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연재 > 현대물
나의 119.
작가 : 삼각형
작품등록일 : 2016.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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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9-25     조회 : 416     추천 : 0     분량 : 5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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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 여기 아이스크림이다.”

  나는 바닐라 맛 막대 아이스크림을 벤치에 앉아 인형을 꼭 품에 안고 있는 꼬맹이에게 건넸다.

  “헤헤, 뭘 이런 걸 다.”

  헤벌쭉하게 웃으며 꼬맹이는 두 손으로 내가 건넨 아이스크림을 받아든다.

  “아이스크림 가게를 바라보면서 침을 질질 흘리고 있는 게 불쌍해서 하나 사주는 거다. 아, 그리고 이제 와서야 생각난 건데, 너 이런 아이스크림 막 사먹고 해도 되는 거야?”

  지갑을 대충 재킷 안에 집어넣은 나는 침을 질질 흘리고 있는 꼬맹이의 옆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흠, 좋지는 않지만 가끔이면 돼요! 가끔은요!”

  내가 아이스크림을 빼앗기라도 하는 줄 알았는지 꼬맹이는 급히 몸을 쭉 빼며 혓바닥을 날름 내밀고 아이스크림을 쓱 핥아버린다.

  “거 천천히 먹어라, 어차피 줬다가 뺏을 생각은 없으니까.”

  나는 손을 내저으며 다리를 꼬고 편히 앉았다.

  “의외로 남자다운 면이 있으시네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꼬맹이는 작은 입으로 아이스크림을 한 입 베어 문다.

  나는 가만히 옆에서 꼬맹이가 맛있게 아이스크림을 먹어치우는 광경을 바라봤다. 이렇게 바라만 보고 있으면, 이 꼬맹이가 어딘가 아프다는 것이 상상도 되지 않는다. 하얀 환자복 대신에 알록달록한 사복으로 갈아입기라도 한다면, 그 누구도 이 꼬맹이가 환자라는 사실을 알아보지 못 할 것이다.

  “그런데, 너는 그렇게 너희 엄마가 좋은 거냐?”

  문득 방금 전, 마술쇼에서의 기억이 떠오르는 바람에 나는 별 뜻 없이 맛있게 아이스크림을 먹어치우고 있는 꼬맹이에게 말을 걸었다.

  별 뜻은 없었건만, 나는 내 말을 들은 꼬맹이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가 다시 펴지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아저씨는 어떤데요?”

  “그거야…….”

  허를 찔렸다. 말문이 턱 막힌다. 어머니에 대해서 내가 어찌 답을 해야 한다는 말인가.

  “대답하기 힘드세요? 흠, 어쩐지 아저씨가 조금 불쌍해지네요.”

  진심으로 동정심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진심인 것 같아서 더 기분이 언짢다.

  “그럼, 아저씨는 여태까지 힘들었을 때 누구 앞에서 울었는데요?”

  “그거야…….”

  어째 내가 먼저 입을 열었지만 질문은 내가 더 많이 받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 질문이란 게 어쩐지 전부 내 말문을 막히게 한다.

  힘들었던 적, 내게 힘들었던 적이 있기는 했던가.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남들처럼 이런저런 걱정할 것 없이 멋진 울타리 속에서 자라난 내게 힘들었던 기억을 찾아내라고 한다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인가, 나는 내가 언제 마지막으로 울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어쩌면 태어날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울음을 터뜨린 날이라고 생각하니, 조소가 지어진다.

  “그러게 말이다, 나는 기억도 안 난다.”

  “아저씨는 행복한 인생을 살아 오셨나 보네요.”

  별로 믿기지 않는다는 건지, 꼬맹이는 이상한 눈초리를 하고 나를 바라본다.

  “음, 제가 이런 말을 하기는 뭐 하지만요.”

  꼬맹이는 내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며 말을 잇는다.

  “저는 제 인생이 정말로 불행하다고 생각했어요. 먹고 싶은 것도 마음대로 못 먹고, 놀고 싶은 곳도 마음대로 못 가고, 듣기도 싫은 병원을 제집처럼 들락날락 해야 하고.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었어요.”

  꼬맹이는 잠깐 흘러내리는 아이스크림에 입을 가져다 대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제 병은 제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태어난 거였거든요. 제가 나이를 먹어 가면, 병도 함께 저를 따라왔어요. 아프고 아파서 병상에서 몸부림을 치면, 그때마다 엄마나 아빠가 달려오고 저는 당연하다는 듯 소리치고 윽박을 질렀어요.”

  그렇게 말하며 꼬맹이는 주사바늘이 꽂혀있는 자신의 한 손을 바라본다.

  “제 잘못은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이렇게 아파야 하는 이유에 내가 보탠 건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저는 언제나 당당하게 화만 냈어요. 평소에 회사에 출근을 하시는 아빠는 제 곁에 자주 없었고, 항상 제 옆에만 계시던 엄마는 제게 있어서 그저 화풀이에 좋은 샌드백이었던 것 같아요. 제가 별 것도 아닌 일에 화를 내면, 엄마는 그 별 것도 아닌 일을 어떻게든 제 기분에 맞추기 위해서 애를 쓰셨어요. 저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엄마에 대한 어떤 죄송함도 느끼지 못했던 것 같아요. 아니, 느낄 필요성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이렇게 된 것에 내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으니까. 나 때문에 이렇게 된 게 아니니까. 그러다가, 언젠가 배가 너무 아파서 진통제를 요청했는데, 진통제가 늦게 왔던 날이 있었어요. 배는 아파오고, 진통제는 오지도 않으니 너무 답답했어요. 그리고 또 화가 나기 시작했어요. ‘뭐 때문에.’라는 생각이 들면서 또다시 엄마에게 소리를 쳤어요. 너무 아프다고,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았겠다고,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고. 제가 소리를 지르면 엄마는 저를 달랠 거라고 생각했어요. 당연하다고 생각했어요.”

  자신의 주사바늘을 바라보던 꼬맹이는 숙였던 고개를 들고 시선을 내게 향한다.

  “뺨을 맞았어요, 처음으로 뺨을 맞았어요. 주사를 맞는 것보다, 복통을 견디는 것보다 더 아팠어요. 음, 뺨이 아팠던 건 아니었는데요, 그냥 엄청 아팠어요. 왜 그런지 아세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자코 꼬맹이의 맑은 눈을 바라만 보았다.

  “헤, 모르시겠죠? 철이 든 거예요, 철이! 갑자기 철이 드니까 아팠던 거예요. 왜냐면요……. 왜냐면요……. 엄마도 울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느꼈으니까요, 엄마도 저랑 아무것도 다를 게 없다는 걸 느꼈거든요. 제가 아픈 데에 제 잘못은 단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며 당당했지만, 그건 다 마찬가지였잖아요. 엄마도, 아빠도, 다른 모든 사람들도 아무도 제게 보텐 건 없었잖아요. 아프다는 이유는 마음껏 투정부리고, 마음대로 남을 힘들게 할 수 있다는 특권이 아니었어요. 제 잘못도 없지만, 다른 사람들도 잘못이 없는 걸요.”

  맑은 눈이 더욱 투명해지며 물결을 일으킨다.

  “엄마는 항상 제 옆에서 말해줬어요, 언젠가는 병이 다 낫고 친구들을 사귈 수 있을 거라고요, 언젠가는 가고 싶은 곳도 마음껏 다닐 수 있다고요. 엄마가 여태까지 제 말도 안 되는 투정과, 짜증을 전부 받아주고 있었던 건 제가 아파서, 환자라서, 어떤 죄책감 때문에 그랬던 게 아니었어요, 그냥, 그냥 저는 엄마의 딸이라서, 가족이니까 이해하고 참아가며 저를 보살펴 주셨던 거였어요. 그런데, 말도 안 되는 이유를 같다 붙여대며 엄마에게 짜증이나 부리고 있었던 제가 참 못났다고 생각했어요. 그 뒤로, 저는 참는 법도 배우고 가족과 즐겁게 대화할 수 있는 법도 배웠어요. 힘든 일이 있을 때는, 항상 제 곁에 있던 엄마에게 말 할 수 있었고, 궁금한 질문이 있을 때도, 항상 제 곁에 있던 엄마에게 질문할 수 있었어요. 엄마는 저를 병든 환자로 치부하지 않았어요, 밖에서 뛰놀며 웃는 다른 아이들과 다를 바 없이 엄마에게 있어서 저는 건강한 딸이었어요.”

  좋은 엄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좋은 어머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딘가 슬퍼 보이는 표정을 한 꼬맹이가 부러워졌다, 또한, 이 꼬맹이보다도 성숙하지도 발전하지도 않았다는 생각이 스스로에게 들어 부끄러워졌다. 좋은 어머니를 둔 꼬맹이, 그렇다면 나는? 내게 있어서 어머니는 좋은 어머니였던가. 결코 좋은 어머니라는 표현을 쓸 수 없었던 나의 어머니, 그래도 나는 어머니에게 만족하며 살아왔지 않았는가, 남들보다 풍족한 삶을 내게 제공해준 어머니에게 감사했지 않았는가, 나는 어머니에게 충분히 만족했었다. 그 이상의 기대도 하지 않았고, 덕분에 실망 또한 하지 않았다. 그랬어야, 그랬어야 정상이니,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뭐, 아빠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들지만, 저는 엄마가 좋아요! 늘 제 곁에 있어준 건 엄마였거든요, 엄마는 제 선생님이었고, 무엇보다 제 엄마였어요! 그래서 저는 엄마가 좋아요!”

  금세 밝은 표정으로 돌아오며, 꼬맹이는 내게 해맑은 미소를 내보인다.

  “아! 그렇다고 아까 일로 오해하지는 마세요, 아까 마술사 선생님께 강력하게 주장했던 건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모양이 이 하트 모양이라서 그랬던 거예요. 아빠는 인형에 별 관심이 없기도 하고요. 음, 그래도 이 인형 두 개는 엄마랑 아빠에게 선물로 할 거니까 이상한 생각이라도 했다면, 딱 거기까지만 하세요. 저는 효녀니까요.”

  품에 꼭 안고 있던 인형을 내게 내보이며 삐약삐약 소리를 내지른다.

  “나 참, 효녀는 자기 입으로 자기가 효녀라고 떠벌리고 다니지 않는다고? 그리고 아이스크림 다 녹아서 땅에 떨어졌으니까, 이제 그만 가자.”

  나는 한 손으로 다 녹아서 바닥에 늘어져있는 아이스크림을 가리키며 앉아있던 벤치에서 먼저 일어났다.

  “어? 어! 이, 이건 아니죠, 아저씨! 아저씨가 말 시켜서 제대로 못 먹은 건데! 그, 그냥 그렇게 가버리는 거예요? 치사하잖아요!”

  엄청 다급한 표정을 지으며 꼬맹이도 벤치에서 일어선다.

  “어차피 공짜로 받은 아이스크림이잖냐, 이런 기회에 교훈도 배워야지. 원래 공짜로 받은 건, 금방 가시기 마련인 법.”

  확실히 어린애와 같이 다니면 어딘지 모르게 유치해져 가는 경향이 있다.

  나는 입을 삐죽 내밀고 분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꼬맹이를 쳐다보며 작게 키득댔다.

  “치, 어쩔 수 없네요. 오늘은 아저씨께 여러 모로 신세를 많이 짓고 말았으니까요. 다음에는 제가 아이스크림을 쏘도록 할게요.”

  내용과는 다르게 아직도 뚱한 표정은 가시지를 않는다.

  “아이스크림 말고, 자판기 커피가 더 나은 것 같은데?”

  “하아, 어른이 편식을 하면 못 써요. 그래도 네, 그렇게 할게요. 덕분에 엄청 재밌는 마술쇼도 관람에 성공했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꼬맹이의 얼굴에서 차차 뚱한 표정이 사라지고, 다시 옅은 미소가 지어진다.

  나는 짧은 다리로 열심히 앞으로 걸어가는 꼬맹이의 발걸음에 맞춰서 좁은 보폭으로 앞으로 걸어 나갔다. 조금은 차갑다고 생각했던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와 나와 꼬맹이의 머리를 한 쪽으로 넘겨버린다. 어쩐 일인지, 오랜만에 휘파람이라도 불고 싶은 기분이 들어온다.

  이 병원에 내가 온 목적도, 이 병원까지 가지고 온 무거운 마음도, 이태까지 살아왔던 나의 한심한 인생에 대한 후회도, 어머니도, 풍선처럼 가볍게 떠서 잠시 그 무게가 무감각해진다. 나보다 불쌍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잔뜩 보고 왔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 꼬맹이의 이야기를 들어서 그런 걸까, 지금은 잠시 가벼워진 느낌이 든다.

  겨울이라서 그런지, 벌써 노을이 지는 광경이 눈앞으로 펼쳐진다. 그리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휘파람 소리가 내 귀를 적신다. 나는 그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고 금방 휘파람의 주인을 찾아낼 수 있었다. 뭔지 모를 노래를 휘파람으로 연주하며 꼬맹이가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

  그 표정을 바라보니, 잠시라도 가벼워진 이유가 짐작이 갔다.

  꼬맹이와 함께 있다 보면 누가 어른이고, 누가 어린애인지 모를 정도로 유치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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