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수업이 끝나자 유지는 축 처져서 교무실로 들어갔다. 직원들은 다 퇴근했는지 교무실은 텅텅 비어있었다. 학원의 원장인 치호가 홀로 남아 컴퓨터로 서류를 처리하고 있다. 유지는 의자를 끌어내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절망적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큰일이다... 이제 애들까지 나를 무시하기 시작했어...... 이래봬도 학교에서 선풍비룡(旋風飛龍)이라고도 불렸던 사람인데.”
치호는 날선 눈매로 유지를 흘겨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물은 아래로 흐르고 해는 서쪽으로 지는 것처럼 당연한 결과지.”
“사람 욕하면서 그렇게 어려운 표현 쓰지 말아줄래?”
“이게 어려운 표현이냐? 기본 교양이 안 되어있군.”
복도와 연결되어있는 창문 너머로 복도를 지나치던 여학생들이 유지를 향해 바이바이 손을 흔들었다. 유지는 가볍게 손을 들어 마주 인사를 해주었다. 손을 흔들던 유지는 죽는 소리를 내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아, 힘들어. 완전 피곤해.”
투덜거리던 유지는 게임기를 꺼냈다. 의자에 반쯤 누워 한가롭게 버튼을 두들긴다. 치호는 혀를 차며 핀잔을 주었다.
“고작 하루 수업하고 뭐가 그리 힘드냐. 나는 일요일 빼고 매일 하루 종일 수업하는데.”
“넌 본업. 난 부업. 두 유 언더스탠?”
치호는 코웃음을 쳤다.
“웃기지 마. 낭인이라고 해봐야 의뢰가 매일 있지는 않을 텐데. 하여튼 게을러 빠져서는...... 네 빚이 얼만데. 죽을동 살동 모아도 될까 말까 하구만. 이자만 해도 한 달에 얼마야?”
유지는 게임을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기억이 잘 안 나는데? 돈 관리는 유나가 다 하니까.”
치호는 한숨을 쉬었다.
“넌 진짜 유나가 착한 애라는 거에 감사해라. 내가 유나였으면 너 같은 자식은 목줄 채워서 컨테이너에 가둬놓고 설탕물만 먹였다.”
“그건 너고. 우리 유나가 얼마나 착한데. 내 선량한 영혼을 나눠가진 작은 천사라고. 가끔 시어머니가 빙의한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그러니까 잘 좀 하라고. 만날 팽팽 놀지만 말고.”
계속되는 쓴 소리에 유지는 질색을 했다.
“잔소리를 하지 못해 슬픈 치호야. 넌 정말 어머니로서의 소질이 탁월한 것 같아.”
“잔소리라고 생각하지 말고 성인의 명언이라고 생각해. 경건하게 경청하라고.”
“됐거든? 내게 잔소리를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돌아가신 어머니와 유나뿐이다! 친구 놈의 잔소리 따위 들을 것 같냐?”
치호는 저놈 저거 못써먹겠네... 라는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다시 서류작업에 들어갔다. 신경질적으로 키보드를 두들기던 치호가 문득 떠올랐다는 듯이 유지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유미는 요즘 좀 괜찮으냐?”
유지는 게임기에서 눈을 떼지 않고 대답했다.
“잘 있지.”
“병원은 계속 다니고?”
“응. 한 달에 한 번. 상담만.”
“그런데 너랑 같이 낭인일을 한다고 하던데... 그건 괜찮은 거냐?”
“본인이 하고 싶다는데 뭐. 게다가 유미가 나보다 훨씬 세다고.”
치호는 눈을 가늘게 뜨며 모니터 너머로 유지를 쏘아보았다.
“이 자식 뭔가 졸라 성의가 없는데. 똑바로 대답 안 해?”
치호의 닦달에 유지는 불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흥, 사람을 그렇게 들들 볶으니 아직까지도 여자친구가 없지.”
발끈한 치호가 의자를 옆으로 빼며 유지에게 몸을 돌렸다.
“그러는 너는 있냐? 너도 없잖아. 자식아!”
유지 역시 게임기를 내려놓고 치호를 마주보았다. 그는 높은 톤의 목소리로 말을 주르륵 쏟아냈다.
“저는 없는 게 아니고 안 만드는 거거든요? 학교 다닐 때 제가 받은 러브레터가 몇 개인지 잘 아시죠?”
유지는 양손을 다소곳이 모아 턱을 받쳤다. 갸름하고 멀끔한 얼굴이 더욱 부각되어 보인다. 유지와 달리 보기만 해도 여자가 도망갈 듯한 사나운 마스크를 가진 치호는 얼굴이 붉어졌다. 성격도 깐깐해 학생들에게도 인기가 없는 그다. 치호는 씨근덕대며 팔뚝을 걷어붙였다.
“이게 얼굴 좀 반반하다고 아주 꼴값을 떠네. 죽을래?”
벨소리가 울렸다. 유지의 주머니 속에서 귀면차자의 여는 곡이 흘러나온다. 잠시 치호와 으르렁거리며 눈싸움을 하던 유지는 휴대기를 꺼내서 누구한테 걸려온 전화인지 확인했다. 번호를 확인한 유지는 웬일인지 떫은 감을 한입 커다랗게 베어 문 표정을 지었다.
유지는 치호에게 얼른 나가라고 손짓을 했다.
“이런 젠장. 뭔데 그래?”
치호는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순순히 교무실을 비워주었다. 유지는 전화를 받았다. 휴대기의 버튼을 누르자 입체영상이 떠오르며 인터페이스를 구성한다. 사각형으로 만들어진 입체 화면에서 머리를 양 갈래로 묶은 여자아이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녀는 유지를 보고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안녕하냐해~!”
커다란 눈망울이 깜빡깜빡 유지를 쳐다보았다. 몸에 착 달라붙는 슈츠를 입고 넥타이까지 맨 모습은 의젓하면서도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로 귀엽다. 하지만 유지의 표정은 퉁명스러웠다.
“이번에는 뭡니까?”
소녀는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손가락으로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그녀는 묘한 발음의 반도어로 대답했다.
“응? 언제나 그렇듯이 그냥 심심해서 전화했다해.”
“전 당신의 심심풀이 땅콩이 아닌뎁쇼.”
소녀의 얼굴이 우울해졌다. 그녀는 어깨를 움츠리며 두 손을 모아 가슴 앞에서 꼼지락거렸다. 유지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묻는다.
“왜 그리 차갑냐해? 설마... 내가 싫냐해?”
“별로 좋지는 않죠. 당신은 내 동생에게 큰 상처를 남겨준 사람 중 하나니까요.”
유지의 말에 소녀는 엉엉 우는 동작을 취하며 칭얼거리는 소리를 냈다.
“흑흑, 소사는 너무 슬프다해! 사랑하는 서방님께 싫다는 소리를 들었다해! 엉엉!”
자기를 소사라고 칭한 소녀는 서방님 미워! 하는 표정으로 유지를 흘겨보았다. 역시 이 여자는 상대하기 힘들다. 유지는 한숨을 쉬었다.
“서방님은 무슨... 기껏해야 후보 중에 한명일 뿐이잖습니까. 그나저나 그 요상한 말투는 어떻게 안 됩니까?”
“왜냐해? 귀엽지 않냐해?”
“그냥 이상한데요. 그리고 그렇게 귀여운 척 하는 게 당신한테 어울리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만......”
소사는 하아 숨을 내쉬었다. 자그마한 입술이 요염하게 미소를 그린다.
“그럼, 이게 좋은가?”
여유가 철철 흘러넘치는 오만한 두 눈이 유지를 향했다. 발랄하던 분위기는 간데없고 팽팽한 긴장감이 감돈다. 외형상으로 변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사람은 달라졌다. 귀엽고 애교 많은 소녀가 지금은 냉철하고 자신감이 넘치는 묘령의 여인처럼 보였다. 아무리 외형이 작고 둥글어도 내면의 본성으로부터 뿜어지는 아우라를 숨길 수는 없는 법이다. 아직 어린 소녀임에도 불구하고 소사는 일대종사(一代宗師)만이 지닐 수 있는 압도적인 무언가를 가지고 있었다. 유지의 눈앞에 떠 있는 것은 단지 거짓으로 그려낸 허상일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교무실의 공기가 뒤바뀌었다.
유지는 소사의 위압감에도 그다지 영향을 받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는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쪽이 더 제 취향에 가깝죠.”
소사는 팔짱을 끼며 핫 하고 웃었다.
“웃기는 취향이군. 하지만...... 난 이게 더 좋다해~!”
분위기가 다시 반전. 소사는 방긋방긋 웃으며 앙증맞은 양 손을 머리 옆에서 흔들어보였다. 유지는 질렸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 말투는 도대체 어디에서 배운 겁니까?”
“반도의 만화책에서 봤다해. 거기서 대륙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말했다해.”
“바쁘다면서 만화책 볼 시간은 있습니까? 대륙 최고의 정보조직인 하오문의 소문주쯤 되셨으면 잠잘 시간도 없이 일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
소사는 샐쭉한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여가시간도 못 가질 정도였으면 애초에 때려쳤다해. 나는 나 자신을 위해 이 자리를 지킬 뿐이지, 이 자리를 위해 있는 사람이 아니라해. 그러는 서방님이야 말로 너무 여유로운 거 아니냐해? 요즘 납부하는 돈이 줄었다해?”
채권자의 은근한 채무독촉에 유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익힌 무공의 특성상, 정신적인 강인함과 유연함만큼은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그였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현실의 문제와 맞서는 것은 고달픈 일이다. 그는 허리를 꼿꼿하게 피며 뻗대었다.
“요즘 경기가 얼마나 안 좋은데요. 돈 벌기가 쉬운 줄 아세요?”
“그러면 더 열심히 해야지. 한심하다해. 아니면... 결국 빚 갚는 건 포기하고 진짜 내 서방님이 되기로 결정한거냐해? 나는 언제든지 하오(好)다해. 하오! 하오!”
공수가 역전되었다. 유지는 더 이상 퉁명스럽게 굴지 못하고 사근사근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지 말고 이자를 조금만 더 깎아주시면 안될까요? 그러면 진짜로 결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볼 수도......”
소사는 깔깔대며 웃었다.
“그런 되도 않는 거짓말은 필요 없다해. 이미 많이 봐줬다해. 네 동생은 우리 투기장의 인기 챔피언이었다해. 겨우 그 정도 금액에 팔 인재가 아니었다해!”
“겨우 그 정도라고 할 수 있는 금액은 아닌뎁쇼... 사부 영감한테 물려받은 보물까지 드렸는데 가격도 엄청 싸게 쳐 줬잖습니까. 이 구두쇠가!”
“아무리 전설로 남아있는 무기라고 해도 요즘 시대에 고작 총 한 자루에 삼백 억이나 쳐줬다해. 그게 엄청 적다면 뭐, 그건 도로 돌려주는 걸로 하고 빚에 삼백 억을 추가 해주겠다해.”
소사는 짝짝 박수를 쳤다.
“역시 내 서방님 후보 3호! 삼백 억쯤은 아주 쉽게 낼 수 있다는 배짱이 보인다해! 워 아이 니~ 사랑한다해!”
“잘못했습니다. 봐주세요.”
소사는 장난기가 동했는지 입을 가리고 키득키득 웃었다.
“사랑한다고 한마디만 해주면 봐줄 수도 있다해.”
“그건 싫은데요.”
유지의 칼 같은 거절에 소사의 표정이 굳었다. 평범한 인간 따위는 한입에 집어삼켜버릴 거대한 뱀이 동굴 밖으로 기어 나오며 본 모습을 드러낸다. 스산한 분위기가 감돌며 소사의 눈이 위험한 빛으로 물들었다. 그녀는 싸늘하게 말했다. 단순히 차가운 것뿐만 아니라 독액으로 축축하게 젖어 듣는 사람의 목덜미에 소름을 돋게 하는 목소리다.
“때로는 하기 싫은 것도 해야지. 하지 않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합법적으로 빚과 이자를 두 배로 늘려주겠다. 말해.”
유지는 안색하나 바꾸지 않고 차분하게 소사를 바라보았다.
“그건 좀 무섭지만. 싫은 건 싫은 겁니다. 게다가 그런 걸로 거짓말을 하는 건 제 주의가 아니라서.”
소사의 입가에 음산한 웃음이 걸렸다.
“내가 한번 입 밖에 낸 말은 장난이라고 해도 반드시 지키는 인간이라는 건 알고 있겠지?”
알고 있었다. 소사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고난과 역경을 헤치고 하오문의 소문주가 된 여자다. 피와 살로 점철되어있는 가시밭길을 걸어온 독종이 한 입으로 두말을 할 리가 없다. 유지는 침을 삼켰다. 이대로라면 여자의 어처구니없는 변덕에 덤터기를 쓰고 평생 노예가 된다.
뭐라도 해야 한다. 마음을 다잡은 그가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아이잉~ 그러지 말고 한번만 봐주세용~.”
유지는 몸을 배배꼬면서 콧소리를 한껏 담아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귀여움을 어필했다. 엉덩이가 실룩실룩 움직이고 두 팔은 몸 쪽으로 붙여 가녀린 소녀의 감성을 담았다. 양 어깨는 앙증맞게 살랑살랑. 마지막으로 깜찍한 윙크를 한번 던지는 것도 잊지 않는다.
유지의 몹쓸 애교 공격에 소사는 큭큭 거리며 웃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떡이며 애완동물에게 먹이를 던져주는 주인처럼 말했다.
“좋아. 말은 안 듣지만 귀여운 아이로군. 두 배로 올린 빚과 이자를 다시 반으로 깎아주도록 하지.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하도록. 알겠나?”
유지는 무언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사람의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럼요. 이게 다 누구 말씀이신데......”
소사는 다시 귀여운 아이로 돌아와 살살 손을 흔들었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다해. 만약 내 얼굴을 보고 싶으면 언제든 연락해도 된다해~ 자, 여기 뽀뽀~!”
그녀는 손가락에 입술을 맞춘 뒤 유지를 향해 그것을 가볍게 날려 보냈다. 유지는 떨떠름한 얼굴로 그것을 받았다. 솔직히 피하고 싶지만 괜히 또 무슨 꼬투리를 잡힐까 무섭다.
통신이 끊어지고 소사의 모습이 사라졌다. 유지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책상에 엎드렸다. 옆을 보니 어느 샌가 치호가 있다. 치호는 심해에서 기어 나온 촉수투성이 괴물을 본 것 마냥 끔찍하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뭐냐... 방금 그... 소름 돋는 개짓거리는...”
유지는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이렇게 힘들게 산단다. 얼마든지 존경해도 좋아.”
“미친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