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은 참 이상한 계절이라, 몸이 추워지면 마음을 덥히고 싶은 것이다.
"다음 주에 봬요."
"응, 잘 가!"
백남진에게도 그랬다. 새로 구한 아르바이트의 첫 퇴근, 문 밖을 나서자마자 볼에 찬 것이 훅 불었다. 해가 떨어진지 오래였다.
바람이 진눈깨비를 불어제끼고 입김이 하얗게 얼어붙었다. 추운 것은 사람을 웅크리게 한다. 꼭 약한 것의 모양새처럼. 그는 우산을 들고 낯선 거리를 걸었다. 지상철 역전, 넓게 펼쳐놓은 사차선 교차로를 중심으로 헐벗은 가로수가 줄지어 늘어진 대로변. 남루하게 번쩍이는 간판들과 지나치는 차들이 헤드라이트를 휘두르는 길은 그의 것이 아니었다.
곳곳마다 진부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나, 익숙한 것 또한 없었다. 20여 년이 넘도록 한 동네에서 자란 그가 아는 거리는 이런 것이 아니었다.
빵집 아저씨가 꽈배기를 굽지 않은 것을 알고, 슈퍼 할머니가 오늘은 할아버지의 파카를 입은 것이 보이고, 길 건너에서 초등학교 동창이 나를 알아보는 것.
그의 세상에서 거리는 책이었는데, 이 거리는 다른 언어로 쓰인 책이었다. 무엇도 읽을 수 없고, 누구도 그를 읽지 않았다.
그래서 이 곳에 왔지. 남진은 그렇게 생각했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거리. 만족스러웠다. 이 거리에는 그가 바라던 무관심과 생소함이 있었고, 지난 몇 달간 그는 거리를 날것으로 두었다. 그러나 외풍을 오래 맞다보면 결국 추워지고 마는 것이다.
우웅,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꺼내어 확인해보니 액정이 켜지지 않았다. 핸드폰이 맛이 가기 시작한 것은 한참 전의 일이다. 눈으로 주변 상가의 간판을 훑자 위 언저리가 당겼다. 이 거리의 언어를 배울 때가 온 것이다. 거북했다. 이 곳을 날것으로 남겨두고 싶었다.
결국 남진은 한 통신사의 대리점 간판을 발견하자마자 곧장 걸음을 옮겼다. 수리점을 찾기 힘든 기종을 2년이 넘도록 쓰고 있었으니, 새로 마련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물론 타협안이었다. 이 거리를 얕게만 보려는.
조금만 더 주의깊게 봤다면 남진은 그 곳에 들어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쇼윈도가 없는 통신사 대리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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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오세요! 우산은 그 쪽 우산꽂이에 두시겠어요?"
발랄한 차임벨과 더 발랄한 목소리. 크림색 스웨터를 입은 커다란 덩치의 남자가 반겼다. 목에 찬 명찰이 매끈하게 빛났다. 점장 장하민.
그와 동시에 남진은 발을 멈췄다. 문을 열기 전부터 의심했어야 했다. 어째서 유리가 아니라 나무 문인지, 왜 쇼윈도가 없는지.
한겨울에 몬스테라라니.
미색 타일벽에 체리색 원목 바닥과 같은 색의 나무 테이블, 커다란 몬스테라 화분이 러그 위에서 잎을 살랑였다. 카운터 옆의 마샬 스피커에서는 일렉트로닉 팝이 흘러나오고, 에스닉 패턴 커튼이 둘러진 아담한 창문. 차라리 카페라면 그럴싸한 분위기였다.
벽 한쪽의 쇼케이스에는 여러 기종의 핸드폰이, 악세서리점에서나 보던 동그란 회전 진열대에는 케이스와 이어폰이 진열되어있었지만 남진은 의아했다. 희고 차가운 대리점에 익숙한 까닭이었다. 본사에서 인테리어 규제를 안하나? 아니면 내가 프로모션 매장에 잘못 왔나?
"어쩐 일로 오셨어요?"
"핸드폰 바꾸려고…."
"아, 이 쪽에 앉으세요. 제일 시원한 자리거든요. 안이 좀 덥죠?"
얼추 맞게 온 모양이다. 얼떨결에 답한 남진은 의뭉스런 표정으로 창가 자리에 앉았다. 체리색 원목 의자에 푹신한 방석이 깔려있었다. 유행 지난 트로피컬 화분들, 단지 취향인걸까?
열대의 식물 때문인지 실내는 엄청나게 따끈했다. 찬바람 맞던 귀 속이 얼얼할 정도로. 옆자리에 패딩을 벗어두고 귀를 두들기는데, 점장이 타블렛 PC를 들고 다가와 살갑게 말을 붙여왔다.
"바깥 많이 춥죠? 따뜻한 거 한 잔 드릴게요. 어떤 거 좋아하세요? 녹차랑 커피랑, 아, 코코아도 있는데."
"커피요."
"커피 드시기엔 좀 늦은 시간 아니예요? 아, 늦게까지 안 주무실 수도 있겠다. 어떤 커피가 좋으세요?"
"…블랙."
말이 많은 남자다. 남진은 당황한 눈으로 점장을 보았다. 점장이 몸을 일으키자 기골이 정말 장대했는데, 그 커다란 덩치로 참새마냥 조잘조잘 떠드는 것이다.
혼잣말인지 건네는 말인지, 점장은 쉴새없이 떠들며 부산스레 움직이다가 곧 쟁반을 내왔다. 결이 고운 나무 쟁반에 가지런히 놓인 흰 커피잔과 과자. 보통은 종이컵에 내올 터였다.
"어떤 거 찾으시려나. 전에 쓰시던 기종이 뭐였어요?"
다행히도 대리점이 맞는 모양이다. 남진은 안도하며 대답했다.
"X5요."
"이야, 오래 쓰셨네? 그거 단종됐잖아요. 그래도 한창 인기 많았었는데, 광고 나왔던 연예인 누구였지? 암튼 되게 예쁜!"
수다스럽기도 하지. 게다가 제스처가 크다. 한 마디씩 할 때마다 곰 앞발같은 팔뚝을 휘두르는데, 테이블의 자그마한 다육 화분이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 같았다.
그러나 위압감은 없었다. 미성에 상냥한 말투, 마주 앉으니 의외로 인상이 고왔다. 예쁘게도 생겼네, 바라보자 웃으며 눈을 깜빡였다. 어쩐지 언짢은 기분에 고개를 돌리니 의아한 기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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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많은 사람은 불편하다. 영업사원 혹은 판매원일 경우에는 더더욱.
"조금만 기다리시면 기기 올거예요. 바로 옆 지점 점장한테 퀵으로 보내달라고 했거든요!"
통신사 이동과 할부로 적정선 요금 책정, 마음에 드는 기기 선정. 함무라비 법전과 견줄 정도로 합리적인 결말이었다. 그러니 남진은 왜 손해보는 기분이 드는 것인지 정확히 알기 힘들었다. 몇 가지 단서는 있었지만.
기기를 고르고 요금제를 정하고 계약서를 쓰는 사이에 남진은 이 커다란 점장-하민이 5년 전부터 이 가게에서 일하기 시작했다는 것, 주로 일렉트로닉 팝을 듣고 화분 가꾸는 게 취미며 최근 키우던 고양이가 아팠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 외의 잡다한 것들도.(정말 알고싶지 않은 것들이었다)
"오래 걸려요?"
"한 십 분 있음 올거예요. 아, 커피 한 잔 더 하실래요? 아님 과자 더 드릴까요?"
"아뇨. 잠깐 나갔다올게요."
피곤했다. 분명 고객 응대는 저 쪽의 몫일텐데. 잘 다녀오시라는 발랄한 목소리를 뒤로하고 문을 열자 기다렸다는 듯 찬바람과 진눈깨비가 훅 들이쳤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계절이 다른 기분이었다.
옆 건물과 좁다랗게 난 틈으로 들어섰다. 대리점과 바로 옆 상가 사이의 작은 공백. 틈과 골목의 어드메 쯤에 속한 공간에는 진눈깨비가 닿지 않았다. 워낙 좁기도 하지만 두 건물 간 처마의 경사가 교묘한 까닭이다.
이상하리만큼 정돈된 인상이었다. 이 거리의 골목들은 대부분 지저분한데, 식당 옆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깨끗했다. 음식물 쓰레기통 옆이 전혀 불쾌하지 않을 정도로. 지저분한 것들을 쓸어낸 것이 분명한 바닥하며 창틀 턱에는 뜬금없는 야자 잎과 재떨이.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이니 발가락부터 귓바퀴까지 시려웠다. 대리점 내부가 후덥지근해 겉옷을 두 겹이나 벗어두었는데, 그 상태 그대로 나온 것이다. 남진은 후드를 푹 눌러쓰고 몸을 푹 숙였다. 어깨가 달달 떨렸다.
추위를 많이 타는 편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올해의 바람은 유독 견디기 힘들었다. 작년엔 어땠던가. 그 전에는? 기억을 더듬는데 바닥을 향한 시야에 갈색 무광 로퍼가 띄었다.
"춥죠?"
고개를 들자 남진의 패딩을 손에 든 점장이 겸연쩍은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커다란 그가 들어오니 안그래도 좁은 골목이 꽉 차보였다. 그가 내미는 패딩을 받아들자 점장은 바지 뒷주머니에서 담배갑을 꺼냈다.
"왜 굳이?"
"그런 차림으로 나가시길래, 걱정돼서요. 제가 추위 되게 많이 타거든요. 그래서 옷 가져다드릴 겸 저도 한 대 필까 하고. 아, 저 불 좀 빌려주실래요?"
말과는 다르게 점장은 실내에서의 차림 그대로였다. 추운 기색 하나 없는 점장을 보며 남진은 다시 언짢아졌다. 아까 점장이 그를 보며 웃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말없이 불을 붙여주자 고마워요, 하고 또다시 웃었다.
"눈 오는 거 좋아하세요?"
"별로. 그래도 저것보단 눈이 낫겠네요."
"그쵸? 아무래도 진눈깨비보단 함박눈이 보기 예뻐요."
점장은 담배를 깊게 빨았다. 남진은 점장의 볼이 움푹 패이는 것을 유심히 봤다. 영 비흡연자 느낌이었는데. 의외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의 스웨터 소매 아래로 문신이 비쳤다. 작은 레터링 따위가 아니라 큰 그림의 일부처럼 보였다.
"요기, 바로 옆에 카레집 가보셨어요?"
"아뇨."
"엄청 맛있어요! 제가 거기 사장님이랑도 친하거든요. 진짜 그 사장님은 천재라니까요. 어떻게 난을 그렇게 맛있게 굽는지!"
또 시작이다. 종일 손님이 없어서 입이 심심했던 걸까? 남진은 쉴새없이 떠드는 그를 경이롭게 바라보다가, 연기를 뱉으며 지루해하다가, 홱 고개를 돌렸다.
"뭐라고요?"
"어디 사시냐구요."
남진의 굳은 표정을 마주했음에도 점장의 표정은 무구했다.
"왜요?"
"그냥요. 저는 저기 살거든요, 저쪽 골목으로 쭉 들어가면 있는 한성빌라-"
"그건 또 왜요?"
"네?"
"왜 말해요, 그런 걸."
남진은 담배를 재떨이에 수직으로 내리꽂았다. 칙, 소리와 함께 타다 남은 담뱃대가 분질러졌다.
"원래 그렇게 말이 많아요?"
"그렇다는 말을 듣긴 하는데…"
"내가 누군지 알고 나불대요? 당신 나 알아요?"
좁은 틈새로 바람이 들었다. 찬 것이 휘잉, 몸을 감았다 사라졌다.
"난 핸드폰 사러 온 건데, 그 쪽네 고양이 아프단 얘기까지 듣게 될줄 몰랐네요. 원래 고객 응대 방식이 그래요?"
"아… 죄송해요. 혹시 기분 나쁘셨어요?"
"아뇨. 그냥,"
남진은 거리의 불빛을 등진 점장의 얼굴을 올려봤다. 고개를 한참이나 꺾어야 했다.
"귀찮고 피곤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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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번호 저장해뒀어요. 기기에 문제 있거나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지 연락하시면 돼요!"
남진은 기가 찬 표정으로 새 핸드폰을 바라봤다. [x사 xx지점장 장하민] 이전 기기와 계정 연동이 안되는 바람에 백지가 된 주소록에 추가된 단 하나의 항목. 24년 살면서 휴대폰 주소록에 통신사 대리점 지점장 번호가 찍힌 것은 처음이다. 필요하면 어련히 알아서 찾아올텐데.
"원래 기기 구매하시면 사은품으로 케이스며 이것저것 나가는데, 오늘은 재고가 없어서 제대로 못 챙겨드렸거든요."
"그래서요?"
"다음주 쯤 입고될텐데, 그 때 문자 넣어드릴게요!"
한 번 더 오라는 소리다. 남진은 방금 전 골목에서의 대화를 떠올렸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던 점장의 표정, 골목을 나올 때 신경질적으로 부딪쳤던 어깨. 충분히 재수없게 굴었다고 생각했는데, 모자랐나?
"필요없어요."
"에이, 그래도 케이스 있는 거랑 없는 거 달라요. 좋은 걸로 골라드릴게요."
"존나 과하네. 나한테 관심있어요?"
놀란 토끼눈. 이쯤 되면 화낼 때도 되지 않았나. 불쾌한 기색을 노골적으로 내비치며 남진은 패딩에 팔을 꿰었다.
"번호 지웁니다. 경계심 좀 갖고 사세요."
"경계심이요?"
"아무한테나 친한 척 하지 말라고요."
남진은 테이블 위의 종이봉투를 집어들었다. 흔한 통신사 대리점 봉투가 아닌, 코르크 색 재생지 봉투였다. 이럴거면 카페를 하지.
몸을 돌려 문으로 향하던 남진은 몬스테라 화분에 잠시 시선을 두었다. 제 키만한 높이, 커다란 진초록의 잎. 추운 바깥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래, 어울리지 않는 공간이다. 그가 있을 곳은 몬스테라가 있는 아늑한 대리점이 아닌 진눈깨비가 내리는 추운 거리인 것이다. 나뭇결이 예쁜 문을 미는 순간 귓전에 점장의 미성이 닿았다.
"추워 보이셔서요."
고개를 돌리자 여전히 웃는 얼굴. 점장은 분무기를 들고 몬스테라 가까이 다가섰다. 솥뚜껑만한 손이 잎 끝을 조심스레 쥐고, 넓은 잎새에 작은 물방울이 맺혔다. 생면부지의 고객에게 욕 먹은 사람이라기엔 지나치게 평온한 표정이었다.
"제가 원래 추운 사람을 가만 못 두거든요. 여긴 따뜻하니까, 몸 좀 녹여가시라고."
'뭐래, 진짜.'
"오지랖도 과하면 병이라잖아요? 제가 또 그 쪽으론 중병이거든요."
그러곤 환하게 웃어보이는 것이다. 촌극에 가까운 행태에, 남진은 눈살을 찌푸렸다.
"병원 가시던가…. 안녕히 계세요."
"오실거죠? 다음 주에."
돌았냐, 또 오게. 중얼거리며 남진은 문을 열었다. 그리고 일순 몸을 멈췄다.
축축하던 진눈깨비가 그새 푸짐한 눈송이로 내리고 있었다. 희고 가벼운 입자들.
"역시 함박눈이 더 보기 좋죠?"
남진은 잠시 눈 내리는 거리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한 번 가로젓고는 우산을 펼치며 밖으로 나섰다. 딸랑,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차임벨이 울렸다. 닫히는 문틈으로 잠시 비친 점장의 얼굴은 여전히 다정한 미소를 띈 채였다.
포장 보도블럭 위로 야트막히 쌓이는 눈송이가 운동화 아래서 자박거렸다. 지나치는 사람들을 무심하게 보며 걷던 남진은 저도 모르게 가게를 한 번 돌아보고는, 자신이 얼마나 이상한 곳에 발을 들였는지 깨달았다. 쇼윈도가 문제가 아니었다. 하얀 벽돌에 알전구를 매달아둔 통신사 대리점이라니. 남진은 기가 찬 표정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미친 놈인가."
눈이 내리는 겨울의 밤거리. 남진은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더이상 자신과는 상관 없는 것이었다. 거대한 몸집에 곱상한 얼굴의 남자라던가, 몬스테라가 자라는 이상한 통신사 대리점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