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1.
루한의 일곱번째 생일.
루한은 점심에 루한의 사촌인 라오와 큰아버지인 케스타와 큰어머니인 렌다와 함께 자신의 생일을 축하했었다.
"루한아. 생일 축하한다."
"여기 이거 선물이야."
가주 케스타 미르와 안주인 렌다 미르.
그리고 그들 사이의 자식인 라오.
루한은 조용히 고개를 떨구었다.
"감사합니다."
자그마한 목소리.
나와는 다른 사람들이야.
"그런데 오늘 입맛이 없어서요..."
"저런..."
큰어머니의 안쓰럽다는 듯한 탄식.
"....그래도 조금은 먹고 가는게 어떻겠니?"
"여보. 그냥 보내줘요. 루한아. 이거는 들고가렴. 너의 생일 선물이란다."
"생일선물!!!"
라오의 손에 꼭 쥐어진 보석함이 루한의 손에 넘어갔다.
"...감사합니다."
루한은 작은 보석함 하나만 들고서 식당을 빠져나왔다.
내가 있기엔 너무 따스한 곳이라서...
나랑은 안어울려.
루한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늘 있던 방으로 들어갔다.
2.
대공가의 한 방에 있는 조그마한 남자아이.
팔랑. 팔랑.
그 남자아이는 그저 조용히 책을 읽고 있었다.
"형!!! 나랑 놀자!!!"
"...."
한 살 어린 다른 밝은 사촌과는 달리 어두운 분위기의 아이는 평소에 말을 잘 하지 않았다.
하얀 피부는 밖에 나가지 않아 창백해질 지경이었고 바싹 마른 몸은 한 살 어린 사촌동생보다 어려보이게 만들었었다.
".....나가."
작은 목소리에는 칼날이 서있었다.
"....알았어!"
그런 반응에 별로 놀라지도 않았는지, 장난감을 들고 뛰어나가는 사촌동생.
그런 동생이 나간 자리를 한참을 바라보던 루한은 다시 얼굴을 책에 밖았다.
'오늘 이 책은 다 읽겠다.'
루한의 손길이 곳곳에 묻은 서재는 이제 그만의 아지트가 되었다.
하루에 절반 이상을 서재에서 보내는 루한의 엄지와 검지는 유독 닳아있었고
그런 그의 눈은 책의 앞에서만 형형하게 빛이 났다.
3.
현 미르가 가주의 동생인 카르텔 미르공작의 외아들.
그는 스스로를 외톨이라고 생각했다.
저주받은 외톨이.
.
.
.
뎅구르르...
오늘도 어김없이 술병이 나뒹구는 방.
"보고....싶어....."
혼자서 웅얼거리는 한 남자는 하루종일 술에 절어있었다.
"...아버지."
루한의 작은 목소리를 듣긴 한걸까?
"보고 싶다고..."
루한의 아버지 카르텔 미르는 공작이라는 지위가 어울리지 않을 만큼 술을 마셔댔다.
미르가에 '용의 전사'.
가주는 아니지만 공작이라는 작위를 하사받은 남자.
모든 것을 남부럽지 않게 가진 그는 너무나 큰 상처를 가지고 살아갔었다.
부인의 죽음.
10년간의 긴 연애끝에 결혼한 두 사람은 안타깝게도 부부의 생활을 길게 가지지 못했었다.
"스키아..."
엄마의 이름과 함께 떨어지는 눈물.
그는 자신의 부인이 아들을 낳다 죽은 뒤,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늘 술을 마셨었다.
특히나 루한의 생일인 날이면 그는 방에 박혀 집무도 나가지 않은 채로 술만 마셨었다.
아직까지도 어머니가 잊혀지지 않는걸까?
눈물을 흘리는 아버지를 보며 루한은 덩달아 눈물을 흘렸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정말...죄송합니다.
제가 어머니를 죽이고 태어나서.
제가 그런 아이라서 죄송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하늘을 바라보는 자신의 아버지 뒤로 루한은 자그만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제 겨우 일곱살.
한 살 어린 사촌동생과는 달리 어둠의 자식같은 자신이 너무 싫었던 루한은 방을 뛰쳐나갔다.
쾅.
"나...때문에..."
나 때문에 엄마가 죽어서.
그래서 아빠가 나를 싫어하니깐.
한참을 울던 루한은 비틀거리며 홀로 식당으로 걸어들어갔다.
4.
저녁시간.
루한은 혼자 자리에 앉아 하인들이 준비해준 스프를 꾸역꾸역 넘겼다.
"도련님. 이거는 꼭 드셔야합니다."
걱정어린 목소리로 루한에게 음식을 건내는 시녀장은 불안하다는 듯이 루한의 손을 꼭 잡았다.
".....먹고 있잖아."
나이에 맞지 않는 어두운 분위기를 뿜어내는 공자는 대공가의 모든 시종과 시녀들에게 힘든 존재였다.
"도련님. 고기도 좀 드셔요."
"먹기 싫어."
"하지만 계속 그렇게 드시면 몸 상하십니다."
"상관없잖아.."
나즈막한 남자아이의 목소리.
그런 남자아이를 바라보던 시녀와 시종들은 다들 안쓰러운 마음에 눈물을 훔쳤다.
그러던 중 갑자기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도...도련님!!!"
왜 부르냐는 듯이 고개를 든 루한은 자그마한 여자아이를 내려다 보았다.
설탕과 크림으로 얼룩진 하얀 원피스.
노란 머리카락에 묻은 캬라멜 소스.
"오빠!"
발랄한 목소리.
"....넌 또 왜 왔어."
오늘처럼 우울한 날엔 너도 보기 싫단 말이야.
파란 눈동자에 반짝이는 금발.
루한만큼이나 하얀 손에 들려 있는 자그마한 케이크.
"오빠 줄려고....나 오늘 검술 연습도 안했는데...!"
이제 겨우 따박따박 순서에 맞게 말을 시작한 유리는 말보다 검을 먼저 배운 아이였다.
"오빠...이거 마싯따."
루한의 무릎 언저리에 케이크를 들고 가만히 서서 올려다보는 여자아이.
루한은 그런 여동생을 보면서 괜한 따스함을 느꼈다.
엄마가 주고 간 선물인걸까.
내 인생에 있어 유일한 희망같은 존재같아.
루한은 자신을 위해 하얀 생크림케이크를 준비한 유리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같이...먹을래?"
"웅! 당연하지. 오빠랑 가치 먹으려구 오늘 하루종일 만드러따."
유리의 케이크를 루한이 살며시 들자 유리가 베시시 웃었다.
"뭐하러 그렇게 오랫동안 만들어.... 그냥 사오면 되지."
루한은 괜히 타박하면서도 그녀의 손에 있는 어그러진 생크림 케이크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위에 캬라멜 소스로 적혀있는 글씨.
'오빠. 생일 추카행.'
피식.
"이거 철자 틀렸어."
"일부로 그런거거든?!"
"너 얼굴에 생크림 묻었어."
"괜차나. 어짜피 먹을 때 또 묻을건데 뭐."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대답하는 여자아이.
그녀는 내 약혼녀였다.
5.
어느덧 자라 루한이 14살이 될 무렵, 유리는 루한의 방에 들어가 평소와 다름없이 뒹굴거렸다.
"흐아...오빠 방 침대는 진짜 너무 푹신해."
"......알겠으니깐 그만 내려와."
사춘기 소년으로 성장한 루한은 아직 어린 유리가 원망스러웠다.
....다 큰 여자애가 왜 함부로 남에 방에 들어와...
루한의 붉어진 귓불을 보지 못한채 유리는 계속해서 루한에게 말을 걸었다.
"오빠는 집에 돌맹이보다 보석이 더 많지?"
"...아니."
밖에 화원 나가면 다 모래고 돌맹인데 설마 그것보다 많을까?
"내가 볼 땐 일단 오빠방은 보석이 돌맹이 수준이 맞아."
그건....그렇지.
루한의 방은 누가봐도 미르가의 자제가 쓸 법한 방이었다.
가주서열권 2위인 루한의 방은 대공저의 방들 중에서도 화려하기엔 손이 꼽혔었기 때문이었다.
일렬로 줄을 지어 세워 둔 보석들은 모두 진귀한 보석들이었다.
"....오빠."
"왜?"
"어짜피 오빠는 보석 필요없지?"
얘가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거야.
"글쎄. 잘 모르겠는데."
"이 마석에서는 쿨워터향이 나는 것 같아. 너무 좋아."
"....이게 마음에 들어?"
루한의 질문.
"응. 나 이거 갖고 싶어."
유리의 웃음.
루한은 그런 유리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넌 내 맘을 알고 그렇게 웃는거야...유리야?
루한의 발그래진 심장이 콩닥거린다는 사실을 유리는 모르는 것 같았다.
조금 있다 유리가 검술연습을 해야한다며 나가자 루한은 고민에 잠겼다.
'저건.....'
라오가 준 생일선물.
루한은 닫혀있던 보석함을 달칵하고 열었다.
방금 전 유리가 만졌는지 보석에는 옅게 지문이 묻어 있었다.
아....
이게.. 갖고 싶다고?
'물의 원석'
물을 스스로 만들어 내는 마석으로 갯수가 한정되어있는 가장 귀한 마석 중 하나.
세뇨라 왕국의 왕족들에게만 대대로 내려오던 '물의 원석'은 얼떨결에 미르가의 손에 들어오게 되었고, 미르가의 가주 케스타 미르는 루한의 마법 속성 중 물속성이 유독 강하다는 사실을 참작해 그것을 생일선물로 준 것이었다.
열린 보석함 사이로 퍼져나오는 쿨워터향은 루한의 기분을 설레게 만들었다.
"...나도 갖고 싶은거 있는데."
내가 이 마석이 되면 나도 내가 갖고 싶은 걸 가질 수 있을까...
어린 나이.
이제 막 접어든 사춘기.
제대로 받지 못한 부모님의 사랑.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줘야 하는 것도 있다고 한 책의 구절.
루한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 것은 순간이었다.
너에게 나를 주면
나도 너를 가질 수 있을까.
6.
그렇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난 너에 대한 집착을 키워왔지.
루한은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샴페인을 한바퀴 돌리며 한 모금 집어 삼켰다.
"빨리 '켄'이 자라났으면 좋겠어."
울먹거리는 이안의 목소리.
그의 울먹이는 목소리에도 아무런 미동이 없던 루한은 그저 연회장을 계속 이리저리 쳐다보았다.
찾았다.
루한은 연회장의 구석에 앉아있는 유리를 발견하고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근데 쟨....누구지?
루한의 눈에 잡힌 한 남학생.
그 남학생을 쳐다보던 루한은 눈살을 찌푸렸다.
"쟨. 뭔데 유리 옆에 있는 거야...?"
"....음....내 말을 안듣고 있던 친구에게 말을 해주긴 정말 짜증나지만 구지 말해주자면 쟨 세뇨라 왕국의 파란후작가의 차남. 이그로겐 파란이야. 나와 같이 사피아노 커런덤(Spiano Corundum)을 다니고 있지."
".......근데 왜 내 약혼녀 옆에 있냐고."
"뭐 어때. 너랑 대화를 안하고 있어서 그렇지 니 옆에도 여자 많잖아?"
이안의 왜 그러느냔 듯한 질문에 루한은 기분이 더 타들어갔다.
"...마음에 안들어."
"깽판이라도 치게?"
이안의 장난섞인 목소리.
"어짜피 약혼한거 알리지도 못하잖아."
루한의 가슴에 이안의 장난이 아프게 박혔다.
"이제...상관없을 것 같던데."
"...왜?"
"넌 몰라도 돼."
"어련하시겠어요."
둘은 투닥거리며 서로의 잔을 부딪혔다.
.
.
.
계속 유리를 쳐다보던 루한은 유리가 잠시 밖으로 나가는 사이, 그녀의 옆에 있던 남학생의 곁으로 다가갔다.
저벅.
저벅.
루한의 발걸음 소리가 들리자 앉아있던 남학생은 슬며시 웃음을 지었다.
....지금 웃는건가?
"역시...오네?"
노란 눈동자의 남학생은 담담한 웃음을 지으며 자신을 지그시 깔아보는 루한을 쳐다보았다.
사피아노 커런덤(Spiano Corundum).
루한은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이그로겐을 빤히 쳐다보았다.
"근데 이렇게 대놓고 바로 오면 너무 쉽지 않나?"
이그로겐의 도발에 파란 은발을 가볍게 쓸어 넘긴 루한은 머리를 살짝 기울인 채 말을 건넸다.
"올 줄 알고 말을 건거면 내가 좀 당황스러운데...?"
"그냥 좀 알고싶은게 있어서 유리 영애에게 갔는데, 너가 이렇게 대놓고 찾아오면 유리영애가 거짓말을 한 게 되버리잖아."
....그게 무슨 소리지?
루한이 눈썹을 찌푸리며 이그로겐을 쳐다보자 그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스피나 제국이 사라왕국과 국혼을 치른 뒤, 사라왕국의 위상이 많이 높아져 세뇨라 왕국이 요즘 좀 제정적으로 힘든 점이 많거든..."
이그로겐은 자신이 들고온 커피를 한모금 마시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아버지를 따라 이것저것 조사를 하던 중에 알고 싶은게 생겼어서....영애에게 몇가지 질문을 했었는데."
"뭘 질문했는데?"
루한의 날카로운 눈초리를 부드럽게 흘리는 이그로겐은 한마리의 여우처럼 한마디 한마디 사람을 홀렸다.
"미르가와 자안가의 약혼이 사실인가....뭐 그런거?"
"뭐!!!"
소리를 지른 것은 다름 아닌 이안이었다.
"쟨 몰랐던거야. 아니면 내가 틀렸던거야?"
이그로겐의 부드러운 웃음과 질문.
"니가 알 바는 아닐텐데...?"
그런 이그로겐이 못마땅했던 루한은 얼굴을 찌푸린 채로 말을 이었다.
"내가 약혼을 하던 말던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상관 없지. 이젠."
이건 또 무슨 생뚱 맞은 소리야.
"유리영애가 그러더라고 약혼자가 없다고."
"....그래서?"
"내가 한 번....들이대볼까 하는데?"
이그로겐의 도발.
"다시 확인해봐야 할 것 같은데. 유리영애...약혼자가 있긴 할테니깐."
"설마 그녀가 거짓말이라도 했다는거야?"
이그로겐이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루한에게 질문했다.
"거짓말이던 뭐던 개한텐 약혼자가 있으니깐. 괜히 들이대지 말라고."
"그럼 니가 가서 물어봐. 유리 영애는 너에게 관심이 없는 것 같으니깐."
순간 루한의 눈에서 불꽃이 일었다.
"여기서 발끈하면 너 완전 새되는거야. 알지?"
"내가 새가 되던 말던 니 알 바는 아니지. "
"그나저나 예쁘더라 유리영애."
"특히 목선이."
루한의 발이 총알처럼 튀어나간 것은 순식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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