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심하게 내리고 있지만 빗소리를 뚫고 똑똑히 들려왔다.
“송이 씨, 지금 편의점 가려고 나왔으니까 이따 다시 연락할게.”
진문이가 전화를 끊고 우산을 폈다. 마당을 가로질러 걸어간다.
그가 대문 밖으로 완전히 나갈 때까지 나는 벽에 딱 달라붙어서 몸을 숨겼다.
내가 왜 숨었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내 몸이 저절로 반응했다.
“아…… 후!”
참았던 숨을 토했다. 나도 모르게 계속 숨을 참고 있었다.
빡구가 자기 집에 앉아 나를 쳐다본다.
나와 진문이를 제외하고 조금 전 상황의 유일한 목격자다.
지금 나는…… 몇 달 전에 내게 프로포즈한 남자가 다른 여자에게 사랑 고백하는 걸 들은 것이다.
그 자식을 우산으로 내리 찍었어야 했나?
이상하다…….
불 같이 화를 내며 따져야 정상인데 무섭다.
뭐가 무서운지도 정확히 모르면서 내 기분이 그렇다.
지금은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다.
들고 있는 이 김치 부침개를 하숙생들에게 갖다 줘야한다는 것 말고는.
좀비처럼 1층 현관문을 열었다.
“오예! 비오는 날엔 부침개지! 진문이형 방금 술 사러 나갔는데 못 봤어?”
차라리 못 봤으면 얼마나 좋았게?
휴학하고 1년 간 고향인 부산에 내려간다고 짐을 싸던 장현이가 부침개 접시를 받아들었다.
비오는 날 엄마의 김치 부침개는 하숙생들에게 언제나 열렬한 환영을 받는다.
“진문이는 요새…… 어때? 계속 늦게 들어오는 거 같던데.”
진문이에 대해서라면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지만 모르는 척 하숙생들에게 물었다.
“전문가의 의견으로는 말이지. 그 놈 요즘 연애하는 거 같아.”
아……. 괜히 물어봤어.
임재의 말이 총알처럼 내 몸 여기저기에 박혔다. 아프다.
“그래? 네가 어떻게 알아? 너 눈치 없잖아.”
“얘 봐라? 나 눈치 빼면 시체야.”
웃기시네. 정말 눈치가 빨랐다면 진문이랑 사귀기 시작한 2년 전에 진작 알아챘어야지.
“방에서 밤새 통화하는 소리도 들었어!”
밤새 통화를 한다고?
나는 아니다. 진문이랑 밤새 통화했던 적은 없다.
“라디오 소리 아니야?”
“넌 진문이 달라진 거 못 느껴? 난 딱 보면 알겠던데. 하긴 네가 좀 둔하지.”
예상치 못한 임재의 2차 팩트 폭력이다.
“야! 넌 공부를 하는 거야, 마는 거야? 맨날 술만 마시니까 자꾸 시험에 떨어지는 거 아니야!”
임재한테 소심한 복수를 해보지만 만족스럽진 않다.
십분 후 진문이가 맥주를 사들고 들어왔다.
우산을 접으며 무심한 표정으로 내 옆을 스쳐갔다.
“진문아, 빨리 앉아. 방금 축구 시작 했어.”
“형! 맥주 던져. 던져.”
하숙생들이 TV 앞에 빙 둘러 앉았다. 한국과 스페인 축구 경기다.
여기저기서 개인 중계방송을 시작한다.
“축구는 스페인이지. 애들이 잘 나가도 변하질 않아요.”
“맞아. 우리나라 애들 봐라. 좀만 잘 나가면 붕 떠가지고 변해.”
“에헤이. 저 자식 인기 좀 끌더니 변했네. 패스가 예전만 못해.”
임재가 젓가락으로 부침개를 가로 세로 찢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변하는 게 젤 나빠! 양아치 같은 새끼! 저러다 후회하지. 도대체 왜들 변해?”
내 목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나왔다. 맥락도 없이 화를 냈다.
“누나, 위층에서 한 잔 하고 내려 왔어?”
소파 밑에 기대서 맥주를 마시던 장현이가 웃으며 말했다.
“너 점점 헛소리가 는다. 자꾸 난폭해져. 이래서 여자는 사랑을 해야 돼.”
임재가 웃음기 없는 얼굴로 거들었다. 정말 눈치 없기는.
옆에 앉은 진문이를 쳐다봤다.
축구를 보면서도 핸드폰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그 여잔가? 송이…….
얼굴은 모르겠지만 이름에서는 완패다.
“스페인 애들 중에서 누가 제일 잘하는 선수야?”
내가 그게 뭐 궁금하겠어?
딱히 알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진문이와 대화하기 위해 꺼낸 말이다.
“8번. 쟤가 제일 잘했는데 모르지 뭐. 실력이 변했을 수도 있고.”
진문이의 마지막 말이 머릿속에 맴돈다. ‘변했을 수도 있고…….’
“컨디션에 따라 달라지는 거니까.”
그가 바로 말을 덧붙인다.
“엇. 저 봐. 컨디션 안 좋으니까 실수를 하잖아.”
너도 단지 컨디션이 안 좋아서 실수하고 있는 거라면 좋겠다.
그건 봐줄 수 있을 거 같다.
결혼하기 전 한 번씩 겪는 시행착오는 있기 마련이라니까…….
솔직히 세상 남자 다 변해도 진문이 만은 변하지 않을 거라 믿었다.
자만하고 있었다.
준희랑 남영이도 그렇게 말해 줬다. 진문이는 변할 남자가 아니라고.
결국 둘 다 헛짚은 거지만!
순간 얄미운 감정이 폭발했다.
쟁반 위에 있던 오징어를 일부러 두툼하게 찢어서 진문이 손에 쥐어줬다. 축구를 보며 의심 없이 받아든 오징어를 꽤나 인내심을 갖고 질겅질겅 씹더니,
“아…… 씨. 왜 이렇게 질겨.”
탁자 위에 오징어를 툭 던진다.
방금 나를 살짝 째려 본 거 같다.
사람이든 오징어든 질기면 버림받는 법인가?
“송이!”
버려진 오징어를 쳐다보다가 나도 모르게 그 여자 이름을 오징어처럼 툭 던졌다.
“뭐?”
진문이가 핸드폰을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위에 포도송이…… 있는데 먹을래?”
내가 지금 뭐라는 건지. 그래도 나쁘지 않은 순발력이었다.
“아까 내려 올 때 가지고 오지. 내일 먹자.”
진문이 대신 임재가 대꾸했다.
“초코송이……! 먹을 사람.”
바닥에 있는 과자 봉지를 뜯으며 외쳤다.
“나 덜어 줘. 내 완소 과자!”
장현이가 손바닥을 쑥 내밀었다. 그냥 몽땅 줘버렸다.
“새송이……! 반찬도 있어.”
이번엔 진문이가 쳐다보지 않는다.
“난 새송이 버섯은 별로야.”
임재의 말이 마치 ‘그 여자’ 는 별로 라는 것처럼 들렸다.
“그치? 송이는 별로지?”
‘송이’ 에 힘을 주면서 얼른 맞장구를 쳤다.
진문이를 곁눈질로 훔쳐봤다.
웃는다!
핸드폰 속 그 둘만의 세상에서 웃고 있다. 활짝…….
요즘 나를 보고 저렇게 웃었던 적이 있었나?
“나 먼저 올라갈게.”
모르겠다.
머릿속이 뒤죽박죽이다. 정리를 해야 한다.
뭐를 어떻게 정리해야 하는지는 몰라도 여기에 더 앉아 있어봤자 좋을 게 없다는 건 잘 알고 있다.
“그래. 잘 자!”
하숙생들의 굿나잇 인사를 뒤로하고 현관문을 닫고 나왔다.
그새 비는 그쳤다.
이층으로 올라가다 계단 중간쯤에서 멈춰 섰다.
“애들이 인사할 때 진문이 목소리도 있었나……?”
멍하니 침대에 걸터앉았다.
정말 진문이가 다른 여자를 사랑하고 있다고?
그 송이라는 여자한테 ‘사랑해’ 라고 말한 건 아니었지만 통화 내용이 그랬다.
진문이 말투 자체가 사랑이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거슬러 올라가야 바로 잡을 수 있지?
2년 넘게 만나고 프로포즈까지 한 남자가 불과 몇 달 새 다른 여자에게 마음을 뺏기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받아들이기 어렵다.
“잠깐 한 눈은 팔 수 있잖아?”
진짜 그렇게 생각해?
내 안에 억눌려 있는 내면의 목소리가 꽥하고 소리쳤다.
메시지 알림 소리에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얼떨결에 친구 먹은 스페인 남자의 메시지다.
▶라울> 평소 이 시간엔 뭐해요? 지금 서울 시간이?
▷나> 술 마시기 딱 좋은 시간요.
아까 마신 맥주 두 캔이 책상 위에 나란히 찌그러져 있다.
▶라울> 그런가요? 마침 나도 와인 한 잔 하고 있는데.
▷나> 스페인 와인이요?
▶라울> 설마 한국 와인이겠어요? 와인 좋아해요?
▷나> 없어서 못 마시죠. 술이잖아요!
▶라울> 하하하. 술을 좋아해서 와인도 좋아한다는 뜻이군요. 나쁘진 않은 대답이네요.
라울의 마지막 메시지를 읽은 후 부엌으로 나와 냉장고 문을 열었다.
“어라? 맥주가 없네? 맞다……. 어제 그 두 개가 다였지.”
싱크대 옆에 놓여 있는 소스 상자로 시선을 돌렸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전에 먹다 남은 와인이 꽂혀 있을 것이다.
“나이스, 있다!”
오늘 하루 있었던 일들 중 제일 기쁘다.
머그잔에 남은 와인을 가득 따랐다.
“이건 어디 와인이지? 메이드 인 스페인?”
방으로 들어와 붉게 찰랑이는 와인을 보며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나> 방금 저도 와인 한 잔 따라 왔는데 스페인 와인이네요.
▶라울> 그렇군요. 나중에 내가 와인 좀 보내 줄까요?
▷나> 와인을요?
▶라울> 가지고 있는 게 와인 뿐 이라.
▷나> 혹시 와인 바 하세요?
▶라울> 네? 와인 바요? 하하하. 저는 와인 관련 일을 하고 있습니다.
▷나> 아, 와인 회사 다니시는 구나.
생각해 보니, 이 남자한테 잘못 간 메일 대부분이 진문이에 대한 얘기다.
이 남자가 그 얘긴 모르는 척 해줬으면 좋겠는데…….
▶라울> 아까 1층엔 남자 친구를 만나러 내려갔던 건가요?
이런 제기랄.
머그잔에 꽉 채운 와인을 단숨에 벌컥 벌컥 마셨다.
▷나> 아뇨. 그냥 엄마 심부름이요.
▶라울> 괜찮아요?
순간 쿵 하고 심장이 내려앉았다.
이 남자가 뭐라고 했다고 이래?
▷나> 뭐가요?
▶라울> 그냥 뭐든. 지금 기분이든, 마시고 있는 와인이든, 남자 친구든……. 괜찮은 거예요?
생뚱맞게 이 타이밍에 왜 울컥하지? 스페인 와인 때문인가 아니면, 이 스페인 남자가 하는 말 때문에?
▷나> 지금 마시고 있는 와인 빼고는 다 괜찮지 않네요. 그것도 이미 알고 계실 거 같지만.
▶라울> 아직 헤어지진 않았군요.
아직은?
식탁 끝에 위태롭게 놓인 유리잔은 살짝만 건드려도 떨어진다.
나는 지금 그 유리잔 같은 상태다.
깨지고 싶지 않아서 간신히 버티고 있는 나를 이 남자가 자꾸 톡톡 건드리는 것 같다.
▷나> 헤어지 다뇨? 결혼할 사이인데!
▶라울> 요즘 결혼들을 많이 하죠. 전 벌써 두 번이나 갔다 왔습니다.
▷나> 벌써요? 하긴, 요즘 세상에 두 번 정도는 흠이 아니죠.
▶라울> 네? 그럼 결혼식을 세 번가면…… 그건 흠이 되나요?
▷나> 아, 결혼식! 라울이 결혼을 두 번 했다는 말인 줄 알았어요.
당신이 대화 논점을 흐려서 오해가 생겼잖아!
▶라울> 남자 친구랑 결혼하고 싶어요? 정말 사랑인지 아닌지 잘 판단해야 할 거 같은데.
▷나> 사귀다 보면 다들 권태기가 있죠. 아직 확실한 거 아니에요. 제가 잘못 들은 걸 수도 있어요!
와인을 너무 한꺼번에 마셨나?
밑도 끝도 없이 아까 있었던 일을 말해 버렸다.
▶라울> 잘못 들어요? 뭘……? 이런. 남자 친구가 다른 사람을 만나고 있나요? 한번 마음 떠나면 되돌리기 쉽지 않은데. 특히 남자는.
▷나> 아뇨. 떠난 거 아니거든요? 그냥 잠깐 흔들리는 거겠죠. 다시 돌릴 거예요.
나 뭐래니. 정말 취했다. 취했어.
▶라울> 어떻게? 쉽지 않을 텐데요.
▷나> 내가 알아서 해요. 노력을 해야죠! 라울도 여자 친구한테 사랑 받으려면 노력하세요.
▶라울> 글쎄요. 사랑 받기 위해 노력하는 건, 내가 잘하는 일이 아니라서.
나는 뭐 잘해서 그러는 줄 알아?
웃겨 정말.
▶라울> 사랑 받고 싶어서 일부러 애쓰는 건 어리석은 짓이에요.
그 짓을 요즘 내가 하고 있다.
▷나> 그래도 노력은 필요해요. 난 오늘도 애 썼는데요? 헛짓이었지만.
가끔 인간은 왜!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속마음을 터놓게 되는 거지?
내 인생에 전혀 영향을 미치는 존재가 아니라서 그런가?
▶라울> 그 남자를 사랑해요?
▷나> 혹시 라울씨도 취했어요? 남자 친군데 당연한 질문 아닌가요?
▶라울> 당연한가? 만나는 상대를 다 사랑하는 건 아니죠. 연인들의 반은 서로 사랑한다고 착각하거나 감정이 부풀려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는데.
이건 뭐 정열의 나라 스페인 남자 마인드 인거냐?
▷나> 사랑을 너무 비관적으로 보는 거 아니에요?
▶라울> 당신은 사랑을 너무 낙관적으로 보는 거고요.
▷나> 비관적인 것 보단 낫죠.
▶라울> 정확히 말하자면 난 비관적인 게 아니라, 현실적인 거라고 말해두죠.
현실적으로 그러시던지 말든지.
▷나> 편하실 대로.
▶라울> 그런 말이 있어요. 사랑과 태양은 같다. 똑바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똑바로 쳐다보려 한다면 줄줄 흐르는 눈물은 각오해야 한다!
대단한 철학자 나셨네.
갑자기 피곤해진다.
새 친구의 사랑학 개론을 듣다가 침대 밑에 쳐 박아 두었던 잡지책을 꺼내 아무 페이지나 폈다.
이런 게 다 있네?
‘권태기 극복을 위해 나 이렇게까지 해봤다!’
무심코 펼친 페이지의 제목이다!
라울이 사랑을 너무 낙관적으로 보는 거 아니냐고 비꼴 때쯤, 이 잡지책에서 다시 사랑을 되찾는 방법을 발견했다.
연애를 하고 있거나 결혼한 여성 100명을 대상으로 한 인터뷰 조사다.
권태기를 극복했던 방법들 중‘특단의 조치’는?
1위. 스트립 댄스 or 섹시한 동영상.
성공률 85%
벌떡 일어나 방문을 잠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