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연재 > 현대물
낯선 거리
작가 : 봄동
작품등록일 : 2019.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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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고흐의 모작이 걸린 호프
작성일 : 19-12-27     조회 : 229     추천 : 0     분량 : 9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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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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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거름녘의 겨울은 어김없이 칼바람이 불었다. 퇴근길, 지상철 맞은편의 역전 거리 한복판. 남진은 흰 벽돌에 알전구가 반짝이는 대리점 앞에 멈췄다. 짧은 새에 버릇이라도 든 듯이 퇴근길이면 꼬박꼬박 들르고야 마는 것이다.

 

 짙은 색으로 발라놓은 나무 문 옆에는 못 보던 트리가 놓여 있었는데, 허리춤에나 닿을 만치 아담한 것이었다. 금색의 오너먼트와 꼬마전구가 반짝였다. 남진은 카메라 앱을 열어 트리를 찍고 나무 문을 밀었다. 딸랑, 더운 공기. 그리고 이어질 인삿말?

 

 없었다. 하민도 윤호도 보이지 않았다. 남진은 롱패딩을 벗어 걸어두고 카운터를 향해 목을 뺐다. 벽걸이에 걸린 어마어마한 사이즈의 코트로 보아 하민이 출근한 것은 분명한데. 카운터 근처를 기웃거리는데, 뒤쪽의 창고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알아, 그러다 실패했지. 그래서 어떡하라고?"

 

 날선 말투는 뜻밖에 하민의 것이었다. 남진은 저도 모르게 발소리를 죽이고 문 가까이로 다가갔다.

 

 "나는 이 방식밖에 몰라. 게다가 시간이 별로 없다고. 그 달력은 아직도... 잠깐."

 

 달력? 의문을 가질 틈도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열린 틈새로 작고 검은 것이 잽싸게 뛰쳐나갔다. 테이블로 뛰어오르는 윤호를 보던 남진은 앞을 돌아보았다. 어둑한 창고에는 하민뿐이었다.

 

 "깜짝이야. 남진 씨, 언제 왔어요?"

 "방금. 근데 누구랑 얘기한 거예요?"

 "아, 전화를 좀."

 

 그리 말하며 싱겁게 웃어보이는 것이다. 남진은 테이블로 다가가 윤호의 등줄기를 쓸었다. 커피 마시겠냐는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자, 하민이 커피 메이커에 정수기 물을 채웠다. 거름망 위로 커피 가루가 고운 흙처럼 쏟아졌다. 달고 고소한 냄새.

 

 "그럴 거면 그냥 카페를 하지."

 "난 바리스타 자격증 없는걸요. 장비도 사야 하고."

 "옷가게 해도 잘할 것 같은데. 왜 하필 통신사 대리점이에요?"

 

 전부터 들었던 의문이다. 오늘은 차이나칼라 셔츠 위에 낙엽색 숄 가디건. 저 체구에 맞는 옷 찾기도 힘들 텐데, 항상 스타일이 좋다. 하민은 쟁반에 잔과 쿠키를 가지런히 올려놓으며 말했다.

 

 "요새는 스마트폰이 사람의 인공 장기래요."

 "인공 장기?"

 "개인적인 편차는 있겠지만, 몸에서 떼 놓질 않잖아요. 사람이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기능을 한다는 거예요."

 

 부글부글, 커피 끓어오르는 소리가 냄새와 함께 몽글거렸다. 윤호의 배를 간질이자 손을 물려고 들었다. 동명의 남자와 비슷한 짓을 한다는 생각에 남진은 소리 없이 웃었다.

 

 "그리고 아무래도 커피보다야 스마트폰 찾는 사람들이 더 많겠죠."

 "근데 이렇게 운영해도 본사에서 뭐라 안 하나? 여기 일반 매장 아니죠?"

 "아, 그건 비밀."

 

 배를 보인 채 뒹굴거리던 윤호가 퍼뜩 몸을 일으켰다. 문을 노려보다가 몸을 날려 카운터 뒤쪽으로 달아나는 것을 의아하게 보는데, 차임벨이 딸랑 울렸다. 열린 문틈 새로 찬바람이 훅 불었다.

 

 "어서오세... 앗, 다예 왔어?"

 "오빠! 앞에 트리 세워놨더라? 완전 예뻐!"

 

 단발머리의 여자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하민은 반갑게 그녀와 포옹하고 안부를 물었다. 남진에게 하듯 친근한 태도였다. 둘을 멀뚱히 바라보자, 하민이 테이블로 그녀를 데려왔다.

 

 "남진 씨, 인사할래요? 이쪽은 내 친한 동생."

 "안녕하세요! 노다예라고 합니다!"

 "백남진이예요."

 

 다예가 환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어왔다. 남진은 손을 마주 잡으며 다예를 훑었다. 얇은 테 안경을 쓴 날씬한 여자, 작고 화장기 없는 얼굴이 예쁘장했다.

 

 "다예는 요 근처 호프집에서 일해요. 다예 커피 한 잔 할래?"

 "아, 나 잠깐 심부름 나온 거라서 금방 들어가야 돼."

 "그래? 그럼 이따가 일찍 문 닫고 치맥 한 잔 하러갈게."

 "이 오빠도 같이 오는 거지?"

 

 남진을 가리키며 하는 말이었다. 저요? 하고 되묻자, 하민이 입을 가리며 당황스레 웃었다. 다예는 티없이 맑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따 오시면 서비스 많이 드릴게요, 오빠!"

 "아, 근데 저는..."

 

 사양하려는데 하민이 팔꿈치로 툭 쳤다. 다예는 좀 이따 보자며 환히 웃어보이고는, 짧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활달하게 가게를 뛰쳐나갔다. 마치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듯한 기분이었다. 카운터 뒤로 숨었던 윤호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야옹?

 

 "... 저분 몇 살이에요?"

 "남진 씨보다 네 살 많아요. 스물여덟."

 

 

 

 -

 

 

 역전 대로변, 다예가 일한다는 호프집은 가까웠다. 이번이 몇 번째던가. 오가는 길에 희뿌연 배경처럼 자리하던 가게들이 하나씩 선명해지고 있었다. [Beer] 네온사인이 걸린 유리창. 들어서자 내부는 널찍했다. 노출 천장에 레일 전구와 펜던트 조명이 길게 달려 있었다.

 

 "너무 상심하지 마요. 치킨은 내가 살게요."

 "됐어요."

 "딱히 남진 씨가 노안이라기보단 좀 성숙해보이는 인상이라-"

 "아니, 됐다니까요."

 

 남진은 얼굴을 구기며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평일 저녁이라 사람이 많은 편은 아니었음에도 호프집은 요란했다. 벽면에는 큰 메쉬망을 쳐놨는데, 눈에 익은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강렬한 붓질과 색감. 고흐의 그림이었다.

 

 "안녕. 주문 뭘로?"

 

 그림들을 구경하는데, 다예가 메뉴판을 들고 다가왔다. 하민이 그녀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는데 어딘가 의아했다. 분명 아까는 단발이었는데, 지금은 허리에 닿을 만치 긴 머리를 산발한 것이다.

 

 "우리 치킨 반반에 500 한 잔씩 주라."

 "그래."

 "엄청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이모님 안에 계시구?"

 "응."

 

 게다가 짤막한 말투. 남진이 생경하게 그녀를 보자, 뭘 꼬나보냐는 듯 퉁명한 시선을 던졌다. 싹싹하던 아까와는 대조되는 눈빛이었다. 남진은 어렵사리 말을 붙였다.

 

 "그새 머리 붙이셨나 봐요.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머리를 어떻게 붙여요?"

 "예?... 그야 뭐, 미용실이나 그런 데서."

 "요샌 미용실에서 머리도 붙여주나 보네. 머리가 두 개면 이상할 텐데."

 "?"

 

 남진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하민을 돌아봤다. 이 사람 뭐야? 하민은 뭔가를 말하려다가, 으흐힉 하는 괴성을 내며 테이블에 이마를 박았다. 영문을 모른 채 하민의 뒷통수를 보는데, 주방 안쪽에서 다예가 달려나왔다... 다예가 둘?

 

 "오빠들 왔어요?"

 "야. 쟤가 나한테 머리 붙였냐는데. 나 머리 두 개냐?"

 "뭐래, 등신아."

 

 두 다예가 투닥거리기 시작했다. 얼빠진 얼굴로 다예들을 번갈아 보자 하민은 숨도 못 쉬고 웃었다. 머리 긴 다예가 남진을 흘금 보더니 툭 던졌다.

 

 "쌍둥이 처음 봐요?"

 

 

 

 -

 

 

 "나는 노다미. 쟤는 노다예."

 

 치킨과 맥주, 땅콩 따위가 담긴 쟁반을 들고 온 다미는 자연스럽게 테이블에 합석했다. 한산하다고는 해도 저녁 시간의 호프집, 다예는 여기저기 서빙 중이었다. 자매의 분주함에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다미는 제 몫의 맥주잔을 들어 보였다. 하민이 잔을 가볍게 부딪쳤다.

 

 "바빠 보이는데, 다예 혼자 놔두고 술 마셔도 돼?"

 "친구들 왔는데 뭐."

 

 그렇게 말하곤 남진을 빤히 보는 것이다. 남진이 얼어붙자 씩 웃어 보였다. 얼굴은 똑같은데 웃는 표정마저 달랐다. 다예가 탄산수라면 다미는 투 샷을 추가한 아메리카노 같았다.

 

 "두 분이서 같이 일하시나 봐요."

 "여기 사장이 우리 이모예요. 난 투잡."

 "아... 그럼 어떤 일이랑 같이 하시는데요?"

 "일하기 싫다. 출근이 제일 싫어요."

 

 남진은 잠자코 닭다리를 뜯었다. 혹시 취한 걸까? 하민은 그 맥락 없는 대화에 또 한바탕 폭소를 터트렸다가, 눈을 부라리는 남진에게 말했다.

 

 "다미 화법이 원래 이래요. 대화하기 편한 타입은 아니죠."

 "취하신 거 아니죠?"

 "멀쩡해요. 그래도 머리 비우고 얘기하면 재밌어요."

 

 저를 두고 하는 말임에도 다미는 별 관심이 없어보였다. 한가롭게 맥주를 홀짝이며 매장 티비를 보는 모습이 카레점 사장 승연과 겹쳐보였다. 세상만사 무념한 표정. 이쪽은 어째 희한한 분위기지만.

 

 치킨을 뜯으며 노닥거리는데, 앞치마를 두른 다예가 다가왔다. 꽤 바빴던 모양인지 뺨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야, 이제 니가 일해!"

 "알았다."

 

 다미는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샌가 비운 잔을 챙긴 다미는 남진에게 손을 흔들어보이고 주방으로 향했다. 긴 머리카락이 가느다란 허리에 휘감겼다. 남진의 옆자리에 앉은 다예는 제 잔을 들어올렸다. 챙, 차게 언 유리가 부딪쳤다.

 

 "아, 다예야. 말해줄 게 있는데."

 "뭔데?"

 "남진 씨 너보다 네 살 어리다?"

 "헉, 진짜요?"

 

 진심으로 놀란 표정이었다. 곧이어 다예는 손을 모으며 온 얼굴로 울상을 지었다.

 

 "미안해요. 하민 오빠 친구라고 생각해서, 둘이 비슷한 줄 알았어요."

 "괜찮아요. 말씀 편하게 하세요."

 "그럴까? 그럼 누나라고 불러!"

 

 태세 전환이 빠르다. 울상은 온데간데없이 신난 기색이었다. 표정이 풍부한 모양이지. 이쯤 액면가에 대한 얘기가 나올 타이밍이라, 남진은 급히 화제를 돌렸다.

 

 "사장님이 고흐를 되게 좋아하시나 봐요."

 

 벽의 한 쪽을 가리키자 하민과 다예가 돌아보았다. 가게 한 편의 널따란 벽, 검은 메쉬망에 하나씩 걸린 고흐의 모작들. 다예는 쑥스럽게 웃었다.

 

 "아, 저거 내가 그린 거야."

 "누나가요?"

 "응! 내가 고흐를 되게 좋아하거든. 그림을 배워본 적은 없지만."

 

 남진은 감탄사를 뱉었다. 아마추어의 모작이라기엔 퀄리티가 훌륭했다. 섬세하면서도 강렬한 붓터치는 원작을 인쇄한 것이래도 믿을 정도였다.

 

 "전 실크스크린 작품인 줄 알았어요."

 "다예가 그림을 진짜 잘 그리죠. 대단하지 않아요?"

 "모작만 하는데 뭘."

 "저기, 저 그림도 누나가 그리신 거죠?"

 

 한 그림을 가리키자 일순 다예의 표정이 굳었다. 그늘지고 가장 구석진 자리, 초라하게 걸린 캔버스에는 노란 얼굴이 한가득 차있었다. 옆의 모작들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엉성했지만, 원색은 강렬했고 이목구비는 다예를 닮아 있었다. 다만 그림 속 심슨(남진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의 표정은 무척 어두웠다.

 

 "자화상이예요?"

 "응, 그렇지. 아, 근데 왜 둘이 서로 존댓말 써? 아까 하민 오빠도 남진 씨라고 하던데. 둘이 친구 아냐?"

 

 화두가 희한한 방향으로 돌아갔다. 남진은 눈을 굴렸다. 만난 지는 얼마 안 됐고, 매일같이 얼굴 보는 사이. 게다가 집까지 방문한 전적이 있다면 친구인 걸까? 하민이 우는 시늉을 내며 손에 얼굴을 묻었다.

 

 "남진 씨가 나한테는 말 놓으라는 말을 안 하더라구. 오늘 처음 본 너랑은 누나동생 하면서. 너무하지?"

 "그럼 남진이는 오빠한테 뭐라고 부르는데?"

 "저기요, 그쪽, 점장님."

 "푸핫, 그게 뭐야. 한 번 형이라고 불러봐!"

 

 남진과 하민의 시선이 마주쳤다. 형? 하민이 미소지으며 턱을 까딱였다. 아무래도 연장자니 그런 호칭으로 부르는 게 맞겠지만, 어쩐지 입이 쉽사리 떨어지질 않았다. 남진이 주먹을 쥐락펴락하며 고민할 때였다.

 

 "아, 여기 좀 앉아보라니까!"

 

 컬컬한 고성. 돌아보니 코가 빨갛게 익은 남자가 쟁반을 든 다미에게 소리를 지른 것이었다. 다미는 짜증이 난 표정으로 긴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내가 거길 왜 앉아요."

 "저짝 테이블엔 앉았잖어!"

 "쟤넨 내 친구들이고. 아저씨 나 알아요? 난 아저씨 모르는데."

 "이게 진짜!"

 

 보아하니 취객이 되도않는 생떼를 쓰는 모양이었다. 그 테이블에는 비슷하게 취한 여러 명의 중년 남성들이 앉아있었는데, 다들 입으로는 그만하라면서도 말리려 들지는 않았다. 주변의 손님들 또한 흘금거릴 뿐 나서는 이가 없었다. 옆 테이블의 커플이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씨, 괜히 시끄럽게."

 "아재 진짜 민폐. 근데 알바도 좀 조용히 넘기면 안되나? 여기 다 동네 장산데."

 "솔직히 좀 그렇지."

 

 '동네 시끄러워서 좋을 거 하나 없어.'

 '다 이웃사촌이잖아.'

 '그러니까 남진아, 네가...'

 

 한순간 시야가 어두워지며 언젠가의 목소리가 겹쳐 들렸다. 손끝이 식고 목 위로 서서히 열이 올랐다. 남진이 몸을 일으키려는데, 하민이 팔을 붙들었다. 돌아보자 고개를 가로젓는 것이었다. 남진은 그것이 퍽 이상하게 느껴졌다.

 

 "왜요?"

 "가만있어요, 남진 씨. 우리가 낄 데가..."

 "왜 그쪽이 그런 말을 해요?"

 "네?"

 

 "술집년이 어딜 눈깔을 부라려?!"

 

 기어코 욕설이 터져나왔다. 수수방관하던 손님들의 시선마저도 쏠렸다. 딸기코는 한층 의기양양한 태도로 다미를 향해 삿대질하고 폭언을 퍼부었다. 남진이 저를 말리는 하민과 다예의 손길을 뿌리쳤을 때였다.

 

 "뭐여, 시방."

 

 주방의 문이 열렸다. 쿵, 쿵. 육중한 걸음걸이가 바닥을 울리자 손님들의 시선이 주방으로 향했다. 따라 고개를 돌린 남진은 얼어붙었다.

 

 그 걸음은 추를 단 듯이 묵직했다. 기백은 용이었으며 눈빛은 매와 같았다. 희끗한 파마머리를 동여맨 붉은 두건, 걷어올린 양 팔에 문신이 가득했다. 왼손에는 후라이팬, 오른손에는 중식도를 든 중년 여성이 밝은 빛을 등지고 걸어나왔다.

 

 흡사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리게 걸어나온 사장은 문제의 테이블 앞에 멈춰섰다. 모두의 이목이 집중됐다. 사장은 굳어버린 딸기코와 팔짱을 낀 다미를 차례로 보았다.

 

 "무슨 일이당가?"

 "나보고 지 테이블에 앉으래."

 

 형형한 눈으로 딸기코를 보던 사장은 다미에게 후라이팬을 건넸다. 한 손이 빈 사장은 딸기코에게 가까이 다가서며 중식도를 한 바퀴 돌렸다. 휘리릭, 날이 짧게 번뜩였다. 사시미를 다루는 양 가벼운 손놀림이었다.

 

 "아따, 울 조카애랑 한잔하고 싶으셨소. 아가 참 곱지요."

 "그게..."

 "근디 울 애기는 바쁘다 안 하요."

 

 사장은 겁에 질린 중년 남성들을 향해 씩 웃어보였다. 금니가 반짝였다.

 

 "그니께는 애기는 닭 튀기고 나가 여 앉겠다 이 말이요. 알간?"

 

 

 

 -

 

 

 "장난 아니다."

 "우리 이모님 너무 멋있죠?"

 

 남진은 강렬한 이모님의 등장과 도망치듯 빠져나가던 취객들을 떠올렸다. 마치 한 편의 희극처럼 통쾌한 장면이었다. 호프 뒤쪽의 골목, 볼이 패이게 담배를 빨던 하민이 연기 도너츠를 만들었다. 따라 해보려니 생각보다 어려웠다.

 

 "그래서 아까 나서지 말라고 했던 거예요?"

 "음- 뭐 그런 것도 있구요."

 

 묻는 시선을 보내자 하민은 손에 쥔 담배를 까딱였다. 큼직하고 마디마디가 불거진 손. 남진은 저 손에 팔목이 붙들리던 순간을 떠올렸다. 마냥 참견꾼인 줄로만 알던 사람이 뜻밖에 적극적인 관조의 태도를 취하던 것을.

 

 "솔직히 의외였어요. 남진 씨가 나설 줄은 몰랐거든요. 다예나 다미나, 남진 씨한테는 초면인데."

 "딱히 그 누나들 때문은 아니고..."

 "주희 때랑 비슷한 거겠죠. 자세한 건 죽어도 말 안 해줄 거고."

 

 입을 닫자 하민은 방긋 웃었다. 붉은 벽돌이 켜켜이 쌓인 담벼락 위로 나트륨등의 노란 불빛이 쏟아졌다.

 

 "근데 나는 이모님이 안 계셨어도, 다미나 다예가 도와달라고 말하기 전까진 굳이 나서지 않았을 거예요."

 "왜요?"

 "다미는 주짓수 퍼플벨트거든요. 걔한테 잡히면 저도 순식간에 넉다운이예요."

 

 남진은 입을 떡 벌렸다. 아담한 키에 가냘픈 허리의 그녀는 유단자였던 것이다. 입김과 연기가 섞인 숨을 뱉은 하민은 말을 이었다.

 

 "누구나 하나쯤 무기를 가지고 있잖아요. 그걸로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사람한테는 오지랖 부릴 필요 없어요."

 "그럼 그쪽은 왜 나한테 오지랖 부리는데요?"

 "우리 남진 씨는 너무 연약해서?"

 "뒤져요, 진짜."

 

 벌컥, 뒷문이 열렸다. 방금의 술상을 치운 다예가 쓰레기봉투를 들고 나온 것이다. 아는 체를 하려는데 하민이 조용히 뒷걸음질쳤다. 거대한 몸이 담벼락과 가로등의 그림자 속에 교묘히 숨었다.

 

 "어디 갔나 했더니 담배피고 있었구나? 하민 오빠는?"

 "...화장실 갔어요."

 

 봉투를 버린 다예는 손을 탁탁 털더니 담벼락 근처로 다가왔다. 하민을 곁눈질하던 남진은 몸을 약간 틀었다. 남진의 몸으로 시선이 막힌 다예는 별 의심하는 기색도 없이 야트막한 담벼락에 등을 기댔다.

 

 "담배 끌까요?"

 "아냐, 괜찮아."

 

 침묵. 골목 바깥에서 차 소음과 발소리, 목소리 따위가 뒤섞여 들렸다. 다예는 안경을 벗고 앞치마 주머니에서 안경닦이를 꺼냈다. 하아, 안경에 입김을 불고 닦는 것을 보던 남진은 다예의 자화상을 떠올렸다. 노란 얼굴.

 

 "아까 그 그림이요."

 

 다예가 안경을 든 채 올려다봤다. 남진은 연기를 한차례 마셨다 쉬었다.

 

 "되게 괜찮던데."

 "그래? 고마워."

 "마음에 별로 안 드시나봐요."

 

 짧은 웃음소리.

 

 "같이 걸어둔 고흐 모작이랑 비교해보면 확실히 별로지."

 "전 그 자화상이 제일 좋았는데요."

 "왜?"

 "누나 그림이잖아요. 세상에 딱 한 점밖에 없는."

 "하민 오빠가 해보라더라."

 

 돌아보니 여전히 미소 띤 얼굴이었다. 나트륨등에 노랗게 물든 얼굴 위로 오뚝한 코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 표정이 자화상의 것과 비슷해보여 유심히 보는데, 다예가 남진의 손에서 담배를 가져갔다.

 

 "모작만 그리지 말고 내 그림을 그려보라 하더라고. 엄청 응원해줬어."

 "아."

 "그런데 딱 한 장 그리고 못 그리겠더라."

 

 다예는 뺏어든 담배를 물었다. 깊게 마셨다가 연기를 뱉는 폼이 익숙해보였다. 도로 건네는 담배를 받아들자 다예는 안경을 썼다. 얇은 유리 한 장일 뿐인데, 단단한 막이 드리운 것처럼 보였다.

 

 "너한테는 또 어떨지 모르겠지만..."

 "뭐가요?"

 "다정한 말들을 조심해. 잠깐 기분이 나아질 수는 있어도, 스스로한테 그런 말 못 해주는 사람한테는 결국 독이거든."

 "예?"

 

 대답 대신 미소. 다예는 몸을 돌려 뒷문으로 향했다. 짧은 머리카락이 목 근처에서 찰랑였다. 이모가 서비스 주신다니까 빨리 들어와! 경쾌한 목소리를 뒤로하고 문이 닫혔다. 남진은 속으로 셋을 세었다가, 뒤를 돌았다.

 

 그림자 속의 하민은 닫힌 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늘진 눈빛이 서글퍼 보였다. 헛기침을 하자 하민은 노란 불빛 아래로 걸어나왔다. 커다란 몸에 드리운 그림자가 서서히 걷혔다.

 

 "왜 숨었어요?"

 "방금 들었잖아요."

 "하나도 이해 못했는데요."

 

 물론 다예의 말에서 생략된 주어가 하민이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지만, 그 이상의 것은 알기 힘들었다. 하민은 필터까지 타들어간 담배를 재떨이에 꽂았다. 가라앉은 표정은 온데간데 없고 평소와 같은 얼굴이었다.

 

 "둘이 무슨 사이예요?"

 "사귀던 사이."

 "...진짜?"

 "당연히 농담이죠. 다예는 남진 씨한테 관심 있는 것 같은데?"

 

 순식간에 김이 빠졌다. 그럴 리가 있나. 인상을 쓰자 하민이 히죽 웃었다.

 

 "진짠데. 다예 전 애인들이 남진 씨 같은 스타일이기도 했구요."

 "나 같은 스타일이 뭔데요."

 "...적당하고 평범한 매력?"

 

 미련 없이 몸을 돌리자 하민이 바짝 따라붙었다. 아이 참, 삐치지 마요. 남진 씨도 잘 생겼어요, 매력 있다니까!

 뒷문을 여니 다미와 다예가 카운터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자리에 앉는데 쌍둥이가 동시에 남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똑같은 얼굴들이 빤히 보다가 저들끼리 웃으며 수근댔다. 분명 남진의 이야기가 나온 것이다. 남진이 바짝 얼어붙자, 하민이 거보라며 어깨를 툭 쳤다.

 

 "내 말이 맞죠?"

 "그래서 뭐... 어쩌라고요."

 "관심 없어요?"

 "별로."

 

 심드렁하게 대답하자 하민은 제 턱에 꽃받침을 해보였다.

 

 "그렇구나. 역시 남진 씨는 내가 좋은 거죠?"

 "미친 거 아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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