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품 더보기
작가연재 > 판타지/SF
일곱 번째 기사
작가 : 프로즌
작품등록일 : 2016.4.24
  첫회보기 작품더보기
 
1권 시작된 연극(4)
작성일 : 16-04-24     조회 : 581     추천 : 0     분량 : 13156
뷰어설정열기
기본값으로 설정저장
글자체
크기
배경색
글자색
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Chapter 3 - 시작된 연극

 

 

 

 

 

 ‘크……! 미치겠군, 정말.’

 일반적으로 현대인이 ‘견딜 수 없는 악취’라고 칭하는 냄새는 오래된 음식물쓰레기 냄새나 혹은 노숙자의 몸에서 나는 냄새 등이 있을 것이다.

 평범한 현대인인 지운은 지금 자신의 주위에서 나는 악취에 미칠 지경이었다.

 구역질이 날 정도로 참기 어려운 냄새의 대향연.

 대충 표현하자면, ‘썩어가는 하천 길을 따라 1년 넘게 씻지 않은 노숙자들과 한 달 넘도록 푹 썩은 쓰레기봉투를 들고 갈 때 나는 냄새’가 그의 주위에 가득했다.

 하지만 지운은 감히 구역질은커녕 얼굴도 찡그릴 수 없었다. 자신과 함께 걸어가는 그 ‘노숙자’들은 칼을 든 노숙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검붉은 피가 묻어 고약한 빛깔의 밧줄에 묶인 채 지운은 병사들의 우악스런 손에 이끌려가고 있었다.

 길은 어찌나 진창인지 발목까지 푹푹 빠졌다.

 고개를 돌리거나 눈을 마주치면 병사들의 욕지거리와 발이 먼저 날아들었기에 지운은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주변을 살펴보았다.

 ‘거지 군락인가?’

 길이라고 부르기에도 미안한 진흙 바닥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움막 같은 집에서 사람들이 꾸역꾸역 나와 끌려가는 지운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나 같이 누더기를 입고 시커먼 얼굴을 하고 있었다.

 철없는 어린 것들은 호기심이 가득한 표정이지만 어른들은 두려움과 낯선 자를 향한 거부감이 강한 눈으로 지운을 바라보고 있었다.

 게다가 몇몇 아낙은 자신의 아이들이 지운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떠들어대자 등판을 세게 치며 눈을 가리기도 했다.

 ‘젠장. 무슨 악마라도 보는 거 같은데…….’

 그렇게 움막들을 지나 조금 더 가다보니 길고 제법 길고 큰 나무로 만든 목책이 보였다.

 대충 2,3백 미터는 됨직한 목책은 군데군데 박혀 있는 바위와 끝이 날카롭게 갈린 통나무가 삐죽하니 튀어나온 것이 제법 공을 들여 만든 티가 났다.

 게다가 망루로 보이는 구조물도 있고 목책 안쪽의 조금 떨어진 언덕에는 투박해 뵈는 성도 보였다.

 “문을 열어라!”

 분명히 그런 뜻 일거다. 발음이 조금 미묘하긴 해도 그들이 쓰고 있는 말은 영어와 거의 같은 언어였으니까.

 목책 문이 열리자 진창길 근처에 있던 움막보다는 훨씬 사람이 살만한 가옥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소 지저분하기는 해도 목책 바깥에서 봤던 사람들 보다는 제법 생기가 도는 얼굴의 사람들이 집 앞에서 서성거리는 게 보였다.

 지운을 붙잡아온 병사들이 웃으며 뭐라고 떠들자 개중 몇몇이 달려와 병사들과 포옹을 하거나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병사들의 가족이나 친구들 같았다.

 비교적 무장이 가벼운 몇몇 병사들이 그대로 집으로 들어가 버리자, 사슬갑옷을 걸친 제법 그럴싸한 차림을 한 병사들만이 남았다.

 그중에서 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뭐라고 고함을 치자 남은 병사들이 함성을 지르더니 둘만 제외하고는 한 곳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자신의 양쪽에 선 두 병사와 대장만 남게 된 지운은 슬쩍 고개를 들어 대장을 바라보았다.

 “이 자를 성으로 데려간다.”

 병사들이 거칠게 지운을 밀쳤다.

 지운은 순순히 그들이 이끄는 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들어 두리번거려도 아까와는 달리 발길질을 하거나 욕을 하지는 않았다.

 지운은 느긋한 마음이 들어 좀 더 자세히 살펴보았다.

 ‘확실하다. 완전히 중세야. 그것도 아주 가난한 영지.’

 농사를 짓는 흔적이 있긴 했지만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고, 돼지 열댓 마리가 꿀꿀거리며 언덕을 오르락내리락 하는 모습이 마치 중세를 다룬 영화의 한 장면 같다.

 다른 점이라면 영화에 나오는 자들보다는 좀 더 무장상태가 좋고 군기라는 게 보인다는 것 뿐.

 아까 먼저 집으로 우르르 들어가 버린 무장이 빈약한 병사들은 아마도 자경단 정도 될 듯싶었다.

 ‘그럼 얘들은 정식병사인가 보네. 그나저나 정말 작군.’

 그랬다. 그들은 정말 작았다.

 체격은 그럴싸했지만, 솔직히 말해 사슬갑옷을 입은 것이 어색할 정도로 그들은 작았다.

 이제까지 본 사람들만 따지자면 176센티미터인 지운의 키가 여기서는 아주 큰 사람 축에 속할 듯싶었다.

 대부분이 160센티미터를 넘지 못하게 보였고, 저 앞에서 씩씩하게 걸어가는 대장으로 보이는 병사도 170센티미터가 채 안되어 보였다. 그런 그가 지금까지 본 인간 중 가장 큰 키였다.

 하지만 몸은 단단해 보였다.

 비록 사슬갑옷에 가려져 있지만 한눈에 보기에도 꽤 무거워 보이는 저런 사슬갑옷을 걸치고 다닐 수 있다는 것은 체력이 뒷받침되기에 가능한 일이 것이다.

 퍽!

 “큭!”

 딴 생각을 하느라 걸음이 조금 느려진 걸 알아챈 병사가 지운의 엉덩이에 발길질을 했다.

 넘어질 뻔한 것을 가까스로 중심을 잡은 지운은 험악한 병사의 표정에 주눅이 든 채 그들이 이끄는 대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멀리서 볼 때는 좀 작아 보이던 성의 그림자가 가까이 다가갈수록 조금씩 길어지기 시작했다.

 대학시절 유럽에 배낭여행을 갔을 때 보았던 크고 화려한 성에는 비할 바가 아니었지만, 눈앞에 보이는 건축물은 낡은 티가 물씬 풍겼음에도 확실히 ‘성’이라는 이름을 달아줄 만은 했다.

 일단 축성을 하는데 있어서 기본이 되는 둔덕(Motte)은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언덕이 제법 훌륭하게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었다.

 성벽은 6, 7미터 쯤 됐고, 그 아래엔 나무를 통으로 짜서 만든 목책이 둘러져 있었다.

 목책 바로 아래에는 폭 5미터 깊이는 3미터쯤으로 보이는 해자(주 : 성 주변에 둘러져 성을 보호하는 인공연못)가 성벽을 따라 둘러져 있었다. 하지만 물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성의 반대쪽과 내성이 보이지 않아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는 힘들었지만, 일단 방어적 개념의 소성이 갖추어야 할 요소는 대략 다 갖춘, 긴 마름모꼴의 전형적인 중세성의 모습이었다.

 ‘성문 위의 망루가 제법 괜찮은데?’

 기사(지운은 대장으로 보이는 자를 기사로 여기기로 했다)가 망루를 향해 크게 고함을 지르니 도개교(주 : 해자를 건너갈 수 있게 만든 성문다리)가 내려왔다.

 끼익끼익 하는 소리를 내며 다리가 내려오는 모습을 본 지운은 내심 실소를 금치 못했다.

 내려온 도개교 안쪽으로 매달려 있는 것은 굵은 쇠사슬이었다.

 쇠사슬은 성 안의 위쪽 양 끝 부분에 매달린 거대한 통나무에 연결되어 있었고, 그 아래로 십여 명의 병사가 땀을 뻘뻘 흘리며 쇠사슬을 천천히 내리고 있었다.

 거대한 통나무 위에 걸친 쇠사슬이 미끄러지지 않게 홈을 판 것이 아주 기초적인 도르래로 보였다.

 ‘정말 무식하군. 무식하기 짝이 없어. 인간 도르래인가?’

 성안으로 들어가자 양쪽으로 병사들이 쭉 늘어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래도 이 병사들은 복장과 무장이 제법 통일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성 밖의 병사들에 비하면 무장도 괜찮았고 덩치도 좀 더 큰 것 같았다.

 무엇보다 분위기가 달랐다.

 양쪽으로 길게 기립해 있는 이들에게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지운도 낯설지 않은 ‘군기’였다.

 아까 보았던 병사들이 마치 신병교육대의 5, 6주차 훈련병이라면, 지금 성안의 병사들은 제법 군대생활을 오래 티가 나는 상병 같은 느낌이랄까?

 굳게 입을 다물고 부릅뜬 시선을 살짝 위로 든 병사들은, 그 숫자는 미미하지만 확실히 정예 병사들로 보였다.

 군기가 엄정한 병사들 사이로 끌려가는 기분은 그리 유쾌한 것이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잠시 잊고 있던 겁이 슬그머니 나기 시작했다.

 책이나 영화로만 접한 중세라는 생소한 환경을 직접 보고 겪으며 본능적인 호기심을 충족시키느라 잠시 잊고 있었지만, 자신은 지금 극히 위협적인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이다.

 아무리 봐도 중세의 유럽이다.

 굶어 죽는 사람이 태반이고, 말 한마디 행동거지 하나 잘못했다고 칼침을 맞아도 하소연 할 곳도 없을 시대가 바로 중세다.

 게다가 자신은 말조차 잘 통하지 않는데다, 무엇보다 신분이 불분명한, 수상쩍은 ‘이방인’이다.

 그런 이방인에게 관용적인 곳은 거의 없었다.

 지운의 등골이 차츰 서늘해졌다.

 도개교가 내려오는 것을 보며 느꼈던 우스운 감정과 중세의 성을 보며 충족했던 호기심이 달아났다.

 지금 지운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단 한 가지 밖에 없었다.

 ‘저,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

 

 ******

 

 병사들이 지운을 끌고 간 곳은 내성 안에 깊숙이 위치한 넓은 홀이었다.

 “크윽!”

 지운은 거칠게 바닥에 내팽겨 처졌다.

 무릎을 꿇은 채로 잠시 기다리자 몇 명의 인물이 홀의 안쪽에서 다가오는 게 보였다.

 ‘귀, 귀족인가?’

 세 남자와 한 여자.

 세 명의 남자 중 가운데 선 남자는 165센티미터 정도의 신장에 엷은 금발과 함께 잘 다듬은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옷차림은 말쑥했으며 무릎까지 오는 가죽부츠는 한눈에 보기에도 고급스러운 것이었다.

 목에는 붉은 빛이 감도는 보석이 박힌 목걸이를 걸고 있었는데 입고 있는 의복의 색깔과 잘 어울렸다.

 어디로 보나 이곳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게 확실한 차림새를 한 인물이었다.

 그의 좌측에 선 남자는 지운을 여기까지 데려온 기사 보다 더 큰 키에 우람한 풍채를 자랑하고 있었다.

 옷차림은 가운데 서 있는 남자와 비슷했지만 왼쪽 허리춤에 걸려있는 검과 양 팔목과 무릎에 찬 강철방어구가 가운데 남자보다는 훨씬 더 위압적인 느낌을 풍겼다.

 게다가 부리부리한 눈과 뭉툭하게 솟아 오른 코, 쩍쩍 갈라진 두툼한 입술은 ‘나는 극히 위험하고 흉포한 중세의 기사다’라고 대놓고 광고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이 보였다.

 흉포해 뵈는 기사의 옆에 선 자도 전체적으로 비슷한 차림새였다.

 하지만 체격이나 인상은 확연히 달랐다.

 170센티미터 정도 됨직한 키에 호리한 몸에 가는 눈매와 우뚝한 콧날, 그 아래로 살짝 기른 수염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한일자로 꾹 다문 고집 있어 보이는 입매.

 얼굴만 놓고 보자면 그는 굉장히 냉철한 학자라고 해도 믿어줄 것 같았다.

 하지만 검을 소지하고 있다는 사실로 보아 그 역시 기사일 가능성이 높았다.

 마지막으로 가장 우측에 서 있는 여자는 놀랍게도 아직 어려보이는 소녀였다.

 게다가 어깨에서 찰랑거리는 짧은 금발이 잘 어울리는 갸름한 얼굴에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인이다.

 짙은 녹색 눈동자는 조금 어두운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희미한 빛을 머금고 있었고, 갸름한 턱 선을 타고 내려오는 금발은 한 번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탐스러웠다.

 21세기의 어느 거리에서 만난다더라도 누구나 한 번쯤 눈길을 돌리게 할 정도의 작고 귀여운 이국의 미소녀였다.

 그녀는 헐렁한 윗옷에 바지를 입고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부츠를 신고 있었는데, 160센티미터가 될까 말까 한 체격에 아주 잘 어울렸다.

 조금 의아한 점이라면 그녀 역시 검을 소지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퍽!

 “큭!”

 등에 충격이 오며 지운의 허리가 꺾였다.

 “예의를 지켜라! ****** ************! 죽인다!”

 “******* ************. Sir 에인세.”

 예의를 지켜라, 죽인다, 그리고 ‘Sir‘라는 단어는 확실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지운은 얼굴을 찌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너는 누구냐?”

 가운데 남자가 지운에게 물었다.

 “어…….”

 지운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 거렸다.

 기다렸다는 듯 발길질이 날아왔다.

 “내가 말했을 텐데! 예의를 지켜라!”

 “잠깐…….”

 가운데 선 남자가 손을 들어 기사를 제지했다. 그러자 기사는 공손히 허리를 굽히고 지운을 노려보더니 뒤로 물러섰다.

 “내 병사들이 Cromwell 숲에서 발견했다고 들었다. 너는 누구고 왜 그곳에서 서성이고 있었지?”

 지운은 긴장된 표정으로 더듬더듬 말했다.

 “나는 수상한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나쁜 자가 아닙니다. 그 숲에서 길을 잃었을 뿐입니다.”

 오랜만에 영어로 말하다보니 발음이 약간 꼬였다. 너무나 긴장한 나머지 당장 생각이 나는 대로 말했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지금 눈앞의 사내가 쓰는 말은 미국이나 영국에서 쓰는 영어에 비해 억양이 조금 이상한 감이 있었지만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아니, 오히려 근엄한 목소리로 악센트를 딱딱 끊어서 천천히 말하는 것이, 속사포처럼 빠른데다 연음과 속어가 많아 알아먹기가 적잖게 힘든 현대 미국식 영어보다 훨씬 이해하기가 쉬웠다.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말을 할 줄 아는군. Cromwell 숲은 인간이 살 수 없는 곳이다. 너는 너의 말을 증명해야 한다.”

 지운의 목구멍이 타들어갔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야기해야 하나?

 너무나 긴장된 나머지 입이 떼어지지 않았다.

 설혹 이야기 한다고 해도 저들이 믿을 것인가?

 도저히 저들의 인상이나 지금 분위기로 봐서는 이런저런 소설이나 영화처럼 ‘와! 그래요? 환영합니다! 다른 세계에서 오신 분!’이라고 해줄 것 같지는 않았다.

 위기다.

 생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척 봐도 사악한 마법사입니다. 더 이상 말할 것도 없이 사형이지요. 목은 제가 직접 베겠습니다.”

 “헬포드 경의 말대로 확실히 크롬웰의 숲에서 서성거렸다는 것 자체가 이미 사형감입니다. 처음 발견했을 때는 크롬웰 숲의 오크무리가 뒤를 따라왔다더군요. 사악한 마법사가 아니라면 할 수 없는 짓이지요. 주님의 섭리를 거스르는 불길한 마법사는 기사로서 인정할 수 없습니다. 두말 할 것 없이 사형입니다.”

 성격 급한 헬포드의 말이 끝나자마자 매사에 ‘기사도‘에 충실한 기사, 에인세가 맞장구를 쳤다.

 “흐음…….”

 웨인 프레드릭 남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좌중을 둘러보았다.

 과격한 헬포드의 말대로 목을 자르는 것은 께름칙하니 이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화형이나 교수형이다.

 생김새가 자신들과 다르긴 했지만 그 다른 생김새는 긍정적인 쪽 보다는 부정적인 측면이 강했다.

 칠흑처럼 검은 머리와 검은 눈동자는 생전 처음 본다. 검은 색은 그들에게 있어서 그리 길한 것을 의미하는 색은 아니었다.

 “내일 영주재판을 열고 교수형을 집행하는 쪽으로 결론을 내리지요. 말도 제대로 못하고 더듬는 것을 보니 변론을 하지도 못하겠더군요. 게다가 신분을 증명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굳이 절차를 밟아 교구재판까지 갈 이유도 없어 보입니다.”

 영지 기사 중에서 가장 유식하고 소양이 깊은 로렌스가 차분하게 말했다.

 그의 말에 프레드릭 남작이 생각을 굳힌 듯 재차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때 다소 높고 또렷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가 사악한 마법사가 아니라 신분이 높은 외국인이라면요?”

 좌중의 눈길이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향했다.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웨인 프레드릭 남작의 딸 로젤리아 프레드릭이 말을 이었다.

 “머리색과 눈동자가 검다는 것은 분명히 불길한 모습입니다. 하지만 몇 년 전에 우리 영지에 잠깐 머물렀던 라타 레폴드라는 음유시인을 기억하시나요?”

 “기억하오. 하지만 그는 정통 카스발인이었는데? 붉은 머리에 푸른 눈동자가 잘 어울렸던 아주 건장하고 쾌활한 청년이었지요.”

 “크하하! 그 엉덩이는 어떻고! 얼굴이 약간 말상이긴 했지만 그 엉덩이만은 조금 그립기도 하단 말이야?”

 전장에서는 남색도 마다하지 않는 헬포드의 말에 남작과 두 기사는 낮은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로젤리아와 다른 한 사람은 웃지 않고 그들의 웃음소리가 그치길 기다렸다.

 “그가 전해준 소식 중에서 이런 게 있었지요. 플라닉 항구에 가면 머리를 천으로 감싸고 아름다운 보석들로 치장한 검은 눈동자의 동방의 귀족들과 상인들을 볼 수 있다고요. 우리와는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다른 신을 섬기는 이교도지만 아주 조용하고 예의가 바른 자들이라고 하더군요.”

 딸의 눈이 자신에게로 향하자 프레드릭 남작도 기억이 났는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톡톡 치며 말했다.

 “확실히 그런 이야기를 했었지. 그렇다면 저자가 그 동방상인과 같은 곳에서 온 자란 말이냐?”

 로젤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는 음유시인 라타 레폴드가 말한 동방인들과는 다릅니다. 레폴드가 전하길 그 동방인들은 모든 남자들은 머리를 흰 천으로 감싼다고 했는데 그는 그러지 않았으니까요.”

 “그렇다면 동방인과는 아무 상관없는 자가 아닙니까?”

 에인세의 반문에 로렌스가 동조했다.

 “에인세 경의 말씀이 맞습니다. 동방인들이 활동하는 플라닉과 우리 영지는 150마일(주 : 약 240킬로미터)도 넘게 떨어져 있습니다. 게다가 우리 영지는 그들의 흥미를 끌만한 것도 없으니 여기까지 그들이 올 이유도 없을뿐더러, 설혹 그 먼 거리를 이동해서 이곳으로 왔다면 분명히 소문이 먼저 돌았을 겁니다. 그런 특이한 차림새를 한 동방상인들의 소문이 들리지 않을 이유가 없지요. 또한 동방에서 온 그 상인들은 이교도이기까지 합니다. 우리 영지는 이교도를 허용하는 플라닉이 아닙니다.”

 “로렌스 경이 옳소! 우리 영지에서 이교도는 무조건 사형입니다! 목은 제가 직접 치죠.”

 기사 헬포드는 여전히 과격했다.

 프레드릭 남작의 딸 로젤리아는 잠자코 있다 그들의 말이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오히려 그가 동방상인과 다른 곳에서 온 자일지도 모르기 때문에 주의를 기울여 판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먼저 이것을 보는 게 좋을 것 같군요.”

 그녀가 꺼낸 물건에 기사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이게 뭡니까?”

 “그자의 소지품 중 하나입니다. 이건 정말 놀라운 물건입니다.”

 로젤리아가 가장 먼저 꺼낸 것은 다름 아닌 스위스아미 나이프였다.

 기사들은 호기심을 가지고 그녀의 손에 들린 나이프를 주시했다.

 “자, 보세요.”

 로젤리아는 자신도 꽤 고생을 해서 알아낸 몇 가지 기능을 기사들에게 보여주었다.

 작은 칼과 공구가 톡톡 튀어나올 때마다 기사들이 탄성을 터트렸다.

 “호오! 이건 정말 탐이 나는군! 나의 로드시여! 저 헬포드의 영주님과 영지에 대한 충성이 이 물건의 가치에 비견해 볼 때 절대 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저에게 주십시오! 이 헬포드의 충정이 두 배는 더 높아 질 겁니다!”

 성질 급한 기사 헬포드가 기다렸다는 듯 하사를 요청하자 로젤리아는 눈살을 찌푸렸다.

 “헬포드 경, 아직 제 말이 다 끝나지 않았습니다.”

 로젤리아의 말에 헬포드는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며 바싹 당겼던 의자를 살짝 뒤로 밀었다.

 “이 기능들도 놀랍긴 하지만 이것을 보십시오.”

 “헛! 저것은?”

 “아니 검은 머리의 이방인이 어찌 저 표식이 찍혀 있는 물건을 소지하고 있단 말인가?”

 “흐음. 확실히 놀랍군요.”

 세 기사는 놀라움을 조금씩 다르게 표현하며 로젤리아의 손에 들린 나이프를 바라보았다. 정확하게는 스위스아미나이프에 찍힌 은색의 문양에 주목했다.

 “성스러운 주님의 표식이 찍힌 놀라운 물건이라……. 혹시 훔친 게 아닐까요?”

 “그건 아닐 겁니다. 자세한 것은 스웬딕 주교께서 말씀드릴 겁니다.”

 그러자 가장 끝에 앉아서 이제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던 흰옷을 입은 중년남자가 일어섰다.

 “확실히 저것은 특별한 성구(주 : 성스러운 물건)에만 허용하는, 우리의 하나뿐인 주 레예스의 표식입니다. 붉은색은 주님을 향한 교황성하의 고결한 예혈을 뜻하며, 주님의 세계를 표시하는 백색 원의 한가운데 위치한 십자는 분명히 주님의 사자, 오롯하신 대천사 훼리암께서 허락하신 우리 성교의 표식입니다.”

 “흐음…….”

 남작과 기사들의 표정이 진중해졌다.

 스웬딕 주교는 차분한 얼굴로 계속 말했다.

 “저런 성구는 이제까지 한 번도 본적이 없습니다. 제가 아는 이 나라의 그 어떤 사제도 저런 물건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아마 우리 왕국의 대주교께서도 저런 물건을 가지고 있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네 어쩌면 그는…….”

 로젤리아가 모두의 의문에 답할 찰나, 낮은 목소리가 조금 더 빨리 홀 안에 울렸다.

 “우리 종교를 믿는 외국인일 가능성이 높다는 말씀입니까?”

 영지에서 가장 유식한 기사라는 로렌스의 말에 이제까지 두 눈을 껌벅이던 두 기사의 표정이 놀랍다는 쪽으로 바뀌었다.

 “맞습니다.”

 로젤리아의 확정.

 정적이 흐르며 좌중은 각자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여전히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귀찮은데 그냥 사형시킵시다. 외국인이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니고.”

 이런 말을 할 사람은 한 명 밖에 없다. 헬포드였다.

 평소 같았으면 누가 나서서 면박을 줬을 테지만 어쩐 일인지 모두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헬포드 경의 말이 그리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설혹 아가씨의 말대로 그가 주님 레예스를 믿는 게 사실이라고 해도 그는 우리와 전혀 상관없는 외국인입니다.”

 에인세의 동조에 헬포드가 헤벌쭉 웃으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러나 헬포드의 웃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성스러운 주님의 뜻을 미약하게나마 허락받은 주교의 권한으로 납득할 수 없습니다. 그는 신묘한 성구를 지니고 있는 성직자일지도 모르는 외국인입니다. 옷차림이나 생김새가 우리와 다르긴 하지만, 만약 그가 그분의 신실한 종이라면 우리는 큰 실수를 범하는 것입니다.”

 영지의 종교지도자인 스웬딕 주교였다.

 항상 인자한 얼굴로 기사들의 말을 경청하는 그였지만 신의 뜻을 설파하고 실천함에 있어서는 절대 양보하지 않는 고집스러운 면을 가지고 있었다.

 “크흠! 꼭 사형시키자는 말은 아니고…….

 헬포드가 꼬리를 내렸다.

 아무리 자신이 기사였지만 주교의 말에 대놓고 반대할 수는 없었다. 아니, 반대를 하려고 해도 무식한 그로서는 절대 주교의 말상대가 되지 않겠지만.

 “만약 남작님께서 꼭 그 자를 사형시키겠다고 하시면 영지재판과 교구재판을 병행할 것을 요청하겠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한 번 보시겠습니까?”

 스웬딕 주교가 꺼낸 것은 외국인이 쓰고 있던 모자와 그의 옷이었다.

 얼룩덜룩한 색깔로 염색한 괴상망측한 의복은 확실히 외국인다웠다.

 “정말 멋대가리 없는 옷이구만요. 멋진 것도 많은데 왜 하필 저런 지저분한 색깔로 옷을 만들었을까? 성구는 꽤 신기하지만 옷은 영 아닙니다 그려.”

 “헬포드 경, 그럼 이쪽을 한 번 보시겠습니까?”

 주교가 헬포드를 향해 내민 부분은 바로 예비군 마크와 수색중대의 마크가 붙어있는 부분이었다.

 “이건…….”

 막 로렌스가 뭐라고 하려던 찰나, 방정맞은 헬포드의 목소리가 먼저 울렸다.

 “오! 이건 굉장히 정교하군요. 색깔도 멋지고! 호오 저 동물은 뭡니까? 정말 용맹스럽기가 그지없이 보이는군요. 으하하! 제게 딱 어울리는 동물인데요?”

 금세 말이 바뀐 게 조금 얄밉긴 했지만 확실히 외국인의 옷에 새겨진 동물은 헬포드와 닮은 구석이 많았다.

 부리부리한 눈에 날카로운 이빨이 박혀 있는 큰 입을 쩍 하니 벌리고 있는 동물은 호랑이였다.

 “이것은 동방에서 서식하는 호랑이라는 이름의 동물입니다. 저기 남부에 사는 사자와 비슷한데, 무리를 짓지 않고 홀로 다니는 것을 좋아하고 용맹스럽기 짝이 없어 동방에서는 맹수의 왕이라 불리는 동물이지요.”

 이곳저곳으로 여행을 한 경험이 많은 로렌스의 대답에 헬포드의 입이 더 벌어졌다.

 “으하핫! 이거야 말로 기사 중의 기사인 저와 딱 어울리는 동물이구만요! 남작님 저 동물이 찍힌 표식을 저에게 떼 주시면……!”

 “조용조용! 아직 주교님의 말씀이 끝나지 않았소, 헬포드 경.”

 “헙!”

 남작의 말에 기가 죽은 헬포드가 입을 다물었다.

 이 용감하고 충성심 깊은 기사는 다 좋은데 너무 성격이 급하다.

 헬포드를 향해 짧게 혀를 찬 프레드릭 남작은 다소 신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볼 때 이렇게 화려하고 정교한 문양은 왕족이나 그에 준하는 고위 귀족가문만이 소유할 수 있는 표식 같습니다. 게다가 호랑이란 동물은 저도 알고 있는데, 동방에서는 이 동물을 숭배하는 자들도 있다고 들었지요. 주교님께서 말씀하고 싶은 것이 혹시?”

 주교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는 우리 종교를 믿는 성직자일 뿐만 아니라, 고귀한 핏줄을 가지고 있는 귀족일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다시 한 번 침묵이 찾아 왔다.

 자신들과 같은 신을 믿는데다 어쩌면 귀족일지도 모르는 외국인.

 아직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는 힘들었지만 몇 가지 증거들로 보아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이런 증거들로 판단하건데 그의 신분은 분명 범상치 않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만약 남작님께서 계속 그의 사형을 고집하시겠다면 저는 이 교구를 책임지게 된 주교의 입장으로서 교구재판을 열 것을 청원합니다. 내일이라도 제가 직접 중앙교구에 서신을 넣겠습니다.”

 스웬딕 주교의 표정은 단호했다. 여차하면 정말 교구재판을 열 기세였다.

 영주와 기사들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영지에서 주교의 위치는 절대 남작보다 아래에 있지 않았다. 물론 영지의 실질적인 지배권과 영지민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이는 프레드릭 남작이었지만, ‘종교’가 관련된 일이라면 문제는 달라진다.

 왕이 하사한 영지는 곧 신이 인정한 교구다.

 그리고 이 대륙을 감싸 안고 있는 신의 입김은 왕이 펼친 우산을 무안케 할 정도의 서리를 내포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신과 종교에 관련된 사안이라면 프레드릭 남작도 스웬딕 주교의 의견을 절대적으로 참고해야 했다.

 영지에서 프레드릭이 왕과 봉주인 후작에게 인정을 받은 영주라면, 스웬딕은 신과 교황의 대리자인 주교였다.

 “아직 그자를 사형시킨다고 말하지도 않았는데 주교님께서 너무 흥분하시는 것 같군요. 하하! 진정하십시오.”

 프레드릭 남작은 미소를 지으며 주교를 달랬다.

 “험, 죄송합니다.”

 약간 겸연쩍어진 스웬딕 주교가 헛기침을 하며 자리에 앉았다.

 평소에는 믿음이 깊은 사제답게 조용하고 인자한 그였지만 신과 종교에 관련된 일이라면 곧잘 흥분을 했다.

 물론 그런 태도가 그의 신과 종교를 향한 믿음이 얼마나 깊은 것인지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지만.

 “내일 그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 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군요. 물론 주교님의 말씀에 이견이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헬포드 경의 의견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외국의 간첩일수도 있고 어쩌면 성구와 주인의 옷을 훔쳐 입고 달아난 노예일수도 있으니까요. 아직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으니 내일 그와 한 번 대면해 보고 판단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생각이 깊고 냉철한, 영지에서 가장 유식한 기사 로렌스의 말에 로젤리아가 선을 들어 찬성을 표시했다.

 “저는 로렌스 경의 의견에 찬성합니다.”

 “나쁠 것 같지는 않군요. 기사도에 의거해서도 합당한 판단입니다.”

 기사도를 중시하는 에인세마저 찬성하자 결론은 금세 한 가지로 좁혀졌다.

 “그럼 내일 아침 그자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고 그 처리를 결정하는 것으로 하겠소.”

 “영주님의 뜻대로 하소서.”

 프레드릭 남작의 말에 기사들이 길게 읍을 하며 존중을 표했다. 이러쿵저러쿵 간에 이곳에서의 최고 결정권자는 프레드릭 남작이다.

 그러나 한 사람은 마음속으로 불평을 늘어놓고 있었다.

 ‘재판까지 갈 필요도 없이 목을 자르는 건 왜 빼는 거야?’

 여전히 손이 근질근질한 헬포드의 생각이었다.

 
 

맨위로맨아래로
NO 제목 날짜 조회 추천
12 1권 시작된 연극(9) 4/24 877 0
11 1권 시작된 연극(9) 4/24 782 0
10 1권 시작된 연극(8) 4/24 623 0
9 1권 시작된 연극(8) 4/24 678 0
8 1권 시작된 연극(7) 4/24 701 0
7 1권 시작된 연극(7) 4/24 782 0
6 1권 시작된 연극(6) 4/24 833 0
5 1권 시작된 연극(5) 4/24 617 0
4 1권 시작된 연극(4) 4/24 582 0
3 1권 시작된 연극(3) 4/24 682 0
2 1권 시작된 연극(2) 4/24 636 0
1 1권 시작된 연극(1) 4/24 1136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