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1.
어렴풋이 저물어가는 노을 사이로 한 남자가 저벅저벅 학교의 화단을 걸어들어오고 있었다.
"솔리네 대학이라...."
이온의 입술이 비틀리며 올라갔다.
언젠가 한 번은 싸울거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그가 들어간 곳은 그가 들어가서는 안되는 곳이었다.
푸른 잔디밭의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분수대가 물을 뿜으면서 반짝였다.
푸른 잔디밭에는 반투명한 고래인 신해어가 하늘을 헤엄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분수대에 호선을 그리며 쭉 길을 따라 걷다보면 나오는 웅장한 건물.
학생 외 출입금지구역인 화연랑 중 최고로 꼽히는 대학 솔리네 대학교.
그 삼엄한 경비를 뚫고 들어온 그의 손에는 작은 딸기사탕이 쥐어져있었다.
'이걸 뺏으면 내가 제자로 인정해주마.'
'허...참나. 내가 못 뺐을 줄 알고?'
한참을 뛰어봐야 세발의 피도 안되는 그녀의 움직임에 웃음을 흘렸던 자신.
자신이 함부로 한 번 꽉 안아보지도 못했던 그녀가 지금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겨있었다.
그것도 그녀의 약혼남에게.
날카로운 그의 눈빛에 섬광이 인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금발의 머리카락 뿐이었다.
'조금 더 길었네....'
"여전히....참 아름답군."
내가 못 본 4년동안 더 아름다워졌네.
더 가늘고 길어진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던 이온은 그녀의 약혼남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러게요."
한참을 쳐다보고 있던 머리카락에서 눈을 올려 탐나는 금발을 만지작거리는 손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그 아이는 아냐? 내가 돌아온 것."
한없이 차가운 약혼남의 눈에 이온은 설핏 웃음을 흘렸다.
저 녀석은 어릴 때도 이쁘장하게 생겼더니 이젠 뭐.
백년 묶은 구미호가 다 됐군.
예전보다 굵어진 선은 남자라고 말하고 있었으나 이온의 눈엔 그마저도 우스웠다.
구미호같은게 감히 내가 탐내는 토끼한테 꼬리를 흔들어.
자신이 노리는 여자가 본디 남의 것이었다는건 짜증이 나는 일이었다.
"잘 지켜보던지."
나도 너가 언제까지 버틸지 궁금하니깐.
이온은 자신의 손에 쥐어져있던 딸기사탕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계속 안고 있어. 내가 사라질 때까지."
그런 그의 말에 유리가 뒤척거렸다.
"오빠. 누구야?"
누구길래 대화를 하는데 얼굴도 안 보여줘....?
"...."
"난 좀 더 극적인 재회를 원했는데. 상황이 여의치가 못해서 말이야."
두툼한 손가락으로 자신의 입술을 쓸어내리는 이온은 끝내 고개를 돌렸다.
"다음을 기약할께."
2.
"유하야. 엄마 왔다."
[마..마?]
아장아장거리던 유하는 이온의 기숙사에 들어온 유리의 품으로 폭 들어갔다.
"엄마 보고싶었지."
[마...마!]
아직 마마밖에 할 줄 모르는 유하는 유리의 얼굴에 자신의 볼을 부볐다.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렇게 오랫동안 안온거야?"
이안의 질문.
그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입은 두 개나 있었으나 대답은 하나도 없었다.
"뭐야.... 나 또 뭐 잘못한거야?"
"...."
또 다시 오는 정적.
이안은 자신의 붉은 머리카락을 흔들며 한숨을 쉬었다.
"그래. 싸울거면 나가서 싸워. 지금 켄 자."
이안은 턱으로 잠을 자고 있는 켄을 가르키며 말했다.
"지금까지 돌봐줘서 고마워.오빠."
"별 걸 다."
이안은 대답을 하며 루한의 눈치를 살폈다.
차갑게 서리가 낀 루한의 눈은 누가봐도 화가 났으니 건드리지 말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그래. 너도 수고해라."
"응. 고마워."
유리는 인사를 마친 채 유하와 루한을 데리고 자신의 기숙사로 돌아갔다.
3.
저벅- 저벅-.
띠리릭.
문이 열리자 마자 루한은 유리를 데리고 기숙사의 안으로 끌고가 입을 맞추었다.
아무말도 하지 말아달라는 듯한 그의 입맞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리는 궁금했다.
오빠를 불안하게 만드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왜 나보고 뒤로 돌아보지 말라고 한 것인지.
"...하."
입술을 먼저 뗀 사람은 루한이었다.
"내가 불안하다고 말했지."
차갑게 얼어있는 그의 푸른 눈동자.
그의 눈동자는 얼어있었지만 그마저도 홀릴듯이 유리를 끌어당겼다.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건데?"
유리의 질문에도 루한은 그저 가만히 서 있었다.
"왜....흔들려?"
루한의 떨리는 목소리.
유리는 그런 루한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 사람이 니 옆에 오면 흔들릴 것 같냐고."
"오늘 온 사람이 설마 이온이라도 된다는거야?"
유리는 진심으로 답답하다는 듯이 루한을 쳐다보았다.
"몰랐었어?"
너가 그 사람을 좋아하는 것도.
그 사람이 많고 많은 남자 중 하필 황자라는 것도.
루한의 속은 여러갈래로 나뉘어져 아우성치고 있었다.
"그래. 방금 전에 그 사람이 이온이라고 치자. 오빠는 어떻게 그 사람이 여기에 온다는 사실을 알았던건데?"
유리가 답답하다는 듯이 질문을 던졌다.
"너가 좋아해서."
그의 대답은 그녀의 입을 닫게 만들었다.
"너가 좋아했던 사람이라서."
아... 나때문에 알게 된 거였구나.
유리는 괜히 심장이 따끔거렸다.
"오빠. 미안한데 좀 나가줘."
루한이 얼굴을 찌푸리자 유리가 웃었다.
"그냥....혼자 있고 싶어서 그래."
"우리 간만에 같이 있는거야. 그건 알아?"
"알아. 근데 오빠도 지금 내 얼굴 보기가 편히지는 않지 않아?"
"..."
유리의 말에 부정을 할 수 없는 루한은 그저 가만히 있었다.
솔직히 불편해.
그리고 너가 미워.
날 두고 다른 사람을 좋아했었던 너가.
그리고 하필 좋아했던 사람이 황자라는 사실도.
전부다 너를 밉게 만들어.
"...믿을게."
루한은 마지막 말을 남긴 채 유리의 기숙사에서 나갔다.
3.
첫 사랑.
지금 생각해보니깐 아련하네.
유리는 유하를 재우며 옛날의 생각을 돌이켰다.
그와의 첫 만남은 연무장에서였다.
회색 머리카락에 큰 덩치를 가지고 있었던 나의 스승은 연무장의 사람들 중 유별나게 허름한 옷을 입고 연습을 하는 사람이었다.
'여기에 들어올려면 그래도 엄청나게 비싼 대여료를 낼텐데 왜 그렇게 허름한 옷을 입고 있는거죠?'
'글쎄. 내 행색이 어떻든 어짜피 상관없지 않나?'
다들 귀하고 비싼 연무복을 입고 들어오는데 유독 허름한 행색의 그는 많은 사람들의 무시어린 눈길을 받았었다.
남들이 힐끔거려도 꿋꿋하게 그런 옷만 골라입고 오는 그를 보면서 유리는 저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라고 생각했었다.
'애초에 한 달 대여료가 10골드인 연무장에 그런 옷으로 들어오는 게 말이 안 되지 않니?'
'그러게요. 어찌되었건 전 아가씨가 그 분과 안 얽히셨으면 좋겠어요.'
'왜?'
'평소엔 남자한테 관심도 없으시던 분이 왜 갑자기 그런 분에 대해 궁금해하시는지도 모르겠고, 일단 아가씨는 약혼을 하신 분이시잖아요.'
'그렇긴 하지.. 그냥 신기한 분이신 것 같아서.'
열다섯살.
나의 첫사랑은 어쩌면 집안의 약혼에 대한 반항심이었을지도 몰랐다.
나의 의지가 들어가있지 않는 약혼에 매여 매일마다 루한의 집에 가는 내가 못마땅했었으니깐.
늘 책에 파묻혀 있는 루한보다 훨씬 대화도 잘 통했었다.
'검기를 어떻게 하면 잡을 수 있는거죠?'
'글쎄. 일단 확실한건 넌 팔 힘을 좀 길러야겠다.‘
‘...제가 약한 건 당연해요.’
남자에 비해 체격적으로 부족할 수 밖에 없던 나.
‘검을 잘 다루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네?’
‘넌 검에 소질이 있다는 소리다.’
내가 아무리 루한의 집에 하루에 3시간이고 4시간이고 눌러있었다고 해도,
내가 연무장에서 스승님과 함께 보냈던 시간은 그 이상이었기에 어쩌면 그에게 끌리는 것은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오빠.'
'왜'
그날도 안경을 끼고 책을 읽고있던 오빠였다.
'나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 것 같아.'
'....'
'오늘 그 분한테 사탕도 받았다?'
내 손에 꼭 쥐여진 딸기맛 사탕.
'너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길 수 있다는 건 알겠는데 그걸 나한테 구지 말해주는 이유가 뭐야?'
'오빠도 언젠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말하라고'
어쩌면 루한을 떠보는 행위였을지도 모른다.
기억도 잘 안나는 과거지만 그때도 루한은 날 좋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루한의 진심이 못내 궁금해 하기도 했었다.
날 좋아하는 걸까.
좋아하면 확실하게 표현해주면 좋겠는데.
그런 루한과는 달리 스승님의 의사표현은 꽤나 확실한 편이었다.
'이온은 귀족이 아닌거야?'
'스승님이라고 불러야지.'
'스승아 넌 귀족이 아니야?'
'...어'
강단있는 목소리.
그는 늘 나의 머리카락을 두꺼운 손가락으로 휘저었었다.
'왜... 귀족이 아니니깐 싫어?'
'음...그건 아닌데.'
'그럼 왜 묻는건데?'
'그냥. 난 이온이 좋아서.'
‘나도.’
‘...어?’
‘나도 너 좋아한다고.’
그 당시의 난 나와 같이 검을 다루는 사람이 있어서 좋았다.
루한보다 많은 걸 짊어질 수 있을 것 같은 어깨도 좋았고.
루한보다 많은 걸 공유할 수 있을 것 같은 그의 검술도 좋았다.
그리고 그에겐 조금 더 의지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의 날카로운 눈빛과 굵은 선. 그리고 그런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다정함까지도 날 포용해줄 수 있을 것만 같았으니까.
"가지말라고 해도 그렇게 가더니....왜 돌아온거야."
이온.
4.
"루한."
"...."
"루한?"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는 루한.
그런 그가 답답한 이안은 루한을 마구 흔들었다.
"왜."
"내가 몇 번 불렀는 줄 알아?"
동그란 은테 안경을 낀 루한은 조용히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아니 그니깐 그.... 황자가 유리를 보러 여기까지 왔다는 게 사실이야?"
"응."
한치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에 이안은 괜히 한숨을 쉬었다.
"너 그 사람 가기 전까지 엄청 힘들어했었잖아."
"하지만 유리는 그 사실을 모르잖아."
"그럼 가르쳐주면 될 거 아냐."
"됐어."
구차해보아잖아.
겨우 황자 하나때문에 벌벌 떨었던 내가 너무 안쓰러워 보이잖아.
"솔직히 그건 유리가 잘못했던거 아니야?"
루한은 그의 불만을 그저 듣기만 했다.
그녀가 잘못했다고 생각했던 시절은 이미 너무 오래전이라 기억조차 나질 않는다.
지금 남은건 그냥 유리라는 '약혼녀' 하나밖에 없으니깐.
"헛소리할꺼면 나가."
"지금 이게 헛소리로 들려? 너가 겨우16살 때부터 가문의 상단을 관리했던 이유가 그건데?!"
이안은 자신이 더 화가나 언성을 높였다.
그도 그럴 것이, 다른 16살의 학생같았으면 하지 않았을 일들을 루한은 너무 어린 나이에 겪었었기 때문이었다.
20개가 넘는 미르가의 보석상단.
그리고 그 20개가 넘는 상단을 관리하는 사람은 가주 케스타 미르와 그의 동생 카르텔 미르 뿐이었었다.
그많은 상단을 운영하면서 공작으로서의 집무까지 해내기에는 일이 너무 많았었기에 그들은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한 상황이었었다.
'제가....도와드리겠습니다.'
'겨우 16살이 하면 뭘 한단 소리냐.'
'그래. 동생인 라오도 아직까지 멋모르고 놀기만 하는데 겨우 2살많은 너한테 그렇게 큰 짐을 쥐어줄 순 없단다.'
가주와 아버지는 그를 말렸었지만 그는 꾿꾿히 하겠다고 했었다.
'저도 지키고 싶은게 있습니다.'
그런 그의 한마디에 그의 요청을 수락한 것은 다름아닌 카르텔 미르였다.
.
.
'그럼 내가 맏고 있는 상단 중 하나를 내줄테니 네가 관리해보거라.'
그렇게 해서 그가 관리하게 된 상단은 5년 새에 미르가에서도 손꼽히는 마석상단이 되었다.
체계적인 시스템과 깔끔한 공정.
똑똑한 그의 머리에서 나온 설계와 결벽증스러울 정도 깔끔함을 추구하는 그의 성격은 '마석상단'을 관리하기에 굉장히 적합한 인물이었다.
'성과가 아주 좋더구나.'
'칭찬 감사합니다.'
'당분간 내가 지방에 내려가야 해서 그러니 마석 상회를 좀 관리해줄 수 있겠느냐?'
아버지의 부탁.
아버지의 첫 부탁을 받은지도 벌써 1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카르텔 미르는 자신이 맏긴 상회일을 지방에서 돌아오고 나서도 회수하지 않았었다.
'네가 잘 알아서 하겠지.'
그것은 무언의 인정과도 같았다.
스스로 알아서 해결해보라는 의미.
"덕분에 나도 많이 발전했고 성장했잖아. 그리고 이제 유리와의 약혼도 모두가 아니깐 상관없어."
"야. 난 너가 진심으로 걱정되서 그러잖아."
"뭐가 그렇게 걱정이 되는데?"
"지금 변형술도 그렇고 가문의 상단관리문제도 그렇고 너가 짊어지고 있는게 너무 많다고 생각하지 않아? 난 네가 좀 학생다웠으면 좋겠다고."
"내 걱정말고 니 걱정이나 해."
루한은 자신의 눈두덩이를 지그시 눌렀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게."
어짜피 내가 감당해야할 몫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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