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시트로 감싸인 침대 위에 리리가 곤히 잠들어 있었다. 리리는 이내 몸을 뒤척이며 입술을 달싹여 소리를 냈다.
“으…음.”
이제 막 잠에서 깬 듯한 나른한 목소리가 방안에 작은 울림을 만들어 낸다. 리리는 게슴츠레 눈을 뜨고선 자신의 잠을 깨운 것을 귀엽게 노려보았다.
커튼 너머로 들어오는 햇살이 리리의 얼굴 위로 물결무늬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리리는 입술을 빼쭉 내밀고는 이불을 당겨 머리 끝가지 뒤집어썼다. 깨어나기에는 아직 잠이 부족하다고 웅얼거렸다.
똑, 똑 하고 자신의 방문을 누군가 두드려도 전혀 반응이 없다.
“들어간다.”
이불속에 파묻혀 헤어 나오지 못하는 리리와는 대조적으로 갓 외출준비를 마친 도진이 들어왔다. 그리고 침대위에 둔덕이 생겨나 있는 것을 보고 도진은 피식, 웃으며 침대 맡으로 다가와 앉았다.
“리리, 일어나. 해가 중천이야. 지금까지 자고 있는 건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하지만 이불속에 숨어버린 리리는 좀처럼 반응이 없다.
도진은 할 수 없나, 하고 중얼거리며 창문의 커튼을 걷고서 창문을 활짝 열었다.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청명한 가을의 공기가 조금 답답했던 방 안의 공기를 몰아냈다.
“이제 그만 일어나. 너도 오늘 약속 있잖아.”
도진의 그 말에 이번에는 미묘하게 움직임이 있었다. 도진은 자신도 모르게 풋, 하고 소리를 내어 웃어버렸다.
도진은 리리의 곁에 앉아 조금 기다려보기로 했다.
“푸하!”
얼마 지나지 않아 시원한 소리를 내며 이불 속에서 리리가 고개를 내밀었다. 숨이 찼는지 얼굴이 빨갛게 상기된 채다.
시원한 푸른색의 눈동자. 매끈하게 이어진 콧날을 따라, 열리면 노래할 것 같은 자그마한 입술. 상기되긴 했어도 안이 들여다보일 것 같은 새하얀 피부. 자다 깬 탓에 부스스해진 길게 내려오는 흑발. 머리칼이 검다는 것만 빼면 흡사 프랑스 인형 같은 사랑스러운 소녀.
“잘 잤어?”
“뭐야, 아직 안 갔어?”
리리는 퉁명스레 대답했다. 딱히 기분이 나빠서 그렇다기보다 리리는 흐트러진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이 싫을 뿐이다. 그 증거로 얼굴의 반쯤은 다시 이불속에 파묻은 채 눈만을 돌려 도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자려고? 씻고 나가야지.”
“너 나가고 나면 안 그래도 그럴 참이야.”
“잠꾸러기.”
도진의 말에 리리의 인상이 구겨진다.
“애 취급하지 마.”
평소라면 큰소리치며 대답했을 부분에서 리리는 묘하게 힘이 없다. 도진은 여전히 졸린 탓이겠지, 하고 생각했다.
“그러게 밤늦게 따라오는 건 무리라고 했잖아.”
“누구 씨 때문에 매일 혼자 집에 남아 있는 내 심정도 좀 생각해주셨으면 좋겠는데요.”
조금 애처로운 항변에 도진은 입을 다물고 만다. 그 모습을 보던 리리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걸렸다.
“할 말 없지?”
“하아…그래. 졌어.”
그렇게 대답하고서 도진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쨌든 이만 일어나. 나는 먼저 나가서 일 보고 출발 할 테니까.”
“어제 만난 그 아저씨 이야기?”
“응. 아직 자세한 이야기는 남았지만 보고는 해야지. 그럼 다녀올게.”
“잠깐만.”
그렇게 말하며 등을 돌리는 도진의 손을 리리가 붙잡았다. 무슨 일인가 싶어 도진이 몸을 돌리기도 전에 등 뒤로 따뜻한 온기가 전해져왔다.
“따뜻하다….”
리리는 양손으로 도진의 목을 감싸 안고선 나른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도진은 리리의 말이 자신이 하고 싶은 말과 같았기에 속으로 웃어버렸다. 아무래도 타인에게 느끼는 체온은 자신보다 더 따뜻한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
이내 리리는 감은 팔을 풀고 양손으로 도진의 등을 떠밀었다.
“잘 다녀와. 오늘 약속 잊지 마.”
“응. 일 끝나는 대로 전화할게.”
리리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도진은 가볍게 웃으며 방문을 열었다. 하지만 도진은 나가려다 말고 돌아서서 리리에게 말했다.
“아 참 이야기하는 걸 깜박했는데, 입가에 침자국은 지우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리고 도진은 능글맞은 웃음을 남긴 뒤 방을 나섰다. 방안에 홀로 남게 된 리리는,
“우――――――악!!”
하고 소리 질렀다.
“그런 건 말 안 해도 되잖아! 레이디에 대한 존중이라는 걸 모르냐아아아아!”
킥킥대는 웃음과 함께 도진이 빠져나간 문을 향해서 베개를 집어 던졌다. 배게는 방문에 막혀 팡, 하는 시원한 소리를 내고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한참 동안이나 집안이 떠나가라 소리치던 리리는 결국 지쳐 침대 위에 大자로 쓰러졌다.
리리는 눈을 지그시 감고 뜬 후에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열린 창문으로 불어 들어오는 바람을 즐겼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딱 기분 좋은 정도의 시원함. 살랑거리며 흘러 들어오는 따뜻한 햇살.
리리는 작은 고양이처럼 손발을 쭉 뻗어 기지개를 펴고서 또 다시 늘어졌다. 이런 기분을 좀 더 즐기며 이불에 파묻혀 다시 잠들면 좋겠지만 한 번 깨어나고 나면 무슨 이유에서든 다시 잠들기가 어렵다. 어째서 그런 걸까, 하고 리리는 쓸데없는 생각을 해 보지만 그런 이야기에 답이 있을 리 없다.
“슬슬 나갈 준비를 할까나.”
리리는 침대에서 꾸물꾸물 내려와 슬리퍼를 신고 바닥에 섰다. 고양이 얼굴이 가득한 파자마는 리리의 체형에는 맞지 않는 한 사이즈 정도 큰 것이라 그 사이로 드러난 가느다란 팔 다리가 리리를 더 작아보이게 했다.
리리는 열려져 있던 창문을 닫고, 또 한 번 양팔을 쭉 뻗어 기지개를 펴고선 이어 늘어지는 하품과 함께 방을 빠져나왔다.
거실로 나오면 여느 집에나 있는 것처럼 TV, 소파, 식탁이 공간을 차지하고 있지만 어째서인지 텅 비어 보이는 느낌이 든다. 묘하게 살풍경하다.
리리는 조금 차가운 공기가 흐르는 거실을 가로질러 TV를 켜두고 아침으로 무엇을 먹을까 생각하다 결국은 토스트로 대충 처리하기로 결정했다.
빵이 구워지는 동안 잽싸게 샤워를 끝내고 오늘은 무엇을 입고 나갈지 머릿속으로 결정해 둔다. 그다지 옷에 욕심이 있는 건 아니라 크게 고민하지 않지만 대게 모자를 기준으로 결정한다.
리리는 모자를 수집했다. 장롱의 문을 열면 한쪽 칸 전체가 가득 차 있을 정도였다. 그 중에서도 베레모가 가장 많았다. 왜 하필이면 베레모라고 묻는다면 글쎄, 대답하기 미묘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좋아하는 것에 특별한 이유가 붙지 않는 경우는 많으니까. 쓰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머리 부근이 따뜻한 것이 마음이 편했다.
리리는 오늘은 핑크색 베레모가 좋겠다고 생각했다. 특별한 기준은 없다. 그냥 외출 직전 떠오르는 기분에 색깔은 정하는 게 기본이다.
리리는 샤워를 끝마치고 머리를 대강 수건으로 감싸 올린 채, 콧노래를 부르며 다 구워진 토스트 위에 마멀레이드 잼을 발랐다. 그리고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식탁 아래로 검은색 그림자가 쑥 들어가는 걸 보았다. 그 검은색 그림자는 의자위로 잽싸게 튀어 올라 검은색의 꼬리를 불쑥 내밀었다. 꼬리 끝에 장난스럽게 달려 있는 나비리본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응? 나비야 배고파?”
“야-옹”
리리의 물음에 간드러지는 울음소리가 대답했다. 그 정체는 나비라는 이름의 검은색의 고양이. 또렷한 눈망울은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으며, 윤기 나는 검은 털은 누구나 한 번쯤 쓰다듬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들게 했다.
리리가 사료를 접시에 담아 바닥에 내려놓자 나비는 잽싸게 달려와 먹기 시작했다. 리리는 웃으며 토스트를 입에 물고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옷장을 열었다. 도진이 있었다면 먹을 걸 입에 물고 방에 들어가지 말라는 둥 시어머니마냥 잔소리를 할 것이 뻔했지만 없으니까 상관없잖아?
리리는 토스트를 먹으며 조금 전 생각해둔 옷가지들을 꺼내어 침대 위로 던졌다. 어느새 리리를 따라 들어온 나비는 리리가 침대 위로 던지는 옷가지들을 요리조기 피하며 장난을 쳤다.
“좋아. 오늘은 이걸로 결정. 나비야 너도 괜찮다고 생각하지?”
머릿속에서 결정한 코디가 생각 외로 마음에 들었는지 리리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서 나비를 안아 올렸다. 그리고는 제자리에서 빙글 돈 이후에 침대위로 기세 좋게 쓰러졌다. 나비는 놀라 발버둥쳐서 리리의 손에서 벗어나 침대 구석으로 피해 자리를 잡았다.
리리는 나비를 다시 붙잡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요리조리 재빠른 몸동작으로 피해버렸다. 리리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자 나비는 놀리기라도 하듯 귀 근처를 긁어대며 밉상스럽게 울었다. 리리는 쳇, 하고 혀를 차고는 고양이 대신 고양이 쿠션을 안아들었다.
원래 버려진 고양이었던 나비를 대려와 키운 것은 자신인데 어째서인지 자기보다 도진을 훨씬 따랐다. 그 사실이 다시금 떠오른 리리는 안고 있던 쿠션을 슬쩍 던져보았지만 얄밉게도 나비는 침대 아래로 우아하게 뛰어내리며 가볍게 피했다.
리리는 드러누운 채 고개만을 돌려 벽에 붙어 있는 괘종시계를 보았다. 시간은 11시. 약속시간은 12시. 만나기로 한 장소는 천천히 걸어 10분쯤이면 도착하는 곳이다. 한 시간이나 남아 있지만 달리 할 것은 없다.
이건 전부 도진이 너무 일찍 깨운 탓이라고 책망하며 침대위에서 버둥거려 보지만 도진이 깨우지 않았더라면 과연 제시간에 일어났을까, 하는 물음에는 솔직히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리리는 만나기로 했던 누군가를 떠올리며, 이렇게 된 김에 그 녀석이나 골려줘야지 하는 생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