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소토피아
5화.
그 뒤로 일주일이 넘었다. 나는 그녀의 친구를 찾기 위해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출발하고자 했다. 목표는 바로 옆 도시지만, 배낭에는 군용 텐트와 나이프 9개, 정글도, 권총 여섯 정에 소총 두 정, 바주카 한 정, 와이어 트랩 8개, 휴대용버너, 물이 가득 담긴 정수기 수통 한 개와 군용 수통 5개, 스X 9캔과 건빵 한 봉지, 토치 등을 준비했다. 왜 이렇게 많이 챙기냐, 하고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하지만 시독이라는 것이 있다. 주변에 온갖 시신이 썩어문드러져 있기 때문에 먹어도 좋은 것을 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식수도 마찬가지. 흔히 독은 가열하면 사라진다고 생각하는데, 분명 그런 독도 있다. 허나 어떤 독은 가열하면 증발해서 공기중으로 퍼져 더 상황을 악화시킨다. 정수기 수통과 군용 수통 여러개를 준비한 이유도 그것이다. 그리고 마찬가지 이유로,
“에이씨……”
고속도로는 못 쓴다. 한 세기동안 방치당하면 벤X도 람보르X니도 X가티도 모조리 고철이 된다. 거기에 압력 때문에 폭발하기 때문에 아마 반파된 구역이 많을 것이다. 그건 안다. 근데,
“이게 대체 뭐야…..”
아사한 시체가 널려 있었다.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아마 차가 막히니 나와서 걸어 가려 한 것 같다. 근데 모종의 이유로 갈 수 없었던 이들이 여기서 굶어 죽었을 것이다.
“제기랄, 빠르게 가려고 이게 무슨 짓이야….”
빠르게 가기 위해서 고속도로 옆을 거닐었다. 국도의 일부인 육교가 무너져 내리면서 시체가 후드득 떨어졌다. 까마귀떼가 미친듯이 날아들었고 주변에 까마귀 소리가 울려퍼진다. 내 미래도 이리 될 것인가 싶었다. 무시하고 걸어갔다. 묵묵히. 늘 그랬듯이.
5화. 지옥에서 쓴 일기장.(1)
이제부터는 말로 설명하기도 힘들다. 기록장이나 읽어라.
멸망기 65년. 10월 13일. 날씨 맑음.
X발. 간살奸殺당한 여자의 시체를 봤다. 꽤나 험하게 다룬 듯 한 모습에 비위가 강한 나조차 구역질이 나왔다. 물론 비슷한 시체를 수백 구고 본 적 있다. 그것에 구역질이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것을 뜯어먹고 있는 까마귀의 모습에 구역질이 난 것도 아니었다. 그런 시체를 보고도 음심이 드는 내가 한심하고 역겨워서 구역질이 난 것이었다. 한동안 시체는 보지도 못 할 것 같다. 그래도 지금은, 이것을 쓰고 있는 오후 8시에는 물이 들어가긴 하니 탈진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다.
멸망기 65년. 10월 14일. 날씨 비가 옴.
비가 오니 내가 비웠던 수통에 빗물을 받아 버너로 끓여서 먹었다. 빗물이 깨끗하다는 소리는 개소리다. 빗방울 속의 세균이 몇이고 공기중 먼지가 몇인가. 물론 그딴 거 생각하기 전에 말라 뒈지는 수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병 걸리면 약도 없기 때문에 이런 면에서는 철저할 수밖에 없었다. 까마귀가 우는 소리가 나서 따라가 보니 짐승의 시체가 있었다. 그것을 해체해서 훈제해 육포로 만들어 두었다. 누린내가 나지만 먹을 만은 했다.
멸망기 65년. 10월 15일. 날씨 비바람이 몰아침.
어제부터 쏟아지던 비가 거세져서 버너의 화력으로는 불을 낼 수 없어서 근처 굴에 들어가 박쥐의 배설물을 찾았다. 박쥐의 배설물은 배트 구아노로 불리는 인광석으로 인염과 질산염으로 분리할 수 있는데 이때 나오는 질산염을 정제해 화약을 만들 수 있다. 그렇게 만든 화약을 버너 위에 아주 조금 올려서 토치와 버너의 스위치를 동시에 켜 발화점에 이르는 속도를 올린 덕분에 아주 작은 폭발이 일어났고, 그 여파로 생긴 불이 작아질 때쯤, 위에 수통과 간이로 만든 물 정제장치를 올려 물을 끓이는 데 성공했다. 어제 만든 육포가 젖어서 다시 굽고 있다. 아마 내일 새벽에 일어나서 다 빼야겠지. 하… 피곤하다. 난 좀 자야겠다.
멸망기 65년. 10월 16일. 날씨 흐림.
잠깐 비가 멈춘 듯 하다. 어제 자야 겠다고 한 것이 플래그였을 줄은 몰랐다, 밤새 말리던 육포를 벌레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개고생을 했다. 아, 커피 땡긴다. 젠장. 비가 좀 그쳤으니 불을 비롯한 숙소를 바깥으로 옮겼다. 나무를 잘라서 비를 막을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나무조각을 엮어서 간이 집을 만들었다. 최대한 간소하게 만들어서 갖고 다닐 수 있게 했다. 그러고 보니 생각난 것이 있는데 내일 해 볼 계획이다.
멸망기 65년. 10월 17일. 날씨 흐림
실험은 성공적이었다. 육포를 말리거나 물을 끓이기 위해서 불을 피우면 벌레가 날아드는데 그 벌레를 잡아서 먹을 수 있는가에 대한 실험이었다. 불에 타들어가는 벌레들 중 내가 구해낸 벌레는 몇 마리 안 되지만 그래도 식량을 아낄 수 있다는 점에서 아주 좋았다. 근처에 멸망 전에 쓰이던 편의점이 있던 것 같은데 내일 털어볼 생각이다,
멸망기 65년. 10월 19일. 날씨 비 옴.
편의점을 털러 갈 때 빌어먹을 비가 내렸다. 불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멸망기 65년. 10월 21일. 날씨 비 옴.
어제는 할 일이 많아 기록을 하지 못 했다. 대충 간략히 기록하자면 숙소를 또 20m정도 옮기고 본격적인 벌레잡이를 시작했다. 아, 편의점에는 별 거 없었다. 잘 해봐야 비상식으로 쓸만 한 개 간식 정도. 오늘의 일도 간단히 요약하면 X됐었다. 호랑이를 정면에서 마주했었다. 뒈지는 줄 알았다. 서기 1900년대에 호랑이가 한반도에서 멸망할 뻔하면 뭐하나. 구 조선 인민 민주주의 공화국에서 남아 있었고 동물원에 시베리아 호랑이가 남아있었는데. 멸망 이후에 그들을 관리할 존재가 없어지자 산 근처에 가면 마주하는 일이 자주는 아니더라도 이따금씩 있다고 들었었는데. 그때 코웃음 치던 과거의 나를 때려 죽이고 싶었다. 맹수가 내뿜는다는 저주파에 근육이 굳는다는 소리를 들었었지만 알지도 못하면서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그때의 내가 저주스러웠다. 눈을 똑바로 마주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했다면 꼼짝없이 뒤질 뻔했다. 아무튼, 이제 내게 이것을 쓰는 시간도 사치기 때문에 바로 자러 가겠다.
멸망기 65년. 10월 22일. 날씨 비 옴.
이런 X발. 나한테 대체 왜 이러는 건데? 잠을 한숨도 못 잤다. 역시 난 일기에 잠자러 간다는 얘기하면 안 될 것 같다.
멸망기 65년. 10월 24일. 날씨 비 옴.
불면 72시간째.
멸망기 65년. 10월 30일. 날씨 흐림.
불면 144시간째이자 길을 잃은 걸 알은 지 24시간째. 아, 그러고 보니 언급 안 한 게 있다. 내가 지금껏 잠을 안 잔 것은 불을 피워서 오는 벌레 중 먹을 것을 골라서, 타지 않게 적당히 구운 뒤, 많이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많이 먹어야 하는 이유? 간단하다. 절대적인 양이 적기 때문이다. 벌레가 같은 무게의 소고기보다 단백질 함량이 세 배가 넘는다고 한다. 그런데 그것은 결국 상대적인 것. 소고기 한 근, 600g을 채우기 위해서는 배추벌레 수천마리를 먹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것을 잠자코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그 결과 지금 불면 212시간째다. 이쯤 되면 카페인의 힘이 절실하게 필요해진다. 그리고 내가 지금 그런 상태다. 하핳 X발.
멸망기 65년. 11월 2일. 날씨 눈 옴.
불면 192시간째이자 길 잃은 것을 확인한 지 48시간째. 먼저 갔던 내 친구였던 새끼가 내게 손짓하는 게 한순간 보였다. 식량은 반 정도 남았고 식수는 현재 거의 무한리필 중이다.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 지 모르겠다.
멸망기 65년. 11월 8일. 날씨 흐림.
불면 164시간째. 도시가 얼추 보이는 것을 보아 한 40km만 더 가면 될 것 같다. 허허, 그 전에 내가 먼저 뒈질 것 같지만.
멸망기 65년. 11월 10일. 날씨 흐림.
어째 X된 것 같다. 중요하니 다시 말한다. 어째 X된 것 같다. 어느 쌍놈의 짐승이 내 식량을 가지고 튀었다. X발. 내일부턴 벌레만으로 견뎌야 한다. 빌어먹을.
멸망기 65년. 11월 13일. 날씨 흐림.
죽을까.
멸망기 65년. 11월 21일. 날씨 흐림.
살고 싶다.
멸망기 65년. 11월 24일. 날씨 눈 옴.
진짜 왜 이러고 있는 거지? 과거의 일기들을 살펴봤다. 진짜 내가 망가지고 있구나 싶었다.
멸망기 65년. 12월 1일. 날씨 흐림.
도시가 4kn앞이다. 허나, 죽을 것 같다.
멸망기 65년. 12월 3일. 날씨 눈 옴.
퇴짜 맞았다. 다시 죽치고 버텨야 한다.
멸망기 65년. 12월 5일. 날씨 눈 옴.
폭설에 의해 벌레도 오지 않는다. 죽을 것만 같다.
멸망기 65년. 12월 10일. 날씨 안개.
한 남자가 달려들다 총맞고 죽었다. 그리고 그 시체를 가져와서 먹었다. 구역질이 났지만 이 악물고 먹었다. 고통스러웠다.
멸망기 65년. 12월 15일. 날씨 눈 옴.
거리에는 멧돼지가 돌아다닌다. 아까 나도 한 마리 잡아서 오랜만에 고기로 포식했다. 남은 고기는 모두 육포로 만들었다. 주변에 조금이라도 얻어먹고자 하는 놈들이 널리고 널렸기에 텐트 문을 잠갔다.
멸망기 65년. 12월 21일. 날씨 눈 옴.
한 사람이 또 장벽에 돌진하다 총 맞고 죽었다. 그는 죽으면서 종이를 사방에 뿌렸다, 종이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Αυτό ισχύει για την ουτοπία. Αυτό είναι το πίσωτοπία.
이것이 바로 너희가 부르짖던 유토피아의 진실이다. 이것이 바로 피소토피아란 말이다. 란 뜻의 그리스어인데, 피소토피아는 피소(πίσω)가 그리스어로 후면 혹은 이면이고, 토피아(τοπία)가 장소란 뜻이니. 혼합하면 세계의 후면, 이면이 될 것이다. 저 장벽 너머의 광경에 대해 의심하다 그럴 리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일기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