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연재 > 현대물
낯선 거리
작가 : 봄동
작품등록일 : 2019.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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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다문화 어린이 도서관
작성일 : 20-01-03     조회 : 222     추천 : 0     분량 : 70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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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요?... 아뇨, 나오긴 했는데.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남진은 시간을 확인했다. 출근시간 10분 전, 사정이 생겨 오늘 영업을 못한다는 연락을 받은 것이다. 남진은 한숨을 쉬며 어둑한 유리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미리 좀 말해주지."

 

 하기사 진작에 연락할 일이었다면 갑작스럽게 하루를 공치진 않을 터였다. 남진은 턱의 상처를 긁적였다. 늦었답시고 급히 면도하던 중에 생채기가 난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느긋하게라도 나올걸.

 

 오전 10시 경의 역전은 한산했다. 아직 문 열지 않은 가게가 수두룩했고, 도로의 차들도 드문드문했다. 역시 변두리 지역이라 생각하며 도보를 걷는데, 바로 옆에서 경적이 울렸다. 돌아보니 경차 한 대가 바짝 붙어 천천히 따라오는 것이었다. 차창이 내려가며 날카로운 눈매가 드러났다.

 

 "남진 씨!"

 

 카레 전문점 사장, 승연이었다. 남진은 고개를 가볍게 까딱였다.

 

 "안녕하세요."

 "어디 가?"

 "알바하러 왔는데, 오늘 문 안 연대서 그냥 집에 가요."

 "그럼 타. 데려다줄게."

 

 차를 멈춰 세운 승연은 엄지로 차 내부를 가리켜보였다. 얼떨결에 조수석에 탑승한 남진은 주소를 묻는 말에 답하고 안전벨트를 맸다. 포근한 방석이 깔린 좌석, 백미러에는 손바닥만한 사이즈의 미니어처 만국기가 걸려 있었다. 일일이 오려낸 코팅지. 가게의 것과 비슷해보였다.

 

 "어디 다녀오시나봐요."

 "병원."

 "다치셨어요?"

 "정신과. 약 타러 갔어."

 

 승연은 콘솔박스에서 약봉지를 꺼내어 흔들어보였다. 말문이 막힌 남진은 입을 닫았다. 창밖으로 불 꺼진 가게와 행인들이 휙휙 스쳤다.

 

 "쌍둥이들 만났다며."

 "예?... 아, 호프집."

 "걘 요새 괜찮나? 나랑 같이 병원 다녔는데, 언제부턴가 안 오더라고."

 

 백미러에 비친 눈빛이 평소처럼 무심했다. 이런 얘기를 들어도 되나? 남진이 머뭇거리자 승연은 시원스레 웃었다.

 

 "정신과 다니는 게 뭐 별거라고. 병원은 치료보다 예방 목적으로 가는 거야."

 "아... 그렇죠. 여기서 좌회전이요."

 

 더 묻지는 않았지만, 예의를 지키려는 심중에도 궁금증이 들었다. 다예와 다미, 둘 중 어느 쪽일까? 애써 깊게 생각하지 않으려는데 차가 멈췄다. 걸어서 이십 분은 걸리는 거리를 오 분도 채 안 되어서 도착한 것이다. 안전벨트를 풀자 승연이 대뜸 물었다.

 

 "저녁에 뭐해? 한 일곱 시쯤."

 "뭐 없는데요."

 "음, 그러면..."

 

 남진은 승연이 입술을 문지르는 것을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이 호쾌한 여자가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주저하는 걸까? 잠시 망설이던 승연은 한숨 쉬듯 말했다.

 

 "나 뭣 하나만 부탁해도 돼?"

 

 

 

 -

 

 

 헐벗은 가로수 사이의 작은 상가. 계단에서는 물에 젖은 냄새가 났다. 2층에 오르자 색종이를 오려 붙인 나무, 어린 손으로 그린 그림들이 벽에 붙어 있었다. 남진은 파스텔톤의 신발장에 운동화를 넣고 유리문을 밀었다. 따뜻한 우유 냄새가 훅 끼쳤다.

 

 '어린이 도서관이요?'

 '오늘 무슨 행사가 있다더라고. 끝나면 주희 좀 데려와줄래?'

 

 차까지 얻어 탄 마당에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 기세 좋은 여자가 육아 앞에 작아지는 것이다. 그러니 게으른 몸을 끌고 나올 수밖에.

 

 작은 상가의 2층에 자리한 어린이 도서관, 책장들은 야트막하고 탁상들은 알록달록했다. 행사가 있었다는 말대로 중앙 공간은 번잡했다. 사서와 봉사자들 여럿이 종이 쪼가리가 널브러진 바닥을 쓸고 닦는 중이었다. 도서관이라기보다 지역 문화공간처럼 느껴졌다.

 

 관내를 둘러보던 남진은 구석지의 책장 뒤에서 낯익은 교복을 발견했다. 남색 니트조끼 아래로 회색 교복 치마, 그 옆에는...

 

 "그리고 여기는 스리랑카. 어딘지 알아?"

 "웅. 엄청 더워."

 "또?"

 "덥구, 또, 스님들이 많아!"

 "역시 우리 주희 똑똑하네. 박사님 해도 되겠어!"

 

 ...흰 셔츠에 차콜색 경량 패딩조끼. 무릎 위에 책을 얹은 하민은 주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어이없는 표정의 남진을 향해 웃어보였다.

 

 "안녕, 남진 씨. 주희 데리러 온 거죠?"

 "그걸 어떻게... 그쪽 가게는요?"

 "윤호가 보고 있죠."

 

 이쯤 되면 악덕 업주다. 주희가 남진을 보더니 반갑다는 듯 손을 마구 흔들었다. 아뎌띠! 예의 혀 짧은 소리. 전에 눈물을 보였던 것이 떠올라 얼굴을 붉히니, 하민이 앉으라는 듯 옆의 바닥을 툭툭 쳤다.

 

 "사장님이 주희 데려오랬는데. 행사 끝난 거죠?"

 "조금만 있다 가요. 주희가 이렇게 좋아하는데."

 "어린이 도서관을?"

 

 맞은편에 주저앉으며 중얼거리자 하민이 카운터 데스크에 쓰인 글씨를 가리켰다. [다문화 어린이 도서관] 그러고 보니 곳곳에 걸린 국기들. 책장에는 다른 나라의 언어로 쓰인 동화책이 가득했다.

 

 "다문화?"

 "여긴 외국인들이 많은 지역이니까요. 중국인들이 대부분이지만. 그래도 주희는 마음에 든 모양이예요."

 "웅, 여기 됴아. 이 책두!"

 

 주희는 하민의 무릎에 놓인 책을 집었다. 한눈에도 재미없어 보이는 어린이용 세계지리 교육서, 단단한 하드커버의 겉표지에는 커다란 세계지도가 몽실하게 그려져 있었다. 문득 카레 전문점과 승연의 차 앞유리에 걸려있던 것이 떠올랐다. 남진은 작게 중얼거렸다.

 

 "만국기..."

 "나는 다아 가볼꺼야. 여기 브라질부터, 여기 남극까지!"

 "가서 뭐하게?"

 

 반짝거리는 눈. 주희는 맑게 외쳤다.

 

 "세계 일쭈! 아뎌띠도 같이 갈래?"

 

 

 

 -

 

 

 참 따사로운 광경이다.

 

 따습고 아늑한 도서관, 낮은 책장에 기대어 앉은 미남자와 장애아. 하민은 주희의 손을 잡아 지도의 여러 곳을 짚어주었다. 각 나라의 이름을 읊조리는 주희의 입술은 꿈에 젖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남진은 인상을 쓰며 고개를 돌렸다.

 

 우유 냄새가 나는 까닭이 있었다. 관내에는 어린이들뿐만 아니라 영유아를 데리고 온 젊은 부모들이 있었다. 행사도 벌인다더니, 문화 공간처럼 느껴진 것이 착각이 아닌 모양이었다.

 

 "아, 여긴 사막이야."

 "긍데 왜 하얘?"

 "소금으로 만들어진 사막이거든!"

 

 맑은 웃음소리. 차라리 지난번의 호프집이 나았다. 모작만을 그린다던 다예와 취객에게 시달리던 다미가. 젖비린내와 동화책이 가득한 공간은 낯설었고, 지도의 곳곳을 읽는 둘의 모습은 거북했다.

 

 속이 꼬여도 단단히 꼬인 탓이다. 남진은 담배를 피우던 하민의 우묵이 패인 볼을 떠올렸다. 다정하게 세계의 곳곳을 설명하는 말소리가 언젠가 창고 틈으로 새어나오던 날선 목소리와 겹쳐 들렸다. 솔직히 위선적이라고.

 

 화목하게 책을 읽는 둘의 모습은 폐교에서 보았던 부녀 동상처럼 소름끼쳤다. 커다란 미남 곁의 다운증후군 소녀는 정말 약자처럼 보였다. 흠집 없는 하민을 한껏 빛내는, 기준치 이하의 잣대. 비교 대상은 주희뿐만 아니었다. 이 정다운 광경마저 낮잡아보는 자신이야말로...

 

 "누나는 왜 그런 거 읽어?"

 

 깨랑한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리니, 초등학교 저학년생으로 보이는 소년이 서있었다. 스포츠 헤어에 파란 안경을 낀 꼬마는 주희의 교복을 위아래로 훑었다.

 

 "중학생 아냐?"

 "맞는데?"

 "그거 애들이나 읽는 거잖아."

 

 어린이용 교육서를 보며 하는 말이었다. 열 살이나 됨직한 꼬마 입에서 '애들이나'라는 말이 나오자 하민이 헛웃음을 지었다. 주희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티만 난 이게 뎨밌는걸."

 "에이. 그냥 바보라서 그런 거지?"

 "나 바보 아닌데?"

 "바보 맞는데, 맞는데? 얼굴도 말하는 것도 바보같아!"

 

 성선설은 누가 짓껄인 개소리던가. 꼬마는 주희 곁의 거구가 눈에 뵈지도 않는지 악의를 담아 빈정댔다. 멍청한 꼬마네, 남진은 태평히 책장에 몸을 기댔다. 영악한 아이는 어른이 곁에 있을 때 입을 함부로 놀리지 않는다. 하민의 반응이 궁금해 고개를 돌리니, 뜻밖에 눈이 마주쳤다. 그는 꼬마가 아닌 남진을 보고 있던 것이다.

 

 "이번엔 안 나서네요."

 "예?"

 "주로 다수와 개인의 갈등을 못 견디나봐요?"

 

 관찰자는 남진이 아닌 하민이었다. 표정이 굳자, 하민이 손뼉을 딱 쳤다. 꼬마의 이목이 하민에게 쏠렸다.

 

 "친구야. 이 책이 무슨 내용인지 알아?"

 "모르는데요? 왜요?"

 "그럼 여기에 얼마나 멋진 지도가 있는지도 모르겠네. 이리 한 번 와볼래?"

 

 하민은 꼬마를 제 곁에 앉히고 책의 앞장을 펼쳤다. 거대한 세계지도, 한 장 한 장을 넘길 때마다 각 나라의 배경과 문화가 펼쳐졌다. 하민의 입을 빌어 세계의 곳곳이 꿈틀댔다. 마치 마법처럼, 손때묻은 어린이용 교육서가 근사한 기밀서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따뜻한 미색의 조명, 아이들이 하나씩 모여들었다. 수줍게, 혹은 신나게 다가온 어린이들은 주희와 하민을 중심으로 비좁은 책장 틈새를 에워쌌다. 아이들을 둘러보던 남진의 시선이 문득 주희의 얼굴에 멈췄다. 설렘 가득한 눈.

 

 "그리고 이 누나는, 여기 있는 나라들을 다 가볼거야. 우와, 너무 멋있지?"

 

 

 

 -

 

 

 "왜 그래요?"

 "뭐가요."

 "저기압이잖아요."

 

 짧은 해가 떨어진 골목, 주희를 데려다놓은 후였다. 남진은 도서관에서 카레점까지 십오 분 남짓 걸어온 길과, 승연과 주희에게 인삿말을 건넨 행적을 되짚어보았다. 원체 말이 많은 편도 아니고, 퉁명스레 굴지도 않았는데.

 

 "어째서 카레를 안 먹겠다는 거예요? 사장님표 카레 엄청 좋아하잖아요."

 

 이것 때문이었나. 남진은 김이 팍 샌 얼굴로 담배를 물었다. 배 안 고프다니까요. 말하자 하민은 제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포마드로 깔끔히 정리한 머리카락이 가닥가닥 헝클어졌다.

 

 "아까 내가 했던 말 때문에 그래요?"

 "아니라고요. 왜 내 눈치를 봐요?"

 "남진 씨는 표정이 너무 솔직하니까요. 눈치 안볼래야 안 볼 수가 없어요."

 

 대답 않자 긴 한숨. 하민은 주머니를 뒤지는 남진의 입가에 라이터를 가져갔다. 칙, 작게 피어오른 불꽃이 하민의 턱과 입매를 밝혔다. 그 위로 언제나처럼 다정한 눈이 드러났다. 이유 없는 짜증에도 걱정어린 눈빛.

 

 "엄청 신경쓰네."

 "뭘요?"

 "주희."

 

 그렇게 말하자 의아한 표정이었다. 남진은 담벽에 기대어 쭈그렸다.

 

 "그쪽 애도 아니면서, 놀아주고 안아주고 데리러도 가고."

 "주희가 절 좋아하니까요. 사장님은 바쁘시구..."

 "과해. 아빠라도 되어줄 생각이예요?"

 

 하민이 입을 닫자 남진은 킬킬댔다. 속이 쓰리니 입이라도 웃어야 할 것 같았다.

 

 "뭐 잘 어울려요. 사장님이랑 그쪽."

 "남진 씨, 그런 거 아니예요."

 "아니면 더 이상하지. 주희가 불쌍해요?"

 

 올려다보니 가로등을 등진 몸이 참 커다랬다. 어깨와 등으로 쏟아지는 노란 불빛, 표정을 알아보기 힘들었다.

 

 "보통 애들이랑 다를 거 없다는 식으로 말했으면서."

 "남진 씨."

 "당신 태도를 봐요. 누가 봐도 동정이지."

 "내가 주희한테만 잘 대해주려고 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래, 나도 불쌍한 새끼라고 생각하잖아."

 

 장초를 집어던지자 불씨가 파박 튀었다. 몸을 일으켰는데도 하민의 얼굴은 저만치 위에 있었고, 여전히 속을 읽기 힘들었다. 남진은 짓씹듯 말했다.

 

 "왜 그렇게 못 챙겨서 안달이야, 내가 얼마나 주인 없는 똥개처럼 보였으면. 혼자 두면 안될 것 같아요? 잘난 그쪽이 보듬어줘야 할 것 같아?"

 "..."

 "좋은 말 한다고 좋은 사람 되는 거 아니예요. 역겹다고요."

 

 돌아서자 콧잔등이 시큰했다. 열등감과 자기방어로만 똘똘 뭉쳐서는. 마구 뱉은 말들이 되려 속을 찔렀다. 골목 바깥으로 몇 걸음을 내딛자, 어느덧 익숙해진 거리의 풍광. 곳곳마다 낯익었다.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나는 분명 이방인이었는데.

 

 익숙함이 그렇다. 비틀리고 못난 속내를 들키고야 마는 것이다. 다정히 손을 내미는 남자에게는 모욕을, 순수한 꿈을 그리던 소녀에게는 격하를 던진 저녁. 발가벗겨져 추한 몸뚱이를 내보인 기분이었다. 눈에 닿는 사방이 따갑고 아렸다. 어금니를 꽉 물고 발을 떼는 순간,

 

 "남진 씨."

 

 저도 모르게 발이 멈췄다. 어깨를 건드린 손이 주춤하며 물러났다.

 

 "미안해요. 내 태도에 그런 문제가 있는 줄 몰랐어요. 그런데..."

 

 그림자가 앞으로 드리웠다. 조심스레 뻗어온 손이 눈가를 덮었다. 축축한 손바닥, 옅은 향수와 담배 냄새가 풍겼다.

 

 "괜찮아요?"

 

 대답도 거부도 할 수 없었다. 남진은 그제야 무엇을 견디기 힘들었는지 깨달았다. 처음 이상한 통신사 대리점에 발을 들이던 때, 미소짓던 얼굴에 속이 거북하리만치 답답했던 것. 그것은 우월도 위선도 아닌, 온전한 선의였다.

 

 "아뇨. 이런 거 하지 마세요."

 "남진 씨."

 "제발요. 나한테 이러지 마요. 나는, 그러니까 나는..."

 

 뜨거운 것이 뱃속에서 올라와 목줄기를 타고 요동쳤다. 해서는 안 될 말을 뱉어내려는 순간,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민 오빠? 남진이?"

 

 

 

 -

 

 

 "어우, 너 발 진짜 빠르다. 둘이 싸웠어?"

 "아뇨."

 

 오래된 지역들이 그렇듯, 이 거리에도 골목이 많다. 폭발 직전의 순간에 나타난 다예는 어쩌면 구원자였다. 도망치는 남진을 따라 달려온 다예는 가쁜 숨을 고르며 쭈그려앉았다. 남진은 담벼락에 이마를 기댔다. 단단한 냉기. 속에서 끓어오르던 것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아니면 뭐, 하민 오빠가 너한테 개수작 부렸어?"

 "..."

 "너 화났지. 그치?"

 

 올려다보며 배시시 웃는 얼굴이 벌갰다. 엷은 술냄새가 호흡을 타고 퍼졌다. 다예는 남진의 팔을 잡고 끌어내렸다. 무너지듯 주저앉은 남진은 인상을 쓰며 팔을 뿌리쳤다. 왜 따라왔나 했더니 술주정이야. 다리를 아무렇게나 던져두고 숨을 고르는데, 다예가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어디 살아?"

 "근처 원룸."

 "가까워?"

 "엄청."

 "나 가도 돼?"

 

 잠깐 호흡이 멈췄다. 투명한 유리알 너머로 큼직한 눈. 옅은 미소로 다물린 입술과 뺨으로 술기운이 붉게 올라있었다. 한 뼘의 거리에서 남진과 다예는 눈을 마주했다. 톡 쏘는 알코올 냄새.

 

 "아뇨."

 

 다예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목 근처에서 단발의 머리카락이 간지럽게 흔들렸다.

 

 "너 겁 많구나. 그치?"

 "네."

 "무서웠겠다."

 "뭐가요?"

 "장하민."

 

 지난번, 호프집 뒤쪽에서의 대화가 떠올랐다. 뜻 모를 말을 하던 다예는 조소를 담아 하민의 이름을 말했다. 다예는 남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견디기 힘들지?"

 "또 뭐가요."

 "착한 거, 따뜻한 거, 아주 그냥 드라마를 찍는 거."

 

 헛웃음이 났다. 작게 피식거리던 것이 점점 크게 번졌다. 이 여자는 나와 닮은 구석이 있다. 그렇게 생각하며 남진은 킬킬댔다.

 

 "웃기고 눈꼴시려워."

 "촌스럽고 같잖아요."

 "야, 너 나랑 말 좀 통한다?"

 "누나도 어지간히 꼬이셨네요."

 "죽을래!"

 

 퍽! 가슴팍이 얼얼했다. 얻어맞은 곳을 쓸어내리는데, 다예가 어깨에 코를 문댔다. 두꺼운 패딩 너머로 오뚝한 콧망울이 비비닥거렸다.

 

 "너도 알지? 우리가 못난 거야."

 "..."

 "착한 게 죄니? 비틀린 사람 잘못이지. 이유 없이 잘해주니까, 쓸데없이 겁이나 먹고. 못난 나를 곱씹기나 하고."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남진은 가로등을 올려다보았다. 노란 불빛에 먼지들이 반짝거렸다. 어깨에 파묻힌 술냄새. 초저녁 어스름을 닮은 소리로, 다예는 중얼거렸다.

 

 "난 이제 관두려고. 더는 못 하겠어서..."

 

 

 

 -

작가의 말
 

 표지 일러스트를 그렸는데 업로드가 안되네요 8ㅁ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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