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1.
스피나제국의 황궁.
황궁의 한 방에선 한 남자가 달빛을 쬐며 앉아있었다.
방은 창문이 열려 있었고, 열린 창문을 향해 눈을 아래로 내리면 황궁의 아름다운 호수가 반짝이며 맑은 빛을 반사해내고 있었다.
풀어헤쳐진 하얀 셔츠 아래에 굴곡진 복근이 조각조각 담겨있는 그는 아무렇게나 흩어진 은색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그래서 지금 솔리오라 제국에 없다는 건가?"
"...예."
남자는 시종의 말을 들은 뒤 헛웃음을 터뜨렸다.
애써 잘 키워놨더니만.
"도망갔네."
나즈막한 음성이 시종의 귀를 울렸다.
달빛에 흩날리는 은색머리카락의 아래에 있는 다부진 눈썹과 입술.
짙은 쌍커풀과 숱많은 속눈썹에도 느끼하지 않고 깔끔한 인상을 주게 만드는 날카롭고 단단한 콧대.
그 밑으로 떨어진 묵직한 목울대.
그의 수발을 들던 시종은 그저 그런 그의 한탄에 숨을 죽일 뿐이었다.
"엄청 아껴놨었는데...."
정좌로 앉아있는 황자의 풀어진 셔츠 사이로 강렬한 향이 터져나왔다.
두텁게 올라온 근육들이 그의 분위기에 야생미를 더했다.
"이온 황자님. 지금이라도 황제폐하께...."
"됐어."
거절을 한 이온은 스며드는 웃음을 내었다.
"어짜피 아버님이 내 마음을 아시면 다신 스피나제국으로 오지도 못하게 할테니."
그의 눈빛은 고독하고 깊었다.
"내가....알아서 하지."
"알겠습니다."
어두운 밤하늘 같이 깊은 눈동자에 담긴 하나의 달.
그는 두터운 눈꺼풀을 사르륵.
덮었다.
2.
"그니깐 지금 제 2황자가 스피나 제국으로 돌아왔다는 건가?"
"네."
루한은 가볍게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그의 찰랑이는 청발의 아래에 매끄럽게 떨어지는 턱선.
"한 번 알현이라도 하러 가야하나..."
그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다는 듯이 눈썹을 살짝 올렸다.
"그럴 필요는...없으실 듯 합니다."
말을 머뭇거리는 시종을 보면서 루한은 피식하고 웃었다.
기어이...
"여기 오나보군."
"....네."
어느 정도 괜찮다 싶으면 꼭 누가 탐을 낸다.
우리의 사이가 좋아지기만 하면 뭔가 틀어지는 사고가 생긴다.
루한은 기분이 상해 자신의 붉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오시면 한 번 만나뵐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할까요?"
"....노력안해도 만나지 싶어."
루한이 일어나 의자에 걸쳐진 검은색의 기다란 가디건을 걸쳤다.
누가 봐도 화려하게 생긴 외모에 여심을 홀릴 것만 같은 체향.
"수업 끝나고 나면 브리핑시작할테니깐. 좀 있다 다시 와."
"알겠습니다."
루한은 시종에게 부탁을 한 뒤 천천히 기숙사를 나왔다.
3.
"유하야"
[마...마!]
어느덧 말을 할 줄 알게 된 유하.
유하는 이제 스스로 날개를 퍼덕이기도 하고 네 발로 걸어다닐 수도 있게 되었다.
하얀색의 날개는 작았지만 위압감이 있었다.
"유하야. 엄마 해야지"
[마..마.]
"진짜 귀엽다."
"그니깐."
유리와 이안은 함께 드래곤 중급론 수업을 듣고 나서 함께 점심을 먹으러 나온 상태였다.
"켄!"
[왜!]
아장아장 걸어다니는 유하보다 조금 더 큰 켄은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하늘에 붕 떠있었다.
"일로와."
[이안이 주는 밥은 맛이 없어.]
흥.
켄이 투덜거리며 이안의 옆에 다가갔다.
"요즘 밥이 맛없다고 자꾸 다른 데가서 놀다가 오는데 진짜 왜이러는지 모르겠어."
그런 켄을 안아들은 이안은 파닥거리며 자신의 팔뚝을 무는 켄을 쓰다듬으며 유리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러게요. 혹시 헤겔교수님이랑 같은 밥 주는 거예요?"
"음....아니? 아직 켄은 어려서 아빠네 용이랑 같은 밥 못먹어."
[먹을 수 이써!]
"안 돼."
크왕.
켄은 불만이 있다는 표정을 역력히 드러내며 브레스를 뿜어댔다.
"스읍!"
[이안. 미워!]
징징대는 켄을 보며 한숨을 푹 쉬던 이안은 유리의 주변에서 가만가만 걷기 연습을 하는 유하를 바라보며 부러운 시선을 보냈다.
"우리 켄도 저만할 때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오빠. 제 기억에는 켄은 이만할 때도 저랬어요."
그런가?
둘은 자식을 키우는 부모처럼 수다를 떨고 있었다.
"유리야."
그런 부모들의 수다장에 끼어든 것은 다름 아닌 루한이었다.
"오빠! 왔어?"
루한은 오자마자 유리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응. 오늘도 고생 많았지?"
"오빠가 더 힘들지 뭐. 요즘 변형술은 많이 안어려워?"
"....응."
화룡인 켄과 금룡인 유하는 저들마다 뽈뽈거리며 주인의 곁을 맴돌고 있었다.
"켄도 많이 자랐네."
[응! 나는 나중에 카서 카이처럼 될꺼야!]
"글쎄....사고만 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이안은 헤겔교수의 용 '카이'를 유독 따르는 자신의 용 '켄'을 보면서 키득거렸다.
[될 수 이써!]
"그래. 그렇겠지"
그들은 투닥거리며 메뉴를 주문했다.
[난 고기!!!]
"그래 고기는 먹는데. 잘라서 먹어야해."
[이익....나 이제 통으로 먹을 수 있다니깐!!!]
크왕.
시도때도 없이 뿜어대는 켄의 브레스가 이젠 질린다는 듯이 이안은 투덜거렸다.
"어휴...저 성질머리는 누굴 닮은거야."
"자식이 부모닮는다는 말이 괜히 나온게 아냐."
유리가 이안을 바라보며 말하자 루한이 웃으며 말했다.
"유하는 착하고 차분한 용으로 자라날 것 같아."
"켄도 착하고 차분하거든?"
[이안. 바랄걸 바래]
이안과 켄은 서로 팀킬을 하며 한참을 투닥거렸다.
4.
"오늘 밥 맛있었어. 그지?"
"응"
루한은 살며시 유리의 손에 깍지를 꼈다.
이안이 유하까지 데리고 돌아가고 나서 유리와 루한은 간만에 둘이서 학교의 정원을 거닐었다.
둘의 약혼사실이 퍼진 뒤, 둘은 서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약혼발표 뒤, 얼마지나지 않아 태어난 유하 때문에 바쁜 유리와
새롭게 탄생한 특이 속성 '얼음'의 주인인 루한은 눈코뜰 새 없이 바빴었다.
"수업은 안 힘들어?"
"음... 좀 빡세긴 한데... 이제 이번학기 끝나가니깐. 괜찮아."
"다행이네. 기특하다."
루한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유리를 바라보자 유리가 살며시 웃었다.
"왜 또 그렇게 쳐다봐?"
"내가 어떻게 쳐다보는데?"
"뭔가.... 바라는 게 있는 것 같은 눈빛?"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루한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난 늘 너한테 바라는게 많지."
루한의 기다란 손가락이 유리의 볼을 톡하고 건드렸다.
루한의 손길에 유리는 키득거렸다.
"유리야."
갑자기 약간 가라앉은 루한의 목소리.
그의 진중한 목소리에 달달했던 분위기가 바뀌었다.
유리는 왜 갑자기 저렇게 낮은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는지 알 길이 없어 고개를 들었다.
"왜?"
"예전에 너가 좋아했던 사람있잖아..."
"...어?"
"그 사람....아직도 좋아해?"
"....어?"
괜히 떨리는 유리의 어깨에 루한은 아릿한 미소를 지었다.
"....나 왜이렇게 걱정이 될까..."
"그게 왜 걱정이야. 나 이제 오빠만 바라보잖아."
유리는 루한과 깍지를 낀 손을 들며 말했다.
유리와 루한의 손에는 약혼반지가 서로 걸려있었다.
"그런데 어짜피 그 사람은 사라왕국 사람이고, 그래서 만날 방법도 없잖아."
"사라왕국의 사람이라서 걱정이야...."
에? 이건 무슨 소리지?
"아니.... 이제 오빠만 볼꺼라니깐?"
내가 그 사람 만났던게 15살이었던가?
유리는 괜히 자신의 약혼남 앞에서 이런 말을 꺼내기가 싫어 대화 주제를 바꾸려고 했다.
"오빠. 그나저나 요즘 변형술 수업은 어려운 거 없어?"
"....어?...어."
루한의 약간 기가 죽은 목소리.
유리는 괜히 불안해져 루한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실제로 루한의 새로운 특이속성'얼음'은 루한이 처음으로 만들어낸 속성이었다.
밝혀진 바도, 알려진 바도 없는 속성의 마법이었기에 모두들 경악했던 그의 마법.
그는 스스로 약혼식 때 새로운 특이속성을 공식발표하다시피 연회장에 눈을 뿌려댔었기에 한동안 국가의 마법사들이 대거 솔리네 대학에 찾아와 그의 조각에 대한 여러가지 테스트을 해보고 갔었다.
요즘에도 수시로 루한의 기숙사에 들어와 그의 마법을 확인해보는 마법사들은 저마다 그의 변형술의 비법을 알기 위해 분주히 연구를 하고 있었었다.
자신에게 변형술을 가르쳐 주었던 아카사 헤겔교수마저도 그 연구에 참여하여 그는 지금 매우 분주한 나날을 보내는 중이었기에.
변형술을 포함해 자신이 맞고 있는 가문의 일까지 해결해 나가던 루한은 체력이 거의 바닥이었다.
루한은 지친 눈으로 유리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오빠... 오늘 왜 그래?"
"그냥..."
요즘 너때문에 많이 힘들어.
"나 좀 쳐다봐봐."
유리의 말에 마지못해 든 루한의 눈동자는 수심으로 가득차 있었다.
"뭐가 또 그렇게 불안한건데..."
"넌 아무것도 모르니깐.."
내가 뭘 모른다는 소리야?
"오빠.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확실하게 말해주면 안될까?"
"아냐. 내가 알아서 할께."
별 것 아니야.
그냥. 너가 예전에 좋아했던 사람이 황자고.
그 황자가 얼마전에 사라왕국에서 화연랑을 졸업하고 솔리오라제국에 널 만나러 왔다고.
아무리 미르가가 강력한 귀족이라도 황족에 왕족인 제 2황자 이온이 전투적으로 널 탐내오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그냥 그런 생각때문에 그래.
"오빠. 혹시 예전에 내가 좋아했던 그 사람. 만난거야?"
"....어? 아니."
"근데... 왜 또 뜬금없이 불안해 하는데?"
루한은 자신과 깍지를 낀 유리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근데....왠지 만날 것 같아서."
유리는 불안해 하는 루한을 바라보며 괜히 자신도 불안해지는 것 같았다.
중학교 시절, 잠깐 좋아했던 오빠.
이온.
하지만 안타깝게도 유리가 데뷔탕트 하는 날, 도망가듯이 떠나간 그녀의 첫사랑은 그 뒤로 만나본 적이 없었다.
"그 땐 정말 아무것도 몰랐잖아."
난 그 오빠가 준 사탕 하나에 홀렸는걸.
지금 오빠처럼 깊이 사랑했던 것도 아니고 그냥 어릴 때의 풋사랑이잖아.
"그리고 솔직히 내가 중학생 올라가고 나서 오빠가 자꾸 나 안보려고 했기도 하고...."
유리가 손가락을 꾸물거리며 말하자 루한은 그저 마음이 아파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내가 널 안보려고 한게 아니라...."
루한은 숨이 탁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지금 미르가의 주얼리샵을 관리하는 이유도, 마석상회를 관리하는 이유도.
다 그것 때문인데.
그게 시작이었는데.
하지만 말할 수 없었다.
"그 때 내가 워낙 집착이 심해졌어서...."
순간 루한이 유리를 품에 폭 집어넣었다.
"그래서 너를 차마 못보겠더라고."
루한은 눈동자를 들어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날카로운 눈.
루한은 유리의 눈을 자신의 가슴으로 가렸다.
그리곤 자신의 앞에 있는 사람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이온 사라 스피나.
스피나 제국의 제 2황자 이온은 저벅저벅 천천히 걸어들어왔다.
살랑거리는 은발.
185cm는 거뜬히 넘을 법한 키에 넓은 어깨.
옷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그의 다부진 근육.
자신의 사냥감을 발견했다는 듯한 날카로운 눈빛.
마지막으로... 그의 손에 들려있는 작은 딸기맛 막대사탕.
"여전히.... 참 아름답군."
"그러게요."
루한은 유리를 품에 안은 채 황자를 직시했다.
"그 아이는 아나? 내가 돌아온 것."
그럴리가요.
5.
루한은 자신의 중학교 시절을 떠올렸다.
처음으로 만난 제 2황자의 눈빛은 지금보다는 덜 짙었으나 그때도 충분히 위협적이었기에.
갑자기 떨어진 황자의 부름에 급하게 간 황궁의 알현실.
그 안에 있던 황자 이온은 지금만큼이나 날카롭고 단단한 사람이었다.
스피나제국의 제2황자이자 사라왕국을 물려받게 될 왕세자.
이온 사라 스피나:<아피마리.달저위.바남.운으라>
'유리영애가 너의 약혼녀라는게 사실인가?'
낮게 깔리는 목소리까지도.
'.....예..황자전하.'
'그 약혼녀. 나에게 넘기지.'
'.....'
그리고 그런 그와는 다르게 무력했던 자신.
'싫다면 어떡하실 겁니까?'
'뺏어야지.'
'황제폐하께서 맺으신 약혼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황자전하라도 쉽게 풀 수 있는 사안이 아니실텐데요.'
자신의 유일한 희망을 빼앗으려는 황자의 날카로운 눈빛은 야생의 야수와 같았다.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내가 사라왕국의 왕으로 즉위할 때 쯤이면....그대도 공작이 되어 있겠군.'
그의 낮게 울리는 음성.
그의 음성엔 서슬퍼런 경고가 담겨있었다.
'내가 왕이 되어있을 때면. 그 땐 자네도 황제가 시킨 약혼이라네 뭐네 거리며 황명에 뒤로 숨지는 않겠지.'
그의 말은 확고한 경계이자 위협이었다.
'그때까지...'
“잘 지켜보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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