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저녁, 혜신류의 왕은 자신의 집무실에 하르한을 불러들였다.
공주, 사영의 일을 그와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하르한, 그는 현재 혜신류의 충신이기도 하지만, 왕의 오랜 벗이기도 했다.
근심이 가득 서린 얼굴로 앉아 있던 왕이 자신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하르한을 향해 말했다.
“어렵게 얻은 나의 공주이지만, 어쩔 수 없소. 융평국의 미래를 위해서.. 공주를 천열관에 보내기로 결정했소. 왕비와도 충분히 논의를 했고.. 공주 또한.. 천열관에 가겠다고 뜻을 얘기 해주었소.”
“전하!”
좋아 보이지 않는 그 안색을 하고서 왕이 꽤 단호한 어조로 말하자 하르한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왕은 하르한에게 연이어 다음 말들을 늘어놓다.
“많은 대신들이 공주를 천열관에 보내지 않는 방도를 생각하느라 몇 년 동안 애 쓴 것을 알고 있소. 어떻게든 천열관의 눈을 피해 공주를 숨겼었지만..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라 했소. 그리고 실은, 며칠 전에 천열관에서 통보가 왔소.”
“천열관에서 통보가 왔다고요?”
하르한은 왕의 말에 살짝 놀란 얼굴로 그에게 되물었다.
“그렇소. 천열관에서 공주가 천신의 운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했소.”
하르한은 왕의 대답에 비통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왕이 방금 했던 말처럼 혜신류에서는 장차 혜신류의 새 주인이 될지도 모를, 공주를 지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해왔었다.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 공주가 특별한 운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천열관과 다른 영토에 들키지 않으려, 공주의 그 운명을 꽁꽁 숨겨 왔었다.
그런데 그 비밀이 어떻게 새어나가게 되었는지, 결국 천열관에 공주의 운명이 발각 되고 말았었다.
천열관에서는 며칠 후에 혜신류의 궁궐을 방문하겠다는 내용까지 왕에게 통보해왔었다.
하르한은 침통한 얼굴을 하고서 왕을 향해 입을 열었다.
“공주님이 천열관으로 보내지시면, 영영 혜신류로 돌아오지 못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건 무엇보다 전하께서 더 잘 아시지 않으십니까? 게다가.. 16년 전, 대재신님께서 말씀하신, 명천신이 찾고 있다는 후계자가.. 어쩌면, 공주님이 실지도 모르잖습니까? 만약, 다른 영토들이.. 그 후계자를, 공주님으로 몰아가기라도 한다면.. 공주님의 목숨도.. 보장할 수 없을뿐더러.. 이 기회에 다른 영토들이 혜신류도 가만히 두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의 말을 들을수록 왕은 눈시울이 붉게 번지고 있었다.
애써 담담한척 하려 했던 그의 마음이 하르한의 현실적인 말들에 와르르 무너져 버린 것이다.
그리고 갑자기 몰려드는 상실감에 왕은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런 그의 귀로 하르한의 묵직한 목소리가 다시 흘러 들어왔다.
“전하, 방도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옵니다.”
방금 하르한이 흘러낸 말에 왕이 고개를 다시 들고 하르한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하르한이 실의에 빠진 왕에게 조금 더 진중한 어조로 말했다.
“저에게 한 가지 묘책이 있사옵니다.”
하르한의 한마디에 왕이 눈을 크게 뜨며 그를 주시했다.
그에게 하르한이 덧붙여 말했다.
“묘책을 말씀드리기 전에, 앞서, 이 묘책은.. 도박을 걸어야 하는 묘책이라는 것을 전하께 아룁니다.”
도대체 무슨 묘책이기에, 하르한이 자신에게 뜸까지 들이며 말을 뱉는 건지, 왕은 의아해했다.
왕은 바로 그에게 되물었다.
“도박을 걸어야하는 묘책이라고요?”
“예. 그렇습니다. 전하.”
하르한은 왕의 물음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말해 보시오.”
“저에게 여식(女息)이 한 명 있습니다.”
“알고 있소. 그대의 그 여식이 사생아라고 하지 않았소? 그리고 그 아이가 공주와 동갑이라고 했었소. 맞소?”
“예. 맞습니다. 전하.”
“그 묘책이란 게 무엇이기에, 그대의 여식을 언급하는 것이오?”
“예. 전하. 놀라 실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제 여식도.. 공주님과 똑같은 날, 똑같은 시에 태어났사옵니다.”
“허! 세상에~ 그, 그게 정말이오? 어떻게 그런 우연이 다 있소? 그대의 여식과 공주의 인연이 보통 인연이 아닌 듯하오.”
왕은 하르한의 고백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르한, 그의 딸이 사영과 똑같은 날, 똑같은 시에 태어났다고 하니 말이다.
“우리 공주가.. 평범한 아이었다면.. 그대의 여식과 좋은 인연을 맺고 지내면 좋을 것을…….”
왕은 아주 삽시간만이라도 그런 생각을 하니 옅은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자신의 오랜 벗으로, 또 지금은 자신의 든든한 충신인, 하르한과의 인연이 서로의 자녀들에게까지 이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니, 왕은 배까지 부른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 경우는 정말, 자신의 딸, 공주 사영이 평범한 아이었을 때나 가능한 일이었다.
한낱 꿈같은 생각일 뿐인 것이었다.
“그래, 그건 그렇다 치고, 그대의 그 묘책이란 것이 무엇이오?”
왕은 이내 옅은 미소를 씁쓸한 미소로 바꾸며 하르한에게 다시 물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해낸, 묘책은.. 제 여식과 공주님의 운명을 바꾸는 것이옵니다.”
왕은 방금 하르한의 입에서 나온 말에 귀를 의심했다.
그리고 살짝 놀란 얼굴로 하르한을 그저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의 그런 반응에도 하르한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하르한은 계속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공주님이 천열관으로 보내지시는 건 어떻게든 막아야 합니다. 제 여식을 공주님으로 위장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주님은.. 감히 송구하오나, 저의 딸이 되는 것입니다. 공주님을 저희 하르한 가에서 보호하고 있겠습니다.”
다소 충격적인 얘기를 너무나도 담담하게 늘어놓는 하르한을, 왕이 입까지 벌리고 쳐다보았다.
“그,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는 것이오? 그대의 딸아이가 천열관으로 가게 되면.. 말이오?”
왕은 하르한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나 왕의 물음에 하르한은 대답을 바로 하지 않았다.
그는 알 수 없는 묘한 표정만 짓고 있을 뿐이었다.
한동안 그렇게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는 듯 했던 하르한이 무거운 적막이 흐르는 이 공간으로 다시 목소리를 터트렸다.
“공주님으로 위장한 제 여식을 천열관에서 데리고 돌아가는 날, 천신들을 습격할 것입니다. 천신들은 해치지 않되, 정체불명의 자객들이 공주님의 목숨을 노린 것으로 꾸며, 공주님으로 위장한 제 여식의 목숨만 빼앗을 것입니다. 천열관 사람들에게 들키지만 않는다면, 공주님은 그 자객들에 의해 사고로 돌아가신 걸로 할 수 있습니다. 천열관의 천신들이 그리 만만하진 않겠지만.. 불가능한 일만도 아닙니다. 제 여식의 목숨을.. 전하와 왕비님과, 공주님, 그리고 이 혜신류와 융평국을 위해 바치겠습니다.”
“하르한!”
왕은 경악을 금치 못해 하르한이 말을 마치자마자 바로 호통을 치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왕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공주를 위해 자신의 딸아이의 목숨을 내놓겠다고 말하는 하르한이 지금껏 자신이 알고 있던 하르한이 맞는지 의구심까지 들었다.
같은 아비로써 스스럼없이 자신의 딸아이의 목숨을 바치겠다고 말하는 저 비정한 사람이 마치 다른 사람처럼 순간 느껴지기 도한 왕이었다.
“그리고 전하. 제 여식의 목숨을 거둔 후.. 그날로 저도 자결(自決)하겠습니다. 그런 다음, 전하께서 저의 딸로 위장되어 계실, 공주님을.. 수양딸로 삼으시는 것처럼 하시면 되옵니다.”
하르한이 쏟아냈던 말들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왕은 정신까지 혼미해져 벙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 그를 향해 하르한이 자신의 계획을 마저 말해주었다.
“허! 허!”
왕은 그저 허탈한 웃음소리를 연신 내뱉었다.
그러자 하르한이 왕에게 다시 말을 덧붙여왔다.
“이것이 전하를 섬기는 신하로써, 전하에 대한 제 마지막 도리라 생각해주십시오.”
하르한은 왕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마지막으로 그에게 말했다.
왕은 여전히 하르한을 벙진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
“공주님! 왜 또 의복을 입지 않으신 것인지요?”
수성재의 공주를 보필하는 궁녀, 자옹이 살짝 울상을 하고서 이얀에게 물었다.
이얀은 며칠이나 이 궁궐에서 지냈는데도, 궁궐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향해 부르는 공주라는 호칭이 적응이 잘 안 되었다.
특히 이 공주의 방은 더욱 더 그랬다.
하르한 가에 있는 자신의 방도 넓고 좋았지만 공주의 방은 차원이 달랐다.
자신의 방 보다 서너 배는 더 넓은 방이었다.
또 아기자기하고 예쁜 장식품들로 꾸며져 있는 혜신류 공주의 방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이런 공주의 방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이얀은 그저 적응이 안 될 뿐이었다.
며칠 전,
10년 전, 자신을 죽이려고까지 했던 아버지, 하르한은 이얀을 자신의 서재로 불러들였다.
이얀은 주눅이든 표정으로 미세하게 몸을 떨며 그의 앞에 앉아 있었다.
그런 이얀에게 하르한이 표정 없이 입을 열어 물었다.
“며칠 후에 천열관에서 수련자들을 선발하러 혜신류에 온다는 것을 알고 있느냐?”
“네. 아버…….”
이얀은 그의 질문에 대답을 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튀어 나오려는 아버지라는 호칭을 다 뱉지 못하고 멈췄다.
그런 이얀을 싸늘한 눈으로 쳐다보던 하르한이 다시 이얀에게 물었다.
“그럼, 공주님이 천열관에 가셔야 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느냐?”
“네? 공주님이요?”
“그래. 사실은 천열관에서 공주님을 모시러 오는 것이나 마찬 가지다.”
이얀은 하르한의 말에 살짝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서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공주님이 천열관에 가시면.. 혜신류에 영영 돌아오지 못하실 수도 있는 거 아닌가요?”
“그래. 어쩌면.”
하르한은 이얀의 질문에 짧게 대답해주었다.
“공주님께서.. 천열관에 가지 않으셔도 될 방법이 없을까요?”
이얀은 하르한에게 다시 물었다.
그러자 하르한은 잠시 침묵하는 듯하더니 이내 이얀에게 말했다.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전하와 왕비님께서는 공주님 탄생일 연회에 한 번도, 다른 영토의 영주들과 천열관의 천신들을 초대하신 적이 없으셨다. 내내 눈을 가리고 계시기도 하고, 혜신류 사람들에게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으시는 공주님의 모습을... 아는 사람이 많이 없지.”
“그러고 보니 그러네요? 저도 한 번도 공주님을 실제로 뵌 적이 없거든요.”
“이얀?”
“네! 아버.. 아니... 하르한님…….”
자신을 부르는 하르한에 이얀은 또 다시 하마터면 아버지라는 호칭을 쓰며 대답할 뻔 했다.
그런 이얀은 아차 하는 얼굴로 그에게 대꾸했다.
하르한은 자신의 계획에 이얀을 구슬리기 위해 입을 떼려 했지만 어쩐 일인지 그는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잠시 망설였다.
그러던 하르한이 굳은 결심을 하고서 이얀을 향해 물었다.
“너의 그 재주를, 혜신류, 그리고 융평국을 위해서 쓰지 않겠니?”
“네?”
이얀은 그의 물음에 뚱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천열관에 가지 않겠니?”
“네? 천열관에요?”
“그래. 어차피 네가 그 신술을 쓸 줄 안다는 것을.. 천열관에서 알게 되는 건 시간문제야. 언젠가는 너도 그 천열관에 가게 될 지도 모른다는 얘기지.”
“하지만, 제가 천열관에 가게 되면.. 어머니는요? 연해 할머니는요? 그리고.. 윤로 와도 헤어져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 곳에 간다고 해서 네 어머니를 영원히 못 보게 되는 건 아니란다. 그리고 수시로 내가 너와 네 어머니가 연통을 할 수 있도록, 내 힘을 쓸 수 있어.”
“저, 저는.. 어머니와 헤어지기 시, 싫어요. 하르한님. 그, 그리고 연해 할머니와 추만 도사님이랑.. 윤로 와도요.”
이얀은 자신을 설득하는 하르한에게 어렵게 자신의 솔직한 의사를 밝혔다.
그리고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자신을 가만히 보고 있는 하르한의 눈치를 살피는 이얀이었다.
“아직 어린 네가 어머니와, 또 너를 지켜주는 이들과의 헤어짐을.. 감당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이얀은 살짝 놀랐다.
계속 싸늘한 모습으로 자신의 솔직한 의사 표현에 하르한이 호통을 칠 줄 알았다.
그런데 하르한이 방금 했던 말투는 다정하고 부드러웠다.
하르한은 계속 그 말투로 이어서 말했다.
“허나, 나는 지금 네게 제안을 하는 것이다.”
“제안이요?”
“그래. 네가 공주님이 되는 건 어떻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