묽은 피가 난자한 바닥
다 찢어진 손가락으로 피비린내 나는 바닥을 기는 한 남자가 있다. 한땐 누군가의 뮤즈였고, 세상이었던.
하지만 그 여자를 탐한 대가로 처절하게 죽어가고 있는 남자, 정연수.
잔인하게 짓이겨진 연수의 손은 특히 건반 위에서 가장 아름다웠다. 하얗고 기다란 손가락이 피아노를 연주할 때면, 한 여자의 세상 안으로 매혹적인 선율이 울려 퍼졌다.
연수는 화진의 뮤즈였다.
사랑할 수밖에 없는 깊은 눈동자로 연수에게 뮤즈를 제안한, 이 세상 가장 공허한 여자.
대부지 스키장을 소유한 국내 굴지 기업 ‘화평’ 회장의 막내딸, 유화진.
연수를 죽어가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거 놔!”
다 찢어져 피가 흐르는 연수의 손을 바라보며 절규하던 화진
제대로 눈조차 뜨지 못하는 연수에게 가고자 하지만, 양팔이 붙잡혀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일어서길 시도하다가도, 다시 맥없이 바닥으로 추락하는 연수의 온몸은 이미 피투성이 상태다.
“그만 좀 해. 제발….”
울부짖다 지친 화진이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 퉁퉁 붓고 실핏줄이 튀어나온 눈으로도 화진을 담기 위해, 연수가 눈을 부릅뜬다.
“할게. 한다고! 당신이 시키는 거 전부. 그러니까 제발 그만해!”
충혈된 화진의 눈이 야멸차게 노려보는 곳에, 문찬이 있다.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넥타이를 고쳐매는, 하얗게 솟은 머리와는 어울리지 않는 날카로운 눈빛을 가진 남자.
이 모든 상황을 설계한 화진의 아빠이자 대기업 화평의 회장, 유문찬.
화진은 문찬이 얼마나 폭력적인 아빠였는지를 기억한다. 그가 원하는 건 모든 이뤄내고, 그가 원하지 않는 건 모든 없애버리고 마는 인물이었다.
고작 자신의 딸과 사랑을 나눴단 이유만으로 연수를 죽기 직전까지 내몬, 아주 잔인한 인물이기도 했다.
문찬이 묵직한 검은색 상자를 들고 와 화진의 앞에 내려놓자, 화진의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온다. 자세를 낮춘 문찬이 비 맞은 강아지마냥 떠는 딸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쓰다듬는다.
“유화진. 그 말은 내가 연수를 외국으로 보내라고 할 때 했었어야지.”
“죽일 거야…? 엄마처럼?!”
갈라진 목소리로 소리치는 화진의 뺨을 사정없이 내려친 문찬이 상자 안에서 권총을 꺼내 든다. 소리 지르며 울기 시작한 화진의 몸부림 역시 손쉽게 제압당한다.
그 시각, 숨을 헐떡이며 뒤늦게 이곳으로 도착한 세준이 상황의 심각성을 확인하고는 충격에 빠진다. 부리나케 화진 쪽으로 달려가지만, 문찬의 비서에게 가로막힌다.
“김비서님. 화진이 저대로 두면 쓰러집니다!”
“여기서 더 회장님의 심기를 건드리시는 건 위험합니다.”
“하지만……”
당장이라도 부서질 듯한 화진에게 손을 뻗는 세준. 하지만 화진의 시선은 온통 연수를 향해있다.
화평을 파헤치다 문찬의 눈에 든 세준은 화평의 기자로 활동하며 권력에 눈을 떴다. 충분한 능력과 뚝심으로 문찬의 오른팔이 될 수 있었던 세준은 ‘화평의 개’라는 수식어도 마다하지 않았다. 딱 한 가지, 화진을 향한 사랑이 걸림돌이 되어왔지만.
가진 힘도, 사랑도 부족했던 세준이 할 수 있는 거라곤 늘 빈자리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 시간 동안 힘을 키우고, 문찬의 눈에 더 깊게 드는 것.
지금도 세준이 할 수 있는 거라곤 문찬의 화가 가라앉길 바라는 것뿐이었다. 세준이 왔음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문찬이 익숙하게 총을 장전하자, 분위기가 더욱 무겁게 고조된다.
“뭔가를 가지려면 뭔가를 잃는 것도 필요해. 나는 유화진을 강하게 키웠어!”
두려움에 떨던 화진이 망설임 없이 문찬의 앞에 무릎 꿇는다. 눈물로 인해 시야가 흐렸지만, 화진의 정신만큼은 또렷했다. 이대로 사랑하는 연수가 죽어가는 걸 맥없이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죽이지만 마. 제발 부탁이야! 평생 안 볼게. 어? 당신이 시키는 데로 살게! 제발요…제발!”
“이미 늦었다, 화진아”
“왜? 대체 왜! 내가 다 한다는데 뭐가 문제야?!”
“바로 그게 문제야. 네가 내 말에 다 따를 만큼 연수를 사랑한다는 거.”
“마음마저 잘못은 아니잖아.”
“마음도 다스려야지. 유문찬의 딸이라면”
문찬이 든 권총의 방향이 정확히 쓰러진 연수에게로 향한다. 더는 저항할 힘조차 잃은 연수의 시선은 여전히 화진이었다.
불안감에 떨던 화진이 결국, 최후의 수단으로 총 앞을 막아선다.
“그럼 나도 죽어. 알잖아!”
“넌 못 죽어”
“아니? 나 죽을 거야. 당신이 살려내도 다시 죽을 거야!”
“네 엄마가 죽어갈 때도 넌 그렇게 말했었어. 하지만 봐라. 멀쩡한 두 발로 서있는 너를”
반박을 포기한 화진이 떨리는 손으로 총구를 잡는다. 놀란 세준이 비서를 뿌리치고 가까이 다가가지만, 이번엔 문찬에게 저지당한다.
“나 당신 딸이야. 한다면 해”
총구를 자신의 심장 쪽으로 갖다 대는 화진. 그제야 문찬의 한쪽 눈썹이 신경질적으로 올라간다.
“내가 널 어리석게 키웠구나”
“애초에 연수를 데려온 게 당신이잖아. 내 옆에 앉힌 것도 당신이야!”
떨리는 손이었지만, 화진의 절박감이 그대로 느껴졌다. 딸의 절규를 바라보던 문찬이 서서히 총을 잡고 있었던 손의 힘을 푼다.
“그래. 화진이 네 말대로 연수를 데려온 건 내 실수였다. 그럼 너한테 마지막 기회를 줘야겠지?”
이윽고 문찬은 화진의 손에 똑바로 총을 쥐여준다. 화진이 문찬의 행동에 당황할 새도 없이, 총이 들린 화진의 손을 힘줘서 잡은 문찬이 정확히 연수의 왼팔을 향해 조준한다.
“왜이래? 뭐하는 짓이야!”
“네가 직접 쏴”
졸지에 연수를 향해 총구를 겨누게 된 화진. 아무리 손에 힘을 줘봐도, 문찬의 힘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 자칫하다간 방아쇠가 당겨질 수도 있는 상황에서, 화진은 소리도 내지 못하고 엉엉 울기 시작한다.
“제발 이러지마….”
“화진아. 분수를 모르는 인간들에겐 이런 식으로 알려주는 거다. 자신이 선택한 것에 대한 대가가 뭔지 말이야.”
“…뭐?”
“네 말이 맞아. 내 딸은 아무 잘못이 없지. 다만 잘못된 꿈을 꾼 연수의 잘못이다. 그러니 벌을 줘야지.”
“당신은 진짜 미쳤어. 난 못해!”
“네가 못하면 내가 해. 그땐 연수의 팔이 아닌 머리를 겨누게 될 거다.”
적막과 긴장만 흐르는 곳에서, 정신이 아득한 화진의 귓가로 언젠가 흘러들어왔던 연수의 피아노 소리가 맴도는 것만 같았다.
연수의 인생을 나락으로 떨어트릴 사람이 자신이라는 걸 알았다면, 화진은 절대 시작하지 않았을 사랑이었다.
“죽는 것보다야 팔 하나쯤 잃는 게 나아”
“당신은 악마야!”
“너는 그런 내 딸이다”
팔을 쏘지 않으면 결국, 문찬이 연수를 죽이고야 말 것이다.
자비가 없는 인물이 문찬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화진은 이 순간, 절망에 놓인다.
하지만 연수의 삶을 가장 사랑하는 것 또한 화진이었다. 평생 피아노를 연주해왔던 연수에게 있어서 팔은 곧 연수의 목숨과도 같았다. 그러니 연수의 팔을 쏘는 건 연수를 죽이는 거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선택할 수 없는 상황을 앞에 두고 그저 눈을 감은 화진.
“제발, 회장님! 화진이를 살려주세요.”
그때, 문찬을 제지한 건 뜻밖에도 세준이었다. 보다 못한 세준이 총구 앞에 무릎을 꿇고는 손이 발이 되도록 빌며 울먹인다.
“도세준! 지금 뭐 하는 짓이야!”
갑작스러운 세준의 행동에 놀란 화진의 눈도 번쩍 떠진다.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비는 세준의 모습은 비참했다. 겁을 먹은 세준의 떨림이 화진에게도 전해질 만큼, 세준은 진심으로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문찬의 오른팔이 되기 위해 몇 년을 바쳤던 세준에겐 이것이 문찬을 향한 첫 불응이나 마찬가지였다.
“아시잖아요. 이런 방식은 화진이를 죽이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문찬은 자신의 아래 엎어진 세준을 내려다보며 혀를 끌끌 찬다.
“제가 앞으로 화진이를 잘 보살피겠습니다. 제발 그럴 기회만이라도 주세요!”
힘이 풀려 주저앉은 화진의 시선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는 세준의 어깨에 고정된다.
그때, 문찬이 주저앉은 세준의 앞으로 손에 쥐고 있었던 총을 떨어트린다. 둔탁한 소리를 내며 떨어진 총의 앞머리를 쳐다본 세준의 표정이 굳는다.
사색이 된 얼굴로 천천히 문찬을 올려다보는 세준.
“화진이를 구해 보거라.”
문찬의 얼굴에 소름 끼칠 정도로 여유로운 웃음이 감돌자,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세준을 감싼다.
문찬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자신이 선택한 도세준이란 존재는, 평생 자신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라는 걸.
세준 역시 자신의 삶을 빚어주고, 화진의 약혼자 자리마저 약속한 문찬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뭐 하려는 거야?”
이상함을 느낀 화진이 힘이 풀린 다리로 겨우 일어서는데, 세준이 바닥에 떨어진 총을 빠르게 쥔 뒤에 화진에게서 멀리 떨어진다.
그리고는 정확히 연수의 팔을 향해 총구를 조준한다.
“도, 도세준!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화진아…사랑해.”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깨문 세준은 꼭 마지막을 앞둔 사람처럼 화진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한다. 세준은 한 번도 연수를 향하는 화진의 시선을 욕심내볼 수 없었다.
이 순간만큼, 화진의 시선은 오롯이 세준을 향해있었다. 비록 그 이유가 원망과 분노라고 해도, 세준은 상관없었다.
천천히 방아쇠에 손가락을 거는 세준.
“아니야. 아니야! 그러지 마. 도세준!”
“평생 날 미워하며 살아도 좋아. 죄책감은 내가 가질게”
“안 돼!”
세준을 막기 위해 화진이 몸을 내던지지만, 세준의 행동이 조금 더 빨랐다. 공터 전체에 울려 퍼지는 커다란 총성에 화진이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는다.
가까이에서 들린 총성에 충격을 받고 이명이 온 화진이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겨우 고개를 든다. 화진의 눈에 가장 먼저 보인 건 팔에 피를 흘리고 기절한 연수였다.
고통의 신음조차 내지르지 못한 채 죽어가는 연수를 보며 울부짖는 화진.
“연수야…!”
결국, 평온해 보이는 연수의 모습을 눈에 담던 화진도 충격에 정신을 잃는다. 아직도 강한 진동이 느껴지는 손을 바라보던 세준이 두려움에 총을 멀리 집어 던진다.
떨리는 다리로 쓰러진 화진을 안아 든 세준. 비록 두려웠지만,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게 된 순간이었다. 울고 있는 눈과는 달리, 세준의 입가엔 알 수 없는 미소가 걸려있었다.
그렇게 각자의 모순된 선택은 필연적인 악연을 불러오고 있었다.
epilogue / 2년 전, 언젠가.
하얀 커튼이 매끄러운 피아노 소리에 맞춰 바람에 흩날린다. 눈부신 볕에 눈을 감은 연수의 긴 속눈썹 아래로 연갈색의 깊은 눈동자가 보인다.
하얗고 선한 손가락이 건반 위에서 춤을 추자, 작은 공간이 연주 소리로 가득 찬다.
산들바람이 창틀을 타고 넘어와 연수의 옷깃을 간지럽히면서 하얀 셔츠도 천천히 흔들렸다.
그리고 그런 연수를 바라보는 누군가의 마음도 흔들리고 있었다.
연주를 끝낸 연수가 사랑하는 연인을 바라보듯, 애틋한 표정으로 피아노 건반을 쓸어본다. 그러다 뒤늦게 방안으로 누군가 들어왔음을 발견하고는 벌떡 일어선다.
햇빛 때문에 상대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자, 연수가 눈을 찡그린다.
“유화진이에요”
어느새 가까이로 다가온 화진이 빛을 피해 연수의 앞에 서자, 연수의 눈이 다시 커진다. 연수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화진의 붉은 머리 색이었다. 그리고 서서히 보이는 화진의 앳된 얼굴. 순식간에 숨을 멈춘 연수가 어쩔 줄 모르다, 꾸벅 고개를 숙인다.
“안녕하세요! 저는 오늘부터 피아노 강습을 맡은 정연수라고 합니다.”
“피아노를 참 예쁘게 치던데”
“그런가요?”
천천히 고개를 든 연수, 어느새 화사하게 웃고 있는 화진을 발견하고는 자신도 따라 웃는다. 처음 보는 연수를 경계할 법도 한데, 화진은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마냥 느릿하고도 꼼꼼한 눈길로 연수를 살피고 있었다.
그러다 화진의 시선이 연수의 손가락에 멈춘다. 가늘지만 단단하고, 상처하나 없이 깨끗하고 긴 손이었다. 당장이라도 자신의 손을 포개어보고 싶은 욕구가 드는 화진이었다.
그런 화진의 시선을 느꼈는지 연수가 손을 올려 악수를 청한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망설이지 않은 화진이 덥석 연수의 손을 잡고, 좀 더 가까이 다가간다. 연수를 올려다보며 또 한 번 웃어 보이는 화진의 당돌함에, 연수 역시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웃는다.
“화진씨 손도 피아노 위에 올라가면 예쁠 손이네요.”
“난 아주 어릴 적 이후로는 처음이라 가르치려면 오래 걸릴 거예요.”
“그럼 그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오래 볼 수 있으니까”
자신도 모르게 툭 나온 진심에 놀란 연수의 눈이 커지자, 화진이 웃음을 터트린다. 그렇게 서로의 손을 꼭 잡고 놓지 않는 둘이었다.
눈동자와 잘 어우러지는 갈색의 머리가 빛을 받아 유독 밝게 보이는 남자 정연수와 붉은 머리를 잔머리 없이 질끈 묶은 여자 유화진의 첫 만남이 그렇게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