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애가 가게를 정리하는 데에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녀는 주방 청소만 대강 마친 뒤에 곧장 가게와 연결되어있는 생활공간으로 가서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언젠가 유지가 말했던 것처럼 몸매가 드러나지 않는 펑퍼짐한 민소매 원피스를 걸치곤 틀어 올렸던 머리는 곱게 가다듬어 길게 늘어뜨렸다. 색기는 떨어지지만 청조함은 배가 되는 복장이다. 그녀의 손에는 작은 여행용 캐리어의 손잡이가 있었다. 이민보다는 가벼운 마실이라도 나가는 사람 같다. 유나가 물었다.
“짐은 그걸로 끝인가요?”
“네. 가지고 갈게 별로 없어서요.”
자애는 조심스럽게 가게의 문을 닫았다. 하지만 아직 미련이 남은 듯 쉽게 걸음을 떼지 못했다. 유지가 그녀의 곁에 섰다.
“가게는 어떻게 처리하기로 한 거죠?”
“다른 분이 저희가 하던 걸 그대로 이어서 하기로 했데요.”
자애는 아기의 이마를 쓸어주는 어머니처럼 가게의 문고리를 만졌다.
“언젠가 다시 돌아와서...... 돈 같은 거 받지 않고 잔치나 한 번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때는 저희도 끼워 주시는 겁니까?”
자애는 환히 웃으며 고개를 끄떡였다.
“물론이죠.”
골목이 너무 좁아서 차는 바깥의 도로에 세워둘 수밖에 없었다. 유지 일행과 자애는 천천히 골목길을 빠져나갔다. 자애는 마지막으로 골목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유지는 자애와는 완전히 다른 이유로 골목의 저편을 보았다. 검은 그림자가 스르륵 꼬리를 남기며 빠져나가는 것이 시야에 들어온다. 유지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유지가 갑자기 손을 들었다.
“미안한데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
“화장실이요?”
유나가 뜬금없는 유지의 행동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유지는 가볍게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그러자 유나의 얼굴이 조금 날카롭게 변했다.
자애는 친절하게 유지에게 화장실의 위치를 가르쳐주었다.
“이쪽으로 들어가서, 저기 파란 간판이 있는 건물 보이시죠? 그쪽으로 꺾어서 들어가시면 거기가 화장실이에요.”
“고맙습니다.”
유지는 자애가 가르쳐주는 대로 화장실을 찾아 시야에서 벗어났다. 유나와 유미는 유지를 내버려두고 자애와 함께 먼저 차에 올랐다. 유지는 그로부터 5분정도 뒤에 합류했다.
차가 출발했다. 자애는 정감어린 눈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하지만 바퀴가 나아가며 낮 익은 풍경들은 점점 뒤로 사라져간다.
그때였다.
“자애야!”
우렁찬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자애는 뒤를 돌아보았다. 창밖으로 한 사람이 기를 쓰며 쫓아오는 것이 보였다. 까까머리를 한 덩치가 있었다. 자애에게 진우라고 불렸던 녀석이다. 그는 자애를 향해 마구 손을 흔들었다. 헉헉 숨을 몰아쉬며 있는 힘을 다해 외쳤다.
“자애야! 잘 가라! 염병, 젠장할! 그리고, 꼭 행복하게 살아라! 진짜, 씨발 존나 행복하게 살다가 죽어라! 꼭이다!”
자애는 창문을 열었다. 몸을 내밀고 진우에게 손을 흔들어보였다. 그녀의 눈에서는 조금이지만 눈물이 맺혀있었다.
“그래, 꼭 행복하게 살게! 너도 잘 있어야해!”
진우는 앞으로 고꾸라져 거창하게 넘어지기 전까지 차를 쫓아왔다. 자애 역시 그가 시야에서 멀어져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차를 멈추고 차분하게 이야기를 나누게 하는 방법도 취할 수 있었을 테지만 유나는 일부러 그러지 않았다. 그리고 그 선택이 딱히 틀리지는 않은 것 같았다.
풋풋한 두 청춘남녀의 작별인사를 지켜보던 유지가 흘흘흘 노인처럼 웃었다.
“짜식, 청춘이구나. 좋을 때다.”
“자기는 청춘 아닌 것처럼 이야기 하지 마요......”
***
도시를 빠져나오자 온통 새빨간 벌판이 펼쳐졌다. 있는 거라곤 오로지 말라죽은 나무와 푸석한 흙먼지뿐인 바깥의 모습에 자애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밖으로 나오는 건 처음인데...... 티브이에서 보던 대로 정말 황폐하네요.”
앞좌석에 앉은 유지가 말했다.
“뭐, 그렇게 큰 전쟁이 있었으니까요. 아직 쌍마연합군은 건재하니까... 전쟁이 끝났다고 보기도 애매하구요. 그래도 우리나라는 극동도에 비하면 괜찮은 편입니다. 제가 말하지 않아도 잘 아시겠지만요.”
자애는 씁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사실 저는 극동도에 있을 때의 기억이 거의 없어요. 오빠에게 말로만 들었죠.”
“어렸을 때 넘어오셔서 그런 건가요?”
“그런 건 아니에요. 그 때는 이미 다섯 살이 넘었었는데요 뭘. 오빠는 저주의 충격 때문이라고 했어요.”
“저주요?”
몰랐던 사실에 유지의 귀가 쫑긋 섰다. 자애가 말을 이었다.
“이곳으로 넘어오기 바로 직전에 제가 전투기의 저주폭격에 휘말렸다고 들었어요. 어떻게 운 좋게 살아나기는 했지만...... 그 충격으로 기억이 날아간 것 같아요.”
“저주폭격에 휘말렸었다고요?”
“네. 그래서 처음 여기에 왔을 때 오빠가 고생을 많이 했나 봐요. 전에 여러분들과 만난 다음 집에서 이야기를 들었는데...... 제 치료비를 벌려고 나쁜 짓도 많이 한 것 같더라고요.”
“그렇군요.”
유지는 흐음 콧소리를 내며 턱을 쓰다듬었다.
자애가 문득 귀에 손을 가져다댔다. 잠시 귀에 신경을 집중하던 그녀가 말을 꺼냈다.
“그런데 밖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 것 같은데요? 쿵, 쿵 하고......”
“아, 그거요? 아마 저기서 나는 소리일 겁니다.”
유지는 엄지손가락을 들어 뒤쪽을 가리켰다. 그리고 뒤를 돌아본 자애는 사색이 되었다.
뒷바퀴가 뿌리는 흙먼지 사이로 거대한 동체가 보였다. 길쭉한 몸통 위로 노란바탕에 빨간 글씨가 가득한 부적을 갑옷처럼 두르고 있다. 키는 5, 6미터쯤 될까. 그것의 움직임은 그야말로 간단. 캥거루마냥 펄쩍펄쩍 뛰며 귀신같은 형상으로 쫓아온다. 그것이 바닥에 착지할 때마다 땅이 둔중한 소리를 내며 울었다.
그것은 나무였다.
녀석은 앙상한 가지를 좌우로 흔들며 줄기를 튕겨 하늘로 솟아올랐다. 그리고 다시 쿵 소리를 내며 내려와 재차 도약한다. 나무가 살아 움직이는 것으로도 모자라 반쯤 날아다니는 것을 본 자애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이었다. 게다가 아무런 감정 표현 없이 기계처럼 일정하게 이쪽을 따라오는 모습이 은근히 무섭다. 자애는 파랗게 질려서 유지에게 물었다.
“저, 저게 뭔가요?”
“목강시(木僵尸)입니다.”
“아, 저게 목강시구나...... 가 아니라. 막...... 엄청 따라오는데 저거 괜찮은 건가요?”
유지는 하품을 하며 나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차에 광역 결계가 펼쳐져 있거든요. 퇴마력이 작용해서 주변의 마물들을 느리게 만들죠. 밤에, 그것도 혈정진토(血精塵土) 위에서면 또 모르겠지만 여기서는 차를 따라잡을 속도가 안 나올 겁니다.”
유지의 말은 사실이었다. 목강시는 열심히 차를 따라붙었지만 점차 뒤쳐지기 시작했다. 자애는 멀어져가는 목강시를 바라보며 신기하다는 듯이 말했다.
“이야기로는 몇 번 들었지만 진짜로 나무가 저렇게 뛰어다니는군요.”
“마교 친구들이 희한한 걸 많이 만들기는 하죠.”
그 말을 끝으로 유지는 팔짱을 꼈다. 눈을 또록또록 굴리며 곰곰이 생각에 빠져든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나는 소울링크의 싱크로율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영적(靈的)으로 강하게 연결되어있는 대상에게만 전달할 수 있는 텔레파시로 유지에게 말을 걸었다.
[뭘 그렇게 생각하세요?]
[아무래도 뭔가 수상해서. 보통 저주폭격이라하면 직격은 고사하고 여파에 스치기만 해도 즉사하는데 말이야.]
그건 그렇다. 유나는 고개를 끄떡였다.
저주폭격이란 원한을 가지고 죽은 시체에 원념을 강화시키는 주술을 걸어 무기화 시킨 뒤 전투기에 실어서 뿌리는 것으로, 그것에 맞으면 끔찍한 악취를 풍기는 시독(屍毒)에 녹아 사라지거나 원령의 저주에 걸려 지독한 환상을 보다가 죽게 된다.
생산방법이 비인도적이기는 하지만 전쟁 중에는 원료를 구하기가 쉽고 그 위력이 뛰어나며 상대방에게 공포심을 심어주는 효과도 있기 때문에 쉬쉬하면서도 모두가 사용하는 무기 중에 하나였다.
유나는 한 가지 사실을 떠올리고 말했다.
[아가씨가 저 분에게 강력한 파마의 힘이 있다고 하셨잖아요. 아마 그것 덕분이지 않을까요?]
[그건 그렇겠지. 하지만 영혼의 힘이 몸에 제대로 자리 잡기도 전에도 저주폭격을 견뎌냈다는 건 단순 재능으로만 치부하기에는 과해. 무슨 성녀(聖女)도 아니고. 고작해야 불법이민자인 소녀가 가질만한 힘은 아니야. 아무래도 수상한 점이 많아서 하오문에 뒷조사를 부탁하기는 했는데 쓸모가 있을지 모르겠네.]
[아까 화장실에 가신다고 하셨을 때 의뢰하신 거예요?]
[응. 그런데 가짜 시민권을 이용하던 불법이민자라 전산기록이 없어서 찾는데 시간이 좀 걸린다고 하더라. 아무리 빨라도 내일 아침쯤에나 연락을 주겠다고 하던데.]
[그럼 어떻게 하죠? 지금이라도 의뢰를 포기하고 돌아갈까요?]
[아냐. 이미 도시 밖이잖아. 치안구역을 벗어난 지도 오래고. 돌아가기에는 늦은 것 같아. 그리고 우리가 위약금을 물어줄 돈이...... 있니?]
[없죠. 전에 선금으로 받은 것도 생활비만 빼고 다 넘겨버렸는데요.]
[그러면 어쩔 수 없는 거지 뭐. 무슨 일이 일어나도 대응 할 수 있도록 준비만 해둬. 긴장 단단히 하라고.]
[......그렇게 속편하게 게임 하시면서 할 소리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유미는 운전대를 붙잡으며 유지를 흘겨보았다. 텔레파시로 대화를 나누던 도중 무언가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것처럼 보이던 사람은 간데없고 열정적으로 휴대용 게임기의 버튼을 누르고 있는 인간만 남아있었다. 유지는 아까처럼 유나에게 윙크를 해 보였다.
[에이, 나는 게임하면서도 충분히 대응할 수 있어! 머리는 게임을 해도 몸은 단단하게 긴장해 있다고!]
그 자신감 넘치는 표정이 왠지 얄밉다. 유나는 기어를 조절하는 척 손을 내리면서 갑자기 손을 뻗었다. 꽉 쥔 주먹이 창처럼 유지의 옆구리를 찔러 들어간다.
유지는 게임을 하던 자세 그대로 팔만 살짝 움직여 팔꿈치로 유나의 주먹을 막았다. 그리곤 후후후 웃으며 육성으로 말했다.
“어때? 완벽하지?”
“완벽하게 얄밉네요. 때려주고 싶을 정도로.”
유나의 음산한 어조에 유지가 어깨를 움츠리며 방어태세를 취했다. 하지만 왠일로 주먹이 날아오지 않는다. 유나는 새침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눈물까지 보였는데 제가 주인님을 때릴 리가 없잖아요.”
“아니, 아까 그건 그냥 장난이었는데.”
“그럼 또 맞을래요?”
유지는 마님의 치맛자락에 물을 쏟은 머슴처럼 굽실거렸다.
“아니오. 방금 것도 장난이었습니다. 때리지 마세요.”
뒷좌석에 앉아 둘의 대화를 지켜보던 자애가 한마디 했다.
“전에도 그렇게 느꼈는데 두 분을 보고 있으면 무슨 결혼한 지 이십 년 넘은 부부 같아요.”
유나의 손에서 운전대가 빠져나갔다. 얼음처럼 굳어버린 유나의 입에서 한 마디 단어가 꿈결처럼 흘러나온다.
“부, 부부......?”
제어를 잃은 차량이 바닥의 돌부리를 밟고 튀어 올랐다. 중심을 잃고 빙글빙글 팽이처럼 돌기 시작한다. 자애가 꺅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 난리 통에도 유나는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았다.
“야, 야, 야, 유나야! 운전! 운전! 운전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