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얀은 혜신류의 밤바다를 보며 모래사장 위에 앉아 있었다.
그런 이얀의 뒤로 윤로가 다가와 섰다.
윤로는 잔뜩 화난 얼굴을 하고서 이얀을 내려다보았다.
“다 듣고 왔어. 홍아 녀석한테.”
윤로는 하염없이 검은 바다를 보고 있는 이얀을 향해 말을 내리꽂았다.
그런데 이얀은 반응이 없었다.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계속 바다만 주시하고 있었다.
윤로는 답답한 마음에 이얀을 향해 다시 쏘아 말했다.
“공주님 대신, 아가씨가 공주님 하겠다고 했다면서? 잘난 하르한 가의 서녀로 사는 게 그렇게 싫었어? 공주가 되어서라도 하르한 가를 떠나고 싶었냐고!”
윤로가 평소처럼 자신에게 윽박지르듯 나무라자 그제야 이얀이 입을 열었다.
그러나 여전히 이얀의 시선은 바다에 꽂혀 있었다.
이얀은 무미건조한 말투로 그에게 대꾸했다.
“예전에 내가 얘기했잖아. 하르한 가를 언젠가는 떠나고 싶다고. 그런데.. 어머니 봐서 참고 여기 있는 거라고. 아버지한테 죽을 뻔한 그 기억 가지고, 내가 어떻게 버텼는데.. 윤로야. 나 이제.. 더 버틸 자신이 없어. 아버지는.. 끝까지.. 날 인정하지 않으셔. 그래. 이제 정말, 하르한 가를 떠날 때가 된 거야.”
“그래서, 하르한 가 떠나서.. 고작 가겠다는 곳이 그 죽음의 길이야?”
“아버지가 내가 공주님 대신 천열관에 가게 되면.. 천열관 가는 길에 날 구해주러 오신다고 하셨어. 그날로 나는 공주님이 되어, 공주님 대신 죽는 거야. 그리고 하르한 가를 떠나, 혜신류를 떠나.. 다른 영토에서 지낼 수 있도록 아버지가 도와주시겠다고 하셨어.”
“바보냐? 진짜 죽을 거라고! 하르한이, 아가씨를.. 진짜로 죽일 거라고!”
이얀이 꼭 해탈한 사람처럼 답답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늘어놓자, 윤로는 빽빽 소리를 지르며 말을 내뱉었다.
그러자 이얀이 고개를 돌려 윤로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이얀은 무표정한 얼굴로 차갑게 윤로에게 한마디 했다.
“10년 전에, 난 이미 아버지로 인해 죽었어.”
윤로는 이얀이 뱉은 그 한 마디에 얼이 빠진 표정으로 이얀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던 윤로가 갑자기 자신의 눈썹을 움찔 거리며 이얀을 더욱 더 주시했다.
이얀이 자신의 오른손 검지에서 하얗고 조그만 빛을 자아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괴기한 걸 할 줄 아는 나를, 아버지가 혜신류와 융평국을 멸망시킬 저주 받은 아이라며, 내 심장에 칼을 겨누셨을 때, 그때, 난 죽은 거나 다름없었어. 그때로가 날 구해주긴 했었지만.”
윤로는 가녀린 손가락에서 그 조그만 빛을 연신 자아내며 말하는 이얀을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내려다보았다.
♥♥♥
“공주님! 왜 또 의복을 입지 않으신 것인지요?”
의복이 아닌, 하르한 가에서 입고 있던 옷을 입고 있는 이얀에게 자옹이 물었다.
그러자 이얀은 멋쩍게 미소를 흘리며 그녀에게 사과하듯 대꾸했다.
“미, 미안해. 적응이 안 돼서…….”
“아이참! 공주님! 그렇다고 이 소인에게 사과를 하시면 어떡하십니까? 아, 참! 마침 공주님이 내일 천열관으로 떠나실 때 입으실 새 의복이 들어왔다고 하니, 그 의복을 가지고 오겠습니다.”
자옹은 이얀의 사과에 난감한 표정을 하고서 이얀에게 볼멘소리로 말했다.
그러던 그녀가 아차 하는 얼굴을 하더니 이얀에게 일렀다.
“아.. 그, 그래!”
이얀은 자옹에게 밝게 대답해주었다.
그러자 자옹은 이얀에게 빙그레 웃어 보이며 서둘러 방을 나갔다.
자옹이 새 의복을 가지러 나간 후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꽤 오랜 시간 동안 자옹은 이얀의 방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얀은 책상에 앉아 한 쪽 손은 턱을 괴고 나머지 한 쪽 손은 검지를 들어 빛을 자아내며 자옹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방문 밖에서 어떤 기척이 느껴졌다.
자옹이 돌아온 건가 싶어 이얀이 방문 쪽에 시선을 꽂고 주시했다.
그러자 바로 방문이 덜컥 열렸다.
이얀은 열린 방문 안으로 들어온 누군가를 보고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자옹이 아니라 검은 상의와 하의, 그리고 검은 복면까지 쓴 수상한 사람이 방으로 성큼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수상한 사람은 허리춤에 검을 차고 있었다.
이얀은 수상한 사람의 등장에 순간 몸이 얼어버렸다.
이얀은 넋까지 나간 표정으로 그를 보더니 이내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검지에 다시 빛을 켰다.
여차하면 그에게 쏠 생각으로 책상에 앉아 그를 연신 경계하듯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자 그때 복면을 쓴 그 수상한 자가 자신의 검지를 복면으로 가려져 보이지 않는 자신의 입가 쪽에 얹으며 천천히 이얀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이얀은 빛을 더 넓게 뿜어냈다.
그런데 그때였다.
갑자기 수상한 자가 복면을 밑으로 살짝 내렸다.
그 바람에 수상한 자의 코와 입술까지 다 드러났다.
이얀은 그렇게 드러난 그의 모습을 보고 다시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수상한 자는 다름 아닌, 윤로였다.
아까 전과는 다른 느낌의 놀란 눈으로 입도 벙긋하지 못하고 이얀이 자신을 주시하자 윤로가 이얀에게 말을 툭 던졌다.
“그 빛 당장 꺼!”
“너, 뭐야? 왜 그런 복장을 하고 왔어?”
이얀은 윤로의 말에 바로 검지에서 빛을 끄며 뚱한 표정으로 윤로에게 물었다.
“설명은 있다가 할게. 그럴 시간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일단 빨리 여기서 나가자!”
“뭐?”
윤로는 이얀의 물음에 대충 둘러 대듯 대답하고 그녀에게 손짓했다.
이얀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하고서 윤로에게 되물었다.
그러자 윤로가 답답한 표정으로 이얀을 보며 이얀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이얀의 손목을 잡고 이얀을 책상 쪽에서 잡아 끌 듯 당겼다.
“왜 이래? 너 이런 꼴로 설마 궁궐에 잠입한 거야?”
이얀은 윤로의 힘에 의해 책상 쪽에서 끌려 나오며 윤로에게 물었다.
“그래! 이런 꼴로 잠입 하지, 그럼! 나 자객이요! 하고 당당히 들어왔겠냐? 이 아가씨야?”
이얀은 윤로의 손에 가차 없이 이끌려 문 쪽으로 가다 말고 자신의 발에 힘을 주어 억지로 멈췄다.
그러자 덩달아 윤로의 걸음도 멈춰졌다.
“헛! 왜? 그리고 밖에 병사들이랑 궁녀들은? 헛! 설마! 로, 병사들이랑 궁녀들 죽이고 들어온 거야?”
“미쳤어? 멀쩡한 사람 살인마로 만들지 마라?”
이얀이 누가 들을 새라 낮은 목소리로 묻자 윤로는 이얀을 신경질적으로 내려다보며 대꾸했다.
“아니, 그럼 어떻게 들어 온 건데?”
“아! 설명할 시간 없는데! 에휴. 어떻게 들어왔냐면? 일단 궁궐 지붕 타고 몰래 잠입 했고, 수성재에 와서는 여기 지키고 있는 병사들이랑 궁녀들 잠들게 했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이얀이 자신에게 연신 물어대자 윤로는 어쩔 수 없이 조목조목 이얀에게 대답해주었다.
“헉! 너 설마 사사초 썼어?”
이얀은 토끼 눈을 하고 윤로에게 물었다.
사사초(蛇死草)란, 융평국 동쪽 지역에 위치한 약초의 땅, 천아에서 귀하게 나는 약초 중에 하나로 독성이 있는 약초다.
독성도 잘만 쓰면 좋은 약재가 된다고 이 사사초의 잎이 바로 약재로 쓰이기도 한다.
독성이 있다고 해도 이 사사초의 소량을 약재로 만들면 불면증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수면제가 될 수 있는 약초다.
잎을 말려 가루로 만들어 여러 가지 약재를 적절히 배합한 후, 이 가루를 물에 넣고 차처럼 다려 소량으로 마시면 수면제 효과를 볼 수 있다.
또 가루를 응고 시켜 향으로 만들 수 있기도 했다.
그런데 이 사사초의 심상치 않은 이름만큼 중독성 또한 무시무시한 약초다.
소량을 이용하면 잠을 편하게 잘 수 있게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다량을 이용하면 이름 뜻 그대로, 뱀이 가지고 있는 독성만큼 목숨을 앗을 정도로 약초가 아니라 독초가 되는 것이다.
환각을 일으킬 수도 있고 끝내 수면 상태로 죽음의 문턱까지 이르게 할 만큼 말이다.
사사초의 성분을 악용하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몇 년 전부터 천아는 이 약초 재배를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이 사사초를 어떻게 가지고 있던 것인지 윤로의 사부인 [추만 도사] 그가 일부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그는 이 사사초를 이용해 향까지 만들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이 사사초로 만든 향을 가지고 악용을 하거나 하진 않았고 몰래 꽁꽁 숨겨 놓고만 있었다.
그런데 이 사사초의 향을 한두 달 전에 윤로가 발견해 몇 개 훔쳐 놨었다.
그걸 또 이얀에게 들켰던 윤로였다.
악용할 생각은 전혀 없고 혹시나 싶어서 몇 개 훔쳐 놓은 것뿐이라고 이얀에게 신경질을 내며 해명했던 윤로였다.
“괜찮아. 아주 조금만 향을 피우고 바로 껐기 때문에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다들 깨어 날 거니까. 이제 됐냐? 아무튼 빨리 나가자!”
윤로는 자신을 쏘아보고 있는 이얀에게 일러주었다.
그리고 다시 자신의 손에 힘을 주어 이얀의 손목을 끌어당겼다.
그러나 이얀은 꿈쩍도 안했다.
윤로는 뚱한 얼굴로 이얀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자꾸 어딜 가자는 거야? 잊었어? 나 내일 천열관 가는 날이야!”
이얀은 윤로에게 끌려 나가지 않으려 발에 안간 힘을 주고 버티고 서서 그에게 말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윤로가 인상을 팍 쓰고 매서운 눈빛으로 이얀을 쏘아보았다.
그런 그가 이얀에게 말했다.
“내 말은 그렇게도 안 들으면서 하르한님이 죽으러 가라고 한 말은 잘도 듣는다?”
“무슨 소리야? 공주님을 위해서 이러는 건데! 그리고 아버지가 구해 주신다고 하셨다고 몇 번을 말해?”
“허! 퍽이나? 아가씨야 말로 잊었어? 안 그래도 못 잊고 있는 기억, 나까지 거들어서 미안하긴 한데, 아가씨 아버지, 하르한! 그가 아가씨 죽이려고 했었잖아. 이번에도 아가씨 죽이려고 하는 거나 마찬가지라니까? 하르한이 아무리 혜신류에서 제일 가는 무신이라도 천열관에 천신들을 어떻게 다 감당하시겠어? 생각해보면 몰라? 아가씨랑 같이.. 자폭 하려는 거야.”
자신도 이렇게 하르한의 진짜 본심을 다 간파할 수 있는데 이얀은 정말 몰라서 그러는 건지 아니면 알면서도 이러는 건지, 그녀의 속을 도통 알 수가 없어 윤로는 답답하기만 했다.
이얀은 윤로가 늘어놓은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런 이얀의 두 눈이 갑자기 붉어지는 듯하더니 짙은 초록 눈망울에서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히고 있었다.
윤로는 이얀의 그런 눈을 보고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이내 다시 그녀를 달래듯 조금 부드러워진 말투로 말을 내뱉었다.
“정신 좀 차려. 기회는 지금 뿐이야. 잘 생각해! 천열관 가다가 정말 죽어 버릴래? 아니면, 나랑 같이 끝까지 살아남을래?”
윤로가 뱉은 말에 이얀은 입을 움찔거리며 목소리를 내려다 말았다.
잠시 주춤 거리던 이얀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죽을래. 공주님을 위해서.. 나 죽을래. 로야.”
“뭐?”
자신이 던진 선택 사항에 그래도 꽤 좋은 방향으로 마음을 움직일 줄 알았던 이얀의 입에서는 예상 밖에 선택이 흘러나왔다.
윤로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리고 헛웃음을 한 번 내뱉고 이얀을 쏘아보았다.
“살아 있어도 아버지한테 자식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살고 있고.. 이미 아버지한테 한 번 죽임 당했었어. 살기 싫어. 로야. 이왕이면.. 불쌍하신 공주님을 위해서 죽을래. 나 이제 죽는 거 안 무서워. 윤로야.”
이얀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그동안 꾹꾹 눌러 참았던 자신의 속마음을 윤로에게 내비춰 보이듯 말을 쏟아냈다.
윤로는 그런 이얀을 벙진 표정으로 쳐다보고 어떤 대꾸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해가 넘어가려는 모양인지 이얀과 윤로가 있는 방 안으로 주홍색의 햇빛이 새어 들어와 둘을 비추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주변으로 한참 적막감이 흘렀다.
윤로는 한참 이얀을 말없이 내려다보다 적막을 깨며 입을 열었다.
윤로의 목소리가 고개를 떨구고 훌쩍 거리고 있는 이얀의 귀에 흘러 들어오기 시작했다.
“10년 전에 내가 너 살렸잖아. 내가 그날 천하에 하르한의 칼을 향해서 얼마나 벌벌 떨면서 내 부용도를 날렸는지 알아? 그 당시에 내 키보다도 컸던, 부용도를 죽을힘을 다해서 날렸어. 아가씨 대신 내가 하르한 손에 죽을 각오를 하고 부용도를 날렸었다고. 어떻게든 너 살려야겠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고.”
이얀은 자신의 귀에 연신 파고 들어온 윤로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눈빛이 살짝 흔들리는 듯 했다.
이얀은 눈물이 흥건한 두 눈으로 윤로를 올려다보았다.
그때 윤로가 다시 말했다.
“내가 그때 널 살렸으니, 내 허락 없이, 아가씨 너, 못 죽어. 너 천열관도 못 보내. 내가 못 보낸다고.”
윤로는 이얀의 눈시울만큼이나 붉어진 두 눈으로 이얀을 똑바로 쳐다보며 강하게 말을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