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연재 > 현대물
낯선 거리
작가 : 봄동
작품등록일 : 2019.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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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복층 다락의 만화카페
작성일 : 19-12-12     조회 : 226     추천 : 0     분량 : 9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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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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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꺼리던 것마저 아쉬워지는 순간이 있다.

 

 주 5일의 아르바이트, 예능 프로그램과 웹서핑으로 보내는 여가 시간. 목가적인 무위의 날들이 흘러갔다. 고객 응대를 제하고는 벙어리처럼 지낸 지 6일째 되던 토요일 아침, 남진은 퀭한 눈으로 시계를 바라보았다. 오전 10시 30분. 평소라면 한창 단잠을 자고 있을 무렵이었다.

 

 시간 더럽게 안가네.

 

 잠이 오지 않았다. 퇴근 직후부터 반지하 월세방에 빛이 들기까지. 밤새 뒤척이던 몸이 뻐근했다. 수백 번째의 헛된 시도 끝에 남진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그잔에 인스턴트 커피 한 봉을 까서 붓자, 코 끝을 톡 치는 원두 냄새에 문득 어딘가가 떠올랐다. 남진은 고개를 홰홰 내둘렀다. 냄비에 물을 끓이며 더운 김을 쬐는데, 이번에는 몬스테라 대리점의 검은 고양이가 떠올랐다. 사람 같던 눈빛과 따끈한 몸뚱이.

 

 딱 잘라 선 그은 주제에 염치도 없지. 그러나 남진은 인정하기로 했다. 기나긴 침묵과 불면의 밤에 남진이 간절히 바라던 것은 그 보드라운 네발짐승의 온기였다. 그것을 안고 있던 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몬스테라 이파리, 혹은 야단스레 방정을 떨던 미성?

 

 관두자. 인스턴트 커피를 홀짝이던 남진의 시선이 책상 위로 향했다. 랩탑과 달력이 전부인 휑한 책상. 달력을 물끄러미 보던 남진은 책상으로 다가가, 빨간 펜으로 마지막 일자의 칸에 X자를 쳤다.

 

 

 

 -

 

 

 세상의 논리는 조화롭고 타당하다. 개인의 우울과는 하등 상관없이. 남진이 한낮의 거리로 기어나온 이유도 이치에 순응하는 것이었다. 울적하고 피로해도 배는 고프고 요리는 귀찮다.

 

 그리고 결정은 언제나 어렵다. 메뉴를 고민하며 거리를 배회하던 남진은 어느새 자신이 알전구가 걸린 통신사 대리점 앞에 멈춰선 것을 깨달았다. 들어가, 말아? 고민하던 찰나 대리점의 문이 벌컥 열렸다. 퍼뜩 놀라 뒤로 한 걸음 물러서자, 마대 걸레를 든 남자가 남진을 빤히 바라보았다.

 

 앳된 볼, 스무살은 되었을까? 엷은 호박색의 눈동자가 햇발에 투명하게 반짝였다. 남진은 눈을 꿈뻑였다.

 

 "들어오게?"

 

 어린 얼굴과는 영 딴판으로, 목소리는 낮고 거칠었다. 그런데 초면에 반말? 인상을 쓰자 남자는 씩 웃으며 남진을 지나쳤다. 잠시 열린 문틈으로 하민은 보이지 않았다. 골목으로 들어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던 남진은 턱을 문지르며 발걸음을 옮겼다.

 

 비품을 들고 나온 것을 보아 손님은 아니고, 직원일까? 아니면 하민의 친구? 남자에 대해 생각하던 남진은 콘크리트 벽의 파이프 배관을 따라 골목으로 들어섰다. 이 거리에서라면 어디든지 볼 수 있는, 흔해빠진 골목이었다. 구태여 그 골목으로 들어선 이유는 아마 상념에 잠긴 탓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남진은 제 앞의 풍경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한 무리의 교복, 그것도 꽤 익숙한 중학교의 교복들을.

 

 "나두 가티 가고싶응데!"

 

 혀 짧은 발음. 볼이 어린 학생들이 골목길에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남진은 그 틈에서 낯익은 뒷통수를 발견했다.

 

 "아…. 근데 주희는 이제 집 들어가야 하지 않아?"

 "맞아, 엄마가 걱정하시잖아."

 "그티만 칭구들끼리 놀러간다구 했댜나. 나 같이 가구시퍼."

 

 학생들은 난처한 표정으로 저들끼리 무언가를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보아하니 저들끼리 놀러 가는 길에 주희가 끼어든 모양이었다. 남진은 알만하다고 생각했다. 학교에서의 태도와는 별개로, 다운증후군 급우와 교실 밖에서까지 가까이 지내고 싶은 중학생이 몇이나 있을까. 심지어 남진 스스로마저도 이 불합리하고 현실적인 우행을 팔짱이라도 낀 태도로 관조하고 있었으니. 결국에는 제 일이 아니라는 듯이. 그러나…

 

 남진은 카레집 사장을 떠올렸다. 중학생 여자애의 엄마라기엔 지나치게 젊은 얼굴의 그녀가 손 끝으로 빚어내는 기막힌 커리와 난을. 실랑이를 벌이는 교복들을 가만히 지켜보던 남진은 주희에게 다가섰다. 학생들이 놀란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아뎌띠?"

 "집에 가자. 엄마 기다리신다."

 "나 놀구시픈데. 칭구들이 떡볶이 먹으러 간다구 했단 말야."

 

 어떤 말로 설득해야 할까. 고민하던 중에 학생들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무언의 응원과 안도감. 볼 뽀송한 것들은 하나같이 교활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얼굴들을 마주하자 남진의 속에서부터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가자고."

 "시러. 나 칭구들이랑…."

 "쟤네가 학교 밖에서도 니 친구일 것 같아?"

 

 주희가 토끼눈을 떴다. 주변의 교복들은 살벌한 어조에 겁을 집어먹은 모양이었다. 학생들은 저들끼리 무어라 귓속말을 하는 것 같더니, 주희에게 급히 손을 흔들어 보이곤 골목 너머로 사라졌다. 두다닥, 가볍고 빠른 발소리가 한데 뭉쳐 멀어졌다. 주희는 입을 벌린 채 사라지는 급우들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정적. 파이프 배관이 성기게 얽힌 골목으로 센 바람이 파고들었다. 한낮의 햇빛도 피해가는 것만 같이 골목은 추웠다. 남진이 가자고 말하자 주희는 답이 없었다. 서너 번의 권고 끝에 인내심이 바닥난 남진이 주희의 어깨를 잡아끌자, 주희는 속상한 표정으로 울먹였다.

 

 "아뎌띠 때매 칭구들 갔쟈나!"

 "쟤네가 친구냐? 너 놔두고 가버리는 애들이?"

 

 침을 뱉듯 말한 남진은 제 말에 흠칫 놀라 주희의 반응을 살폈다. 혹시나 이 '모자란' 소녀가 왈칵 울음을 터트리기라도 한다면…. 그러나 주희는 울지 않았다. 눈물 고인 눈으로 남진을 똑바로 바라보며 외쳤을 뿐이었다.

 

 "시러! 아뎌띠 미워! 내 칭구들인데!"

 

 남진의 눈이 흔들렸다. '내 친구들인데.' '왜 그랬어?' '친구라며.' '친구라면서….'

 

 "쟤넨 니 친구 아니…"

 "아냐, 칭구야! 나는 혜지두, 미나두, 지민이두, 다 너무 좋단 말이야!"

 

 "그러지 마, 이 멍청아!"

 

 버럭 소리를 지르자 주희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까와는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주희는 이해하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남진을 보다가, 남진에게 조심스레 다가갔다. 남진은 제 얼굴로 다가오는 작은 손이 점점 흐려진다고 생각했다. 퍽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게 철썩같이 믿지 말라고… 좋아하지 말라고."

 

 까치발을 든 주희의 손이 남진의 눈가에 닿았다. 부연 시야로 넓적한 얼굴이 점차 작아지다가, 한 점이 되어 툭 떨어졌다. 그제야 시야가 맑아졌다.

 

 "어라, 주희야? 남진 씨?"

 

 높고 부드러운 목소리.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반대편 골목의 끝에 거대한 인영이 서있었다. 목욕 바구니를 든 채 주희와 남진을 번갈아 보던 그림자는 남진을 향해 물었다.

 

 "주희가 또 아저씨라고 했어요?"

 

 

 

 -

 

 

 "따라오지 마세요."

 "어디 가요?"

 "밥 먹으러."

 

 남진은 퉁명스럽게 답하며 주위 건물을 돌아보았다. 분명 배를 채우러 가던 길인데, 애 앞에서 울기나 하고. 더군다나 그 장면을 들키기까지 한 것이다. 남진은 하민의 손을 흘깃 쳐다봤다. 샴푸며 바디워시가 든 목욕 바구니. 사우나라도 다녀온 모양이지.

 

 "나도 점심 아직인데. 어디서 먹을 거예요?"

 "아직 안 정했어요."

 "그럼 나 가려던 데로 갈래요?"

 

 하민은 손으로 저를 가리켜 보였다. 습관적으로 거절하려던 남진은 하민이 데려갔던 카레 전문점을 떠올렸다. 토박이가 안내하는 곳이라면 분명 맛집이겠지. 고개를 끄덕이자 하민은 신난 얼굴로 남진을 이끌었다.

 

 "여길… 밥 먹으러 와요?"

 "네! 요샌 되게 잘 되어있잖아요."

 

 식당이 아니라 근래 유행하는 최신 시설의 만화카페였다. 넓고 쾌적한 공간에 높은 벽을 가득 메운 만화책들, 여러 형태의 편안한 좌석들. 데이트 중인 여러 커플이 눈에 띄었다. 복층의 안락한 다락 좌석을 눈여겨보던 남진은 아쉬운 표정으로 소파 자리에 앉았다. 하민의 덩치로는 비좁을 터였다.

 

 테이블 위에는 코팅된 메뉴판이 붙어있었다. 기껏해야 라면이나 팔 줄 알았는데 의외로 메뉴가 다양했다. 만화 카페에 파스타? 황망한 표정으로 메뉴판을 보자 하민이 신난 표정으로 물었다.

 

 "저는 짜파게티에 계란 후라이 추가, 김치볶음밥이랑 사이다 먹으려구요. 남진 씨는 뭐 드실 거예요?"

 "똑같은 걸로."

 

 카운터에서 주문을 마치자마자 하민은 소년만화 코너로 달려갔다. 남진은 흑백 만화를 뒤적이는 그를 낯선 눈으로 바라보았다. 보라색 아디다스 저지라.

 

 첫날 대리점에서 봤던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꽈배기 짜임의 크림색 스웨터와 잘 다려진 코튼 바지에 무광 로퍼, 신경 써서 매만진 것이 분명한 머리. 단정하지만 공들인 모양새가 화려하게 보일 정도였는데, 매번 죄여진 모습을 보다가 부스스한 머리에 추리닝 차림의 그를 마주하자 퍽 생소하게 느껴졌다.

 

 "어, 그거! 나도 재밌게 봤어요."

 

 웹툰 단행본 한 권을 들고 앉자 만화책을 열 권은 챙겨온 하민이 아는 체를 했다. 웹툰 좋아하시나 봐요? 묻는 말에 고개를 저었다. 딱히 웹툰이 좋다기보단 그나마 아는 것을 가져온 것이다. 그마저도 옆으로 밀어둔 채 테이블의 목욕 바구니를 바라보자, 하민은 머쓱하게 웃으며 바닥에 바구니를 내려놓았다.

 

 "아, 죄송해요. 목욕 다녀오던 길이었거든요."

 "가게는?"

 "저희 직원이 보고 있어요."

 

 남진은 아까 대리점 앞에서 보았던 남자를 떠올렸다. 역시 직원이 맞았다. 그런데 직원이 대뜸 반말? 고자질 겸 그에 대해 물으려는 순간 쟁반을 든 알바생이 다가왔다. 그릇들과 음료수 캔이 차례로 테이블에 얹혔다.

 

 반숙 계란 후라이가 얹힌 짜파게티와 김치볶음밥, 우동 국물. 아까의 고역으로 입맛이 뚝 떨어졌는데도 음식 냄새를 맡으니 침이 돌았다. 계란 노른자를 터트려 짜파게티에 비빈 것을 한 젓가락 푸짐하게 물자 익숙하고 자극적인 맛이었다. 하민은 사이다 캔의 후크를 따서 남진에게 건넸다.

 

 "아까 골목에서 말인데요."

 

 남진은 짐짓 태평하게 사이다를 받아들었다. 역시나 괜히 데려왔을 리 없다.

 

 "주희 친구들 본 거죠?"

 "그런 애들이 친구는 무슨."

 "나더러 오지랖도 병이라고 하더니. 신경 쓰였어요?"

 "주희 때문이 아니라…."

 

 아차. 입을 다물자 하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부분의 공감은 경험과 상상에서 비롯하죠. 비슷한 경험이 있었나봐요?"

 "별로 말하고 싶지 않은데요."

 "하긴 우리가 그만큼 친한 사이는 아니니까. 그쵸?"

 

 말문이 막혔다. 남진이 대답하지 않자 하민은 짜파게티를 호로록 물고는 계란 후라이를 잘라 입에 넣었다. 우물거리는 입가가 자국 하나 없이 깔끔했다. 남진은 저도 모르게 제 입꼬리를 엄지로 훑었다. 당연히도 춘장 양념이 묻어났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안 섭섭해요?"

 "전혀."

 "너무해. 요새 잘 못자요?"

 

 냅킨에 엄지를 닦던 동작이 멈췄다. 뜨끔했다. 짐짓 멀쩡한 표정을 해보이자, 하민은 남진의 눈가를 가리켜보였다.

 

 "누가 봐도 밤샌 얼굴인데요. 꼭 팬더같아."

 "그냥 잠이 안 와서."

 "다음에 사우나 같이 갈래요? 뜨거운 데 몸 담그고 나면 잠 되게 잘 와요."

 "그쪽이랑 가면 다들 쳐다볼 것 같은데."

 

 손목을 가리켜보이자 하민은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머쓱하게 웃으며 저지 소매를 끌어내렸다. 잠시 드러났던 문신의 일부가 옷 아래로 사라졌다.

 

 "사이즈가 커 보여서. 전신?"

 "그렇게 크진 않고, 가슴부터 손목까지예요. 눈썰미 좋으시네요?"

 "왕년에 좀 노셨나 봐요."

 "그런 건 아니구. 그냥 취향이에요."

 

 어물쩡 말을 넘긴 하민은 이내 김치볶음밥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남진은 열심히 그릇을 비우는 하민에게 싱거운 시선을 던졌다. 저도 똑같으면서. 침묵의 식사가 이어졌다.

 

 관계의 깊이와는 상관없이 누구나 꺼내기 싫은 말들이 있다. 본인에 대한 것이라면 더더욱.

 

 

 

 -

 

 

 "남진 씨, 남진 씨."

 

 톡톡, 어깨를 건드리는 손길에 퍼뜩 눈을 뜨니 하민이 장난스레 웃었다. 남진은 입가를 닦으며 고개를 돌렸다. 이용 요금이 아까워 딱 한 시간만 채우려 했던 것이, 포만감과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고 잠든 것이다.

 

 "잠 못 잤댔죠. 졸려요?"

 "네, 뭐… 흐아암."

 "그럼 우리 저기로 갈까요?"

 

 하민이 가리키는 곳은 복층의 다락이었다. 아늑한 나무칸, 푹신해 보이는 매트리스형 바닥과 쿠션. 남진은 웬만한 선반 사이즈만한 하민의 어깨를 가리켜 보였다.

 

 "그쪽이랑 같이 들어가기엔 좁아 보이는데요."

 "안쪽은 보기보다 깊어서 괜찮을 거예요. 편하게 쉬는 게 낫지 않겠어요?"

 

 잠시 고민하던 남진은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들어온 지는 한 시간 이십 분, 지금 나가도 두 시간 요금이 나올 텐데. 돈 아깝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자 하민이 신난 표정으로 만화책과 목욕 바구니를 챙겨들었다.

 

 실내화를 벗고 사다리를 오르자 동그랗고 푹신한 다락에는 원목 특유의 나무 냄새가 그윽했다. 하민의 말대로 밖에서 보던 것보다는 널찍했다. 하민의 거구가 들어차자 답답해지긴 했지만, 남진이 걱정하던 것처럼 불필요한 접촉이 있을만치 협소한 공간은 아니었다. 남진은 쿠션 하나를 집어 베고 누웠다.

 

 "담요 가져다줄까요?"

 "됐어요."

 

 막상 편히 누우니 잠이 오지 않았다. 낮은 천장을 멀뚱히 바라보는데, 시야로 하민이 불쑥 고개를 디밀었다. 복숭아 향 샴푸 냄새가 훅 끼쳤다.

 

 "뭘 봐요."

 

 왜 그렇게 보냐고 물으려던 것이다. 며칠을 물고기처럼 지냈던 탓일까, 말 한마디가 곱게 나가질 않았다. 뱉고서야 후회하며 눈치를 보니, 하민은 별 기분 나쁜 기색도 없이 만화책 한 권을 흔들어 보였다. 표지에는 꽃과 함께 미남 미녀의 일러스트가 그려져있었다. 순정 만화?

 

 "이거 한 번 읽어볼래요? 되게 재밌는데."

 

 평소라면 단칼에 거절했겠지만, 시비조로 뱉은 말이 마음에 걸렸다.

 

 "무슨 내용인데요?"

 "소원을 들어주는 초자연적인 존재에 대한 얘기예요. A군은 그녀를 찾아가, 불의의 사고로 죽은 가족들을 살려달라는 소원을 빌게 되는데…. "

 

 웹툰을 제외한 만화책은 읽어본 적도 없으며, 판타지는 더더욱 취향이 아니다. 그러나 하민의 설명을 설렁설렁 듣던 남진은 점점 귀를 기울이더니, 종내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래서요?"

 "궁금하시면 읽어보세요. 순정 만화는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고."

 

 

 

 -

 

 

 "남진 씨는 참 모순적인 사람이네요. 가기 싫다던 식당에서는 사장님이 박수칠 정도로 드시고, 읽기 싫다던 만화책은 앉은 자리에서 완결까지!"

 

 하민은 뿌듯한 표정으로 담배를 물었다. 남진은 민망한 표정으로 깜깜한 거리를 내다보았다. 잠시만 있으려던 것이 어느덧 어둠이 새까맣게 내려앉고 길가의 행인들이 사라질 때까지였다.

 

 예상보다 만화책은 재밌었고, 좁고 안락한 공간에서 노닥거리며 흘려보내는 시간은 혼자의 것보다 즐거웠다. 남진은 지난 며칠간의 불면과 침묵을 떠올렸다.

 

 "재밌었죠? 그 만화."

 "뭐 그럭저럭…."

 "거기서 어느 부분이 제일 마음에 들었어요?"

 "엔딩이요. 결국 다 떠나고 주인공 혼자만 남던가."

 

 되는대로 답하자 하민이 조용히 웃었다. 역시 해피엔딩을 별로 안 좋아하시나 봐. 벽에 기대어 쪼그려 앉은 하민은 남진을 올려다보았다.

 

 "어떨 것 같아요? 그 만화처럼 전지전능한 존재가 남진 씨 앞에 나타난다면."

 "공짜가 아니잖아요. 다들 끝에는 파탄 나던데."

 "에이, 댓가를 미리 생각하진 말고요. 어떤 소원을 빌고 싶어요?"

 

 별 생각 없이 대답하려던 남진은 문득 하민을 내려다보았다. 평소처럼 미소띤 얼굴이었다. 담배를 태우며 곰곰이 생각하던 남진은 맥없이 중얼거렸다.

 

 "딱히…."

 "나처럼 잘생겨진다던가(남진은 얼굴을 구겼다), 초능력 발현! 이런 현실성 없는 것들이라도 괜찮아요. 혹시 내가 비웃을까봐 그래요?"

 "아뇨, 정말로. 얼굴도 초능력도 관심 없고."

 

 하민은 실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레미콘 차량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적막한 도로를 지나갔다. 다 타들어간 담배를 벽에 비벼 끄며 하민은 몸을 일으켰다. 골목이 금세 좁다래졌다.

 

 "읏차, 오늘 나랑 놀아줘서 고마워요."

 "저야말로."

 "주희한테는 내가 잘 말해놓을게요. 그러니까 불편해하지 말구, 카레집 자주 가요."

 

 뜨끔했다. 남진이 대답 없이 집 쪽으로 걷기 시작하자 하민이 쫄래쫄래 따라왔다. 목욕 바구니가 달그락거렸다.

 

 "맨날 거기 가래. 무슨 홍보 대행사예요?"

 "제가 또 그런 거 잘해요. 전에 판촉 알바를 한 적이 있는데, 두 시간 만에 완판한 거 있죠?"

 "얼굴 때문이겠죠."

 "아, 그것도 인정. 그날 몇 명이 번호를 물어봤냐면-"

 "그건 좀 재수없고!"

 

 시덥잖은 대화를 나누다 보니 금세 몬스테라 대리점 앞이었다. 이제 집까지 혼자 걸어갈 생각을 하니 어쩐지 휑한 기분이 들었다.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하다고 생각하며 작별 인사를 건네려는데, 하민이 잠시만요! 하고 대리점 문을 열고 뛰어들어갔다.

 

 그러고 보니 가게에 밤 열두 시가 넘도록 불이 켜진 것이다. 아까 그 직원 아직까지 퇴근 안 했나? 창문 안쪽을 슬쩍 들여다보니 하민과 직원이 실랑이를 하고 있었다. 불량한 태도, 쩔쩔매는 하민. 점장과 직원의 상하관계로는 보이지 않았다. 원래부터 친한 사이였던 걸까?

 

 "아, 미안해요. 뭣 좀 주려고 들어갔는데, 우리 직원이 내가 너무 늦어서 화났나 봐요."

 

 종이봉투를 손에 든 하민이 나무 문을 열고 나왔다. 문틈으로 언제나처럼 푸른 몬스테라 잎. 팔짱을 낀 직원이 하민의 뒷통수를 노려보고 있었다.

 

 "저 직원 아까 나한테 반말하던데. 몇 살이래요?"

 "…어려요. 한국말이 서투르거든요. 주의시킬게요."

 "외국이라도 살다 왔나 보죠. 근데 이건 뭐예요?"

 

 봉투를 받아들자 적당한 무게감. 안쪽을 확인하던 남진은 의아한 표정으로 스프링이 달린 종이뭉치를 꺼내들었다. 트로피컬 패턴이 그려진 단단한 표지, 펼쳐서 내용물을 들여다보니 격자와 숫자가 가득했다.

 

 "달력이예요. 마음에 드는 걸 몇 개 샀는데, 주변에 나눠주고도 좀 남아서요."

 

 끄덕이며 각종 일러스트가 그려진 달력을 넘겨보던 남진의 손이 멈칫했다. 12월의 한겨울, 한 달도 안 되어 지나갈 해의 달력. 고개를 들자 하민이 투명하게 웃었다.

 

 "책상에 두세요. 원래 쓰던 건 버리시구요."

 

 

 

 -

 

 

 신경과민일까?

 

 남진은 책상에 나란히 놓인 두 개의 달력을 보며 팔짱을 꼈다. 꽃 핀 선인장이 그려진 새 달력과, 마지막 날에 X표가 그려진 기존의 달력. 기막힌 우연의 일치에 장하민이라는 사람의 특성을 이것저것 섞어놓은 것이 가장 상식적인 결론일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오늘?'

 

 눈을 가늘게 뜨고 생각에 잠겨드는 순간, 별안간 핸드폰이 까톡! 울렸다. 하민에게서 온 톡이었다. 양반은 못 되네. 긴장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집어 들자 하민이 보내온 것은,

 

 - 프사 하세요:D

 

 남진의 사진이었다. 만화 카페에서 입을 벌리고 잠들었던. 남진은 얼빠진 표정으로 사진을 보다가, 침대에 핸드폰을 집어던졌다.

 

 "이 또라이가 진짜!"

 

 씩씩대고 있자니 방금의 망상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만화를 너무 재밌게 읽은 모양이었다. 김이 샌 남진은 침대에 몸을 털썩 던졌다. 매트리스 속에서 스프링이 푸르르 떨리는 진동이 아랫배에 닿았다. 누운 채로 달력을 바라보던 남진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어제까지는 그렇게 청해도 오지 않던 잠이 밀려들었다.

 

 사고는 느려지고 머릿속에서 하루의 일들이 뭉그러지며 한데 뭉쳤다. 남진은 주희의 작은 눈과 대리점 직원의 호박색 눈을 떠올렸다. 아이다스 저지와 목욕 바구니, 만화책과 소원을 들어주는 전능한 존재. 그리고 교복, 교복.

 

 '어떤 소원을 빌고 싶어요?' 산드러진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렸다.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졌다. 마지막 칸에 X표를 쳐놓은 달력이 점점 아득해졌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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