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1.
내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바로 '이온'. 나의 첫사랑이었다.
첫사랑이라고 하기엔 조금 애매한 부분이 있긴 하지만...
"잘 지냈나?"
여전히 낮게 깔린 음성.
이온:<아마리.달님.바남.운으라>
난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저번에 루한이랑 싸운 이유도 다 저사람 때문이라는걸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네."
여전히 흔들린다.
"스승님은요?"
"스피나 제국의 황자이시자 사라 왕국의 왕세자를 뵙습니다."
나의 질문을 덮은 목소리의 주인은 내 친구들이었다.
"제 2황자 이온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내 친구들과 부띠끄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머리를 기울이며 예를 갖췄다.
"...."
하....이 상황은 또 뭐야?
유리를 답답하다는 듯이 친구들과 이온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어이가....없네요?"
짜증난다는 듯한 목소리.
이온은 그런 유리의 목소리를 삼키며 낮게 웃었다.
"그런가."
"제가 여가서 지금 예의를 차려야 합니까?"
유리의 건방진 태도는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 정도였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지."
"전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온은 그녀를 계속 봐준다.
그런 이온이 답답하다는 듯이 카즈마가 타박스런 음성을 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너에게는 '스승'하나면 족하다."
"..."
"애초에 가르쳐 준 것도 그것 뿐이었으니깐."
"<바>"
유리가 자신의 검을 꺼내든 것은 순식간이었다.
쾅.
"스승님과의 대련을 기다렸습니다."
"나도 꽤 기다려지긴 하더군."
유리의 칼을 쉽게 받아친 이온은 유리의 검과 합을 이루었다.
쾅.
쾅.
쾅.
칼이 부딪히는 건지 바위들이 부딪히는 건지 구분이 되지 않는 소리와 울림.
여러 번의 합이 팽팽하게 이어진 뒤, 유리는 외워둔 전술을 시전했다.
먼저 아래에서 대각선으로 가로베기를 한 뒤, 칼을 비틀어 어깨에 칼을 꽂는 방식.
그런 유리의 칼을 막아선 이온의 켄슬리움은 제법 단단하였다.
전술이 막힌 유리가 바로 뒤로 돌아 칼을 흘리며 몸을 틀자, 이온은 의외라는 표정으로 뒤로 물러나 칼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쇄액.
그녀는 칼을 깊게 찌르듯이 그의 옆구리를 관통하려 했으나 이온은 그것을 쉽게 저지해냈다.
휘익.
그녀는 그런 이온의 여유로움을 비웃으며 반바퀴를 돌아 이온의 반대쪽 옆구리를 정확히 강타했다.
"...많이 늘었군."
그녀의 검은 마나로 이루어졌기에 형태를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었고, 그녀는 그것을 이용해 칼을 무디게 바꾸었다.
무딘 칼에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유리가 준 타격은 꽤 얼얼했다.
그런 유리의 모습을 처음 본 친구들은 다들 놀란 채로 굳어 서있었다.
"검술을 배우러 사라왕국에 간 줄 알았는데요."
"그러긴 하지."
얇게 줄어든 이온의 눈가.
"그런데 실력이 형편없으신 것 같습니다."
"그런가."
이온은 피식하고 실소를 터뜨렸다.
카즈마경은 그런 유리가 짜증났지만 그녀의 실력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칼을 변형할 줄 아는 마검사라니....'
"혹시 봐주신 겁니까?"
"...그럴리가."
조용히 듣고 있떤 카즈마경은 그녀의 겸손에 치를 떨었다.
스릉.
"성과 이름을 대라."
순간적으로 뽑힌 카즈마의 손에 걸려 있는 롱소드가 유리의 목 아래에서 진동했다.
"...유리 자안."
"....!"
"스피나 제국의 자안가문이다."
2.
"켄. 가만히 있어."
크왕.
제법 커진 켄은 이제 축소마법이 걸린 마석을 목에 건 채로 파닥거리고 있었다.
[이안은 잔소리가 너무 심해.]
변성기가 온 건지 목소리가 살짝 낮아진 켄의 목소리에 루한은 피식 웃었다.
"1살짜리가 21살보다 낫군."
"....진짜 둘 다 죽는다."
이안은 붉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털어내며 짜증을 냈다.
"그나저나 뭐 살려고 나온거야?"
"옷."
"에....?"
너 남아도는게 옷....
"내일 데이트하잖아."
아...
이안은 이제야 이해를 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뭐. 유리 앞에선 같은 옷은 입어주기 싫다?"
"그냥 입 다물고 갈 길이나 가자."
이안은 그런 루한을 보며 웃었다.
"왠만한 왕자보단 미르가가 낫지."
"유리도 새 옷 사기로 했다."
"그럼 같이 사지. 왜 따로 가는 건데?"
"유리가 친구랑 옷 보고싶다고 해서."
그런 루한을 바라보던 이안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서 너도 친구랑 옷보러가는거냐?"
멈칫하고 흔들리는 루한의 실루엣.
그런 루한을 비웃듯이 이안은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넌 왜 맨날 쳐웃기나 하고 사람을 짜증나게 하는거냐?"
"내가 언제 맨날 쳐웃기만 했는데."
"잘 생각해봐. 너 계속 쪼개기만 하니깐."
"야. 저거나 먹자."
그런 루한의 타박이 익숙해지기라도 한 듯, 이안은 손가락을 꼬지를 파는 곳을 가르켰다.
"맛은....있는거냐?"
"당연하지."
형형색색의 빛깔로 먹어달라는 듯이 윤기를 반짝이는 꼬지들.
"넌 항상 참 당황스러운 것들을 제안하는 것 같다."
꽤 먹음직스럽게 빛나는 음식들을 가르키던 이안의 입에는 벌써 군침이 돌고있었다.
"하긴....너가 이해하긴 좀 어렵긴 하지."
침을 흘리며 반짝이는 눈빛을 발사하는 이온을 보던 루한은 어이가 없었다.
..그냥 니가 이상한게 맞다니깐...?
루한은 결국 졌다는 듯이 얼굴을 찌푸렸다가 웃었다.
"가자."
꼬지 먹으러.
3.
딸랑.
이안과 루한이 꼬지를 든 채 들어온 부띠끄에서는 꽤나 격력한 대련이 벌어지고 있었다.
챙.
챙.
챙.
그 안에서 흔들리는 금빛 머릿결.
번쩍이는 머리카락은 이안과 루한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그것이었다.
"....야."
"...."
"....야."
이안의 계속되는 부름.
"저거....저거...말려야하는 거 아냐?!”
"...."
그런 이안을 깡그리 무시한 채 루한을 조용히 유리를 바라볼 뿐이었다.
"많이 늘었네."
검술 시간말고도 매일 연습하더니...
"너 지금 장난하냐? 대련하는 사람 황자인거 안 보여!?"
"그래서 더 많이 는 것처럼 보이는데."
화와 짜증을 동시에 내는 이안을 보며 루한은 담담히 말했다.
어쩌면 더 당황스러운 쪽은 루한이었다.
약혼녀가 환자에게 칼을 휘두르고 있었으니깐.
하지만 루한은 이 순간을 즐기는 듯 했다.
"정황상 유리가 이제 이온이 황자라는 사실을 모르지도 않을 것 같고...."
빠르게 굴러가는 푸른색의 눈동자.
"...."
"이제야 좀 이야기가 풀리는 기분인데...?"
이안은 미쳤다는 듯이 대련을 지켜보았다.
제 2황자라면 자안가라도 검술에서 밀릴 수도 있으니깐.
"제 2황자는 현 황가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검사야."
"유리는 현 자안가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검사다."
"지금...장난하냐?"
"....이긴 것 같은데?"
루한은 뒤를 돌아 이온의 옆구리를 가격하는 유리의 동작을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죽었으면 더 좋았을걸..."
"....이 미친놈."
이안의 손에 들려있던 꼬지가 방정맞게 흔들렸다.
그러거나말거나 루한은 흥미롭다는 듯이 유리와 이온의 대화를 들었다.
4.
"스승님이 오셔서 제가 약혼자와 얼마나 다툰줄 아십니까?"
내가 온 걸 알기라도 하는지 내가 하고 싶은 말만 골라서 해주는 약혼녀.
"내가 그걸 왜 알아야 하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약혼자가 그렇게 화를 내는 상황이 됐었던 겁니까?"
"나야 말로 묻고 싶군."
유리의 말을 가볍게 짓누르는 이온의 되받아침에 루한은 짜증난다는 듯이 조소를 내비쳤다.
"그대는 지금 뒤에 약혼자가 온 사실을 알고는 있나?"
순간 흐트러지는 금빛 머리카락.
금빛 머리카락의 주인의 눈동자는 금새 나의 눈동자를 찾아냈다.
"....루한?"
"오늘은 만나지 말자고 했는데....이렇게 만나네?"
오늘도 여전히 예쁘다.
유리의 틀어올려진 머리카락이 잔잔하게 흔들리며 아름다운 목선을 드러냈고, 입고있는 드레스는 방금 전에 검술대련을 했다기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단정했다.
루한은 손을 들어 가볍게 흔들며 유리에게 인사했다.
흔들리는 손의 반대편에는 달콤한 빨간 양념이 발린 꼬지가 들려있었다.
"지금 이 상황 둘이서 짜고 친 거....아니지?"
"그럴리가."
이온과 루한의 목소리는 거의 동시다발적이었다.
"그럼 설명해봐. 왜 이런 상황이 벌어졌는지."
"난 그냥 내일있을 데이트를 위해 옷을 고르기 위해 왔을 뿐인걸?"
루한의 여유로운 표정에 이안은 조용히 옆에서 귓속말을 했다.
"니가 말하면 그냥 일어난 우연이라도 왠지 흑막이 있을 것 같은건 아냐?"
"시끄러."
"나도 마찬가지다. 내일 있을 연회복을 고르기 위해 온 거지."
"...솔리네에서 가장 큰 부띠끄니깐...그럴...수도 있는 거겠...죠?"
세아의 의심이 다분한 목소리.
"여기가 스피나 제국인지 솔리오라 제국인지 분간이 안 되네요."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하는 세뇨라 왕국의 공자. 레번 세뇨라는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귀족들의 반응에 부띠그에서 일하던 사람들의 머리는 깊게 조아려질 뿐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부띠끄에 있는 인원은 열 명이 채 되지 않았지만,그 사람들은 하나하나 가볍게 볼 수가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었다.
스피나 제국의 황자이자 사라왕국의 왕세자인 이온 사라 스피나.
스피나 제국의 대공가이자 비아룬 대륙의 금맥이나 다름없는 미르가의 루한 미르.
솔리오라 제국의 '용의 주인'가문인 '헤겔'가문의 이안 헤겔.
사라왕국의 정치권을 쥐고있는 로제타 가문의 공녀 세아 로제타.
세뇨라왕국의 왕족 방계이자 해상무역권읠 쥐고있는 세뇨라가문의 공자 레번 세뇨라.
솔리오라 제국의 상권을 쥐고 있는 '세르 상단'의 외동 아들인 세한.
마지막으로 스피나 제국의 군사력을 담당하는 검의 가문 자안가의 유리 자안까지.
지금 상황은 후대에 비아룬 제국을 이끌어나갈 사람들이 거의 다 모여있음이나 마찬가지였다.
5.
"난 좀 더 극적인 재회를 원하는데 넌 번번히 방해를 하는 군."
기분이 나쁘다는 티를 역력히 내는 동굴같은 목소리는 루한을 겨냥한 채로 낮게 울렸다.
"전 좀 더 비극적인 재회를 원하는데 조금 아쉽네요."
"무엄하다!!!"
이어지는 카즈마경의 목소리는 무참하게 묻혀버렸다.
"너 그렇게 까불다가 진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도 있어."
이안의 나즈막한 목소리.
"니 앞에 있는 상전이 널 버리고 사라 왕국으로 떠나면 넌 스피나 제국에 남아서 미르가의 발이나 닦아야 될테니깐."
속을 긁는듯한 이안의 말은 카즈마의 속을 뒤짚었다.
"헤겔후작가는 목이 두 개라도 달린건가? 왜 감히 황자인 나에게 인사를 안한 것도 모자라 나의 호위를 능멸하는지 모르겠군."
괜히 '나'라는 말을 강조해서 말하는 이온황자의 말에 이안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그 상황을 깨고 나온 목소리는 루한의 것이었다.
"뭐 죄송할 것 까지야...."
"....!"
"사실인데."
일촉즉발의 상황이 벌어지자 유리는 상황을 중재하려 했다.
"루한...! 가만히 있어."
유리의 다급한 목소리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루한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제가 열 다섯살이었죠....아마?"
루한의 낮게 깔린 목소리.
열 다섯살의 루한과 스물 한살의 루한은 많이 달랐다.
차가운 목소리와 미르가의 공자답운 거만한 말투는 실내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황자전하께서 저한테 먼저 제안하셨습니다."
"...그렇지."
"황자전하께서 사라왕국의 왕이 되는 것이 먼저일지, 제가 미르가의 공작이 되는 것이 먼저일지는 아직도 미지수군요."
"...."
"하지만 확실한 건.. 이젠 황자전하께서 왕이 되더라도 두렵지 않습니다."
루한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부띠그의 안을 살얼음장으로 만들었으나 그의 독설은 그치지 않았다.
"제가 공작이 되어 스피나 제국을 전두지휘할 것이라는 것도, 후에 약혼녀와 결혼하게 될 거라는 것도 이미 결정이났기 때문입니다."
"....건방지군."
"저를 건방지게 만든 것은 황자전하 아니십니까."
"황가와 왕가를 능멸하는 것이냐."
이온은 낮게 으르렁 거렸다.
이온은 늑대들의 우두머리라면 루한은 백년묵은 구미호있다.
"먼저 저와 제 가문을 능멸했던 것은 황자전하십니다."
"...아직 그대가 공작이 되지도, 약혼녀와 결혼을 하게 될지도 결정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루한은 마디마디를 끊어서 그 때를 재현했다.
"그때까지 잘지켜보시지요."
처음으로 약혼녀의 존재를 위협받던 그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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