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청이 찢어질 듯 큰 소리가 났다. 유미는 화들짝 놀라 유나의 팔에 엉겨 붙었다. 유나는 유미의 어깨를 감싸주며 조곤조곤 그녀를 달랬다.
“괜찮아요. 여기서 갑자기 스피커를 켜서 그래요.”
유나가 가리킨 곳에는 막 부스를 차려놓고 홍보를 준비 중인 화장품 가게가 있었다. 음향기기의 상태가 좋지 않은지 스피커가 계속해서 쇳소리를 낸다. 유미는 안절부절 못하며 유나에게 매달렸다. 초여름에 목도리를 걸쳐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던 유미의 얼굴에 식은땀이 넘쳐흘렀다.
“미안해... 칼이 없으면 괜히 불안해서...”
팔을 감싸 쥔 손을 통해 유미의 떨림이 전해져왔다. 유미는 솜털을 세우며 주변을 경계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의심스럽게 쳐다보고, 조금이라도 큰 소리가 나면 몸을 굳히며 움찔거렸다. 마치 상처 입은 고양이 같다. 유나는 안쓰러워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 마음을 굳게 먹고 표정을 고쳤다. 그녀는 활짝 웃어 보이며 팔을 들어 이두박근을 만들어보였다.
“아가씨. 제가 옆에 있잖아요! 주인님이나 아가씨만큼은 아니어도 저도 꽤 세다고요. 꼭 지켜드릴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마세요.”
유미의 떨림이 잦아들었다. 유나의 미소를 보곤 조금은 안심이 되는 듯 했다. 그녀는 살짝 고개를 끄떡였다.
“응......”
유나는 유미의 손을 놓치지 않도록 꼭 쥐었다. 그녀는 밝게 웃으며 먼저 발을 내딛었다.
“가죠. 오늘은 마음 편하게 놀아요.”
유나와 유미는 우선 쇼핑을 하기로 했다. 유미는 유나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려하기는 했지만 계속해서 신경을 날카롭게 세우지는 않았다.
유미는 유지와 함께 귀면차자 시리즈를 테마로 한 트레이딩 카드 게임을 즐겨했다. 그녀는 보드게임 상점에 들러 새로 발매된 카드 팩을 몇 개 구매한 뒤, 중고로 팔린 희귀카드들을 유심히 살펴보고선 가격대가 괜찮은 몇 몇을 골라냈다. 중고 매품 중에 그녀가 좋아하는 일흑귀면의 최종변형형태가 그려져 있는 캐릭터카드가 탐이 났지만 값이 너무 비싸 그만두었다.
그 다음은 음반매장이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밴드의 앨범은 이미 집에 쌓여있었기 때문에, 유미는 최근 인기순위에 이름을 올려둔 앨범의 곡을 꼼꼼히 챙겨들은 후 제일 마음에 드는 것을 하나 샀다.
유나는 의류매장을 중점적으로 돌아다녔다. 알뜰한 그녀는 돈을 아끼기 위해 이 더운 여름에도 겨울옷을 찾아 매장을 헤맸다. 적당히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주저하지 않고 사버리는 유미와는 달리, 그녀는 수없이 많은 가게를 탐색하며 서로를 비교하고 그 중에서도 제일 싸고 마음에 드는 옷만을 샀다. 유미가 쇼핑을 끝내는 데에는 한 시간이 조금 넘게 걸렸지만 유나는 옷 한 벌을 사는데 세 시간을 썼다.
질릴 정도로 흥정을 하며 더 나은 물건을 찾아 끊임없이 움직이는 유나의 열의에 일류이상의 무공고수인 유미도 학을 땠다. 유나를 쫓아다니느라 진이 빠진 유미는 결국 죽는 소리를 냈다.
“오, 오늘 쇼핑은 여기까지만 하자.”
“앗, 죄송해요. 제가 한 번 옷을 사기 시작하면 시간가는 줄을 몰라서......”
제법 시간이 지나 하늘 높이 떠 있던 해는 어느 샌가 서쪽으로 이동해 조금씩 저물어가고 있었다. 유나는 엄청나게 미안해하다가 잠시 쉬었다가자며 카페로 유미를 이끌었다. 유나는 기본적으로 식사가 필요 없는 몸이었지만 미각기관도 존재하고 유기물을 마력으로 치환하는 소화기관도 있었다. 때문에 가끔은 군것질을 하거나 차를 마셨다.
유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그리고 유미는 카페모카와 생크림 딸기케이크를 주문했다. 유나는 씁쓸한 커피를 빨대로 쪽쪽 빨며 안 그래도 헛구역질이 나올 정도로 단 카페모카에 시럽을 짜 넣고 있는 유미를 끔찍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아가씨, 그거... 너무 달지 않을까요?”
“글쎄. 잘 모르겠는데.”
유나는 케이크를 먼저 먹었다. 그래도 케이크보다 커피가 더 달 것이라는 자각은 있는 모양이다. 그녀는 자그마한 수저로 케이크를 야금야금 먹어치운 뒤에 미지근하게 식은 커피를 꿀꺽꿀꺽 들이켰다. 커피를 마시는 건지 설탕을 마시는 건지 모를 지경이다. 그 맛을 상상하자 소름이 끼쳤다. 유나는 으악 하고 입모양만으로 비명을 질렀다.
그래도 종일 돌아다니면서 불안감은 많이 가신모양이다. 유미는 비교적 평온한 표정으로 입가를 닦았다. 유미를 흐뭇하게 지켜보던 유나가 말을 꺼냈다.
“다음엔 어디에 가고 싶으세요?”
“노래방.”
카페를 빠져나오자 밖에서는 거리공연이 한창이었다. 한 여성이 석양을 받으며 기타를 들고 앉아 노래를 하고 있다. 일류라고 하기에는 미흡한 실력이지만 그 음색에는 독특한 매력이 있었다. 감정표현도 훌륭하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그녀의 노래를 들었다. 유나와 유미역시 천천히 길가를 걸으며 공연을 구경했다. 유미가 말했다.
“잘하네.”
“그러게요. 저 정도면 곧 티브이에서 얼굴을 보게 될지도...... 엄마야!”
말을 잇던 유나가 새된 비명을 질렀다. 차가운 아이스크림콘이 그녀의 가슴 앞에 떨어졌다. 흐물흐물한 크림이 주르륵 흘러내리며 옷을 더럽힌다. 유나와 부딪힌 상대방은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었다. 그녀는 안절부절 못하며 사과했다.
“앗, 죄, 죄송해요!”
여학생은 꾸벅꾸벅 허리를 숙였다. 아무래도 유나와 여학생 모두 공연을 구경하며 걷다가 실수를 한 것 같았다. 유나는 더러워진 옷을 보고 울상을 지었지만 이내 아하하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전 괜찮아요. 어디 다친 데는 없어요?”
“네.”
여학생은 메고 있던 가방에서 휴지를 꺼내어 건넸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고, 유나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학생을 달랬다. 학생은 연신 사과를 하며 세탁비를 내겠다고 지갑을 꺼내들었지만 유나는 정중하게 거절한 뒤에 그녀를 보냈다.
여학생은 마지막까지 인사를 하고 등을 돌렸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유나는 자기의 옷을 돌아보곤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대충 휴지로 닦아내기는 했지만 옷은 여전히 엉망이었다. 상의는 흠뻑 젖어서 몸에 달라붙고, 그 아래로는 진득하게 녹은 바닐라가 레이스를 타고 흘러내려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고 싶었지만 유미를 혼자 두고 가야한다는 것이 걱정되었다. 같이 화장실에 가자고 제안하는 것도 왠지 유미를 무시하는 발언이 될 것 같아 말하기가 꺼려진다.
그런 그녀의 고민을 알아차렸는지 유미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녀는 돌아다니던 내내 꼭 쥐고 있던 유나의 손을 놓아주었다.
“갔다 와. 화장실.”
유나의 얼굴이 걱정으로 물들었다.
“......괜찮으시겠어요?”
“잠깐 정도는 괜찮아.”
유미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안심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유나는 망설였지만 결국 유미의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녀는 쇼핑백을 유미에게 맡기며 말했다.
“그럼 빨리 다녀올게요.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유나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한 건물을 골라 빠른 걸음으로 들어갔다.
홀로 남은 유미는 한숨을 쉬며 근처의 벤치에 앉았다. 유나가 곁에서 떨어지자마자 심장이 뛰며 몸이 긴장으로 굳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 못 참을 정도는 아니다.
옆에서는 아직도 거리 공연이 이어지고 있었다. 유미는 불안감을 잊기 위해 노랫소리에 정신을 집중했다. 리듬감 있는 기타소리와 여성 보컬의 고운 선율이 마음을 가라앉혔다. 유미는 눈을 감고 조금씩 마음속의 구멍을 메워갔다.
바스락
희미한 기척에 온몸의 신경이 곤두선다. 유미의 고개가 번개같이 회전했다. 하수구 구멍을 빠져나와 음습한 골목 속으로 몸을 숨기는 쥐의 뒷모습이 보였다. 골목을 타고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바닥에 버려져있던 홍보지가 날아오르며 시야를 어지럽혔다. 석양을 받아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불길하게 일렁였다.
심장이 뛰었다.
“허억......!”
유미는 가슴을 움켜쥐며 심호흡을 했다. 그녀는 눈을 꽉 감으며 배 아픈 사람처럼 허리를 숙였다.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정신을 다잡아보려고 애를 썼지만 몸은 이미 그녀의 통제를 벗어나있었다. 점점 신경이 날카로워지며 온갖 것들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도로를 지나는 차의 엔진소리가 귀청을 흔들고, 저벅저벅 울리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진동을 타고 다리로 전해졌다. 예민해진 코는 뒷골목에 쌓인 토사물의 썩은 내와, 누군가가 밤중에 싸갈긴 오줌의 지린내까지 잡아낸다. 눈을 뜨자 바닥을 기어 다니는 개미의 더듬이가 정신없이 움직이고, 아스팔트 바닥에 깔려있는 모래알갱이들이 눈에 밟혔다. 당장이라도 토할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온몸에서 식은땀이 넘쳐흐른다.
면도날처럼 예리한 감각이 누군가의 시선을 감지했다. 단정한 양복에 타이만 느슨하게 풀어놓은 남자가 그녀에게 눈을 향했다. 유미는 왠지 모를 위기감을 느끼며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하지만 손은 허공을 휘저을 뿐, 원하는 것을 움켜쥐지는 못했다.
뾰족한 경적소리가 울려 퍼졌다. 유미는 펄쩍 뛰며 뒤를 살펴보았다. 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
눈물이 났다. 유미는 외딴 곳에 홀로 버려진 아기처럼 주변을 돌아보았다. 큼지막한 눈이 간절하게 누군가를 찾았다. 하지만 없다. 유지도, 유나도 그녀의 곁에 없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이상하다는 듯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유미는 그 눈빛을 견딜 수가 없었다.
사위가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다만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만이 야수의 것처럼 빛을 번뜩였다. 심장이 요동치고 목덜미가 차갑게 내려앉았다. 목 언저리에서 무언가가 뻗어 나와 슬금슬금 머릿속을 파고든다. 그러자 몸이 뜨겁게 달아오르며 격렬한 충동이 불꽃처럼 치고 올라왔다. 유미는 이를 악물며 있어서는 안 될 충동을 억눌렀다.
경박한 웃음소리와 환호성이 들리고, 하늘은 강렬한 스포트라이트로 물들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 바닥은 어느새 건조한 모래사장이 되어있었다. 모래 위에는 새빨간 피가 선을 그리며 흐르고 있다. 유미의 동공이 확장과 수축을 반복한다. 그녀는 이제 숨도 쉬지 않았다. 떨리는 유미의 눈이 피의 궤적을 따라 돌아갔다. 바짝 굳은 어깨와 목이 나무토막처럼 움직인다. 핏줄기는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굵어지며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그 첨단에 거뭇하게 칠해진 둥그런 물체가 있다. 유미의 벌어진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그것은 누군가의 잘려진......
“이봐요, 괜찮아요?”
화약고에 불이 붙었다.
유미의 몸이 폭발적으로 반응. 어깨에 올려놓은 손을 낚아채며 두 다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허리를 틀어 꼬며 그녀의 몸이 회전했다. 순식간에 낚아챈 손과 연결되어있는 팔을 꺾어 상대방을 바닥에 메쳐버렸다. 울려 퍼지는 남자의 비명소리.
목도리가 펄럭였다. 핏빛기운이 맴돌며 수라귀구속제어술식이 발동. 1단계 봉인이 해제되자 수라마경의 기운이 단전에서 솟아올라 전신을 휘감았다. 그녀의 몸속에 살고 있는 귀신 중 하나가 잠에서 깨어나 괴성을 지르며 유미의 몸에 깃든다.
신체빙의 교아귀.
유미의 손날을 타고 칼날 같은 이빨이 솟아올랐다. 섬뜩한 빛을 띠고 있는 삼각형의 배열이 회전하며 팔을 감싼 니트티를 매끄럽게 갈라버렸다. 조각난 니트티 사이로 울긋불긋한 속살이 드러난다.
남자의 눈이 커졌다. 그의 눈에 죽음의 공포가 깃든다. 유미는 기계 같은 얼굴로 남자의 목덜미를 향해 손을 내질렀다.
“아가씨!”
톱니가 멈췄다. 굳어있던 유미의 얼굴이 경련한다. 그리고 누군가의 목을 파고들려하는 자신의 손을 발견했다. 유미는 튕겨 오르듯이 남자의 곁에서 떨어졌다. 남자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유미를 돌아보았다. 잔뜩 겁에 질린 그는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사타구니가 흥건하게 젖어있다.
유미는 팔을 감싸며 주춤주춤 물러섰다. 그녀의 얼굴이 어둡게 물들었다. 머뭇거리던 그녀는 이내 한 마디를 꺼냈다.
“미안해요.”
그리고 도망쳤다.
“아가씨! 아가씨!”
뒤에서 유나가 불렀지만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유미는 달렸다. 그녀의 눈에 사람의 띄지 않는 곳이 나타날 때까지, 달리고, 또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