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한 포를란 지스카드 데 지운 자작(Viscount) <1432(?)~1465(?)>
신원이 불확실했으나 모종의 거래를 통해 웨이크필드 후작에게 남작의 작위를 인정받은 외국인.
공갈, 사기, 협박, 무력시위 등 갖가지 방법을 동원해 혹세무민하고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져 프레드릭 백작가문의 중흥을 꾀했다.
‘크롬웰의 여섯 늑대’는 기사 중의 기사이자 프레드릭 백작의 충성스런 검이었다는 사실은 본 저자도 인정하는 바다. 하나 몇몇 이들이 주장처럼 ‘크롬웰의 일곱 늑대’라는 이름으로 지운 자작이 포함되며 그가 기사였다는 사실은 인정할 수가 없다.
하물며 드래곤 나이트 운운은 언급할 가치조차 없다. 이는 후에 다루겠지만, 우리 인류의 역사와 성스럽고 오롯하신 단 한 분, 주님을 기만하고 욕되게 하는 것이 바로 드래곤이란 존재의 인정이다.
또한 기사로서의 그의 검술 실력을 언급하자면, 그것을 ‘검술‘이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혹독한 수련과 진검결투로 단련된 진짜 기사들에게 엄청난 실례일 것이다.
헌데, 한낮 야바위꾼에 불과한 그를 실로 진정한 기사들이자 올곧고 빛나는 검이었던 ‘크롬웰의 여섯 늑대’의 일원으로 인정하는 것은,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기사들에 대한 모독일 뿐만 아니라…….
-퀘른 왕국연합의 역사가 죠쉬 마르세 남작의 저서 ‘지스카드 데 지운, 그 악마적 정치가의 실체’ 서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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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포를란 지스카드 데 지운 자작은 위대한 정치가였으며 그 자신의 등장 전까지 존재했던 정치, 경제 그리고 전쟁에 관련된 기술과 법칙을 최초로 학문적으로 서술한 위대한 학자였다.
또한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실천한 행동하는 사상가이자 주님의 사랑을 받은 성자이기도 했으며, 동시에 문학의 정의와 예술역사의 기점을 바꾼 역사에 길이 남을 대문호이기도 했다.
그의 미들네임 ‘지스카드’는 항간에 떠도는 근거 없는 논문(이라고 부르기도 미안한 잡서)들이 말하는 것처럼 거래로 산 이름이 아니다.
대저 그의 출현 전까지 이 땅에 드래곤의 존재를 믿었던 자가 몇이나 됐으며 그 드래곤이 자신의 이름을 친히 남긴 ‘인간’이 존재키나 했던가?
그럼에도 그 역사적인 사건을 한낮 ‘거래’로 치부하는 자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본 저자 장탄식을 금하지 않을 수 없다.
믿으라. 그는 드래곤이 인정한 ‘기사’다.
그는 오롯하게 존재하시는 우리의 주님 레예스와 우리 인간 사이에 서 있는, 저 드래곤 산맥의 주인 초월자 ‘브라드키오 팔시오니아 롬 지스카드’가 인정한 드래곤 나이트이자 웨인 랭스터 데 프레드릭의 일곱 검 ‘크롬웰의 늑대들’의 수장인,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일곱 번째 기사’였다. 이 역사적 진실은…….
-프림 왕국 왕립 아카데미 수석 교수 알프레드 윌바 데 롯시 자작의 ‘한 포를란 지스카드 데 지운 평전’ 중에서
Chapter 1 - 생존의 시작(1)
하늘이 높다. 살랑거리는 봄바람에 꽃잎들이 춤을 추듯 다가와 시야를 어지럽혔다.
멍하게 그것을 바라보던 지운의 뺨에 꽃잎 하나가 달라붙었다. 지운은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때고 시선을 떨어트렸다. 부채처럼 넓은 붉은 색의 꽃, 제라늄이었다.
“허이구, 이거 예비군훈련 두 번만 더 하다가는 몸이 남아나질 못 하겠구먼.”
야단스럽게 어깨를 두드리며 호들갑을 떠는 한 예비군의 말에 지운은 손을 툭툭 털고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이곳에 와서 친해진 예비군 중 하나였는데, 나이도 가장 많고 넉살까지 좋아 예비군들 사이에서 알게 모르게 의견을 대변하는 큰형의 역할을 맡게 된 이다.
“하긴 형님은 신혼이니 더 몸조심 해야지요. 댁에서 형수님이 오매불망 기다리고 계실 텐데…….”
지운의 농담에 예비군들은 낄낄거렸고, 박이라는 예비군은 멋쩍은 듯 뒤통수를 긁으며 팔꿈치로 지운의 등을 툭 쳤다.
2박3일의 동원예비군 훈련은 정오를 기점으로 모든 교육이 종료되었다.
예비군들은 각자 가방을 들고 그사이 친해졌던 동료예비군이나 현역병들과 인사를 나누며 부대위병소를 통과했다. 개중 같은 부대 출신의 몇몇은 서울로 가서 술이라도 한잔 하려는지 끼리끼리 몰려 택시를 잡기도 했다.
“어이 한지운 씨! 같이 안 갈래요? 최선배가 신촌에서 고기 집을 한다던데?”
“아뇨, 전 괜찮습니다. 많이들 드세요!”
“이거 섭섭한데……. 뭐 생각이 바뀌면 전화해요!”
“예, 그러죠.”
3일간 같은 내무반에서 제법 정이 들어서인지 아쉬운 표정으로 전화기를 들어 보이는 예비군에게 지운은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나저나 이거 이 녀석은 왜 이리 늦는 거야?”
위병소를 통과하는 예비군도 드문드문 해지자 지운은 부대연병장을 뒤돌아보며 중얼거렸다.
그때 저 멀리서 한 군인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선배님! 한지운 선배님!”
“야 임마, 오상병! 늦었잖아!”
“애들이 작업이 늦어져서 방금 복귀했지 뭡니까. 자 여기 있습니다. 네 보루 하고…… 한 갑 더요.”
“생각보다 많은데? 고맙다, 오상병.”
“에이 뭘요. 어차피 담배 피우지도 않는 애들인데다가 한 갑에 천오백 원에 사주시니 저희야 좋죠 뭐.”
씩 웃는 오상병이 내민 비닐봉지에는 군 보급 담배가 가득 들어 있었다.
지갑을 꺼낸 지운은 만원 지폐 일곱 장을 꺼내 오상병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자 여기 담배 값 하구, 나머지는 넣어둬. 며칠 동안 예비군들 짜증 묵묵히 받아준다고 고생했다.”
“앗! 이거 이러면 안 됩니다 선배님! 제가 나머지 거슬러 드릴게요.”
오상병이 화들짝 놀라며 손사레를 치며 허겁지겁 뒷주머니에 손을 넣자 지운은 웃어 보이며 그를 만류했다.
“받아 임마. 어차피 우리 소대는 회식도 못했잖아. 나 말고 다른 예비군들도 마음에 드는 애들 용돈 하라고 몇 푼 쥐어줬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아니, 그래도 이건 좀…….”
지운의 말에 오상병이 미적거리자 지운은 오상병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됐다니까 글쎄. 나도 현역시절에 대민지원 같은 거 나가면 동네아저씨들한테 담배 값이나 하라고 용돈 받은 적도 있고……. 짜식 이거 너무 적어서 그러는 거 아냐?”
“아, 아닙니다! 어휴, 그럼 고맙게 잘 쓰겠습니다.”
지운의 농담에 오상병은 손을 마구 내저으며, 못내 미안한 듯 지운이 준 지폐를 주머니에 넣었다.
제법 짬밥을 먹은 상병이면서도 순진한 모습을 자주 보여주던 오상병이 마음에 들었던 지운은 그의 어깨를 몇 번 두드려 주었다.
“그래, 얼마 되지도 않는데 너무 고마워 할 필요는 없고... 군생활 잘해라. 형은 이제 가보마.”
“예 그러십쇼. 그럼 충성!”
“귀청 떨어지겠네, 자식. 그래 충성이다 임마!”
장난스럽게 경례를 받아준 지운은 위병소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해는 아직 중천에 떠 있었지만 와글거리던 예비군들의 모습이 더 이상 보이지 않자 주변은 고즈넉한 느낌을 주었다.
담배가 든 비닐봉지를 가방에 넣은 지운은 터벅터벅 버스 정류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없는 돈에 생색내기도 힘드네. 8천원이면 아껴 먹으면 두 끼 식비인데. 좀 오버했나?”
8천원. 큰돈은 아니다. 하지만 지운의 입장에서 팔천 원은 무시해도 될 작은 돈도 아니었다.
스물여덟 살 먹은 사회인의 생각치고는 너무 쪼잔 하다고 해도 어쩔 수가 없는 노릇이다.
지운의 직업은 소설가, 그것도 비주류이자 경계문학으로 불리는 판타지를 쓰는 소설가였다.
먹고 살기가 팍팍한 세상이다. 게다가 지운이 받는 인세는 딱 혼자 먹고 살기에만 적당한 수준이었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다고, 출판사가 얼마 전 부도가 나는 바람에 밀린 원고료마저 받지 못했다. 몇 푼 안 되는 돈에도 민감해질 수밖에 없었다.
“담배 네 보루에 7만원이면 만원 번거지 뭐. 좋게 생각하자.”
지운은 편하게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언제부터 자신이 만원도 안 되는 돈에 이런 저런 생각까지 하게 되었는지 조금 겸연쩍은 생각이 들었다.
얼마간 기다리자 기차역으로 향하는 버스가 왔다.
지운이 오상병을 기다리는 사이 한시라도 빨리 부대를 벗어 나고팠던 다른 예비군들은 이미 다 떠난 후였기에 부대 앞 정류장에는 지운 혼자만 타게 되었다.
‘아무도 없네?’
외진 군부대 지역에 대낮이다 보니 버스엔 지운 외에는 단 한사람의 승객도 없었다. 번잡한 것을 싫어하는 지운은 내심 쾌재를 부르며 가장 뒷자리로 갔다.
버스가 출발하고 느긋하게 창가를 바라보던 지운은 살짝 졸음이 오는 것을 느끼고 도리질을 쳤다.
오상병의 말로는 버스를 타고 여섯 정거장이면 기차역이랬다. 졸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을 터다.
하지만 폐인이라는 말에 딱 어울리는 직업을 가진 지운으로서는 요 3일 간의 피곤한 훈련까지 겹쳐지니 쉽게 졸음을 쫓을 수가 없었다.
안 되는데 안 되는데, 하면서도 지운은 꾸벅꾸벅 아래로 내려가는 머리를 바로잡을 수 없었다.
끼이익! 쾅!
“억?”
느닷없는 굉음과 함께 느껴지는 둔탁한 충격에 지운의 눈이 번쩍 떠졌다.
하지만 불행히도 눈을 뜬 순간 지운의 몸은 좌석을 벗어나 이리저리 구르고 있었다. 그 와중에 뭔가가 제대로 보일 리가 만무했다.
다만 한 가지, 버스기사의 모습이 보이지가 않았다.
“컥!”
텅하는 소리와 함께 지운의 몸이 버스 안에서 한 번 더 튀었다.
창밖으로 풍경이 어지럽게 스쳐 지나며 지운의 의식이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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쏴아…….
바람이 한차례 어두운 숲을 쓸고 지나간다.
숲을 돈 바람은 반쯤 썩어가는 덩굴과 제멋대로 자란 고목 사이를 파고들더니, 죽은 듯 쓰러져 있는 누군가의 몸을 한 번 스치고는 왔던 곳으로 사라졌다.
이제까지 엎드려 있던 누군가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큭……!”
지운은 이마를 감싸며 몸을 일으키려다 그대로 다시 무릎을 꿇었다. 온몸에서 느껴지는 통증도 통증이었지만 머리가 깨질 듯 아파서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었다.
잠시 무릎을 꿇은 자세 그대로 있던 지운은 엄지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누르며 고개를 들었다.
돌덩이를 얹은 듯 뒷머리가 무거운데다 팔다리가 쑤시고 아팠다.
“으…….”
앉은 자세 그대로 목을 몇 번 돌리자 시야가 제대로 잡혔다.
“크으! 죽겠네. 그나저나……”
주위를 둘러본 지운은 어리둥절해졌다.
손바닥에 전해지는 느낌이 기분 나쁜 질퍽한 토양, 햇빛이 제대로 들지 않아 구부정한 등허리를 기이하게 비튼 종을 알 수 없는 나무들이 가득한 장소.
이곳은 숲이었다.
“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지?”
특별히 숲이라는 장소가 신기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추락하는 버스 안에서 본 마지막 광경은 분명히 좁은 계곡과 그 밑으로 검푸른 줄기를 내밀던 강물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주변엔 계곡도 없고 강도 없었다. 말 그대로 어두컴컴한 숲이었다.
“대체 뭐지? 여긴 어디야……?”
지운은 허겁지겁 일어나 주변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어딜 보아도 여긴 숲이다.
짐승이 썩어갈 때 내는 것 같은 고약한 냄새와 수명이 다 된 식물들에게서 나는 특유의 퀴퀴한 향이 공기 중에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숲.
“이거 참……. 아 그래!”
고개를 갸웃거리던 지운은 주머니에서 황급히 전화기를 꺼냈다.
하지만 전화도 인터넷도 되지 않았다. 통화권이탈 표시만 뜰 뿐이다.
“뭐 어떻게 된 거야? 아! 하긴 이런 숲이라면……. 좋아, 일단…….”
몸의 근육들이 아우성을 쳤지만 지운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쓰러져 있던 자리를 중심으로 주변을 샅샅이 뒤졌음에도 기대했던 것들은 보이지 않았다.
“일단 숲이라고 치자. 근데 버스는 어디로 간 거야? 통째로 찌그러졌다고 해도……. 아니지, 아냐.”
허탈하게 중얼거린 지운은 이내 도리질을 치며 적당한 나무 등걸에 주저앉았다.
“후우……! 천천히 생각하자, 천천히.”
심호흡을 하자 머릿속이 조금 차분해졌다.
제대로 정리가 되진 않았지만 설명할 수 없는 일에 의해 자신은 죽지 않고 숲에 떨어졌다. 몸 곳곳이 욱신거리고 머리가 좀 아프긴 했지만, 특별히 외상을 입지도 않은 상태에다 옷가지도 가방도 무사했다.
지금 있는 곳이 어딘지도 모를 지저분한 숲인 것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그래봤자 대한민국 안이니 몇 시간만 고생하며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더 운이 좋으면 금방 전화기가 터질지도 모르는 일이고.
“좋아. 일단 움직이자. 전화만 터지면 되니까.”
지운은 숲의 안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어두운 숲을 보자니 조금 불안해졌지만 지운은 스스로 다독이며 좋은 쪽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일단 그는 죽지 않고 살아있었으니까.
******
“빌어먹을! 제기랄!”
지운은 욕설을 뱉어내며 걸음을 옮겼다.
발이 푹푹 들어가는 썩은 내 나는 진흙탕은 참아줄 수 있었다. 지금 신고 있는 것이 운동화나 구두였으면 몰라도 그는 지금 예비군복장 그대로라 길들이기가 조금 힘들어서 그렇지 품질은 제법 좋은 편인 전투화를 신고 있으니까.
또 파리인지 모긴지는 몰라도 쉴 새 없이 귓가를 앵앵거리며 땀에 젖은 목덜미와 얼굴에 척척 달라붙는 날것들도 참을 수 있다. 어쨌거나 지금은 생명이 태동하는 봄이고 이런 숲에 날것들이 없는 게 더 이상할 것이다.
“제기랄 놈의 숲! 여기가 대한민국 땅 경기도가 맞기나 한 거냐!”
그랬다. 지운이 욕설을 내뱉으며 짜증을 있는 대로 나게 한 것은 바로 이 숲 자체였다.
지운은 이렇게 굴곡이 적고 평탄한 숲은 처음 봤다.
한 시간이나 걸었으면 분명 계곡이나 능선이 나타 날만도 했는데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 그가 복무했던 강원도 DMZ에도 이런 지형은 없었다.
“이상하다. 정말 이상해…….”
땀을 닦으랴 날파리를 쫓아내랴 짜증나는 와중에도 머릿속에 문득 뭔가 떠올랐다.
학창시절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갔을 때, 기차를 타고 가며 이런 숲을 본 적이 있었다.
짙푸른 숲이 지평선 끝까지 펼쳐진 광경은 장관이었다. 잘못 들어가면 길을 잃고 평생 나오지 못한다는 옆자리 현지인의 말이 거짓말 같지 않았다.
게다가 2차 세계대전 전까지 영국이나 남유럽의 일부 지방에는 너비가 수십 킬로미터에 달하는데다, 비행기를 타고 내려 봐도 그 안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짐작도 할 수 없는 완벽한 원시림으로 이루어진 깊은 숲도 있었다고 했다.
일단 그런 숲 속으로 들어가면 하늘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물론 전혀 햇빛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해가 떠도 항상 어두침침하다.
게다가 곳곳에 위험하기 짝이 없는 늪지대가 산재해 있었고, 특유의 기후 때문에 굉장히 습하고 바람도 잘 불지 않는다.
일견하기에 곧게 뻗은 나무들이 울창하여 제법 멋진 모습일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그런 생각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불안과 두려움만 남는다는 게 처음 들어가 본 사람들의 한결 같은 증언이었다.
“아무래도 이상하단 말이야…….”
말도 안 되는 가정이긴 하지만 지운은 어쩐지 지금 자신이 걷고 있는 숲이 그런 곳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제기랄. 어디 좀 쉴 곳도 없고. 아 저긴 좀 낫겠네.”
커다란 구렁이가 땅을 파고 들어간 것 같은 모습의 나무뿌리를 발견한 지운은 힘겨운 숨을 몰아쉬며 털썩 주저앉았다.
“휴우! 어디보자.”
지운은 어깨에 멘 가방을 꺼내 내용물을 살폈다.
아직 입지 않은 속옷 두 벌과 검은색 셔츠가 하나에 양말이 세 켤레. 거기에 편의점에서 산 세면세트와 깨끗한 수건 두 장이 있었다.
지운은 세면시간에 속옷과 양말을 빨아두기를 잘했다고 내심 생각했다. 평소 같았으면 어림도 없을 일이였지만 생소한 곳에서 규칙적인 생활을 하니 괜스레 하고 싶어져서 빨아서 말려 둔 것이 이렇게 고마운 일일 줄이야.
별 쓸모는 없겠지만 예비군 훈련 중에 심심할 때 읽으려고 가지고 온 책도 두 권이 있었다.
다음에 쓸 소설에 참고하려고 산 중세유럽의 정치경제와 역사에 관련된 책과 지운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인 에드가 엘런 포우를 비롯한 몇몇 현대 영미시인들의 모음시집.
포우라면 지금 이 상황에 어떤 시를 읊었을까?
실없는 생각에 피식 웃으며 지운은 나머지 물건들을 계속 꺼냈다.
피엑스에서 사놓고 먹지 않은 이온음료 한 캔과 싸다는 이유로 집에 가서 마시려 산 캔 커피가 네 캔, 혹시나 싶어 사왔지만 먹을 기회도 없었던 작은 페트병소주가 두 개 있었다.
군대 약은 절대 믿지 않기에 집에서 챙겨온 파스와 아스피린, 정로환도 있었고, 오상병에게 산 것까지 포함해 담배가 네 보루하고 네 갑이나 됐다.
라이터는 주머니를 탈탈 뒤지니 세 개가 나왔다.
마지막으로 야간훈련이 끝나고 배식 받은 것이 남아서 얼결에 조장인 지운이 챙겨둔 컵라면 두 개.
“이럴 줄 알았으면 옆 소대 것도 챙겨둘 걸.”
말도 안 되는 후회였지만 컵라면을 챙기던 지운은 내심 아까워하며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누가 예비군훈련에서 남은 부식을 집에 챙겨 간단 말인가?
아무리 돈 몇 푼에 벌벌 떠는 신세가 되었어도 그런 소소한 것까지 챙기기엔 나름 자존심은 남아 있었다.
사실 지금 꺼낸 컵라면 두 개도 정말 얼떨결에 가방에 넣은 것이 튀어나와 지운도 기억이 난 것이다.
“하! 이건 정말 창환이한테 고맙다고 해야겠네.”
가방 안쪽에서 뭔가를 꺼내며 지운은 피식 웃었다.
농담처럼 중얼거렸지만 그것은 어쩌면 가장 중요한, 절대 잃어버려서는 안 될 물건이 될지도 몰랐다.
지운의 손에 들려있는 것은 은색의 휴대용 손전등과 빅토리녹스사에서 나온 흔히 맥가이버칼이라고 부르는 스위스아미 나이프였다.
동원예비군 훈련을 가면 분명히 어디엔가 써먹을 데가 있을 거라고 얹혀사는 친구 창환이 챙겨준 휴대용 손전은, 건전지로도 작동이 되지만 자가발전이 가능해서 수평으로 세우고 열심히 흔들어도 작동이 되는 놈이다. 상정하고 싶지 않은 상황이지만, 이 숲에서 밤을 맞이하게 될 때 가장 든든한 물건이 될 것이다.
그리고 열쇠고리 대용으로 가지고 다니던 스위스아미 나이프. 녀석이야 말로 현재 지운에게 있어서 가장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물건일 터다.
“고맙다, 자식아.”
무사히 돌아가게 되면 삼겹살이라도 사다 구워 주리라 결심하며 지운은 캔 커피를 하나 들었다.
“후우……!”
지운은 커피 하나를 따서 담배와 함께 즐겼다.
빌어먹을 숲에서 괴상한 상황에 처해있기는 했지만 커피와 담배는 잠시나마 그런 것들을 잊게 해주었다.
힘껏 담배연기를 들이킨 지운은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냈다. 하지만 여전히 아무 것도 되지 않고 통화권 이탈이 표시만 뜰 뿐이다.
“쯧!”
지운은 혀를 차며 전원을 껐다.
배터리는 아직 꽉 차있는 상태지만 아껴야 한다. 언제 숲을 벗어나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전화기를 계속 켜둔다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담배를 비벼 끈 지운은 스위스아미 나이프를 꺼내 손잡이에 부착된 작은 나침반을 살폈다.
나침은 제대로 양극으로 향하는 것 같았다.
일단 남서쪽으로 내려가는 게 급했다. 두 시간 동안 끝없이 이어지는 숲이 불안하긴 했어도 예비군 부대에서 남서쪽이 서울이었으니까.
“휴우. 어쨌든 가보면 나오겠지…….”
힘없이 중얼거리는 지운의 목소리에는 자그만 불안이 녹아있었다.
말도 안 되고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할 일이지만, 어쩌면 이곳이…… 대한민국이라고 불리는 땅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말이다.
******
“아……!”
지운의 눈이 더할 나위 없이 커졌다. 커진 눈에 담긴 것은 놀라움보다는 허망함이었다.
불안이 현실이 됐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좌절한다. 그리고 그것이 생존에 달린 문제일 때 느끼는 좌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지운이 겪고 있는 상태가 정확하게 그런 상태였다.
오후 다섯 시 삼십 분.
최초로 깨어난 장소에서 남서쪽으로 무려 네 시간을 넘게 숲을 헤쳐 온 지운은 드디어 제대로 된 밝은 빛을 볼 수 있었다.
거무죽죽한 나뭇가지가 수십 겹으로 가린 위에서 드문드문 새어 들어오는 희미한 빛이 아니라, 숲 저 편에서 ‘여기가 숲의 끝이요’라고 알려주는 것처럼 빛이 환하게 내리쬐고 있었던 것이다.
지운은 당연히 환호성을 내지르며 달려갔다.
그러나 10여 미터 정도를 남겨둔 시점에서 갑자기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가면 갈수록 분명 주위가 점점 환해지긴 했다. 하지만 동시에 점점 밝아지는 주변과는 대비되는 기이한 어두움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럴 리가 없다고, 애써 불안감을 억누르면서 지운은 전진했다.
그리고 그는 보게 되었다. 높은 비탈길 아래부터 다시금 펼쳐진 지긋지긋한 숲의 파도를…….
맑은 하늘의 색과 대비되는 어두운 암록의 물결이 지운의 시야가 허락하는 곳까지 그렇게 펼쳐져 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믿어지지 않는 광경에 지운은 털썩 주저앉았다.
“대체…… 대체 여긴 어디야?”
대답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눈앞의 숲이 내뿜는 어두움만큼이나 불길한 느낌이 드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기괴한 새소리만이 지운의 귓가를 맴돌았다.
******
워낙 습한 곳이라 불을 피울만한 나뭇가지와 마른풀을 찾기도 힘들 것 같았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가파른 벼랑의 경사면은 그나마 햇빛이 길게 든 탓에 그 아래에서 잘 탈 만한 나뭇가지들을 제법 모을 수 있었다.
대부분의 토양이 전투화굽이 쑥하고 들어갈 정도로 물기에 축축하게 젖어있는데다 불을 피우고 몸을 뉘일 정도로 트여있는 곳을 찾기가 힘들었다.
10여 분을 고생을 더 한 끝에 지운은 대체적으로 만족할만한 장소를 찾을 수 있었다.
경차 한 대 정도의 크기를 가진 큰 바위가 놓여있는 그곳은, 땅도 제법 평탄한데다 바위가 깊이 박혀 있는 탓에 괴상한 모양의 수목들도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흙도 좋네. 좋아, 여기로 하자.”
흙이 질지 않고 푸석거리는 것이 오랜 기간 바위에서 긁혀져 나온 토양이 바위근처에 자리를 잡은 듯했다.
전투화 옆 굽으로 대충 자리를 만든 지운은 바위 곁에 떨어져 있는 작은 돌조각으로 땅을 파 작은 구덩이를 팠다.
마른 넝쿨과 풀을 구덩이 아래에 깔고 그 위를 나뭇가지로 덮은 다음 라이터로 불을 붙이자 걱정과는 달리 제법 잘 탔다.
“오 탄다, 타! 하하!”
환하게 웃었지만 상당한 고생이었다.
돌멩이로 땅을 파며 지운은 예비군부대에서 사용했던 신형 3단 야전삽이 그렇게 그리울 수 없었다. 야전삽만 있었어도 그럴 듯한 잠자리도 만들 수 있었을 텐데…….
지운은 입맛을 다셨지만 어떤 정신 나간 놈이 예비군훈련 가서 야삽을 훔쳐 온단 말인가?
그렇게 생각했지만 지운은 곧 결론을 수정 할 수밖에 없었다.
“창환이 자식이었으면 분명히 몰래 가지고 나왔을 테지…….”
친구 자취방에서 얹혀살면서도 뭐가 그리 잘났는지 늘 티격태격 거리던 친구 창환의 얼굴이 떠오르자 지운은 저도 모르게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어쩌면 가장 친한 친구의 얼굴을 다시는 못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쑥 들며 지운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아냐, 그럴 리가 없어. 그나저나, 진짜 여긴 어디지…….”
애써 부정하고는 싶지만, 지운은 여기가 대한민국의 경기도에 위치한 숲이라고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실은 정신을 되찾은 곳에서 30분 쯤 걸은 후부터 생각하고 있던 바였지만, 지금에 와서는 거의 확신하고 있는 사실이었다.
일단 간벌(주 : 나무가 잘 자라도록 불필요한 나무를 솎아 베어내는 것)을 한 흔적을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
규모를 떠나 이만한 자연적인 숲이라면 자연보호와 수목의 성장을 돕기 위해서라도 간벌은 꼭 해주는 게 상식이다. 하지만 이곳은 사람의 흔적이 전혀 닿지 않은 진짜 원시림인 것 같았다.
게다가 동네 뒷동산만 가도 볼 수 있는 소나무를 지운은 이제까지 단 한 그루도 볼 수가 없었다.
다섯 시간을 넘게 걸어온 숲이 완벽한 원시림에 소나무는 고사하고 길조차 보이지 않는다는 불편한 진실.
그렇기에 지운은 이곳을 경기도에 위치한 곳이라고 여길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지운이 이곳이 한국이 아니라는 완전한 확신을 내리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럼 여긴 대체 어딘 거야? 이 상황이 지금 말이 되는 되나?’
절대 말이 되지 않았다.
이런 일은 자신이 쓰는 소설에서나 가능한 일이지, 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는 결코 일어날리 없는 그야말로 ‘판타지’다.
상상의 세계를 글로 쓰는 소설가임에도, 절대 일어날리 없다고 여겼던 상상속의 일을 지금 실제로 자신이 겪고 있는 것 같았다.
“후우!”
지운은 담배를 하나 꺼내어 물었다.
길게 연기를 내뿜은 그는 냉정을 가다듬고 생각을 천천히 되짚어 보았다.
‘일단 여기가 경기도 인근이 아니라는 건 확실하다. 한지운. 대전제는 이걸로 정해야 돼.’
자신이 몇 차원에 떨어졌는지 지구의 과거에 떨어졌는지 하는 상황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사실은, 자신은 강물로 처박혀 죽어야 했는데 깨어보니 숲이었고, 그 숲은 관찰한 결과 절대 한국에서는 존재하지 못할 자연적 환경을 지닌 곳이라는 거다.
지운은 스스로에게 좀 더 정직해 지기로 했다.
“그래. 여긴 경기도가…… 아니, 한국이 아니야. 절대로.”
여긴 한국 땅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자연환경을 가진 ‘숲’이다. 그리고 죽거나 그에 준하는 중상이라도 입어야 할 자신은 별다른 상처도 없이 살아 있다.
죽지 않고 깨어보니 이상한 숲.
대전제가 될 소재는 이걸로 충분했다.
그럼 이제 어떻게?
“으음.”
이제까지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그러나 스멀스멀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최악의 가정을 떠올리려니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그러나 지운은 냉정해지려 애썼다.
앞으로의 행동과 판단에 가장 큰 지침이 될 대전제는 한시라도 빨리 정하는 게 좋고, 일단 정해지면 무조건 그것을 따라야 한다.
그렇다면 그 대전제는…….
“후우…….”
가볍게 숨을 몰아쉰 지운은 용기를 내서 떠오른 생각을 말로 내뱉기로 했다.
“나는…… 알 수 없는 세계에 온 건가…….”
무거운 바위가 떨어진 듯 가슴이 묵직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