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가 아니라, 좁은 곳이 아래로 가게… 아뇨, 돌려야죠. 아니 좌우로 말고, 멍청아!"
남진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900*400mm 사이즈의 원목 합판을 15분째 들고있는 사람이라면 합당한 분노였다.
몬스테라 대리점의 점장, 하민은 스크래쳐 기둥을 든 채로 울상을 지었다. 남진은 부아가 치밀어 테이블 위의 검은 고양이를 노려보았다. 동그란 앞발을 할짝이던 고양이 - 윤호는 남진을 태평한 눈으로 마주보았다.
저 털빛 고운 네발짐승이 아니었다면 일요일 오후에 육체와 정신을 혹사시키는 일은 없었을텐데.
캣타워 조립을 도와달라는 부탁을 분명 거절했었는데. 손 끝이 윤호의 보드라운 털을 새벽 늦게까지 반추하는 바람에 결국 찾아오고 만 것이다. 그리고 결과는 처참했다. 여러 모양새의 원목 부품으로 이루어진, 흡사 추상화에 가까운 구조물. 성인 남성 둘이 삼십 분동안 씨름한 결과물이었다. 충분히 완성하고도 남았을 시간이었는데, 다만 문제는…
"그쪽 면허 없죠."
"어떻게 아셨…"
"당연하지, 상하좌우도 구분을 못하는데!"
…조수의 공간 지각력이 가히 신생아 수준이었던 것이다. 하민은 고개를 푹 숙였고, 남진은 합판을 내려놓고 얼굴을 문질렀다. 이렇게 성질을 부린 것이 얼마만이던가. 그것도 친하지도 않은 사람에게.
들러붙는 것이 거북하고 불편해 틱틱대긴 했지만, 이만치 골낼 마음은 없었다. 속을 너무 많이 내비쳤다는 생각에 남진은 흠칫했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건 마땅한 인과다. 이 거대하고 수다스러운 남자의 뇌 속에는 해마 세포가 없는 것이 분명했으니.
"그게요, 제가 가끔은 왼쪽 오른쪽도 잘 모르겠거든요. 머리로는 아는데, 눈이 그걸 못 따라가서 한 번은…"
"시끄러워요."
싹둑 말을 자른 남진은 하민에게서 기둥을 뺏어들었다. 하민이 애처로운 눈길로 남진을 올려다봤다. 설마 그럴 건 아니죠? 제발!
"나 혼자 합니다. 저기 가서 윤호랑 놀아요."
TV를 끄는 아빠처럼 엄격한 목소리였다.
-
"감사합니다. 윤호도 고마워할 거예요."
말과는 다르게 토라진 목소리. 남진은 본인이 30분만에 완성한 캣타워와 볼이 부은 하민을 번갈아 보았다. 알만하다. 하민은 협동의 결실을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남진은 그 속터지는 짓을 더는 할 수 없었다.
"대체 왜 조립식으로 주문한거예요? 어차피 못할 거면서."
"남진 씨랑 같이 하려고요."
"그거 주문했을 땐 나 몰랐잖아요."
"윤호야! 여기 한 번 올라가볼래?"
하민은 몸을 돌려 윤호에게 손짓했다. 말을 돌리는 투였다. 그루밍 중이던 윤호는 남진이 완성해놓은 캣타워를 흘금 보는가 싶더니, 도로 앞발을 핥짝였다.
"아직 완성이 아닌 걸 아나봐요."
"뭐가 더 남았어요?"
"위에 카페트 붙여야죠!"
"맞다. 본드로 붙이면 돼요?"
"아뇨, 밸크로 테이프."
찍찍이 말이예요, 하민은 곰발같은 양손을 붙였다 떼보였다. 고개를 끄덕이던 남진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카페트는 봤지만 찍찍이는 못 봤는데. 따로 빼놨나? 두리번거리던 남진은 곧 하민이 베시시 웃는 것을 발견했다.
"…주문 안 했군요."
"네. 깜빡 빼먹었더라고요."
"그쪽은 가게 봐야하니까 자리 비우지도 못 할거고."
"카레점 옆 골목으로 한 블록만 가면 철물점 있어요."
건네는 카드를 받아들며 남진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한 대 칠까? 그 순간 하민의 광활한 어깨와 굴강한 팔뚝, 거목만한 가슴팍이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밸크로 테이프만 사오면 돼요?"
-
카드 들고 튈까, 중얼거리며 남진은 패딩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없이 사는 것 같진 않고, 잔고가 넉넉하니 그런 이상한 가게나 하겠지. 그러나 하민의 흉포한 몸을 유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소매 아래로 가끔 드러나는 문신은 아무리 봐도 큰 전체의 일부. 함부로 내뺐다간 어느 야산에서 변사체로 발견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다행히 철물점은 가까웠다. 몇 걸음 딛지도 않아 오래된 간판이 눈에 띄었다. [철물·샷시·부속] 남색 배경에 희고 두꺼운 글씨로 쓰여있었다. 역전 근처 상가에 철물점이라니. 남진은 꽤 우스운 기분이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서울이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고개를 들면 시야에 하늘이 꽉 찰 정도로 건물들이 낮은 역전 사차선 대로. 줄지어 늘어선 상가들은 주로 해묵은 주점들이며, 거리와 골목에는 쓰레기와 숨죽인 악취가 그득하다. 잘 정비되고 넓은 도로가 남루한 건물들과 공존하는 꼴은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고층 빌딩은 고사하고 역전과 유흥가 몇 군데를 제외하면 패스트푸드점조차 찾을 수 없는, 경기도 외곽의 변두리 지역.
이런 동네는 으레 뜨내기들에게 냉담한 법이다. 몇몇 이상한 사람들을 제외하면. 남진은 대리점 점장과 카레점 사장을 떠올리며 작은 철물점의 유리문을 밀었다.
서늘한 쇳내. 불쾌하지 않은 금속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남루한 가게 벽과 진열대에는 자물쇠며 철사, 공구 따위의 것들이 어수선하게 걸려 있었다. 밖에서 보던 것보다 널찍한데다 너무 많은 물건들이 빽빽해서 고개를 한바퀴 꺾어도 둘러보기 어려웠다. 물건을 찾아 사방을 둘러보는데, 안쪽에서 드르륵 미닫이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오셨는가?"
반쯤 열린 창호문 틈으로 진분홍 누빔 조끼를 입은 할머니가 고개를 내밀었다. 중년 남성이나 할아버지를 기대했던 남진은 약간 당황했다.
"사장님이세요?"
"하모."
"아…. 밸크로 테이프를 찾는데요. 그러니까, 찍찍이요. 아세요?"
방금 전 하민이 했던 것을 떠올리며 양 손을 열심히 붙였다 뗐다 해보이자, 노인은 눈으로 웃었다. 가소롭다는 표정이었다.
"접착식, 비접착식?"
"예?… 접착식이요."
"쩌그 옆에 벽. 위쪽은 쓰리앰이고 아래쪽은 대성인게. 저저 아래 후끄에 걸린 게 듀얼락이고 이지 후끄는 고 옆에 거여."
남진은 토끼눈으로 백발 성성한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
"내가 미안해, 응?"
밸크로 테이프가 든 비닐봉투를 들고 대리점으로 돌아오자, 하민이 울상으로 윤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카운터에 가지런히 올려져 있던 화분과 액자들이 바닥에서 나뒹굴었다. 또 일을 쳤나. 눈으로 묻자 하민이 울먹이며 외쳤다.
"그건 실수였어요!"
"뭐가요."
"남진씨랑 같이 먹으려고 롤케잌을 사놨거든요. 아침에 건너편 빵집에서 사온 걸 창고에 있는 냉장고에 넣어뒀었는데-"
"짧게 말해요, 짧게."
"창고 문 여닫다가 윤호 꼬리가 끼었어요. 들어오려던 걸 제가 못 봐서."
그래서 느닷없이 변을 당한 윤호는 뿔이 났고, 하민은 쩔쩔매고 있는 것이다. 가지가지 하는구나. 남진은 한숨을 쉬며 하민에게 비닐봉투를 건넸다.
"왼쪽 오른쪽은 구별 못해도 길이는 잴 수 있죠?"
"자 있으니까 그 정도는…."
"카페트 길이 재서 테이프 잘라놔요. 한 번 더 다녀올테니까."
"어딜요?"
철물점. 짧게 대답하며 남진은 도로 대리점 밖으로 나갔다. 가까우니 망정이지.
"왜 또 왔는가?"
"그, 문 닫을 때…."
쉬운 설명을 고민하던 남진은 아까의 상황을 떠올렸다.
"도어 스토퍼 있어요? 말굽이나 자석 말고요."
노인이 문 너머로 잠시 사라졌다가, 문 밖으로 다리를 내밀어 녹색 슬리퍼를 챙겨신었다. 한 쪽 모퉁이로 다가가 어지럽게 쌓인 박스들을 둘러보던 노인은 허리를 숙여 한 박스를 뒤지기 시작했다.
"제가 찾을게요."
"괜찮어. 스또뻐도 한두 가지여야지. 어데 쓰려는가?"
"문 끼임 방지용이요."
"아그 땜시로?"
"아뇨, 고양이가 꼬리를 끼어서. 제 고양이는 아닌데…."
"괭이?"
노인은 허리를 펴고 남진에게 플라스틱으로 포장된 쇳덩이를 내밀었다. 두 손으로 받아들자 노인은 남진을 아래위로 훑으며 물었다.
"고 머스마네 괭이?"
"예?"
"쩌그 저, 핸드폰 파는 이쁘장한 머스마 말여."
"어떻게 아셨어요?"
"여서 장사만 삼십 년이여. 도마도 하나 먹을랑가?"
노인은 창호문을 열고 남진에게 손짓했다. 문 안쪽으로 전기장판과 이불이 깔린 방. 거절의 뜻을 비치려는데, 문득 궁금증이 머리를 스쳤다. 이상한 통신사 대리점을 운영하는 젊은 남자와, 그를 잘 아는 노인의 말투.
이 노인은 그에 대해 알고 있을까?
신발을 벗고 창호문 안으로 들어서자 전기장판이 따끈하게 발을 데웠다. 큼직한 스테인리스 대접이 놓여진 개다리상, 작은 브라운관 텔레비전에서 몇 해 전의 연속극이 방영되고 있었다. 남진이 상 앞에 앉자 노인은 대접을 남진 쪽으로 밀었다.
"괭이 꼬랑지를 거시기했댜. 고놈 등치는 산만해가지구 참 칠레팔레 해븐다. 그쟈?"
"그 사람 잘 아세요?"
"몰러. 본 즉은 오래 디였어두 남남인디."
별 소득은 없을 모양이다. 실망이 역력한 눈으로 대접 안쪽을 들여다보니 대추 방울토마토가 가득 담겨있었다. 알알이 실하고 굵은 것들이었다.
"갸만큼 살곰시론 머스마가 없어야. 참 순해. 그쟈?"
"예, 뭐…."
"근디 보는 맹치로 맹탕은 아닌가베."
"예?"
노인은 방울토마토 꼭지를 하나씩 떼어 대접 옆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가만봉께 아가 솔찬히 요상혀. 벨 잡놈들이 꼬일만도 한디, 고 집엔 얼씬도 않어. 맴이 약헌가, 눈이 트였는가. 델고 오는 것들은 다 그짝같은 눈에…."
주름진 손이 움직이는 것을 보던 남진이 움찔했다. 고개를 들자 노인은 깊은 눈으로 남진을 보고 있었다. 급히 시선을 피하자 끌끌, 가래끓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뭣이 무섭당가. 고 머스마한테도 그랬는가?"
"…."
"너무 그라진 말어. 고놈 자슥이 별짝시럽게 새똥빠진 소릴 해싸도, 흔디가 아문디같이 표만 안 내는 건게로. 젊은 놈들이 왜그리 속앓이를 혀."
방울토마토 꼭지를 다 뗀 노인은 손을 털고 티비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 혼자의 시간으로 돌아간 것처럼. 남진은 노인의 주름진 옆얼굴을 잠시 보다가, 꼭지 떼인 방울토마토를 입에 넣었다. 살캉한 과육이 입 안에서 톡 터졌다. 새콤한 단맛.
-
"남진씨!"
대리점으로 돌아오니 대치상태 종료. 윤호는 캣타워에 똬리를 틀었고, 하민은 윤호가 어질러놓은 카운터를 정리하는 중이었다. 남진은 하민에게 도어 스토퍼가 담긴 비닐봉투와 카드를 내밀었다.
"이건 뭐예요?"
"도어 스토퍼. 쟤 꼬리때문에."
창고 문을 가리키니 하민이 감동한 표정으로 눈을 반짝였다. 세상에, 윤호 생각해서 사다준 거예요? 남진씨 최고! 가만 놔두면 끌어안기라도 할 태세라, 남진은 급히 캣타워 가까이로 다가섰다.
몬스테라 화분 옆에 두면 예쁠 것 같았는데. 하민은 윤호가 잎을 뜯을까 걱정된다고 캣타워를 쇼케이스 근처에 두었다. (기기나 진열대를 망가뜨릴 걱정은 안하나보다) 층층이 밝은 원목의 합판마다 맞춤하게 붙여놓은 차콜색 카페트가 꽤 맵시있었다. 꼭대기에 자리잡은 윤호의 이마를 문지르자 졸린 눈을 꿈뻑대다가 하품을 했다. 그 장면을 홀린 듯 보던 남진은 결국 카메라 앱을 켰다. 핸드폰을 구입하고 처음이었다.
"며칠은 지켜보다가 올라갈 줄 알았는데."
"캣타워가 익숙하니까요. 집에도 비슷한 게 있거든요."
"집과 가게를 왔다갔다? 고양이 데리고 이동하는거 쉽지 않을텐데."
"윤호는 길냥이 출신이거든요. 같이 산책도 할 수 있어요."
산책이 가능한 고양이! 정신없이 셔터를 누르던 남진의 눈이 커지자 하민이 까르르 웃었다.
"고양이 되게 좋아하시네. 윤호때문에 앞으로 자주 오시겠어요?"
"내가 왜 여길 또 와요, 폰도 바꿨는데."
"언제든 와도 돼요. 할머니랑은 무슨 얘기 했어요?"
액정에 검은 고양이를 담던 손이 멈췄다. 남진이 탐탁찮은 표정으로 돌아보자, 하민은 방긋 웃으며 어깨를 으쓱여보였다. 남진은 고개를 돌리며 조소를 흘렸다. 하민의 의중이 짚였다. 옆 가게 비혼모 사장과 장애아, 골목의 철물점 할머니. 그것은 아무래도 뻔한 가족애로 점철된 진부한 드라마였다. 하품이 나올 정도로 고루한 훈화, 머리가 굵어지면 우스꽝스럽고 유치한 동화.
'여긴 따뜻하니까요. 몸 좀 녹여가시라고.'
불쾌하고 꺼림칙했다. 고작 며칠 본 사이, 뭘 안다고?
"좋은 말씀들. 뭐 저희 할머니들 생각나고 좋았어요."
"진짜요?"
"네. 외할머니는 저를 사람 구실도 못하는 새끼라고 부르셨고, 친할머니는 엄마한테 저런 거 낳고 미역국 끓여먹었냐고 하셨지만."
침묵. 당황한 하민의 표정을 마주하며 남진은 씩 웃어보였다.
"왜, 놀랐어요?"
"아, 그게…."
"이쯤 하세요."
"네?"
남진은 몸을 돌려 다시 윤호를 바라봤다. 윤호는 눈을 감은 채였는데, 머리를 쓰다듬자 꼬리를 살랑였다. 잠든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나 여기 마음에 들어요. 여긴 따뜻하고, 예쁘고, 고양이도 있고. 그쪽이 나한테 친절한 것도, 부담스럽고 귀찮은거지 싫은 건 아녜요."
"그런데요?"
"근데 알고싶진 않아요. 그쪽이나 주변 사람들 얘기."
하느작거리는 꼬리를 붙들자, 윤호가 캭 소리를 내며 번쩍 눈을 떴다. 불편하고 민감한 부분을 조심하라는 신호인 것이다.
"말했잖아요. 안 궁금하다고."
말을 마친 남진은 윤호에게 사과하듯 손바닥을 내밀어보이고는, 하민의 시선을 피하며 옷을 챙겨들었다. 문으로 향하는 걸음이 마치 도망치는 꼴이었다.
"남진씨!"
돌아보자 미소띤 낯이 의기소침했다. 하민은 창고 안쪽을 가리키며 조심스레 물었다.
"롤케잌 사놨는데… 모카맛이구, 되게 맛있거든요. 그거만 먹고 가지 않을래요?"
"아뇨. 됐어요."
반사적인 거절이 튀어나왔다. 뱉은 남진이 되려 놀랄 정도로 단호한 답이었다. 하민은 여전히 무엇엔가 크게 놀란 눈으로 남진을 보았고, 남진은 그 시선이 거북했다. 두어 발짝인가 뒷걸음을 치다가 결국 몸을 돌리니, 엷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오늘 도와줘서 고마웠어요. 언제든지 내킬 때 와요."
남진은 문을 열고 바깥거리로 향했다. 낮은 상가들, 줄지은 가로수 사이사이가 여전히 겨울이었다.
하늘이 차츰 짙어지고 있었다. 묵직해보이는 구름이 꼭, 지난 번처럼 한바탕 진눈깨비라도 쏟아낼 모양이었다. 남진은 걷던 채로 고개를 꺾어 무채색의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역전 사거리 교차로로 향했다. 몇 개월을 걸어도 간판과 사람은 여전히 그를 낯설게 스쳐지나갔다. 남진은 주머니에 손을 넣고 패딩을 여몄다. 바람이 차가운 까닭이었다.
그래도 롤케잌은 먹고 나올걸 그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