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저물어가며 온 세상을 핑크빛으로 물들이 듯 석양이 아름답게 지고 있었다. 보는 사람들 마다 감탄을 자아내는 풍경이건만 병실 침대에 기대어 창문 너머를 바라보고 있는 가을의 감성은 자극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저 초점없는 눈으로 멍하니 밖을 바라봤다.
생각이라는걸 깨어난 후 부터 지금까지 계속 이어나갔지만 답도 없이 하면 할수록 미궁으로 빠져들어가는 것 같아 잠시 멈추고 뇌에도 휴식을 취해주고 있는 중 이었다.
그리고 조금만 움직이면 아직도 어지러운 허약한 몸도 생각을 멈추게 하는데 한 몫을 했다.
"후우, 아직도 어지럽네"
고개를 잠깐 숙이기만 했는데 또다시 핑 돌면서 속이 울렁거렸다. 고개를 가볍게 들고 침대 헤드에 머리를 기대자 속이 가라앉았다. 몸에 연결되었던 여러가지 장치는 이미 다 제거됐고, 파랗게 멍든 손등만이 꽤 오랜시간 수액을 맞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한달동안 누워있던 사람 치고는 회복력은 빨라 이제는 앉아 있어도 될 정도로 기력이 회복되었다. 급하게 움직이지만 않는다면 기립성저혈압도 일어나지 않겠지만 낮에 한번 혈압이 떨어져 쓰러진 이후로는 행동이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이가을..."
입술이 어색함 없이 열렸다. 낮부터 계속 들었던 이름이라 그런가. 처음 뱉을 때 부터 혀 끝에 친숙하게 달라붙었다.
'이가을님. 결과를 들으셨겠지만 검사상에서는 아무런이상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낮에 찾아온 주치의에 의한 설명은 그랬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된건 불치병도, 그렇다고 몸을 가누지 못하는 상태는 아니라는 것.
'하지만 지금 상태로 봐서는 심리적 외상으로 인한 해리성 기억상실로 보입니다.'
'갑작스런 상실의 경우 갑자기 회복되기도 하니 조금 더 지켜보도록 하죠.'
그녀는 진짜가을이 아니었기에 주치의의 질문에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선택지 말고는 할 수 있는 답안이 없었다.
그래서 작은 위로와 함께 붙여진 병명은 해리성기억상실증. 어차피 병명은 중요하지 않았다. 진짜가을이 돌아오면 사라질 병이니깐.
그리고 단독 vip병실을 사용하길래 부자가 아닐까 라는 기대감도 있었지만 후원자의 도움으로 입원을 한거라는 칼 같은 대답만 들을 수 있었다.
"무슨 후원으로 vip병실씩이나..."
그렇게 해서 얻은 가을에 대한 정보는 나이는 29살, 이게 전부였다. 거울을 통해서 본 얼굴은 핏기가 없는 것을 제외하고는 쌍꺼풀진 큰 눈에 가지런한 눈썹, 그리고 갈색눈동자가 인상적인 사람이었다. 특히 웃을 때 한쪽에만 들어가는 보조개는 건강했다면 더욱더 매력적이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 만큼 지금도 사랑스워보였다.
얻은 정보가 저게 다라니.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휴"
어디서 부터 진짜가을의 영혼을 찾아야할까.
가을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테이블에 놓여진 지갑과 핸드폰을 가만히 주시했다.
"저기에 모든 비밀이 숨겨져 있을것 같은데"
그녀도 본인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자신이라면 핸드폰에 모든걸 다 기록해 뒀을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폰을 가만히 노려봤다. 노려본다고 폰의 잠금화면이 풀릴 일도 없건만, 괜한 눈싸움에 오히려 눈물만 핑 도는걸 느끼고는 얼른 눈을 감았다.
"왜 안열리는거야 진짜"
폰을 받자마자 충전 시키고 배터리가 1% 되자 바로 핸드폰을 켰다. 잠금을 풀기 위해 지문을 인식했지만 손이 건조해서 그런지 인식이 잘 되지 않았다. 계속되는 시도에도 일치하지 않는다는 안내문만이 화면에서 반길 뿐이었고 그것조차 갑자기 화면이 꺼진 후로 볼 수 조차 없게 되었다.
이제 남아있는 희망 중 하나는 지갑속에 고이 보관되어 있는 진짜가을의 신분증에 적힌 주소였다. 퇴원하게 되면 바로 집으로 찾아가 영혼을 찾아볼 생각이다.
제발 그곳에서 얌전히 있어라.
먼저 경험한 선배들의 말로는 99%는 살던 집에 있었다고 하니 거기에 모든 희망을 걸었다.
최악으로 그곳에 없다면 찾을길은 진짜가을의 가족을 통해서지만, 입원해 있는 동안에도 가족의 방문은 없었다고 하니 진작에 기대는 하지 말자.
“에휴”
이러다 습관 되겠네.
한숨을 쉬면 복이 달아난다는 옛 어른들의 말이 문득 떠올랐지만, 어차피 복따위는 애저녁에 바닥으로 떨어져 지구 중심 쯤에 박힌지 오래 된 것 같으니, 무슨 상관이겠는가.
똑 똑
더 깊은 나락으로 빠져들어가려는 순간 누군가 병실문을 두드렸다. 또 간호사겠구나 싶어 별 기대없는 목소리로 가을이 대답했다.
“네, 들어오세요.”
대답과 동시에 문이 열렸고, 가을의 예상을 깨고 낯선 남자가 들어왔다.
복도에서 부터의 밝은 조명 탓인가. 들어온 남자의 얼굴 뒤로 후광이 비춰졌다. 먼저 보이는 건 큰 키에 탄탄해 보이는, 늘씬하게 뻗은 사지를 네이비 색감의 정장이 몸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한걸음 더 병실 안으로 들어오자 그제서야 얼굴이 자세히 보이기 시작했다.
눈썹을 살짝 덮는 길이의 칠흑같은 앞머리, 그리고 그 밑으로 한 올 한 올 섬세하게 그린듯한 짙은 눈썹. 눈을 감았다 뜰 때 마다 보이는, 길게 뻗은 속눈썹과 옅게 자리잡은 쌍커플라인, 그리고 그 아래를 따라서 단정하고 곧게 뻗은 콧날과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는 도톰한 입술. 조명이 아니라 자체가 후광이었구나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순간 스쳐지나갔다.
티비에서 아마 봤을 것 같은 잘생긴 배우가, 조금은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그녀의 눈앞에 서있었다. 그리고 그 배우가 말을 걸기 시작했다.
“이가을."
“...”
“...감상은 아직 안 끝났나?"
불쑥 가까워진 그의 얼굴에 가을은 깜짝 놀라 정신이 번쩍 들었다.
“ㄴ... 네?!”
“다행히 정신은 괜찮은것 같군”
매력적이라 생각했던 입꼬리가 한쪽만 올라가니 서늘해 보였다. 너무 넋을 잃고 바라봤다는 생각에 얼굴에 열이 확 올랐다.
가을은 손등으로 열이 오른 볼을 가볍게 식히며 소파에 기대어 앉은 그를 힐끗 쳐다봤다.
그런데 누구지, 가족은 아닌것 같은데.
"그런데 누..."
"가족은 아니지만 비슷한 관계이긴한데, 그사이에 혼잣말이 많이 늘었군."
혼잣말이 입밖으로 나온 줄 몰랐던 듯 화들짝 놀라며 입을 가리는 그녀의 모습에 그는 입꼬리를 가볍게 올리며 웃었다. 주치의에게 들었던 상황 보다는 훨씬 나아보였다.
가을은 영혼일 적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불쑥 튀어나온 혼잣말에 얼굴이 화끈거리며 달아올랐다. 창피함에 괜히 목소리를 가다듬는 척 입을 열었다.
"크흠, 그럼 그 비슷한 관계인께서는 누구신가요?"
그의 말로 짐작컨데 그는 충분히 그녀의 상황을 알고 있는 사람 같았다.
“J&E 주지혁.”
"네? 누구요?"
대부분의 사람이 모를리 없는 그의 이름을 새삼 처음 듣는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에 지혁은 방금 전 만나고 온 가을의 주치의이자 사촌 형과의 대화가 떠올랐다.
'해리성 기억상실.'
'뭐?'
'심리적 외상으로 생기는 건데, 가을씨 같은 경우는 부분적인 것 보다 전체적으로 다 기억을 하지 못하는 케이스야. 그런데 본인은 그것에 대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니깐 그냥 평소에 하던대로 행동하면돼.'
"나를 모르다니. 정말 기억상실이 맞는가 보군."
"...허..."
모든 사람이 그의 이름을 알고 있을 거라는 어이없지만 당연해 보이기도 하는 저 자신감에 가을은 짧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런데 듣고 보니 저 얼굴과 이름, 어디서 많이 본것 같긴 하다. 특히 얼굴은 절대 잊을 만한 외모가 아닌데.
가을의 어이없어 하는 감탄사를 한 귀로 흘리고 지혁은 자연스럽게 냉장고를 문을 열어 생수를 꺼내어 마셨다. 그리곤 조용히 덧붙였다.
“애인사이.”
"...네?..."
“궁금해 하는 관계 그거, 애인사이라고."
입술 끝을 끌어 올리며 그녀를 향한 표정은 연인을 바라보듯이 달콤했지만, 목소리는 무덤덤함 그 자체였다.
허, 애인사이~?
차마 내 뱉지는 못하고 속으로 콧방귀를 뀌며 가을은 지혁을 흘겨 봤다.
“우리가 애인사이라구요?”
"그렇지."
매끈한 얼굴로 당연한 소리를 왜 묻냐는 표정을 하고는 침대 옆으로 의자를 끌고 와 지혁이 앉았다.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는 그를 가능하다면 어디 환자 앞에서 거짓말이냐며 멱살이라도 잡고 탈탈 털고 싶었지만, 진짜가을의 체력과 체면을 생각해서 그를 내려다보면서 흘기는 걸로 만족 하기로 했다.
가을이 이렇게 뿔난 이유는 그가 누군지 생각 났기 때문이다.
영혼으로 돌아다닐 적 할일이 무엇이 있었겠는가. 악령의 활동 시간은 저녁이라서 낮동안에 무료함을 달래며 대부분의 시간을 병실 로비에 앉아 병원을 오고가는 사람들을 구경했고, 그것도 재미없어지면 티비에서 방영하는 드라마 그리고 뉴스를 보면서 세상 돌아가는 정보를 얻었다. 그리고 지혁을 본 것도 거기에서 였다.
외모는 드라마에 나올 주연배우 뺨칠만한 비주얼이었지만, 그는 드라마 보다는 뉴스의 주요소식 중 하나에 해당되는 사람이었다.
J&E의 주지혁대표.
그의 말이 허풍이 아니라는걸 증명 하듯이 티비를 보다보면 오히려 그를 모르면 간첩이라는 말이 나올만큼 대부분의 국민들이 한번은 입에 오르내렸던 사람이었다.
그런것이 30대 그룹에 속하는 주일그룹의 유일한 후계자이지만 같이 유학 한 친구들과 회사를 설립해 1년만에 매출액을 국내 100위 안으로 끌어올렸고, 설립 후 5년이 지난 지금 당당히 30위 안으로의 매출을 바라보는 탄탄한 기업이 J&E였다. 그리고 직원들 연봉과 복지도 취준생들이 들어가고 싶은 기업 3위를 차지하고 있는 곳의 대표였다.
그런데 최근의 따끈 따끈한 뉴스는 회사 관련 소식이 아니였다.
[J&E 주지혁대표, SS그룹 차녀와 약혼?!]
뉴스였는지 가십거리를 다루는 프로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SS그룹의 김모씨라는 여성이 주대표의 숨겨진 약혼녀라는 소식을 그 당시에 전하고 있었다.
그런데 가을의 기억으로는 분명 악혼녀의 성은 이씨가 아닌 김씨였고 진짜가을은 부자도 아니니 가을은 그의 약혼녀가 될 수가 없었다.
“전 김씨가 아닌데요?”
"... 그건 또 무슨 뜬금없는 소리야."
"주지혁의 악혼녀 SS그룹 김모씨. 기억 잃었다고 세상 돌아가는 것 까지 모르는건 아니거든요?"
“하하하, 그건 어디서 봤지?"
"음... 그것까지는"
표정은 웃고 있지만 지혁의 한쪽 눈썹끝이 올라갔다. 분명 오보를 다 끌어내렸는데도 어딘가 남아 있다는게 신경에 거슬린다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업데이트는 많이 늦나보군"
"네?"
눈이 마주친 지혁의 얼굴은 아까와는 다르게 상냥한 미소가 띄어져 있었다.
"허위사실 유포로 다 고소했는데. 당신도 모아둔 돈이 꽤 되나봐. 아, 아니지. 우리는 애인사이니 같이 고소가 들어갔어야 했는데. 나중에 재판할때는 함께 참여할 기회를 주도록 하지."
애인사이!가 조금 더 강조된것 같은 느낌이지만 착각이겠지? 바쁜 대표가 하나하나 민사에 출석할 일은 없겠지만 지혁은 그녀가 단칼에 관계를 부인함에 있어서 기분이 썩 좋지는 않은듯 삐뚜름한 미소로 괜히 심술궂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영혼일 적 돌아다녔을 때 본 소식이었으니 적어도 지금보다는 일주일 전 이었다는 사실을 가을은 순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