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연재 > 현대물
낯선 거리
작가 : 봄동
작품등록일 : 2019.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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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책방, 굴다리, 침대
작성일 : 20-01-15     조회 : 230     추천 : 0     분량 : 8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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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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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 몇 시나 되었을까.

 

 사차선 교차로와 신호등을 지나, 빗물이 질척대는 아스팔트를 지나, 어느 순간 눈앞에는 젖은 굴다리가 있었다. 불이 들어오지 않아 깊고 어두운 굴다리. 우산을 든 남진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탁, 탁. 통로를 울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한 치 앞도 가늠할 수 없는 굴다리의 어둠을 바라보자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다가오던 발소리가 점차 느려지더니, 어느 순간 뚝 끊겼다. 치익, 마찰음과 함께 불꽃이 작게 피어올랐다. 성냥개비를 든 손이 말했다.

 

 "백남진?"

 

 

 

 -

 

 

 눈을 뜨니 낯선 것이 시야에 가득했다. 저 멀고 깜깜한 것이 무엇일까 고민하던 남진은 잠시 뒤, 그것이 하민의 방 천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창밖으로 뭉툭한 빗소리가 처마를 두들겼다. 이불을 걷었는데도 여전히 후끈했다. 침대를 가득 메운 온수 매트에서 뜨끈한 기운이 끓고 있는 것이었다.

 

 어젯밤 더블사이즈 침대에 남자 셋이 구겨자던 것이 떠올랐다. 기어코 침대에서 자겠다는 윤호와 바닥에서 손님을 재울 순 없다던 하민의 설전을. 말싸움이 길어지자 남진은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셋이 같이 침대에 눕자고 제안했고, 그 말에 하민은 눈을 빛내며 냉큼 '그럴까요?' 하는 것이었다.

 

 예상만큼 비좁진 않았다. 침대를 고집하던 사람 윤호는 어디로 갔는지, 고양이 윤호가 남진의 허리춤에서 잠들어 있었다. 짧은 털을 쓸며 천장의 펜던트 조명을 바라보는데, 옆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잠이 안 와요?"

 "좀 더워서."

 

 드르륵, 창문 열리는 소리. 커튼이 펄럭이고 찬 공기와 빗소리가 방 안으로 쏟아졌다. 겨울비가 시원하게 내리는 모양이었다. 창문을 연 하민은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 머리만 빼꼼 내놓았다.

 

 "바람 부네..."

 "바닷바람이 산을 타고 불어오거든요. 봄이 오면 안개도 많이 낄 거예요."

 "다예 누나랑 무슨 말 했어요?"

 

 뒤죽박죽이었던 사건들, 현실과 허상의 혼재. 그러나 자신이 만약 몬스테라 대리점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하민은 남진이 언제를 묻는 것인지 알기 힘들 터였다. 교묘한 질문을 던진 남진은 고개를 돌려 하민을 보았다. 그러나 하민은 눈을 감은 채 웃고는, 다른 말을 꺼냈다.

 

 "연애 해본 적 있어요?"

 "아뇨."

 "섹스는?"

 "안 해봤어요."

 "누구 좋아해 본 적은?"

 

 입을 다물자 하민이 베개에 팔을 괴었다. 남진은 그의 시선을 마주하며 기시감을 느꼈다. 어둑한 방, 90도로 기울어진 시야, 열일곱 살의 한겨울.

 

 "어떤 사람이었어요?"

 "..."

 "어떤 마음이었어요?"

 

 '내가 비밀을 말해주면, 너도 솔직하게 말해줄 수 있어?'

 

 몽울진 한때의 감정. 눈가에 열이 올랐다. 열린 창으로 여전히 빗방울이 아스팔트 때리는 소리, 겨울비가 내리는 밤. 갈비뼈가 먹먹하게 죄어들었다. 하민을 더 바라보고 있을 수가 없어서 고개를 돌리는데, 눈에 익은 것이 들어왔다. 남진은 침대 옆의 스탠드 테이블로 팔을 뻗었다.

 

 "이거..."

 

 찰랑, 얇은 금속 사슬들이 부닥쳤다. 다예가 윤호를 쫓을 때 썼던 팔찌와 비슷한 디자인의 목걸이. 세트로 만들어진 것처럼 보였다. 하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예 누나 꺼 아니예요?"

 "맞아요. 두고 갔나 보네요."

 "누나가 여기 왔어요?"

 

 롱 스탠드와 침대와 나이트 테이블, 바닥에 깔린 러그와 커튼이 전부인 방. 하민을 돌아보자 미소짓는 얼굴이었다. 남진은 그것이 낯설게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방어적인 웃음. 차라리 제게서 흔한 표정이었다.

 

 

 

 -

 

 

 "백남진?"

 

 굵은 빗줄기가 우산을 때렸다. 어두운 굴다리, 하느작대는 성냥개비가 말했다. 이윽고 어둠 속에서 다예가 걸어나왔다. 한 손에는 팔각 성냥곽을 든 채였다. 성냥의 나무 막대에 불이 옮겨붙자, 다예는 바람을 후 불어 불을 껐다. 흰 연기가 가느다랗게 피어올랐다.

 

 "여기서 뭐해?"

 

 그러는 누나는요, 속으로 생각하며 다예를 위아래로 훑었다. 격자무늬 셔츠 위에 코트를 입은 것이 어젯저녁의 차림새와 같았다. 다예가 남진을 향해 손짓하자, 남진은 굴다리로 들어가 우산을 접었다.

 

 "이제야 조용해졌어."

 "뭐가요?"

 "아까까지만 해도 꽤 시끄러웠거든."

 

 귀를 기울였지만 사방엔 빗소리만 가득할 뿐이었다. 다예는 새 성냥을 꺼내어 성냥곽의 거친 벽면에 그었다. 탁, 탁. 두어 번 긋자 빨간 머리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주홍으로 턱과 입술이 물들었다. 남진은 그 빛이 전혀 따뜻해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굴다리는 단단하고 어두웠다. 울리는 발소리에 어디선가 물방울 똑, 똑, 떨어지는 소리가 섞여들었다. 성냥 불빛을 제하고는 사방 분간이 힘들 정도로 어두웠다. 다섯 걸음에 한 번씩 멈춰가며 새 성냥을 꺼내던 다예는 입을 열었다.

 

 "어디 있다가 왔어? 이 시간에."

 "..."

 

 남진은 하민의 방을 떠올렸다. 성기게 짜인 러그가 깔린 나뭇바닥, 더블 사이즈 침대와 두툼한 소라색 이불. 동그랗게 몸을 말고 잠든 윤호와 뛰쳐나가는 자신을 말없이 바라보던 하민. 대답이 없자 다예는 고개를 갸웃했다.

 

 "알바한댔지. 어디서 일해?"

 "왜요?"

 "그냥. 궁금해서."

 

 올려다보는 눈. 성냥의 불꽃이 눈동자 속에서 일렁였다. 남진은 며칠 전 똑같은 질문을 받았던 것을 떠올렸다.

 

 

 

 -

 

 

 "남진 씨는 어디서 일해요?"

 

 일렉트로닉 팝과 사람 키만한 몬스테라, 늘 덥고 평화로운 몬스테라 대리점. 고양이 윤호와 노닥거리는 남진에게 하민이 물어본 것이었다. 남진이 들은 체 만 체 하자 하민은 눈썹을 팔자로 휘었다.

 

 "알려주기 싫어요?"

 "찾아올 거잖아요."

 "내가요? 허, 나 아주 바쁜 사람이예요!"

 

 말과는 다르게 하민은 일없이 카드를 세우는 중이었다. 남진은 도미노처럼 줄지어 세워놓은 카드를 보며 인상을 썼다. 하민이 주먹을 말아쥐고 동동거렸다.

 

 "안 알려주면 밤마다 카톡해서 귀찮게 해줄 거예요!"

 "땡깡부리면 이 카드들 쓰러트릴 거예요."

 

 하민은 입속으로 꿍얼대더니 괜스레 윤호의 꼬리를 잡아당겼다. 윤호는 귀찮다는 듯 꼬리를 팡 내리쳤다. 그 바람에 세워놓은 카드들이 흔들거리더니, 촤르륵 일렬로 쓰러졌다. 울상이 된 하민이 외쳤다.

 

 "이럴 거면 땡깡 부릴걸!"

 

 

 

 -

 

 

 박스를 정리하던 남진은 허리를 폈다. 높은 책장 너머로 오크목으로 마감한 벽, 진열대에는 엽서와 생활 소품 따위가 늘어져있었다. 채도 낮은 올리브색 벽에는 미색 조명, 흰 글씨가 쓰여진 쇼윈도 앞에는 원목 하프 테이블.

 

 "이래서 말을 못 해준다고."

 

 안락한 분위기의 책방. 구석의 테이블에서 한 모녀가 함께 책을 읽고 있었다. 책은 몰라도 분위기는 확실히 하민의 취향이었다. 골목 속에 숨은 동네 책방, 따스하고 세련된 인테리어, 편안하게 즐기는 독서와 여유. 하민이 알게 된다면 하루 걸러 하루는 죽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신간 정리를 끝내놓고 빈 박스를 접는데, 문이 열렸다.

 

 "어서 오..."

 

 남진은 그대로 돌아 책장 뒤로 숨었다. 책장 너머를 살그머니 돌아보니, 역시 예상대로였다. 실내로 들어서며 행여나 부딪치지 않을까 머리 위를 살피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민이 구둣소리를 내며 책방 안으로 들어섰다. 남진은 접힌 박스를 꼭 끌어안은 채 숨을 죽였다. 대체 여길 어떻게 알았지? 미행했나? 말로만 듣던 뒷조사? 오만 생각이 머릿속을 떠돌았다.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다가, 탁 멈췄다. 심장이 졸아들었다.

 

 "오, 신간."

 

 책장 달그락거리는 소리. 김이 팍 샜다. 하민이 맞은편의 박스형 책장에서 책을 집어 든 것이다. 그러고 보니 여기서 일하게 된 것도, 그를 알게 된 것도 얼마 되지 않았다. 역전 골목, 취향의 책방. 하민이 이곳을 이미 알고 있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안도의 한숨을 쉰 남진은 목을 길게 뺐다.

 

 골목길이 비치는 쇼윈도, 책과 생활 소품이 얹힌 박스 책장, 카멜색 코트 안에 흰 목폴라 스웨터를 받쳐 입고 흑백 만화를 읽는 거구의 남자. 남진의 고개가 잠시 기울었다가, 바로 섰다.

 

 

 

 -

 

 

 "어디서 일하는지도 알려주기 싫어?"

 "아뇨. 동네 책방이요."

 

 다시 굴다리. 다예는 남진의 대답을 듣더니 입술을 오므렸다.

 

 "되게 의외다."

 "왜요?"

 "편의점같이 사람 별로 안 대하는 알바 할 줄 알았어."

 "고객 응대는 사장님이 거의 하세요. 저는 주로 청소하고, 책 정리하고, 커피나 차 만들고... 손님들 대할 일은 거의 없어요."

 

 훅, 바람 부는 소리. 다예는 또다시 멈춰서서 새 성냥을 그었다. 여전히 물 똑똑 새는 소리. 남진은 다예가 쥔 성냥이 계속 신경쓰였다.

 

 "하민 오빠도 알아? 너 거기서 일하는 거."

 "..."

 

 남진은 입을 닫았다. 대답할 말이 마땅찮았기 때문이었다.

 

 

 

 -

 

 

 안 가네.

 

 남진은 쇼윈도의 하프 테이블에 자리를 잡는 하민을 보며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스툴에 코트를 벗어두는 꼴이 작정하고 오래 있을 모양이었다. 대리점은 직원 윤호에게 (뻔뻔스럽게) 떠넘겼을 테고, 테이블에 놓아둔 책은 타라 덩컨. 저럴 거면 저 좋아하는 만화카페나 가지.

 

 그래서 나가, 말아? 카운터로 다가오는 하민을 보며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책장 앞의 창고 문이 벌컥 열렸다. 꽁지머리에 수염을 기른 중년 남자가 쟁반을 들고 나오다가, 남진과 눈이 딱 마주쳤다.

 

 사장은 남진을 위아래로 훑었다. 박스를 든 채 책장 뒤에 숨은 꼴을 본 사장은 하민을 턱짓해보였다. '아는 사람?' 남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곤란한 표정을 마주한 사장은 카운터로 다가갔다. 사장을 발견한 하민이 해맑게 웃었다.

 

 "안녕하세요! 여기 라떼류는 없나요?"

 "아메리카노도 캡슐 커핀데요, 뭐. 싼 이유가 있죠?"

 "으핫! 그럼 레몬티 한 잔 주세요. 따뜻한 걸로요."

 

 남진은 둘이 대화하는 틈을 타 창고로 쏙 들어갔다. 일이나 하자. 접어놓은 박스들을 정리하고 새 박스를 뜯어 품목을 확인하는데, 금세 음료를 내놓은 사장이 뒤이어 들어왔다. 사장은 두꺼운 철문을 닫고는 바깥을 가리켜보였다.

 

 "아는 사람 맞지? 친구야?"

 "뭐... 근데 저 사람 여기 자주 와요? 아니면 전에 왔던 적 있어요?"

 

 사장은 도로 창고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가게를 내다보던 사장은 잠시 후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렇게 체격 좋은 사람이 흔한 것도 아니고, 봤으면 기억했겠지."

 

 

 

 -

 

 

 "글쎄요. 아는지 모르는지..."

 

 그 말에 다예는 대답이 없었다. 잠시 흐른 침묵을 타고 물 떨어지는 소리가 일정했다. 남진은 이 상황이 불편했다. 다예와 함께 하민의 이야기를 하는 상황. 하민의 침실에서 발견한 다예의 목걸이가 떠올랐다. 머릿속으로 질문을 고르는데, 다예가 먼저 입을 열었다.

 

 "커피도 판댔지? 나도 한 번 가보고 싶다."

 "오세요. 가게 예뻐요."

 "진짜?"

 "사장님이 예전에 영화 쪽에서 미술감독 하셨대요."

 

 탄성이 터졌다. 순진하게 감탄하는 다예를 보며 남진은 약간 의아했다.

 

 "책 좋아하세요?"

 "응. 되게 좋아해."

 "되게 의외... 아야!"

 

 얻어맞은 팔을 문지르니 얼얼했다. 때마침 성냥을 끌 때가 되어 손이 빈 것이다. 몸이 작고 손이 매운 여자는 새 성냥을 꺼내들어 그었다. 심통난 목소리였다.

 

 "내가 책 좋아하는 게 의외야?"

 "그런 게 아니라. 그림 좋아하는 사람들은 글 별로 안 좋아할 줄 알았는데."

 "그림이랑 글은 다르지. 개인적인 생각이긴 하지만, 그림은 표현에 가깝고 언어는 사고와 밀접하니까."

 

 

 

 -

 

 

 "그런 게 좋아요. 언어는 불분명한 생각을 밖으로 끄집어내주고, 애매한 감정들을 콕 짚어내주잖아요!"

 

 남진은 하민의 뒷통수를 노려보았다. 창고 정리를 한 시간이나 하고 나왔는데도 하민은 여전히 테이블에 죽친 채였다. 심지어 사장까지 합세. 옆자리에 앉은 사장은 하민 앞의 책을 가리켜보였다.

 

 "타라 덩컨을 앞에 두고 할 말은 아닌데."

 "판타지도 결국 사람 얘기잖아요. 공감할 구석이 있는."

 "금수저 미소녀가 제국 후계자가 되기 위해 모험을 떠나는 이야기가?"

 "얼굴로 공감할 수도 있죠."

 

 어김없이 꽃받침을 해보이는 것이다. 부끄러움은 왜 타인의 몫인지. 남진은 벌개진 얼굴을 푹 숙였다. 사장은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야, 읽을 줄 아는 친구네. 우리 알바생도 그랬으면 좋겠는데."

 "알바생이요?"

 

 몸이 퍼뜩 얼어붙었다. 남진은 고개를 홱홱 내저었다. 사장은 온 얼굴로 거부 의사를 표명하는 남진을 짖궂게 바라보았다.

 

 "응. 여기 알바하는 친구 있는데, 그 친구는 만날 책 만지면서 볼 생각은 죽어도 안 해."

 "텍스트 읽는 걸 별로 안 좋아하나보죠?"

 "정확히 말하면 그 친구는..."

 

 지금이라도 튀어나가서 아는 체를 할까. 남진의 머릿속에서 상황을 무마할 갖가지 깽판의 시나리오가 펼쳐지던 순간, 사장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핸드폰을 들여다본 사장은 하민에게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 자기야. 유리문이 차임벨 소리와 함께 열렸다.

 

 고요해진 책방. 하민은 타라 덩컨을 다시 펴들었다. 금발 벽안의 미소녀가 그려진 책표지. 남진은 그가 한때 제게 권했던 만화책을 떠올렸다. 선남선녀와 꽃이 그려진 만화책. 예쁜 것을 좋아하는 모양이지. 마치 그 자신처럼.

 

 오후의 졸리운 햇살이 내려앉은 귓바퀴가 희게 빛났다. 덩치에 비해 지나치게 고운 얼굴. 남진은 다예를 떠올렸다. 작은 얼굴과 시선을 잡아끄는 눈. 솔직히, 미인. 그들과 저 사이에 투명한 막이 있는 것처럼 이질적이었다. 둘이 한데 있으면 퍽 완벽한 그림이니.

 

 그 사이에 끼어든 남진은 깍두기 내지는 엑스트라인 것이다. 있어도 그만, 없으면 금상첨화. 어쩐지 심사가 뒤틀려 인상을 쓰는데, 하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되게 마음에 든다. 누구랑 같이 오고 싶네."

 

 혼잣말이었지만, 꼭 대화의 단편 같았다.

 

 

 

 -

 

 

 "저는 글 별로 안 좋아해요."

 "왜?"

 

 하민은 그 자리에서 두어 시간 가까이를 죽치고 있다가, 타라 덩컨 시리즈를 열 권이 넘게 사갔다. 아는 체를 할까 말까 고민했지만, 구태여 숨은 마당에 뒤늦게 얼굴 내미는 것도 퍽 이상한 일이었다. 다만 쇼윈도 너머로 커다란 뒷모습이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유리창 위로 희게 쓰여진 글자들이 뒤집혀있었다. 남진은 그때의 글귀를 가만히 떠올렸다.

 

 "너무 정확해서요."

 "알 것 같아. 나도 글보다 그림이 더 좋거든."

 "그런데 왜 모작만... 아, 죄송해요."

 

 생각에 잠겨있던 탓일까, 심중의 말이 여과없이 나왔다. 다예의 눈치를 살피자, 다예는 별 기분나쁜 기색도 없이 웃었다.

 

 "무서워서."

 "예?"

 "결국 나를 드러내야 하니까. 나는 그게 끝까지 무섭더라고."

 

 특별히 성적인 호감이 아니더라도, 사람은 사람이 궁금해질 수 있다. 남진은 다예가 궁금했다. 어두운 굴다리를 성냥 한 개비에 의존해서 걷는 다예가, 캔버스를 태우던 다예가, 온 몸통에 흉터가 있는 다예가, 투명하게 웃는 다예가,

 

 "너도 그런 게 싫은 거지? 들키는 거."

 

 판에 찍은 듯 닮은 생각을 하는 다예가. 남진은 제 속이 훤히 드러내보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퍽 이상했다. 누군가 자신을 읽고 있는데, 그것이 하나도 두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었다.

 

 남진은 다시금 다예의 목걸이를 떠올렸다. 생각해보면 다예는 언제나 제게 관심을 보였고, 그녀의 관심이 어디에서 시작된 것인지 알 것만 같았다. 하민이 저를 가까이했기 때문이다. 쓴맛이 혀에 감돌고 니코틴이 당겼다.

 

 어느새 굴다리의 끝, 파르스름한 새벽하늘이 멀리로 펼쳐졌다. 사위가 아까보다 한층 밝았다. 더 이상 불을 켤 필요도 없을 텐데, 다예는 멈춰서서 또다시 성냥을 그었다.

 

 "가게?"

 "예?... 가야죠. 안 추워요?"

 "응. 춥네."

 

 그러나 다예는 발을 떼지 않았다. 다만 타오르는 성냥의 머리를 가만히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성냥이 다 타들어갈 때까지. 작은 얼굴에서 주홍빛이 사그라들자, 남진은 손에 쥔 것을 내밀었다. 축축하게 젖은 우산.

 

 "갈 때 이거 쓰고 가요."

 

 빈 손으로 우산을 건네받은 다예는 남진을 잠시 올려다보다가, 몸을 돌려 어둠 속으로 걸어갔다. 성냥개비를 태우던 손에는 젖은 우산이 똑, 똑, 물을 떨궜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뒷모습이, 책방의 쇼윈도 너머로 떠나가던 하민과 겹쳐보였다. 유리창에 적혀있던 글귀가 떠올랐다. 남진은 뒤집힌 글씨를 하나씩 입속으로 읊었다.

 

 스스로 의미를 주는 것만이 삶이다.

 

 어둠이 다예를 집어삼켰다. 물 떨어진 자욱만 남긴 채였다.

 

 

 

 -

 

 

 굴다리 바깥으로 나오니 빗줄기가 꽤 잗다랬다. 금방 멎을 모양이지. 후드를 푹 눌러쓰고 패딩을 여몄다. 굴다리 앞으로 펼쳐진 아침의 도로, 겨울비가 내리는 길을 걷는데 어느 순간 위쪽에서 우산 꽁다리가 톡 튀어나왔다. 돌아보니 호박색 눈이 짜증스레 깜빡였다. 남진은 순간 떠올렸던 이름을 도로 삼켰다.

 

 "여기 어떻게..."

 "물 묻히지 마. 축축해."

 "그럼 우산 씌워주질 말던가."

 "나 말고 너."

 

 두터운 야상 점퍼를 입은 윤호는 하품을 했다. 품이며 깃이 헐거운 것이, 아무리 봐도 제 사이즈의 옷이 아니었다. 말없이 갓길을 걷는데, 윤호가 대뜸 입을 열었다.

 

 "쟤랑 같이 있지 마."

 "쟤?"

 

 윤호는 굴다리를 턱짓해보였다. 지켜보고 있었나? 기분이 팍 상한 남진이 얼굴을 구겼다.

 

 "내가 누나랑 있든 말든 니가 무슨 상관이야."

 "하지 마."

 "이게 자꾸 명령조야. 너 몇 살이냐?"

 "두 살."

 "개소리도 가지가지..."

 

 투닥거리며 갓길을 걷는데, 주변이 점점 더 환해졌다. 새벽과 아침의 경계선에 다다른 것이다. 아직은 푸릇한 하늘, 옅게 안개가 꼈다. 젖은 풀내음을 맡던 남진의 코 끝에 익숙한 냄새가 섞여들었다. 허공에 코를 벌름대자 윤호가 따라 킁킁대기 시작했다.

 

 "탄내 난다."

 "탄 내..."

 

 남진은 주변을 돌아보았다. 분명히 굴다리, 폐공장 옆의. 안개가 끼어 시커멓다고만 생각했던 건물이 생각보다 가까웠다. 남진은 그제야 폐공장이 새까맣게 탄 것을 발견했다. 사방에는 폴리스 라인, 그리고 주차된 경찰차.

 

 폐공장 안쪽에서 경찰 근무복을 입은 두 사람이 걸어나왔다. 그들은 꽤 피곤한 모양새로 우산을 펴고는, 경찰차로 다가갔다.

 

 "그래도 비가 와서 불길이 금방 잡혔네요. 대체 누가 이런 데다 불을 지른 거야?"

 "하도 철거 안 하니까 시위라도 하나보지. 뭐 발견된 거 없어?"

 

 경찰차에 기댄 둘은 담배를 꺼내물었다. 찰칵, 라이터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작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성냥이요. 요새 누가 성냥을 쓴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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