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가삼랑의 주요 활동 무대인 대산시는 반도에서 제일 큰 항구도시였다. 서해의 커다란 만을 끼고 형성된 이 도시는 반도를 현대 최강의 국가라고 불리는 중화대륙과 이어주는 아주 중요한 연결고리 중 하나였다. 근처에 공항도 있기 때문에 서방세계와의 접촉도 잦았다. 대산시는 반도 물류와 유통의 흐름 한 가운데에 위치하는 핵이었고 반도 제 2의 수도라고까지 불렸다.
서가삼랑과 계약을 한 낭인 중개 사무소는 항구 외각에 위치한 신도시인 화산동에 위치해 있었다. 화산동은 대산시의 중심도시로 공항에서 가깝고, 내륙으로 빠지기에도 좋은 위치에 놓여 있기 때문에 사람들의 왕래가 잦아 사업가들에게 인기가 있는 곳이다.
사무실은 빼곡히 들어찬 고층건물 사이에 낑겨있는 작은 빌딩에 있었다. 건물 2층에 ‘윤창식 낭인 중개 사무소’라고 적혀있는 간판이 걸려있다. 유지, 유미, 유나는 지하의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창구에 있던 아가씨가 그들을 알아보고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세요.”
“......안녕.”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셋은 꾸벅꾸벅 인사를 했다. 유지의 인사를 받던 아가씨가 깜짝 놀라서 물었다.
“어머, 유지씨. 눈이 왜 그래요? 잘생긴 얼굴이 다 망가졌네!”
유지는 한쪽 눈이 시퍼렇게 멍이 들어서 그 위에 계란을 굴리고 있었다. 옆에 있던 유나가 흠칫 어깨를 굳히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유지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얼버무렸다.
“아, 그게... 어제 도적들이랑 싸우다가 한 대 맞았어요.”
“정말요? 그 유지씨가 맞다니... 상대가 엄청난 고수였나 봐요?”
유지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그는 무겁게 말을 이었다.
“엄청난 고수였죠. 무시무시하기 짝이 없는......”
“빨리 가요!”
유나는 홍당무가 되어선 유지의 손목을 낚아채 척척 걸어갔다. 그녀는 고개도 들지 않고 급하게 걷다가 결국 누군가와 부딪히고 말았다.
“아이코!”
균형을 잃고 쓰러지는 그녀를 누군가가 잡아주었다.
“조심해라.”
묵직한 중저음의 목소리. 고개를 들자 엄청난 거구가 보였다. 키는 185쯤 될까, 팔은 통나무 같이 두껍고 몸 둘레가 유나의 세배는 되어 보인다. 동양인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체구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의외로 얼굴은 점잖다. 안경을 쓰고 구레나룻을 멋들어지게 다듬어 놓았다. 그가 유나의 팔을 놔주었다.
유나는 퍼뜩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소장님.”
이 사무실의 소장, 윤창식은 고개를 끄떡여 인사를 받았다.
그는 한때 잘나갔던 낭인으로, 전차를 짜부라트릴 정도로 패도적인 권법을 구사하는 것으로 유명한 무술가였다. 하지만 결혼을 한 뒤 낭인의 위험한 삶을 접고, 지금은 그동안 쌓아 두었던 돈과 인맥을 이용해 중개업을 하고 있다.
유미는 고개만 살짝 기울여 인사를 했다. 유지는 경례를 올려붙였다.
“안녕하십니까! 형님!”
창식은 질색을 했다.
“그건 또 무슨 장난질이냐. 그만둬.”
인사를 받던 창식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얼굴에 그건 뭐냐?”
“이건.... 그러니까......”
창식에게 어설픈 거짓말은 통하지 않는다. 유지는 난감한 얼굴을 했다. 유나는 다시 붉어진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
그걸 보고 대강의 진실을 알아차린 창식은 혀를 찼다.
“장난은 적당히 해야지. 장난기가 있는 사람은 많이 봤지만 유지 너는 좀 심해. 그리고 유나는 성격 좀 죽여라. 그러다 잘못하면 사람 잡겠다.”
둘은 이구동성으로 고개를 숙였다.
“네......”
창식은 안경을 손가락으로 밀어 올렸다. 그리곤 유지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뭐, 마침 잘 왔다. 지금 막 의뢰인도 도착했거든.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으니까 가봐.”
유지가 물었다.
“이번 의뢰는 뭐에요?”
“호위.”
“무슨?”
“불법입국을 도와주는 호위다.”
“에이, 또 그거에요? 그럼 이번에도 동도에서 오는 사람이에요?”
창식은 고개를 저었다.
“그 반대야. 반도에서 다른 나라로 가는 걸 도와주는 거다. 배는 저쪽에서 구했다고 하니까 너희들은 브로커들이 이용하는 불법항구에 데려다주기만 하면 돼.”
“우리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가는 거라고요? 어디로요?”
“그건 직접 물어봐. 그리고 이번 의뢰인은 내 지인이니까 신경 좀 써줘라.”
“형님 지인이면... 낭인인가요?”
“아니, 내가 자주 가는 음식점 주인이야. 요리사지.”
***
응접실에 들어가자 접객용 탁자가 있고 의자에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서른 초반 정도로 보이는 차가운 인상의 남자와 막 꽃이 피기 시작한 청초한 소녀였다.
남자를 본 유미가 흠칫 놀랐다. 남자는 두 팔을 기계로 바꾼 사이보그였다. 언뜻 보기에는 일상용 기계팔을 착용한 평범한 사이보그로만 보인다. 하지만 분위기가 달랐다. 사내 주변의 공기가 묵직하게 가라앉아있었다. 차분히 앉아있는 자세조차 언제든지 공격을 할 수 있도록 몸을 웅크리고 있는 맹수처럼 보였다.
고수라고 단언하기에는 미진한 구석이 있었으나 절대 만만한 인간은 아니었다.
‘저런 놈이 요리사라고?’
유미는 경계심을 곧추세우며 사내를 지켜보다가 흘끗 눈을 돌려 유지에게 향했다. 감이 둔한 편인 유나는 모르겠지만 유지는 그녀가 느낀 것을 똑같이 느꼈을 것이다. 아니, 유지의 경험과 실력이면 그녀보다 많은 것을 알아냈을지도 모른다.
유지는 무엇에 놀랐는지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유미의 경계심이 강해졌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날 이후로, 친남매임에도 불구하고 유미와 유지는 오랜 시간을 같이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라도 유지가 당장 지구가 멸망한다 해도 웃으면서 헛소리를 지껄일 수 있는 인간이라는 건 알았다.
유지가 저렇게 놀랄 정도면 보통일이 아니다. 유미는 긴장을 끌어올리며 왼손에 쥐고 있던 칼의 코등이에 엄지손가락을 댔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유지의 시선을 따라갔다. 그 시선의 끝에......
가슴이 있었다.
노골적인 변태의 시선에 소녀가 얼굴을 붉히며 팔을 들어 가슴을 가렸다. 옆에 있던 남자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는다. 그리고 두 여자가 움직였다.
“주인니이이이이이이이임!”
“......이런 미친놈이.”
두 여자의 일격이 작렬.
유지는 잠시 정신을 잃었다.
***
“아, 이거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일종의 병 같은 게 있어서요.”
유지는 너스레를 떨며 인사를 했다. 그의 뒤에는 유나가 서서 뚱한 표정으로 유지의 눈을 가리고 있었다.
남자는 영 미덥지 못한 얼굴이었다.
“여자 가슴을 보면 정신줄을 놓는 병도 있습니까?”
“음... 정확히 말하자면 병이라기보다 주화입마나 심마 같은 무공의 부작용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사부님이 실수를 조금 하셔서요.”
“......그래가지고 일은 제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웬만해서는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일을 할 때 가슴이 잘 드러나지 않는 옷을 입어주시면 좋겠는데요. 그러면 아무 문제없을 겁니다.”
유지의 당당한 요구에 소녀는 쿡쿡 웃었고 남자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옆에 있던 유미가 말했다.
“그냥 그 눈을 뽑아버리면 모든 게 해결될 텐데.”
“헉, 어찌 그런 잔인한 생각을! 너무해!”
“손님 앞에서는 장난치지 마요. 쫌!”
남자는 의뭉스러운 얼굴로 투닥거리는 셋을 관찰했다. 그는 첫 번째로 유지를 지켜보다가 유나를 거쳐...... 마지막으로 유미를 바라보았다.
순간, 유미가 칼을 잡았다. 하지만 그보다 유지가 빨랐다. 그는 유나에게 눈이 가려져 있는데도 정확하게 움직였다. 유지의 손이 칼의 손잡이를 눌렀다. 발검이 막히자 유미는 사나운 눈으로 유지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결국 이를 꾹 물며 힘을 풀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유나와 남자의 옆에 있던 소녀는 당황했다. 남자가 고개를 끄떡였다.
“서가삼랑...... 이라고 했던가요? 창식이 형님이 사무실에서 중개할 수 있는 최고의 낭인이라고 하던데...... 말한 대로의 실력은 있어 보이는군요.”
유지가 미소를 지었다.
“갑자기 살기를 뿜는 건 자제해 주시죠. 저는 괜찮지만 제 동생은 그런 거에 아주 민감하거든요.”
유미는 말도 하기 싫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남자는 정중히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하지만 당신들의 실력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유지가 유나의 손을 잡아서 내렸다. 유나는 조금 긴장된 분위기를 느끼고 순순히 손을 치워주었다. 유지는 그...... 아름다운 소녀에게 눈이 멀지 않도록 조심하며 남자에게 말했다.
“저는 이번 일을 단순한 호위임무라고 들었는데요. 불법입국을 시도한다고 하시던데... 브로커의 배가 있는 항구까지만 모셔다드리면 되는 거 아닌가요?”
“맞습니다. 알고계신 그대로의 일을 맡기고 싶습니다만.”
“그런데 손님께서는 저희의 호위가 필요한 분은 아닌 거 같은데요.”
남자의 얼굴에서는 쓴웃음이, 소녀의 얼굴에서는 당혹함이 떠올랐다. 특히 소녀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마주친 사람처럼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상반된 반응에 유지의 눈매가 조금 날카로워졌다.
남자는 소녀의 어깨를 잡아주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제가 호위를 맡기고 싶은 것은 여기 있는 제 동생, 자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