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1.
<세한의 별장>
"유하야"
[엄마!]
포옥.
유하는 이제 온 유리를 만나기 위해 쏜살같이 날아갔다.
[엄마. 어딨었어. 유하. 보고싶었어.]
부비부비.
유리는 제법 커 말도 할 줄 알게 된 유하를 쓰다듬으면 엄마미소를 지었다.
은색의 날개도 꽤 커다래져 축소 마법을 건 켄보다 커진 유하를 유리는 힘겹게 안아들었다.
"엄마가 유하 선물도 사왔지."
유리는 반대쪽 손으로 부스럭거리는 상자를 열어 초커를 꺼냈다.
[엄마. 이게 뭐야?]
유리가 유하를 위해 준비한 초커는 중간에 꽃처럼 조각된 은색 마정석이 반짝거렸다.
"이건 켄 오빠처럼 유하 크기도 줄여주고, 유하가 어디있는지도 알려주고, 유하가 엄마 옆에 올 수 있도록 텔레포트도 할 수 있는 거지."
유리는 똑같은 꽃이 조각된 팔찌를 보여주며 말했다.
"유하가 엄마가 엄청 보고싶으면 이제 엄마 옆으로 텔레포트도 할 수 있어."
[우와]
유하는 꺄르륵 거리며 날아내려가 바닥을 뒹굴었다.
'이거 사느라 잔고가 텅텅 비었지만...'
유리는 쓴 웃음을 지었다.
방금 전 유리는 루한과 함께 내일을 위해 데이트룩을 준비한 뒤, 이왕 쓴 거 유하선물도 사야겠다는 마음으로 바로 옆에 있던 마정석 상점에 들어갔다 온 참이었다.
그곳에서 엄청나게 추천받은 이 것.
드래곤과의 친밀도도 올려준다고 해서 일부러 금룡이 쓰기 좋은 금의 정령석으로 제작된 것을 고른 유리는 내심 뿌듯했다.
"내가 봐도 꽤 괜찮아 보이더라."
루한은 덤덤히 유리가 산 물건에 대해 칭찬했다.
"어짜피 오빠네 숍이었잖아."
미르가의 마정석 상점. '미르루스'는 애초에 루한이 관리하고 있는 상단의 일부였다.
"그니깐 좋다고."
덕분에 반값에 산 유리는 뿌듯한 마음으로 유하의 목에 초커를 걸어주었다.
"와....이렇게 비싼 걸 유하 목에 걸어준다고?"
옆에 온 이안은 부럽다는 듯한 눈빛으로 유하와 유리를 쳐다보았다.
"그래도 꽤 오래 쓸꺼니깐요."
유리가 산 물건은 6000골드 짜리의 바이탈쥬얼로 주인을 인식하는 물건이었다.
"그래도 오빠 덕분에 3000골드에 구입했어요."
하루만에 만골드를 날린 유리는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대박이네."
그런 유리가 부럽다는 듯이 이안은 유리의 팔찌를 바라보았다.
2.
"유리야. 간단한 디저트라도 좀 먹을래?"
집 주인인 세한은 유리를 향해 가벼운 디저트를 권했다.
"응? 아니야. 오늘 오는 길에 뭐 많이 먹었어. 그나저나 오늘 나 때문에 많이 힘들었지?"
유리의 미안하다는 말투에 세한과 세아는 같이 웃음을 지었다.
"솔직히 궁금하기 하더라. 어쩌다가 너의 나라의 황자와 칼부림을 낸거야?"
"그니깐. 남의 나라에서 스피나제국이 요즘 얼마나 사고를 치고다니는 줄 알기는 해?"
"심지어 그런 사고에서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어 넌."
친구들은 장난을 치며 분위기를 풀어갔다.
"그러게.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네."
"그니깐 처음부터 스필리온 대학으로 갔으면 됐잖아."
루한의 불만어린 타박.
유리는 그런 루한의 불만도 얌전히 들었다.
하긴...내가 좀 잘못하긴 했어.
유리도 그 사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남의 나라에 와서 내 나라마냥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으니...
유리는 그런 자신이 못내 부끄러우면서도 이 학교에 들어온 게 후회되지 않았다.
"그래도 덕분에 너희들이랑 친해졌잖아."
"맞아. 덕분에 좀 더 다양한 시야를 갖게 된 것같아."
"그래서 내가 많이 위로받은 것 같아."
유리의 떨떠름한 고백에 별장의 분위기는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솔직히....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 힘들었거든."
"..."
유리와 함께 있던 별장의 사람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 그녀의 말을 들었다.
"엄마가 마지막으로 준 선물이 유하였었고 그래서 유하를 조금 더 잘 키우고 싶었어. 다른 사람한텐 어떨 지 몰라도 나한테는 유하가 엄마가 마지막으로 남겨준 동생이고 선물이고 아이였거든. 그래서 솔리네 대학에 들어오게 된거야."
"우리도 어느정도 추측은 했었지만....."
세아는 말을 흐렸다.
생각보다 유리의 상처가 깊어보였기 때문이다.
한결같이 밝아보였던 유리의 상처를 보게 된 친구들의 마음은 착잡해져갔다.
"적어도 솔리네 대학에선 정말 제대로 된 '용의 전사', 용의 주인을 기르는 학교였으니깐."
스피나 제국의 특산품이 미르가의 세공쥬얼이라면 솔리오라 제국의 특산품이랄 것은 아무래도 '용의 전사'였다.
제 6신 사랑의 신을 숭배하고 그로 인해 많은 '용의 전사'를 배출해 낸 솔리오라제국은 유리에게 있어 유하라는 동생을 키우기에 너무나 적합한 곳이었었다.
"우리들 모두 뛰어난 용의 전사, 용의 주인이 되기 위해 이곳에 왔지만 너만큼 간절한 사람은 없을꺼야."
"....맞아."
친구들은 하나 둘씩 입을 모아 유리를 위로했다.
"그래. 우리덕분에 네가 많이 위로받았다면 그걸로 됐어."
"맞아."
친구들은 하나 둘 씩 유리를 안아주었다.
"이제 들어가서 자자. 내일 용의 축제에 가야하니깐."
초대장을 받지 못한 세한을 제외하고는 모두 아침 일찍부터 스케쥴이 잡혀있는 상태였다.
"세한. 너도 갈꺼지?"
유리의 물음.
세한은 그런 유리의 질문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근데 내 이름으로 가진 않을꺼야."
"흠....그렇구나. 물어보면 안되는 부분이야?"
유리가 솔직하게 질문을 하자 세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내가 말해줄 수 있는 부분은 여기까지야."
"알았어. 이만큼이라도 말해줘서 고마워."
"유리야. 이제 자러 가자."
세한과 대화를 나누던 유리를 잡아끈 것은 루한이었다.
"난 유리 옆 방에서 잘께."
"네. 선배님."
".....그냥 이름으로 불러도 돼."
루한은 고개를 돌린 채 유리를 끌며 윗 층으로 올라갔다.
3.
"같이 갈래요?"
"네 약혼자로?"
이온의 표정이 알싸해졌다.
떨리는 여인의 목소리.
"아버지께서 내일 꼭 나오라고 하셨는데, 제가 그런 자리를 가 본 적이 없어서요."
"하지만 내일이 약혼일은 아니지 않은가."
이온은 내일 올 유리와 루한의 눈에 그녀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요."
가녀린 목소리의 주인은 기다란 검은색의 생머리를 가진 미인이었다.
뽀얀 피부와 눈 밑에 있는 자그마한 점.
오똑한 코와 붉은 입술.
그녀는 매우 이색적이고 아름답게 생긴 여인이었다.
"높은 고위귀족들이 모두 모인다고 들었어요. 용의 주인, 황족, 왕족, 유망한 귀족들. 그런 곳에 제가 간다는 게 너무 무서워요. 하지만 무섭다는 이유로 가지 않으면 아버님이 싫어하실 거세요. 가긴 가야하는데....다른 사람들 눈에 거슬리고 싶진 않아요."
"왜 그런 걱정을 하지?"
이온이 이해할 수 없단 얼굴을 했다.
"전.... 어머니의 말이 모두 거짓인 줄 알았거든요. 황자전하를... 만나기 전까지는요."
이온은 지금 그녀가 걱정하는 것들을 모두 없애 줄 수 있었다.
스피나제국의 황자이자 사라 왕국의 왕세자이니깐.
"내일은 제일 화려한 드레스와 장신구를 걸게 될꺼야. 그 누구보다 화려한 태황녀로."
여인의 기다란 눈썹이 아래로덮였다.
"전..그것보다 왕세자비자리가 더 탐나는 걸요."
이온은 더는 들을 것도 없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 보러 올께."
"머리부터 발끝까지 바꿔줄께. 나와 무척이나 잘 어울리도록."
이온이 먼저 움직이자 머지않아 그 여인이 따라서 걸어오는 게 느껴졌다.
제 뒤를 쫓는 발소리를 들으며 이온은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유리야.
너가 분명히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이해한다고 했었잖아.
이온은 지금의 상황이 두려웠다, 무서웠다.
다른 사람을 내 옆에 두고도 유리를 사랑한다는게.
"그거.....지금도 여전해?"
그의 눈빛이 까만 밤하늘처럼 어두워졌다.
4.
"어떠십니까?"
"몹시 지루하군."
종이를 읽으며 건조하게 말하는 이온을 향해 카즈마는 미소를 지었다.
지금은 황궁의 별궁에 앉아있지만 얼마 뒤엔 거대한 연회장에서 새롭게 존재를 알리게 될 황자였다.
그 생각만 하면 마음이 벅차올라 카즈마는 아침부터 시종일관 웃는 얼굴로 황자를 대했다.
"이렇게 약혼식을 일찍 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어쩌겠어. 황제가 하라면 해야지."
"스피나 제국의 황제폐하께서는 아십니까?"
"...."
아버지가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이온은 대답대신 손가락으로 눈가를 꾸욱 눌렀다.
"반지는?"
"약혼발표가 시작되면 바로 나오게 준비되어 있습니다."
"....."
"다들 어떤 표정을 할지 벌써부터 두근거리는 군요."
이온은 묵묵히 마지막 장을 읽어 내려갔다.
외울 기세로 씹어서 보고서를 읽던 이온은 혼자서 중얼거렸다.
"여러모로 문제가 많군."
"오늘 4시부터 준비를 시작할 예정입니다. 이 날을 위해 준비된 옷이 수십 벌이라, 고르는 데에도 시간이 꽤 걸릴 듯 합니다."
"아무거나 입으면 되는 거 가지고."
"아니요, 오늘은 뭐든 최고로 갖춰 입으셔야 합니다."
카즈마는 또 한 번 미소를 띄었다.
"드디어 솔리오라 제국에 발을 들이는 날이니깐요."
흥분한 카즈마와 달리 이온은 시큰둥했다.
조금씩 문장을 읽어 내려가던 눈동자가 종이를 반으로 접으며 떼어졌다.
"나가지. 이제 준비해야 시간이니."
욕실로 걸음을 옮기는 이온을 보고 카즈마도 몸을 돌렸다.
별궁의 밖으로 나간 카즈마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지금껏 보아온 이온의 정치능력은 그의 검술실력을 상회했었다.
그런 그가 솔리오라 제국과 연맹을 맺는 다는 것은 분명 그에게도 자신에게도 남는 장사임이 확실해보였다.
'이런 분을 모시게 되다니.....'
딱히 연줄도 좋은 가문도 없이 실력으로 들어온 자리를 통해 이렇게 많은 것을 얻게 될 줄이야.
카즈마는 휘파람을 불며 자신의 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5.
'으음....'
탕에선 이온의 탄탄한 복근 사이로 하얀 연기가 피어 올라오고 있었다.
지금껏 노력했던 결실이 하나 둘 빛을 내게 될 순간이 얼마 머지 않았다.
2년 전 카즈마를 데리고 온 솔리오라 제국에서 만난 여인.
크롬 솔리오라가 처음으로 사랑했던 여인의 딸.
이레나 솔리오라.
그녀는 그가 수소문을 해 끝내 찾아낸 여인이었다.
늘 솔리오라제국과의 거래가 불발되었던 그에게 이레나는 한줄기 빛과 같은 존재였다.
그녀의 존재를 알게 된 후로부터 현 황제 크롬 솔리오라는 이온이 해달라는 것은 뭐든지 들어줄 심산인 듯 했다.
"그녀가 나를 사랑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이온은 찜찜한 기분에 옆에 있던 붉은 스파클링 샴페인은 들어 삼켰다.
이온이 황제에게 그녀를 알현시키고 나서 받은 제의는 '약혼'이었다.
'내 딸아이와 약혼을 해주게.'
'하지만...그것은.'
결혼만은 유리와 하고 싶기에 망설였던 그에게 들어온 황제의 제안은 꽤나 막대한 것이었다.
'난 내 딸을 솔리오라 제국의 여황제로 만들고 싶네.'
'설마...'
'왜...껄끄러운가? 자네의 어미도 사라왕국의 여왕이지 않는가.'
이제 70을 바라보는 왕의 눈은 나이에 맞지 않을 정도로 형형했다.
주색에 도가 터 낳은 서출만 20명이 넘는다는 황제의 입에서 나올 말이라기엔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이레나를 낳은 여자는 내가 처음으로 사랑한 여인이었어. 난 그 여인에게 그녀와 나은 자식을 보위에 올리겠노라 약속을 했지.'
'허나 솔리오라제국은 이미 황태자가 있지않습니까.'
'황태자를 밀어낼 정도의 힘은 있네. 그대는 날 믿고 따라와주면 돼.'
'...'
'그대가 그토록 원하던 솔리오라 제국이 아닌가.'
이온의 눈에선 알수 없는 이채가 흔들렸다.
...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