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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리는 선글라스에 핑크색 베레모를 푹 눌러쓰고 가을에는 어울리지 않는 하얀 털실 머플러로 얼굴을 반쯤 묻은 채 걸음을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두 손을 모은 품속에는 나비가 간간히 꿈지럭거리며 졸고 있었다.
리리는 다른 곳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목적지를 향했다. 목적지는 ‘로즈마리’ 라고 쓰인 나무 간판이 걸려 있는 카페.
“푸하 … 더워!”
리리는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품속에 안고 있던 나비를 풀어주었다. 나비는 우아한 동작으로 바닥에 착지해 플로어를 거닐다 어딘가로 숨어버렸다.
리리는 눌러 쓰고 있던 베레모며 목도리를 풀어서 손에 쥐고서 적당히 의자 위에 던져놓았다. 그리고 손수건으로 땀을 닦아내며 옷깃을 펄럭였다.
리리는 가게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가게는 이제 갓 문을 연 시간이라 한산했다. 아직 테이블에 손님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카페 내부의 모든 물건은 나무로 제작되어 있었는데, 마치 커다란 나무 둥지 안에 들어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특히 결이 고운 나무를 이용해 꼼꼼하게 벽과 천장을 덮고, 나무줄기로 장식한 인테리어는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데 성공적이었다.
가게 안에서는 베토벤의 월광 교향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침부터 듣기에는 무거운 곡이지만 리리는 싫어하지 않았다. 가게 안에 흐르는 조용한 분위기의 클래식 음악은 그나마 이 가게 주인의 정상적인 취미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것마저 싫어했다간 이 카페에는 분명 발붙일 일이 없어질 것이다.
리리는 크게 숨을 들이쉬며 가게 안에 흐르는 갓 볶은 원두의 향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선 두리번두리번 주위를 살폈다.
“아무도 없나?”
자신 이외에 아무런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리리는 바 테이블 안쪽으로 슬그머니 들어갔다. 그리고 위쪽 선반에 흰 천으로 덮어둔 고양이가 그려진 자신의 전용 컵을 꺼냈다. 그리고 다시 주변을 한 번 살펴보고선 조심스럽게 아래쪽 선반의 문을 열어 약병처럼 생긴 용기에 이름표를 꼼꼼하게 붙여 분류해둔 원두들을 살폈다.
오늘 쓸 만큼의 원두를 미리 분류 해둔 것이다. 이 가게의 주인은 커피에 대해서는 매우 예민해서 오늘 사용할 양 이상은 판매를 하지 않는다. 주인의 커피에 대한 사랑 덕분에 여러 종류의 체인 브랜드 명을 가진 카페들 사이에 끼어서도 좋은 평판을 받고 있다. 단골손님도 꽤나 있는 편이어서 개인 사업가로서는 나름대로 수완도 있다고 봐야겠지.
“아, 찾았다!”
리리가 자신이 찾는 원두를 담은 용기에 손을 뻗으려는데,
“주인 허락도 없이 마음대로 가게 물건을 다루면 쓰나. 커다란 도둑고양이 아가씨야.”
갑자기 누군가의 손이 나타나 주저앉아 있는 리리를 뒤에서 가볍게 안아 들었다. 리리는 불쑥 들어올려져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버둥거렸다.
“이거 놓으라고오!”
“네네. 일단 안에서 나가시고 나면요. 네가 내 작업장을 엉망으로 만드는 꼴을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네.”
그 손은 카운터 밖으로 리리를 옮겨 바테이블의 바깥에 놓인 위로 긴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그 사람은 다시 바 테이블의 안쪽으로 들어갔다.
리리는 굉장히 뚱한 얼굴로 턱을 괴고서 눈앞의 사람을 바라보았다.
말꼬리처럼 묶은 머리가 걸을 때 마다 흔들렸다. 잡아당겨주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짓을 했다간 분명 보복을 당할게 뻔했다.
이 사람은 정창권. 리리와 도진의 친구였다.
축 처진 눈. 헝클어진 옷 매무새. 부스스한 머리. 정리하지 않아 삐죽삐죽 튀어나온 수염. 이런 분위기 있는 가게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지만, 이 사람이 카페-로즈마리의 주인이다.
창권은 바에 서자말자 가게의 마크가 달린 에이프런을 능숙하게 둘렀다. 이상하게도 굉장히 잘 어울린다고 리리는 생각했다. 창권은 머리를 다시 한 번 깔끔하게 고쳐 묶고선 장난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뭐 마시려고 했어? 역시 우유?”
“아니야!”
농담, 농담, 하며 웃음을 짓지만 얼굴에는 여전히 짓궂음이 걸려 있다.
“그러면 뭐로 해줄까?”
“……루와크.”
“그런 비싼 원두는 우리 가게에선 취급하지 않습니다 손님.”
“거기 선반 세 번째 줄에 맨 뒤에 이름표 붙어 있는 거 조금 전에 봤거든?”
창권은 리리의 시선을 피하고 딴청을 피웠다.
“누, 눈의 착각입니다.”
“헤에 … 맞구나. 정말로 거기 있나 보네. 딱 발견하자마자 끌려 나왔거든.”
리리는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꼬맹이한테는 따뜻한 우유가 좋겠지!”
창권은 냉장실에서 우유를 꺼내는 척 하며 흘끗 리리를 쳐다보았다. 리리는 뚱한 얼굴로 창권을 쳐다보고는 테이블 위를 가볍게 내리쳤다.
“칫, 됐어. 그냥 평범하게 ‘오늘의 추천 메뉴’로.”
창권은 승자의 미소를 지으며 우유를 다시 집어넣었다.
“네네, 손님 우리 가게의 추천 메뉴는 항상 향기롭지요.
창권은 선반의 맨 앞에 위치한 용기를 꺼내어 그것을 볶기 시작했다. 새롭게 볶아내는 커피콩의 진한향이 퍼진다. 리리는 눈을 감고 그 달짝지근함에 담긴 사르르한 향을 즐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창권은 리리 앞에 컵을 내려놓았다. 고양이의 얼굴이 몇 가지 색깔로 그려진 컵에서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 올랐다.
“여기 주문하신 카페라떼 나왔습니다.”
“으엑, 결국 우유 넣은 거잖아!”
“자자 진정하고, 거기 봐 거기.”
리리는 자신의 눈앞에 놓인 잔을 보았다. 거기에는 거품으로 만들어낸 네잎 클로버가 그려져 있었다.
“네잎 클로버?”
“그거 만들려니까 어쩔 수 없었다고.”
그렇게 말하며 창권도 리리의 맞은 편에 의자를 놓고 앉았다.
“오늘 도진이랑 약속 있지? 데이트?”
“어떻게 알았어?”
창권은 어깨를 으쓱했다.
“뭐, 옷차림만 봐도 딱 알지. 어디 놀러가요, 하는 복장이구만.”
리리는 자신의 옷차림이 그렇게 티가 날 정돈가, 하고 돌아보았다.
조금 길게 내려오는 검은색 원피스에, 흰색 자켓. 작년 생일 선물로 받았던 리본 목걸이. 작은 보석이 박힌 별 귀걸이 구두는 그 동안 아껴두었던 굽 높이가 거의 없는 붉은색의 장미꽃 장식이 마음에 들었던 구두.
…… 스스로를 돌아보고 나니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를 정도로 너무 신경을 썼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창권은 인상을 잔뜩 찡그리고 있는 리리를 보며 킥킥 웃었다.
“예쁘게 하고 그렇게 인상을 찡그리면 보기 흉하다고. 너희들 하는 일이 좀 거칠잖아? 그러니까 오늘 하루는 평온하게 보내라는 의미에서 네잎 클로버로 해 봤어. 마시면 부적 효과가 생긴다고?”
리리는 창권의 말에 잠시 멍한 표정을 지은 뒤, 피식 웃었다.
“호의 고맙게 받도록 할게. 그래도 우유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한 건 감점. 두고 봐 갚아줄 테니까.”
리리는 커피를 조금 마신 후 입 안 가득 퍼지는 달콤함에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그나저나 급하게 날 부른 용건이 뭐야? 뭐, 대강 알겠지만.”
“오늘 지현이가 학교에 일이 생겨서 시간을 못 맞춘다고 하니까, 그 사이 시간만 좀 도와줘.”
“뭐 … 그 정도라면 문제없지만 오늘은 늦게 까지는 안 돼.”
“괜찮아. 저녁 시간대라면 지현이도 올 테니까. 손이 없는 점심시간만 넘기면 되거든.”
리리는 알았어, 하고 짧게 대답하고서 컵을 두 손으로 잡고 호호 불면서 홀짝거렸다. 창권은 그 모습을 느긋하게 지켜보았다.
“아, 도진이는 잘 지내? 최근에 그 녀석 전혀 못 본 것 같은데.”
리리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그 …… 해결사라는 일 하고 있는 거야?”
“응.”
“오래는 안 할 거라더니 좀처럼 끝나지 않는구나.”
“응…….”
“그 녀석 여전히 그거 … 때문에 그만두지 못하는 건가?”
창권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와는 반대로, 리리는 조금 날이 선 목소리로 이야기 했다.
“‘그거’ 같은 애매한 지칭 하지 말고 직접 이야기하는 게 어때? 맞아. 내 몸 때문이지.”
“…… 진전은 있어?”
“몰라. 도진인 나한테 아무런 이야기도 해주지 않으니까.”
리리는 굉장히 괴로운 표정으로 그렇게 대답하고선 네잎 클로버 장식의 거품을 형체도 알아 볼 수 없게 빨대로 휘적휘적 저어버렸다.
“넌 어때?”
“뭘 말이야?”
“넌 …… 원래 몸으로 돌아가고 싶어?”
“그야 할 수만 있다면 당연하잖아. 이런 늙지도, 죽지도 않는 몸 나에겐 필요 없어.”
리리는 빨대로 휘젓던 손을 멈추고, 눈을 반쯤 내리깔고서 흘러가는 커피 연기만을 주시했다.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놓였다.
리리는 커피를 조금 마시고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런데 말이야 가끔 이런 생각을 해. 원래대로 돌아가는 법 따위는 애초에 없고, 날 이렇게 만든 ‘그것’은 평생을 살아도 다시 만날 수 없는 거라면 굳이 도진이가 날 위해 고생할 필요는 없지 않나, 하고 생각해.”
“포기 하는 거야?”
“포기 …… 때때로 오히려 이쪽이 바른 게 아닐까 하고 고민해.”
리리의 한숨 섞인 대답에 창권의 인상이 구겨졌다.
“네가 포기해버렸다면, 그럼 도진이는 뭘 위해서 그런 험한 일을 하고 있는 거야?”
리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찻잔을 조용히 내려놓고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직 다 마시지 않은 커피에선 따뜻한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창권은 리리가 화를 낼 줄 알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반대로 리리는 평소보다 몇 배는 진한 미소를 짓고는 돌아섰다.
“손님 왔어.”
“어? 어?”
“손님 왔다고 바보야. 준비해. 어서 오세요.”
리리는 익숙한 몸놀림으로 플로어로 나갔다. 막 입구에 들어온 남자 손님은 자신이 첫 손님인 게 굉장히 어색했던지 한참을 두리번거리며 서 있다가 리리의 안내를 받고 자리에 앉았다.
창권은 그런 리리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리리는 벗어놓은 옷가지들을 챙겨 들고선 성큼성큼 스태프 룸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스태프 룸으로 들어가기 전 얼굴만 빼꼼 내밀고선,
“누가 포기한다고 말했어?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지. 메-롱 이다 바보야.”
그렇게 말하고 쏙 들어가 버렸다.
★
도진은 호연과 헤어져 리리와 만나기로 한 장소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 도진의 표정은 굉장히 기묘했는데, 입가는 웃고 있지만 미간은 잔뜩 찌푸리고 있어서 어쩌다 도진의 얼굴을 본 사람들은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하고선 슬그머니 길을 피해주고 있었다. 그 웃기지도 않은 표정은 도진이 고심할 때의 무심코 나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도진의 머릿속은 타인의 시선 따위 신경 쓸 여유가 없을 정도로 복잡했다.
아니, 유하가 살아있다는 그 사실이 아직도 현실감과 기억의 경계에서 붙었다 떨어졌다는 반복했다.
유하는 2년 전, 구 건물의 화재사건으로 죽었다. 도진의 눈앞에서.
그런 결과를 원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도진이 그녀를 정신적으로 몰아붙인 탓이 되었고, 도진은 그 일에 늘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살아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수정해야 지금의 결론에 다다를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손에는 유하의 사진과 그녀가 남긴 흔적들이 남긴 자료를 보고 있노라면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실감은 없었다. 여전히 유하를 떠올리면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구하지 못한 그녀의 뒷모습이 남아있다.
그리고 이 일은 리리에게는 가능하면 알리고 싶지 않았다. 리리 역시도 이 사건에 관계가 있어서 유하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면 분명 상처를 받을 것이 뻔했다. 더 이상 리리에게 상처가 되는 일은 피해야했다.
어제 밤, 리리가 따라왔을 때도 자세하게 알려주지 않았던 것이 새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또 하나 호연의 말.
도진이 해결사를 시작하고 실수가 있을 때 마다 비슷한 협박을 들은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노골적인 위협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유하가 찾고 있는 것은 아마 도진 역시도 자신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호연도 마찬가지겠지. 그럼에도 호연이 도진을 향해 질 나쁜 협박을 한 것은 농담 없는 악질적인 의도임이 분명했다. 광대처럼 벗어날 수 없는 상황에서 몸부림치는 걸 기다리고 있는 거겠지.
도진은 자신이 ‘사냥개’ 라는 걸 자각하고 있었다. 그 처지는 분명 자신이 목적을 위해서 자처한 것이기에 후회는 하지 않는다. 하지만 때때로 사냥개는 필요에 의해 쉽게 버려질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할 때 마다, 불쾌감에 휩싸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번일은 실수해서도 안 된다. 정말로 위험한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 사실이 무겁게 도진의 어깨를 짓눌렀다.
도진이 끔찍한 표정으로 한참을 고민하는 사이 걸음은 ‘로즈마리’ 앞에 서 있었다. 도진은 숨을 고르며 생각을 정리했다.
그 중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채수의 증언. 그것은 도진의 목을 죌 수도 있는 내용이다. 유하와 자신의 연결고리 때문에 사고가 일어났다면 채수의 증언에 따라서 정말로 목숨이 위협받을 수 있다.
도진은 크게 쉼 호흡을 하고 고개를 흔들었다.
우선은 웃자. 편한 얼굴로 리리를 만나는 게 우선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가게 문을 열었다.
도진이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가게 안은 누가 봐도 바쁘겠네, 할 만큼 북적이고 있었다. 가게 안은 온통 사람들의 대화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도진은 적당히 앉은 자리를 찾아 맴돌다 운 좋게 창가 근처자리에 빠져나가는 사람이 있어 냉큼 그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오랜만에 왔네?”
도진이 자리에 앉자 메뉴판을 손에 쥔 웨이트리스가 미소와 함께 말을 걸어왔다.
“아, 지현 누나 오랜만이에요.”
도진은 자신에게 인사를 건네는 아르바이트생을 보며 반갑게 인사했다.
지현은 로즈마리에서 일하고 있는 아르바이트생으로 창권의 가게에서 꽤 오래 일했다. 동글동글한 얼굴의 귀여운 느낌에 반해 또렷한 눈매가 언밸런스한 매력이 있었다. 밖에서 보면 고등학생으로 밖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동안이지만 대학원 졸업을 준비하고 있는 학생이다. 꽤 당찬 성격으로, 전혀 일을 하지 않는 창권을 대신해 실질적으로 로즈마리를 관리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지현을 보기 위해 일부러 찾아오는 학생들도 꽤 있는 편이라, 덕분에 가게 매상도 오르니 창권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복덩어리, 였다. 창권 역시도 그런 사실을 알고 있기에 끈덕지게 ‘여기에 영구 취업할 생각 없어?’ 하고 농담반 진담반으로 말을 던져보고 있지만 지현은 ‘점장님이 이 가게를 넘기는 조건이라면 할게요.’ 라고 대답 하는 바람에 무기한 보류중이다.
“주문할래? 아니면 조금 후에?”
“조금 있다가 할게요. 아 그리고 창권이 형 좀 불러 주실래요?”
“……음, 그게 말이지.”
바테이블 뒤에서 우당탕, 하고 큰 소리가 나더니 창권이 튀어나왔다.
“으하하하! 요 꼬맹이가 어디서 날 잡으려 드나!”
“너 잡히기만 해봐! 제삿날로 만들어 주겠어!”
그리고 이어 바테이블 뒤에서 리리도 함께 튀어 나왔다. 리리는 제대로 열 받았는지 이마에 한껏 힘줄을 세우고 있었다.
두 사람은 술래잡기라도 하듯 가게 안을 종횡무진하며 뛰어다녔다. 테이블 사이의 간격은 넓었지만 사람이 많은 시각이라 도망 다니기도 쉽지 않을 텐데 창권은 요리조리 리리를 잘도 피해 다녔다.
가게 안의 손님들은 인상을 찡그리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 그런 두 사람을 쳐다보며 서로 킥킥댔다. 이 ‘로즈마리’를 자주 들르는 사람은 이런 이 가게의 분위기를 좋아했다.
“점장님이 보다시피 저런 상태라서…. 미안해.”
도진은 푸하하, 하고 자기도 모르게 소리 내어 웃어버렸다.
“하, 하하, 어쩌다가 저렇게 된 거죠.
“그게 …… 점장님이 리리 씨 옷 안에다가 뭘 넣었나봐. 그런 장난은 초등학생도 안 할 텐데.”
“그런 것 치고는 반응이 과한데요.”
“그게 넣은걸 벌레라고 속였나봐. 리리 씨 반쯤 울면서 옷에서 그걸 빼내고는, 속았다는 걸 알고선 아까부터 쭉 저런 상태야.”
도진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래도 이제 술래잡기는 슬슬 끝내야겠죠?”
“그렇겠지? 아, 도진이는 앉아 있어. 내가 처리하고 올 테니까.”
지현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당찬 아가씨의 그 미소는 확실히 믿을 수 있는 것이었다. 도진은 어깨를 으쓱하고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저기 점장님! 여기 좀 봐주세요!”
“엉? 나 지금 바빠! 왜?”
창권은 요리조리 피해 다니면서 잘도 지현에게 다가갔다. 지현은 창권이 가까이 다가오자 미소를 지으며 눈에 보이지 않을 속도로 순식간에 창권의 귀를 붙잡았다.
“아…아아악! 아파!”
“점장님 잠깐 따라오세요. 리리 씨, 도진이 왔어요.”
그렇게 말하며 지현은 스태프 룸으로 창권을 끌고 가 버렸다. 도진은 그런 창권을 보며 부디 좋은 곳으로 가기를, 하며 명복을 빌었다. 아마 이 가게에서, 아니 이 세상에서, 창권이를 유일하게 앉혀놓고 훈계할 수 있는 사람은 지현 밖에 없을 것이다.
“……왔어?”
창권이 끌려가는 것을 본 리리는 잔뜩 부은 얼굴로 볼을 부풀려서는 도진의 맞은편에 앉았다.
“여기 제복 잘 어울리네.”
뭐, 그야 당연하지 … 하고 말을 줄이는 리리는 조금 수줍은 표정으로 입술을 뾰족였다.
로즈마리는 종업원들에게 계절별로 다른 옷을 지급했는데, 이것 역시도 창권의 취미 중 하나였다. 가을에는 하얀 블라우스 상의와 갈색 체크무늬가 들어간 치마에 가게의 나뭇잎 마크가 달린 앞치마 차림이었다.
도진은 조금 전 상황이 떠올라 또 피식, 하고 웃어버렸다.
“……나 괴롭히는 거 보니까 재밌어?”
“아니, 아니. 미안. 울었어?”
리리의 눈은 조금 빨갛게 충혈 되어있었다.
“창권이가 등에 뭔가 집어넣고선 바퀴벌레라잖아! 안 놀라는 게 이상하지! 레이디에게 이런 장난을 치다니. 나중에 두고 봐. 꼭 배로 갚아 줄 테니까.”
“그래, 그래. 그 때는 형이 어디 도망 못 가게 나도 도와 줄 테니까.”
“……약속했다. 그 때 가서 불쌍하다느니 적당히 하라느니 딴 소리 하기 없기다.”
“알았어. 새끼손가락이라도 걸까?”
도진이 새끼손가락을 내밀자 리리는 거기에 자신의 손가락을 걸고는 엄지를 찍었다.
도진이 그 행동에 풋, 하고 웃어버리자 리리는 잠시 멀뚱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잠시 후, 얼굴이 붉어지더니 손에 들려있던 메뉴판으로 도진의 머리를 때렸다.
“너…애 취급 한 거지!”
“들켰네요. 봐주세용.”
도진은 창권의 말투를 따라하며 리리를 놀렸다. 리리는 완전히 토라져선 나중에 두고 봐, 라는 말만 남기고 플로어로 돌아가 버렸다. 그리고 곧 스태프 룸에서 나온 지현과 함께 플로어를 돌아다니며 몇몇 손님들에게 소란을 피워 죄송하다는 사과를 하고는 다시 일로 돌아갔다.
“여, 왔냐?”
창권은 도진이 있는 테이블로 뒷목을 잡으며 와서는 삐딱한 자세로 앉았다.
“형 괜찮아요?”
“아-죽는 줄 알았다. 아니, 한 번 죽었다가 왔어.”
“아쉽네요.”
“죽었으면 했냐!”
“아니, 뭐 굳이 그런 건 아니지만요. …그에 준하는 몰골이 되어 나올 거라 기대했는데, 조금 실망이에요.”
창권은 엑토플라즘이 튀어나올 것 같은 긴 한숨과 함께 테이블 위에 넙죽 엎드려서는 중얼거렸다.
“저 무서운 아르바이트생은 도대체 누가 뽑은 거야. 누가 가게 주인이고 누가 아르바이트인지 모르겠네. 이참에 쟤 잘라버리고 다른 사람 구할까? 이번에는 분위기 좋고 쭉쭉빵빵한 언니로 구하는 거야. 그러면 가게 분위기도 좀더 …….”
“……점장님 단명하고 싶어요?”
한껏 이야기에 박차를 가한 창권의 뒤로 귀신의 얼굴을 한 지현이 슥, 고개를 내밀었다. 창권은 바로 입을 다물고 식은땀을 흘리며 시선을 돌렸다. 지현은 창권의 머리를 메뉴판으로 툭툭 때렸다.
“남 없을 때 험담하면 모를 것 같아요? 자르고 싶으시면 지금 당장 잘라주세요. 아니면 다시 면담의 시간을 가지실래요?”
창권은 지현의 말에 오들오들 떨며 뭉크의 절규를 얼굴로 재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창권은 도진을 향해 도와달라는 눈빛을 열심히 날려 보았지만 도진은 애써 무시하며 킥킥댔다.
짧은 잔소리가 끝나고 지현은 웃으며 도진에게 물었다.
“주문은 정했어?”
“커피 맛은 잘 모르니까, 전 그냥 블랙으로 해 주세요.”
“어머, 블랙이 가장 커피를 잘 마시는 사람이 선택하는 메뉴인데?”
“그래요?”
“뭐, 개인적인 지론이지만 말이야. 아, 그리고 점장님은 선택권 없어요. 제 마음대로 할 거에요.”
지현은 주문판에 블랙, 하나를 기록하고선 아직도 소침해 있는 창권을 흘겨보았다. 창권은 눈치를 살피다 시선이 마주치자 잽싸게 딴 짓을 했다.
최근 창권은 지현에게 자기 레시피로 커피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고 있는 듯 했다. 지현도 점점 능숙해져서 최근에는 창권의 손을 거치지 않고 나오는 경우도 잦은 모양이었다. 도진은 이대로라면 카페가 통째로 지현의 손에 떨어질 날이 멀지 않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주문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리리가 쟁반 위에 따뜻한 김이 피어오르는 커피를 가지고 돌아왔다.
“여기 주문하신 커피 나왔습니다.”
창권은 자신의 몫을 받아 들고서 진지하게 커피를 마셨다. 향, 온도까지 확실하게 체크했다. 아무리 장난끼가 넘치는 창권이라도 자신의 일에 만큼은 확실했다. 이내 창권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가가 느슨하게 풀었다. 그리고는 리리를 보며,
“땡큐! 거기 귀여운 아가씨 오늘 시간 있으면 나랑 영화라도 … 악!”
리리는 싸늘한 표정으로 쟁반의 모서리를 이용해 냅다 창권의 머리를 때렸다.
“헛소리 하지 마.”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는 리리의 손을 도진이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얼마나 더 걸려?”
리리는 입가를 잠시 매만지더니 가게 벽면에 걸린 시계를 흘끗 보고서 대답했다.
“앞으로 한 시간 쯤 더 걸릴 거야. 오늘 생각보다 손님이 많아서 그냥 나가면 아마 지현 씨 힘들 것 같거든.”
“그래? 그러면 오랜만에 형이랑 이야기나 하고 있어야겠네.”
“그런 김에 실컷 놀려먹도록 해. 내 몫까지 말이야.”
리리는 도진을 향해 미소 짓고는 다른 테이블의 주문을 받으러 갔다. 도진은 그런 리리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아주 눈을 못 때는구만.”
다시 부활한 창권이 턱을 괴고선 빈정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도진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언제 또 사라질지 몰라서 불안해서 그런가 봐요.”
“하긴, 네가 갑자기 리리를 대리고 돌아왔을 땐 정말 놀랐지.”
“그래도 포기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오랫동안 상처받았으니까요.”
창권은 의자 뒤로 고개를 넘기며 천정을 향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렇게 치면 나는 더 할 말 없다. …벌써 2년인가. 리리가 저렇게 다시 웃게 된 것도 다 네 녀석 덕이야. 그러니까 좀 더 자신감을 가져라 소년아!”
그렇게 말하며 창권을 손을 뻗어 장난스럽게 도진의 어깨를 툭 쳤다.
“그래서, 앞으로 어쩔 거야? 그 해결사라는 일 계속 할 거냐?”
“리리의 몸을 정상으로 되돌릴 때 까지는 해야죠.”
“어째서?”
“세계최고의 정보력은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창권은 무엇인가 말하려다 삼키고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창권도 도진이 대기업인 S.J와 어떤 계약관계에 있다는 것을 대강이나마 흘려들어 알고 있었다. 해결사라는 일이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그렇게 근사하거나, 멋진 일이 아니라는 사실쯤은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신을 몰아붙이는 도진을 보면 창권은 어쩐지 속이 쓰렸다. 도진이라는 녀석은 자신의 고민이 있어도 좀체 자신의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다. 오늘도 무엇인가 일이 있었다는 게 오래 도진을 알고 지낸 창권의 눈에는 뻔히 보였다. 좀 더 털어놓고 지내면 좋을 텐데, 자신이나, 리리에게나.
창권은 슬쩍 떠 보기로 했다.
“그런 것 치고 어째 오늘은 복잡한 얼굴이다?”
“…티나나요? 곤란한데.”
도진은 자신의 얼굴을 당겨 억지로 웃는 표정을 만들어 보였는데. 굉장히 우스꽝스러웠다.
“다른 사람은 속겠지만 … 나나, 리리가 보기에는 뻔히 보이지. 그러니까 지금 여기서 털어놓고 가는 게 어때?”
도진은 커피를 조금 마시고는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더니 입을 열었다.
“형, 예전에 유하 … 기억하고 있어요?”
“아, 대학 때 너랑 잠깐 사귀었던 그 아이?”
“살아있어요.”
도진의 짧은 말에 오히려 격하게 놀란 건 창권이었다. 깜짝 놀라 일어서는 바람에 테이블 위를 엉망으로 만들 뻔 했다. 창권은 반쯤 쏟은 커피를 휴지로 닦아내고서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리고는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 했다.
“잠깐잠깐잠깐. 유하라면 걔 맞지. 2년 전에 대학교의 구건물의 지하를 통째로 태워서 7명을 태워 죽인 그 아이. 자살 처리됐잖아. 이유는 모르고.”
도진은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창권은 말하면서도 놀란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 도진이 대학교를 그만두기 전, 재학중에 도진과 유하는 함께 이 로즈마리에 놀러 오곤 했었다.
창권이 기억하는 유하라는 그 아이는 한 때 도진에게 남아있던 그림자를 지워줄 만큼 밝고 태양 같은 아이였다. 자신을 포함해 옆에 있는 사람의 그늘을 지워줄 만큼 밝은 사람.
누가 그런 일을 벌였는지는 대대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후에 사건이 있고 나서 창권은 도진에게서 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아직도 그 아이가 그런 일을 벌였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 사건은 이후에 뉴스도, 신문에도 단지 미스터리 사건으로만 치부될 뿐이었다.
“정말이야? 그 애는 그 사건 때 죽은 거 아니었어?”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최근에 알았어요.”
“그래서, 그 유하라는 아이가 살아있다는 건 알겠어. 그래서?”
“……자세하게 말은 못하겠지만 굉장한 사건에 연루되어 있어서 잡지 않으면 안되요.”
“그러냐 ….”
도진은 맥 빠진 미소를 지으며 창권에게 말했다.
“유하에 관한 일은 가능하면 리리에겐 비밀로 해 주세요.”
“어째서?”
“가능하면 비밀로 해 두고 싶거든요. 분명히 슬퍼할 테니까요.”
그렇게 말하고서 도진은 이야기를 끊었다. 창권도 어떤 일이 있었는지 굳이 자세하게 캐묻지는 않았다. 개인이 파고들어 들어줄 수 있는 이야기에 선이라는 게 있다. 창권이 들어줄 수 있는 이야기는 이정도가 한계였다.
“조금 고민이었는데, 확실히 형한테 이야기 하고 나니까 마음이 한결 가볍네요.”
“뭐, 그렇다면 다행이네.”
아마, 이 뒤의 이야기는 리리가 아니면 그 누구도 도진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없을 것이다. 창권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도진은 이 짐을 나누어 줄 생각이 없다.
창권은 곁눈질로 리리를 한 번 보았다. 다른 사람들에게 웃으며 플로어를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예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많이도 바뀌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오래 숨기지는 마라. 네가 고민하는 건 너무 뻔히 얼굴에 나타나니까, 녀석 금방 알아차릴거야.”
도진은 씁쓸하게 웃었다. 창권이 표정을 보아하니 절대로 알릴 생각이 없는 얼굴이었다. 창권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진짜, 쓸데없는 곳에서 완강한 녀석이다. 창권은 정말로 한 대 때려주고 싶은 고집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실천했다.
이후의 일은 상상에 맡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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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량 2개를 합쳤습니다. 좀 많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