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1.
"내가 그 정도로 싫었으면 일찍 좀 말하지 그랬어."
그의 서리같은 눈동자는 녹아 눈물이 되었다.
"그랬으면 내가 널 좋아하는 일도,
널 사랑하는 일도 없었을 꺼 아냐."
"오빠...."
"그래. 이제 그만하자."
"오빠..그게 아니고."
"미안하다. 내가 집착해서."
유리가 그를 잡으려고 했지만 루한은 자신이 할 말만 끝내고 뒤로 돌았다.
2.
루한과의 싸움 이후, 연회장에선 모두 유리와 루한의 약혼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럼 자안가와 미르가가 정략약혼을 했다는 거야?"
"대박이네. 그 집안 두 개가 합치는게 계획된 거였으면 뭐. 전쟁이라도 터지는거 아냐?"
"충분히 가능성 있지. 그런데 둘이 사이가 저렇게 틀어졌으니 뭐 다 물건너간건가?"
아무튼지 둘의 약혼은 굉장한 일이었기에.
소문은 엄청난 속도로 퍼져갔다.
퍼져나간 소문은 비단 둘 사이의 '약혼'뿐은 아니었다.
"미르가에서 사피아노 커런덤(Spiano Corundum)이 나오는 것도 다 이유가 있었겠지."
"맞아. 그 집안은 원한다면 아우름(Aurum)탄생일정도는 편지 한통으로도 받아낼 수 있는 가문아닌가."
사람들은 저마다 쑥덕거렸다.
미르가에 대한 동경.
그리고 루한이 가지고 있는 특이속성 '전기'에 대한 동경.
그 와중에 가만히 자리에 앉아있는 유리의 눈은 초점없이 흔들렸다.
이게...아닌데....
이게...아닌데.
"유리야. 일단 기숙사 가자."
세아의 부축.
세아와 레번, 그리고 세한은 그녀를 일으켜세웠다.
"일단 기숙사 가서 쉬어."
"그래. 내가 마차 밖에 세워뒀으니깐 그거 타고 기숙사 가있어."
친구들의 권유에 마지못해 일어난 유리는 자신의 기숙사로 자리를 옮겼다.
3.
<아우름(Aurum)기숙사-유리>
어떡하지...
어....떡하지...
유리의 불안정한 눈빛.
그녀의 얼굴은 이미 눈물로 번져 흉해져있는 상태였다.
유리는 숨이 막히는 것만 같아 자신의 가슴을 두드렸다.
"아......으...하.."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작은 단말마일 뿐이었다.
투둑.
또 떨어지는 눈물.
그녀는 기숙사에 도착하고 나서도 해가 질 때까지 눈물을 흘려댔다.
그를 잊으려 했지만 자신이 앉아있는 의자는 루한의 기억을 더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대학연회 첫 날, 술을 먹고 만취된 자신을 끌고 데려온 루한.
자신을 포근하게 안고 자던 루한.
시간표로 나를 유린해 품 안에 가뒀던 루한.
그리고 그와 함께 나누었던 키스까지도.
생생하게 떠오르는 그의 흔적이 그녀의 숨을 가쁘게 만들었다.
무시당하기 싫은데.
비교당하기 싫은데.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는 루한이 원망스러워 또 울었다.
자신이 태어날 때 부터 정해져 있던 자신의 약혼자가 너무 미워서 또 울었다.
자신이 기어다닐 때부터 대학에 올 때까지 늘 자신의 옆에 있던 약혼자가 그리워서 또 울었다.
"흐읍...."
나 때문에 마석을 귀에 박았던 그가.
나 때문에 대학을 바꿔 들어온 그가.
나 때문에 연회장에서 소리를 쳤던 그가.
유리에겐 이제 간절한 존재가 된 것 같았다.
황제의 명령으로 이어진 약혼이라.
집 안의 해가될까 두려워 아직까지 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약혼이 이젠 너무 간절해져버렸다.
다른걸 다 떠나서 그가 없는 미래가 떠오르지가 않았다.
유리는 꼭 사과해야겠다고...
꼭 다시 만나서 대화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하다가 그만 지쳐 바닥에 누워 잠이 들었다.
4.
<사피아노 커런덤(Spiano Corundum) 기숙사-루한>
쾅
콰광.
"도련님...이제 그만하시는게..."
시종이 벌벌떨면서 말해도 그의 행동은 멈추지 않았다.
'아니 무슨 마석이 저렇게 터지는 거야..... 완전 폭탄제조기잖아.'
시종은 그저 멍하게 윗전의 행동을 바라볼 뿐이었다.
쾅.
콰광.
루한은 애꿎은 켈리아를 계속해서 터뜨렸다.
쾅.
켈리아가 다 떨어지자 그는 마지막 남은 상자를 열었다.
투두두둑.
상자에 가득 담겨있던 마석. 켈리아가 쏟아졌다.
콰광.
콰과광.
그는 급기야 양 손 모두 켈리아를 쥐고 터뜨리기 시작했다.
'.....마나가 제어가 안되네...'
그의 손아귀에 있던 마석은 그가 쥐기만 해도 마나가 넘쳐 터졌다.
"왜....왜..."
팅.
팅.
"....!"
얼어붙어 떨어지는 눈물을 보고 놀란 것은 비단 루한 뿐만이 아니었다.
"....!도...도련님!!"
시종은 놀라 거의 넘어질 뻔 하였다.
"이....이럴 수가.."
그의 뒤에는 얼음이 얼어있었다.
가구들은 서리가 끼여 하얗게 변해있었고,
루한의 눈물은 기어이 얼음이 되어 떨어질 때마다 부서지는 소리를 내었다.
"도련님! 이건 새로운...!"
지금껏 없던 특이속성.
'얼음'
루한의 손은 하얗게 언 눈송이가 이지러지게 박혀있었다.
지금껏 수속성변형 특이속성은 '전기'가 다였건만.
지금 도련님께서 만든 것은 '전기'뿐만 아니라 '얼음'.
즉, 새로운 속성의 탄생을 의미했었다.
"하....."
루한은 그런 자신을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것 좀 봐.....
얼마나 한심해.
별 것도 아닌 도발에 넘어가서 미친 내가 넌 불쌍하지도 않니?
루한은 서서히 일어나 기숙사의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도련님!!!"
"나 오기 전까지 다 치워놔."
루한은 명령을 지시한 뒤 그대로 발을 돌려 기숙사를 빠져나갔다.
5.
유리의 방.
한참을 잔 유리는 몸을 뒤척이며 일어났다.
언제 침대에 온거지?
유리가 눈을 비비며 게슴츠래 뜨자 눈 앞에는 파란색의 머리카락이 보였다.
사락.
유리의 손길에 흔들리는 파란 머릿결.
"오빠....?"
유리의 물음에도 대답이 없는 파란 눈동자.
그녀는 그런 루한을 빤히 쳐다보았다.
"어떻게 들어온거야...?"
잠겨 있었을 텐데...?
유리는 잠이 들어있는 루한의 얼굴을 만지며 말했다.
"내가 많이 미안했는데... 내가 사과할려고 그랬는데...."
유리는 속에서 눈물이 울컥하고 차올랐다.
날 보러 여기까지 온건가...
유리가 잡은 루한의 손은 차갑게 얼어있었다.
그리고 얼어있는 서리의 아래에는 새까맣게 그을린 그의 손이 있었다.
".....이게...뭐야?"
그녀의 질문에도 루한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유리의 머리카락을 만졌다.
"읏...."
차가운 느낌에 유리가 움츠리자 루한이 피식하고 웃었다.
"나 다쳐서 아파..."
"내가...구급약 가지고 올께...잠깐만..."
유리가 일어서서 나오려고 하자 루한이 그런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넌 그냥 여기 있으면 돼."
"아냐...오빠 손 보니깐 약을 좀 발라야 할 것 같아."
그런 그녀의 손목을 더 세게 당겨 자신의 품 안에 넣은 루한은 자신의 머리를 유리의 머리카락에 부볐다.
"괜찮아...."
"뭐가...괜찮아."
'괜찮아...다 괜찮아."
유리는 자신의 머리카락 사이로 흘러 스며드는 루한의 눈물을 느꼈다.
"오빠...울어?"
"....응."
루한의 떨리는 목소리를 들은 유리는 고개를 들어 루한을 쳐다보았다.
눈물젖은 눈동자.
유리는 괜히 마음이 찢어져 루한의 품에 파고들었다.
"울지마."
".....너가 울린거잖아."
"너가....나 아프게 만든거잖아."
루한의 질책에 유리도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울지마....울지말고 나 봐봐."
루한은 자신의 품에 파고든 유리를 떼어내 자신의 머리맡으로 끌어올렸다.
할짝.
루한이 유리의 눈가를 핥자 유리는 너무 놀라 땡그래진 눈으로 루한을 바라보았다.
"나... 헤어지기 싫은데... 나 헤어진다고 생각하니깐 너무 마음이 아프던데...."
"..."
"그래서 널 계속 생각하니깐 나. 새로운 변형술도 생겼다?"
루한의 젖은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너처럼 하얗고 예쁜건데...."
"...오빠."
유리는 루한의 손을 꼭 쥐며 부들거렸다.
"나 이제 '얼음'속성도 사용할 줄 알아."
"그런게...있을리가 없잖아...."
유리가 얼이 빠진 표정으로 루한의 손을 매만졌다.
차가운 손.
하얗게 떠있는 얼음 조각.
유리의 흔들리는 동공을 바라보던 루한은 고개를 숙여 유리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나....많이 미워?"
"...어?"
갑자기 물어보는 루한의 질문에 당황한 유리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고개를 들자 루한이 유리의 허리를 끌어안고는 입술을 겹쳤다.
부드럽게 자신의 품으로 파고드는 루한을 그녀는 조심스럽게 앉았다.
얇고 작은 손가락이 루한의 등허리에 닿자 그가 움찔거렸다.
붉은 입술이 닿은 곳으로 부터 얼었던 차가움이 녹는 것만 같아 루한은 유리의 품을 헤집었다.
그렇게 한참을 헤집던 그의 입술은 아래로 내려와 유리의 목덜미를 물었고 그에 유리가 작은 울음을 냈다.
"....아."
"나....밉냐고."
유리는 붉어진 얼굴을 가리려 밑으로 내린 채 고기를 좌우로 흔들었다.
"우리....약혼반지도 이제 애들한테 말할까....? 어짜피 다들 알잖아."
아침에 그만하자고 했던 말은 기억도 나지 않는 것 처럼.
루한은 유리를 깊게 끌어앉으며 그녀의 목에 걸려있던 목걸이를 빼내었다.
자신의 반지와 안과 밖에 있는 문양이 반대인 유리의 반지.
루한의 반지가 겉에 미르가의 물결무늬가 그려진 반지라면
유리의 반지는 겉에 자안가의 구름무늬가 그려진 반지였다.
그리고 그들의 반지 안에는 서로의 약혼자가문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어짜피 우리는 서로를 사랑해야 하는 운명이잖아.
"어디든 도망은 못가는 거 알지...?"
"앞으론 헤어지자고 하지도 마."
"알았어."
둘은 서로를 깊이 껴앉았다.
6.
다음날.
퉁퉁부은 눈을 보며 울상을 짓는 유리를 보며 루한을 피식 웃음을 지었다.
"눈이 왜그래..?"
".....오빠 땜에 그렇잖아."
픽 토리잔 그녀를 보며 귀엽다는 듯이 그녀를 앉고 부비거리던 루한은 유리의 정수리에 입을 맞췄다.
"내가 가라앉혀줄게."
그의 입술은 살짝 내려가 유리의 눈에 닿였다.
"....으.."
루한의 입술이 닿은 곳에는 차가운 한기가 느껴졌다.
한참을 입술을 붙이고 그녀의 눈가를 지분거리던 그는 겨우 입술을 뗐다.
"어디보자."
유리는 새빨게진 얼굴을 들지 못하고 루한의 품에 안겼다.
"다 낳은 것 같아...."
"봐야 알지."
루한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
유리는 괜히 간지러워 꺄르르 웃었다.
"몰라....이제 괜찮을 것 같아."
루한의 커다란 손이 유리의 턱선을 따라 부드럽게 유리의 얼굴의 쥐었다.
루한의 손에 잡힌 유리의 얼굴은 천천히 들어졌다.
촉.
"예쁘게 잘 가라앉았네."
".....으."
유리는 자꾸만 자신에게 뽀뽀를 하는 루한을 보기 부끄러워 신음을 흘렸다.
"예쁘다."
"....오빠 특이속성.....왜 벌써 그 정도로...."
왜 벌써 입술로도 쓸 수 있을 만큼 는거야?
부끄럽잖아.
그런 그녀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루한으 가만가만 그녀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이제 빨리 가봐야하니깐 나갈까?"
"응. 지금부터 준비해도 꽤 늦을 것 같아."
벌써 해는 하늘의 중간에 걸려있었다.
"그게 더 좋아."
"빨리 꾸미고 나가자. 가면 딱 사람 많을 시간이겠네."
둘은 서로의 손을 잡은 채로 기숙사에 나왔다.
.
.
.
"뭐야...? 둘이 왜 손을 잡고 들어와?"
"둘이 약혼 파혼하기로 한 거 아니었어?"
"그런데 왜 손을 잡고 들어오냐고..."
웅성거리는 사람들 틈새로 둘은 손을 잡고 연회장에 앉았다.
둘의 손에는 서로의 반지가 걸려있었다.
두 개의 반지는 얼핏 보기엔 똑같아보였다.
웅성거리는 목소리들 사이로 이안의 목소리가 마석에 의해 홀 안 가득 울려퍼졌다.
".....유리 자안과 루한 미르의 약혼을 이 자리에서 공개발표하고 하니..."
이안의 목소리에 기다렸다는 듯이 유리의 턱을 잡는 루한.
"둘의 약혼을 축하해주시기바랍니다."
이안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루한은 유리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부딪혔다.
그와 동시에 떨어지는 하얀 눈송이.
"이...건 뭐야?"
"눈이잖아...?"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것을 보곤 입술이 말려 올라간 루한은 꾿꾿히 입술을 부딪혔다.
우리 지금 떨어지는 눈송이갯수만큼 사랑하자.
내가 오늘 이 연회가 끝날 때까지 떨어트려줄게.
사랑해. 유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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