해진 아우름(Aurum)반 학생들은 저들끼리 모여 시험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번 시험 어땠어?"
"솔직히 그정도는 쉬웠지 않아?"
"근데 헷갈리는 조각이 너무 많아. 일단 '로'랑 '료'부터가 헷갈리잖아."
"난 목속성이 제일 먼저 있어서 맨 위에 있는 '로'가 더 짧다고 왜웠는데..."
세아와 레번은 서로의 답안지를 바꿔가며 채점을 하며 말했다.
"난 이것보다 화랑이 더 걱정돼....비랑은 그저 왜우기만 하면 되지만..."
기말에 보게 될 화랑은 원리가 꽤나 복잡하고 왜울 양이 비랑보다 많았다.
"세한. 너는 잘 쳤어?"
"어?....어."
세한의 초록빛 눈이 유리의 파란빛 눈을 물끄럼히 바라보았다.
2.
신입생들이 서로 친해지고 학교에 적응해 나갈 동안, 붉은 머리카락이 유독 눈에 띄는 세한은 금방 평민이라는 사실이 퍼졌었다.
솔리네 대학이란 곳에선 '평민'이란 신분은 매우 어울리지 못하고 거슬리는 존재였기에.
'쟤 평민이래.'
'그런데 어떻게 아우름(Aurum)에 들어갔대?'
'권력에 미친 부모가 신전에 뒷 돈을 대가며 탄생일을 얻어냈겠지 뭐...'
'에이...그게 사실일리가 없잖아...'
'그나저나 쟤가 여기서 졸업하면 우리보다 신분이 높아지는 거야?'
'그래도 우리보단 낮지 않을까...?'
'평민이랑 같은 학교라니...불쾌해.'
"그 입 좀 다물어줄래?"
그런 아이들을 바라보던 세아와 레번 그리고 유리는 세한을 변호했다.
세뇨라 왕국의 공자 레번 세뇨라:<운샴.아프.달행.운길>
사라 왕국의 공녀 세아 로제타:<운샴.운길.엔라.하제바>
스피나 제국의 후작 영애 유리 자안:<운샴.바님.바라.바행>
그들이 나서자 '세한'의 존재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던 학생들은 금방 입을 다물게 되었다.
"어짜피 귀족들이 탄생일을 받아내는 것도 뒷돈이랑 다를 바가 없잖아?"
그나마 다행히도 세한은 왠만한 귀족들만큼은 부귀한 집안의 자식이었기에 귀족들도 점차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웅성거렸던 소문들을 뒤로하고 넷은 더욱더 친해지게 되었다.
"고마워."
세한의 새빨간 머리카락을 닮은 볼과
"뭘 그런걸 가지고."
유리의 새파란 눈동자를 닮은 시원한 대답이 서로를 더 단단히 연결시켜주었다.
다음 학기 11월이 되면 함께 '용의 시험'이란 목숨을 건 사투를 같이 헤쳐나가야 친구들이었기에.
그들은 어쩌면 당연히 다른 반 학생들보다 더 강한 단결력을 가지게 될 수 밖에 없었다.
3.
"그나저나 유하는 잘 있는거 확실해?"
세아가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유리에게 질문했다.
"응"
아마.
한 달이란 시간이 지나는 사이 유리에게는 많은 변화가 있었고 그 중 하나가 '유하의 탄생'이었다.
아직은 너무 어려 자신을 겨우 알아보는 유하였지만 그런 유하를 키운다는게 유리에게는 너무나 큰 선물이었다.
유리는 멋쩍게 웃으며 친구들을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말이야....나 이제 검술수업 가야해서... 먼저 가봐도 될까?"
"어...? 벌써?"
세한이 아쉽다는 듯한 표정으로 유리를 바라보았다.
"어짜피 수업 1시간 뒤에 있지 않아?"
"근데... 유하도 봐야하고... 그래서."
유리는 머리카락을 긁적이며 말했다.
그런 유리를 의심가득한 눈초리로 바라보던 세아가 톡 쏘듯이 말했다.
"솔직히 말해봐. 너 유하. 루한공자한테 맞긴거지?"
"....."
아. 뭐라고 해야.......
유리는 식은땀이 나는 것만 갖은 기분을 느끼며 친구들에게 어색한 웃음을 지여 보였다.
"음..."
"뭘 고민해. 여기서 누가 그걸 모른다고."
레번의 능청스러운 말투.
그런 레번의 팔뚝을 유리가 세게 꼬집었다.
"아악!"
"....맞을 만 했어."
세한은 그런 레번을 보면서 짧고 강한 타격을 주었다.
"...어떻게 그런 말을 ....."
레번은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삐쭉 내밀었다.
"진짜 병아리 닮았으니까 입 집어넣어라."
튀어나온 레번의 입술을 세아가 꾸욱 눌러 집어넣었다.
"병아리 아니라니깐."
불만어린 레번의 목소리.
"누가봐도 병아리같이 생긴게."
"흥."
"새침한 것 보소."
친해진 넷은 투닥거리며 복도를 걸어갔다.
4.
<검술시간>
쾅.
"흐아..."
유리는 숨을 헐떡거리며 겨우 검술시간에 정시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어짜피 너 자안가잖아."
약혼사실을 뒤늦게야 알게 된 세아의 투덜거림.
그런 세아를 달래던 유리는 '자안가'라는 이유 하나로 늦게까지 연무장에 출발할 수 없었고,
수업시간이 10분정도 남았을 때에야 겨우 출발할 수 있었다.
으...힘들어.
유리는 덜덜 떨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헉헉거리며 검술장안에 들어갔다.
"저....왔습니다."
"그래. 안그래도 출석을 부르던 중이었다."
교수는 덤덤히 그녀를 바라보다가 다시 출석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녀가 안도하며 들어가자 루한은 포대기에 싸여있는 유하를 토닥거리며 잠재우고 있었다.
"유리 자안"
"네!"
검술수업의 교수인 이코 룬교수는 그런 그녀를 보면서 빙그레 웃었다.
"요즘 많이 바쁜가 보구나."
"그러게요."
유리는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태어난지 한 달도 안된 유하를 돌보는 일부터
빡세기 그지없는 대학수업들과
약혼 사실에 대한 친구들의 놀림.
그리고 루한.
...하.
유리는 한숨을 쉬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루한을 바라보았다.
바다같은 머리카락과 바다같은 눈동자.
루한은 유하가 폭 파묻혀 보이지 않는 포대기에 젖병을 물려둔채 유리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오늘 시험 잘쳤어?"
"어?...음. 그럭저럭 괜찮았던 것 같아."
"잘했어."
쓰담쓰담.
루한은 부드럽게 웃으며 유리를 쳐다보았다.
두근.
루한의 예쁘게 휘어지는 눈꼬리에 유리는 발그레진 볼을 아래로 내리며 유하를 받아 안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루한은 그녀의 볼에 살며시 키스를 했다.
루한의 느릿하고 부드러운 키스에 유리는 경직되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학생들은 다들 저마다 신이나 한마디씩 거들었다.
"오...."
"오오오오!!!"
"결혼한 것 같습니다!!!"
"이제 막 애낳은 신혼인 것 같습니다!!!"
검술시간을 함께 듣던 학생들은 둘을 놀리듯이 큰 목소리로 둘이 잘 어울린다며 소리쳤고,
"나도 알아."
루한은 당당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의 당당한 대답에 연무장에는 웃음소리가 가득히 퍼져갔다.
이 상황. 나만 부끄러운 거야?
유리는 발그레해진 자신의 볼을 머리카락을 늘어뜨리며 가렸다.
"...조용히 좀 해."
"음...왜?"
루한은 장난스럽게 일부로 내린 유리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말했다.
"난 지금 너무 좋은데...?"
누가 보면 포대기에 싸여진 용이 진짜 우리가 낳은 앤줄 알겠어.
유리는 간지러운 마음과 낯간지러운 오글거림에 괜히 유하를 토닥거렸다.
머리카락은 왜 맨날 그렇게 야하게 넘기는거야.
포대기에 쌓인 용과 유리를 바라보는 루한의 눈빛이 너무나 따스했기 때문일까.
그들의 약혼이 알려지고 난 뒤, 사람들은 그들을 보면 신혼부부를 대하듯이 행동했다.
짝짝.
"집중!"
그런 둘을 흐뭇하게 쳐다보던 이코교수는 학생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검술 연습을 시작한다!"
"알겠습니다!!"
우렁찬 학생들의 목소리를 다음으로 서늘하게 갈리는 검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너 먼저 연습하고 와."
루한의 예쁜 눈동자가 유리를 바라보았다.
"아냐. 오빠나 연습하고 와. 어짜피 유하는 내 용이지 오빠 용도 아닌걸...."
"그렇게 선긋는 건 그만하자고 그랬지."
루한은 유리의 머리카락을 부비며 말했다.
"요즘 잠도 잘 못자잖아. 연습하고 와. 내가 그때까지 봐줄께."
"그래도 오빠도 시험준비 해야지. 검술. 어짜피 실기가 다잖아."
"난 괜찮아."
"음....고마워."
루한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덮어 쓰다듬어 주던 유리는 검술연습을 위해 앞으로 나갔다.
5.
유리 자안:<운샴.바님.바라.바행>
그녀는 조용한 목소리로 조각을 읊었다.
"<바>"
우웅.
그녀의 손에 반짝이는 마나가 일렁이더니 기다란 은색 장검이 생겼다.
그녀는 비아룬 조각으로 자신만의 검을 만들기 위해서 두 달가량을 고생한 끝에 겨우 자신이 원하는 검을 형성해 내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바>조각. 즉 제련된 금속을 의미하는 조각을 세 개나 가지고 있는 그녀는 과연 검술가인 자안가다웠다.
아름다운 그녀의 검의 자태는 유리를 닮은 듯, 아름답고도 날카롭게 빛났다.
그녀가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자 반짝이는 은빛의 검에서는 강한 은빛의 마나가 일렁거렸다.
휘익.
그녀가 가볍게 칼을 휘두르자 검이 공기를 가르며 소리를 내었다.
날카롭지만 묵직한 마나 덩어리가 쇳소리를 내며 검술장에 울려퍼졌다.
"이게 네가 만든 검이냐?"
바람을 가르던 유리의 검소리를 뒤로 하고 뒤에서 천천히 이코교수가 다가와 물었다.
"네."
유리의 덤덤한 대답에 교수는 살짝 웃었다.
"예전 너의 아버지를 보는 듯 하구나."
"저희 아버님을 아십니까?"
유리는 계속 검을 휘두르면서도 음정의 변화없이 덤덤히 대화를 이어갔다.
"그럼. 스필리온대학을 함께 졸업한 동기인걸."
"진짜요?"
유리의 되물음에 룬교수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나저나 자안가에서 '용의 전사'라니 웃기는 구만...."
"...그런가요?"
"물론이지. 그들은 한 때, 검 한자루로 용을 제압할 만큼 강한 마검사였는걸..."
"<바>"
그가 조각을 읊자, 그의 반짝이는 붉은 마나가 검을 만들어냈다.
"너희 아버지는 나보다 훨씬 강하고 재빠른 사람이었어."
쇄액.
그의 검이 강하게 진동을 울리며 소리를 내었다.
교수는 천천히 검무를 하면서 유리에게 유리의 아버지에 대한 과거를 털어놓았다.
"애초에 그렇게 강한 자가 있을 거라고 생각을 못했었지."
“아버지에 대한 칭찬. 감사합니다.”
유리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런 녀석이 어느 날 한 여자를 데려와서 결혼을 하겠다고 난리를 치더구나."
"저희 어머니신가보군요."
그런 유리의 질문엔 교수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래. 어찌보면 너와 루한을 닮은 듯한 둘이었단다."
"어떤 점에서요?"
"글쎄 어떤 점에서 일까?"
쇄액.
한 번 더 칼이 바람을 갈랐다.
'부드러운 동작이다.'
유리는 그의 검무에 감탄을 하며 칼의 끝자락을 유심히 살폈다.
"너희 아버지는....."
근육이 단단히 덮힌 교수의 몸과는 안어울리는 매끄러운 검의 실루엣이 그녀를 매혹했다.
견고하고도 경건한 검무.
그랬던 검무가 어느덧 마무리되자 교수는 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의 약혼남이 얼마 전에 친 사고만큼 큰 소란을 일으키며 연애를 시작했단다."
.
.
.
화르륵.
유리의 볼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윽....부끄러워.’
그 '사건'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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