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만 두세요!”
그 앞을, 자애가 가로막았다. 급하게 차에서 뛰쳐나오느라 조금 숨을 헐떡이고 있다. 유미는 짜증스러운 눈으로 주변을 훑었다. 예상치 못한 사태에 바보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유지와 유나가 보였다. 그녀는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비켜.”
자애는 완고하게 고개를 저었다.
“무저항인 사람을 그냥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어요.”
유미는 역겹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몸에서 조금씩 살기가 피어오르며 손에 들린 교아귀가 소름끼치는 쇳소리를 냈다.
“개소리 지껄이지 말고 꺼지시지.”
자애는 당돌하게 대꾸했다.
“뭐가 개소리라는 거죠?”
한숨.
“그럼 우릴 죽이려 한 놈을 죽이지 말라고 하는 게 개소리가 아니면 뭐지?”
“위협을 가했다고 싸울 의지도 없는 사람을 무작정 죽이려는 걸 말리는 게 잘못 된 건가요?”
비웃음.
“위협? 그걸 그렇게 단순히 위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건가?”
“아뇨. 하지만 그게 당연하다는 듯이 사람을 죽일 이유가 되지는 않아요.”
“역시 개소리군. 죽일 이유는 충분하다 못해 흘러 넘쳐. 고작 재미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죽일 수 있는 게 사람이야. 그런데, 우리를 죽이려한데다 살려두면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는 위험인자를 내버려 두라고? 이 세상이 그렇게 따뜻해 보이나?”
“따뜻하지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분노.
유미는 습관대로 이를 갈았다. 그녀의 분노에 반응해 전신의 기가 들끓어 오른다. 주변의 기압이 낮아지며 그녀의 머리카락이 조금씩 떠올랐다. 수라마경의 마기(魔氣)에 물든 두 눈에서는 푸른색의 귀화가 피어올랐다. 씹어뱉듯 말했다.
“뭘 믿고 그렇게 까불지? 죽고 싶어서 환장했나?”
말만 앞설 뿐인 양아치의 위협과는 다르다. 유미는 진심이었다. 당장이라도 칼을 날려 목을 쳐 날릴 것 같은 살벌함이 말 속에 섞여 있다.
자애는 유미의 살기에 질려 부들부들 떨었다. 아무런 훈련도 받지 않은 소녀가, 일생의 반절을 서로가 죽고 죽이는 아수라장에서 살아온 인간과 기 싸움을 해서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자애는 눈을 부릅뜨면서 끝까지 자신이 할 말을 했다.
“전 단지 옳은 일을 하려고 할 뿐이에요.”
유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작지만 강철보다도 단단한 손이 손잡이를 고쳐 쥔다. 손에 들린 교아귀검이 굶주린 늑대 같은 울음소리를 냈다. 유미가 나직하게 읊조렸다.
“비켜. 비키지 않으면 죽인다.”
“싫어요.”
“마지막 경고다. 비켜.”
유미의 눈이 빛났다. 막대한 살기가 쏟아졌다.
마치 맨몸으로 쏟아지는 우박을 받아내는 것 같은 느낌에 자애는 몸서리를 쳤다. 피부가 따끔거리고 어깨가 당장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다. 창백한 얼굴에선 식은땀이 흐르고 다리는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그러나 고개를 저었다. 비켜서지 않았다.
유미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럼 죽어라.”
무자비한 칼이 휘둘러진다. 소녀의 가녀린 목덜미를 향해 교아귀검이 이빨을 들이밀었다.
“잠깐 스토-옵! 거기까지!”
둘 사이로 유지가 끼어들었다. 그가 손을 과장스럽게 흔들며 몸으로 교아귀검의 길을 막았다. 유미의 손이 멎는다. 멈춘 유미의 팔을 살며시 잡는 손이 있었다. 유나였다.
“아가씨......”
유나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 유미는 순간 욱 하며 목에 핏대를 새웠으나, 이내 아랫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신경질적으로 교아귀검을 검집에 집어넣는다.
“마음대로 해.”
유미는 뒤로 물러나 차에 다가갔다. 차의 옆구리에 허리를 대고 기댔다. 팔짱을 끼고서는 눈을 감아버렸다.
유지는 힘이 풀려 주저앉는 자애를 부축했다. 유나가 텔레파시로 말을 걸어왔다.
[어쩌죠? 저도 죽이는 게 좋은 판단이라고 생각하지만 자애씨가 저렇게까지 나오시니 엄청 애매한데요. 저희가 무슨 살인마도 아니고......]
[일단 내가 이야기를 좀 해볼게.]
자애는 비척거리면서도 흑의인을 지키려는 양팔을 벌렸다. 그렁그렁한 눈에는 여전히 힘이 있고 입술은 고집스럽게 닫혀있다.
정말 근성 있는 여자다. 유지는 내심 감탄하면서 타이르듯이 말했다.
“자애씨, 이러시면 저희가 곤란합니다. 비켜주세요.”
“싫어요.”
어지간해서는 물러날 기미가 안 보인다. 유지는 차선책을 선택하기로 했다. 그는 주머니에서 단단히 밀봉되어있는 작은 쇠통을 하나 꺼냈다. 쇠통의 표면에는 긴급 치료 물약 이라는 명칭이 음각으로 박혀 있었다. 그는 약통을 흔들어보였다.
“저 친구를 죽이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어차피 저대로 두면 곧 죽어요. 비켜주시죠.”
유지와 자애의 눈이 마주쳤다. 유지의 침착한 눈을 마주한 자애는 이내 고개를 숙이며 옆으로 비켜섰다. 중심을 잡지 못하고 넘어지려는 것을 유나가 잡아주었다.
유지는 반쯤, 아니 반 이상 죽어가는 흑의인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는 흑의인의 두건을 벗겼다. 생각 외로 앳된 소년의 얼굴이 나타났다. 나이는 열여덟, 아홉쯤 됐을까. 녀석은 흐릿한 눈으로 유지를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정신이 삼도천을 들락날락하는 것 같다. 유지는 녀석의 입에 물약을 흘려 넣어주고 잘린 팔에도 담뿍 약을 뿌려주었다.
유지가 사용한 것은 마법으로 만들어낸 일종의 비약으로 외상을 빠르게 치료하는 데에는 이것만한 것이 없었다. 다만 효과가 좋은 만큼 부작용이 심했다. 상처부위가 이상하게 접합 된다던가 재생의 수준을 넘어서 피부가 증식해 부풀어 오르는 등의 문제가 생기기 일쑤인데다 심한 경우 새로운 팔다리가 생겨나는 괴현상이 일어나기도 한다. 때문에 전장에서도 목숨이 경각에 달한 사람이 아니라면 거의 사용하지 않는 물건이다.
약효가 돌자 피가 멎었다. 순식간에 자란 살점이 어깨의 단면을 덮었다. 내상을 입어 입에서 흘러나오던 피도 잦아들었다. 소년의 눈에 조금이지만 빛이 돌아왔다.
딱히 부작용이 발생한 것 같지는 않다. 운이 좋은 녀석이다. 유지는 녀석의 멱살을 잡아 일으켰다. 동도어로 말을 걸었다.
“어이, 조금 정신이 드나?”
소년의 시선이 유지에게 향했다. 피에 젖은 입술이 달싹였다.
“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 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 나는......”
그는 멍한 표정으로 같은 말을 반복했다. ‘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 아무래도 정상적인 반응이 아니다. 마치 실 끊어진 인형 같았다.
“이거 왜 이래?”
유지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다가 곧 무언가를 떠올리고선 소년과 얼굴을 맞댔다. 손가락으로 소년의 눈꺼풀을 뒤집어본다. 소년의 하얀 흰자위 위로 기이한 문자들이 도형을 이루고 있는 것이 보였다. 유지는 혀를 찼다.
“이 친구 섭혼술(攝魂術)에 걸려있어. 뭘 캐내기는 힘들겠는......”
순간, 소년의 동공이 회전했다. 유지와 눈을 마주친다. 소년의 흰자위 위를 떠도는 문양들이 마구잡이로 꼬여 엉망진창으로 일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소년의 몸이 경련했다. 그의 몸 위로 섬뜩한 모양의 주인(呪印)이 떠올랐다. 전신이 붉게 달아오르며 눈과 입은 물론이요, 콧구멍과 귓구멍에서까지 빛이 뿜어져 나왔다. 흑의를 찢어발기며 풍선처럼 소년의 몸이 부풀어 오른다. 한계까지 늘어난 피부가 찢어지며 온몸에서 하얀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유지가 자애를 감싸며 유나의 뒤로 뛰었다. 그의 입에서 다급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유나야!”
유나가 반사적으로 왼팔을 들었다. 그리고 폭발.
섬광이 주변을 휩쓸었다. 순간적으로 해가 뜬 것처럼 주변이 빛으로 물든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빛이 꺼지며 굉음이 울려 퍼졌다. 뒤따르는 충격파. 힘의 파도가 바닥을 타고 원형으로 퍼져나간다. 폭발. 흙더미가 사방으로 흩뿌려지며 기류가 변했다. 짧은 시간동안 생겨난 열기가 급격하게 상승하며 작은 구름을 형성한다.
잠시 후, 연기가 걷혔다. 구름 아래로 둥그런 보라색의 보호막이 몸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것은 깜빡깜빡 점멸하더니 이내 피식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팔을 들고 있는 유나가 있었다. 유지는 자애와 함께 그녀의 등 뒤에 붙어있다.
유나가 입술을 깨물었다. 펑 소리와 함께 그녀의 팔이 터져나갔다. 파란 방패 문신이 빛을 잃는다. 부서진 표면 장갑의 틈으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유지가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아?”
“네. 하지만 과부하로 마력회로가 80퍼센트는 날아간 것 같아요. 그보다 아가씨가......”
“난 괜찮아.”
폭발의 여파로 쌓인 흙더미를 무너트리며 유미가 걸어 나왔다. 손에는 거대한 대력귀검이 들려있고 피부는 은빛으로 빛나고 있다. 대력귀를 방패로 폭발을 막아내며 충격파를 금강귀의 강도로 버텨낸 것이다. 유미는 재킷의 먼지를 털어내며 뒤를 돌아보았다. 차가 옆으로 쓰러져 배를 내보이고 있다. 옆구리에는 폭발에 튕겨나간 유미가 들이받아 생긴 등 자국이 깊게 박혀 있었다. 유미는 대력귀검의 끝을 땅에 찔러 넣어 지렛대의 원리로 차량을 일으켜 세웠다.
그때, 사방에서 마법진이 떠올랐다. 수십 개의 마법진이 빙글빙글 돌며 공간이 일그러진다. 전장에서 몇 번이고 보았던 광경이다. 유지와 유나의 표정이 굳었다. 유지가 소리쳤다.
“차에 타! 빨리!”
그는 냉큼 문을 열고 자애를 내던지듯이 차에 태웠다. 유미와 유나도 급하게 차에 올랐다. 그러자마자 바깥에서는 검은 옷을 입은 닌자 수십 명이 마법진 안의 공간을 비집고 바닥에 내려앉았다. 그들은 일제히 검을 뽑았다. 그 끝에서 벼락과 화염, 그리고 보라색 수리검이 분출.
유나는 운전석의 버튼을 두들겨 방어막을 켰다. 포격이 밀어닥치며 충격이 차체를 휩쓴다. 배리어가 깨지고 다시 발동하기를 반복. 차량 뒤 칸의 마나배터리의 잔량을 표시하는 계기판이 급격하게 움직인다. 눈에 띄게 마력잔량이 줄어갔다.
유지가 말했다.
“유나야 밟아!”
퇴로는 닌자들에게 막혀있다. 도대체 어디로 밟으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따질 시간은 없었다. 냅다 시동을 걸면서 묻는다.
“어디로요?”
“저기로!”
유지가 가리킨 곳은 탑으로 이루어진 벽 너머, 혈정진토가 파도처럼 일렁이고 있는 붉은 대지였다.
과연, 옳은 판단이다. 적의 적은 아군. 피아를 구별하지 않고 사람을 습격하는 마교의 괴물들은 그들의 좋은 방패막이가 되어줄 것이었다. 따라 들어오지 않는다면 그것으로도 좋다. 수십 명의 훈련된 닌자의 연계를 상대하는 것 보다는 이지(理智)를 상실한 마교의 괴물을 상대하는 것이 낫다.
“꽉 잡아요!”
유나는 거칠게 액셀러레이터를 때려 밟았다. 엔진이 둔중한 소리를 내며 울부짖는다. 바퀴가 돌며 차체가 튕겨나가듯이 가속.
닌자들은 사격을 가하면서 각자 헤이스트를 발동. 두 다리로 차의 뒤를 쫒는다.
그렇게 한 대의 차와 수십의 닌자가 마교의 땅에 발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