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집을 훑어보던 화진의 발걸음이 거실 한가운데 걸린 커다란 액자 앞에 멈춘다. 예술을 좋아했던 문찬은 유명 화가에게 화평 스키장을 그려달라 부탁했었다. 자신이 만든 것 중 가장 걸작은 스키장이라 말했을 만큼, 유독 스키장을 사랑했던 문찬.
언젠가 설원 위의 웅장한 스키장을 그림들로 남겨 전시회를 열고자 했었다. 그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그림을 보는 화진의 표정에 씁쓸함이 감돈다.
“변한 게 없네.”
한참 만에 돌아온 화진의 집은 떠나기 전 봤던 그대로였다. 구조와 인테리어는 물론이고, 하물며 화진이 처음 걷기 시작했을 때 신었던 작은 슬리퍼조차 그대로 장식되어 있었다. 집의 명의가 바뀐 것만 뺀다면, 당장이라도 화진의 식구들이 걸어 나올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집주인이 언제 돌아온다고 했지?”
작은 방에 화진의 짐을 풀다 말고 누군가와 연락 중이던 여민이 화진의 물음에 급하게 거실로 나온다.
“당분간은 출장이라 집에 없을 거래. 그보다 화진아 정말 괜찮겠어?”
“이 집 새로운 주인이 아빠랑 친한 지인이라며. 더군다나 집에도 잘 안 온다는데 뭐. 크게 걱정할 게 있겠어?”
오랜 시간 이 집에서 함께 살았던 여민은 화진에겐 유모이자 이모이고, 또 엄마나 마찬가지였다. 문찬의 부탁으로 한국에 남은 여민은 화진이 돌아올 때를 기다렸다. 한국에서 살만한 집을 알아뒀지만, 화진이 굳이 원래 살던 이곳으로 오겠다며 고집을 부린 탓에 다시 돌아오고 말았다.
“그래. 크게 만날 일은 없을 거야. 가끔 청소만 해주고 집만 좀 살펴주면 된대”
“아빠한테 아직 그런 지인이 있었다니. 호의적이라 내 쪽에선 감사하네”
피아노가 있던 2층의 작은 방을 올려다보던 화진이 애써 고개를 젓고는 부엌으로 향한다.
부와 명예를 잃은 아빠로 인해 한순간에 집주인에서 셋방살이로 전락한 신세에 구 약혼자에겐 회사마저 뺏겼지만, 그것치고는 꽤 밝은 모습이었다.
“근데 나 요리에는 소질 없는데. 집주인은 집에서 밥 자주 먹는대?”
“요리 천재인 이모가 있는데 뭐가 걱정이야?”
팔을 걷어 올린 여민이 핸드폰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화진에게 향한다.
오랜만의 재회로 화목한 둘의 뒤로, 여민의 핸드폰에 문자 하나가 도착한다. 수신자는 ‘유회장’이었다.
*
남색의 깔끔한 맞춤 정장을 입은 세준이 스키장 로비에 서서 공사현장을 지켜보고 있다. 정리한 서류를 들고온 장실장이 세준의 가까이에 선다.
“공연장의 준공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화평을 무너트린 후, 스키장을 인수해 그대로 보존한 세준이 가장 먼저 한 일은 ‘화평’의 이름을 딴 공연장 건설을 마무리 짓는 일이었다. 유회장 때부터 화진의 요구로 진행되던 사안이었지만, 더딘 공사 속도를 서두른 건 세준의 결단력 덕분이었다. 그로 인해 공연장은 벌써 준공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문찬의 비리가 녹아있는 스키장에 화평의 이름을 살리려는 세준의 뜻에 직원들은 의문을 품었지만, 세준은 유독 스키장과 공연장에 신경을 기울이는 중이다.
“화진이는 어떻게 됐어요?”
“아직도 연락이 닿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 화진이가 왜 또 숨어버렸을까요?”
장실장이 건넨 차가운 커피를 단숨에 들이킨 세준이 생각에 빠진다.
귀국하자마자 처음 자신을 찾아왔던 이후로, 며칠째 화진의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다. 종잡을 수 없는 화진의 성격상, 이렇게 갑작스러운 잠수는 세준의 심기를 건드리기에 충분했다.
“화평 스키장을 인수해서 그대로 운영하겠다는 결단을 내린 유일한 사람이 바로 저라는 말 전하셨어요?”
“아가씨께서는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언론에서도 꾸준히 보도하고 있었던 덕분인 듯 합니다.”
“그럼 유회장 때부터 거론만 되고 끝났던 이 공연장이 완공에 가까워진다는 것도 화진이가 압니까? 이것 역시 제 뜻이라는 거?”
장실장은 대답 대신 고개를 숙인다. 세준의 심기가 날카로울 때면 차라리 건드리지 않는 것이 장실장의 방법이었다. 특히나 화진의 이름 앞에선 유독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는 세준이었다. 화진을 미워하면서도, 자꾸만 인정받으려는 욕구와 집착이 세준에게 들끓고 있었다.
“귀국하신 후 한 번도 스키장에 들리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아마 모르실 겁니다.”
“알면 어떨 것 같으세요? 좋아할까요?”
“아마 이사님의 뜻을 이해하기 어려워하실 겁니다.”
“돌아올 곳을 친해 마련해주려는 나의 갸륵한 동정심을 못 본다니 아쉽군요.”
“차라리 그냥 두심이 어떠신지요.”
“그럴 수는 없죠. 그러지 말고, 솔직하게 말씀해보세요. 화진이 오랫동안 보셨으니 누구보다 잘 아실 거 아닙니까? 그렇게나 아끼던 스키장에 관심을 뚝 떼고 행방이 묘연한 화진이의 생각은 대체 뭡니까?”
장실장이 오랜 시간 화평의 비서실장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건 우직한 성품과 리더를 향하는 태도였다. 세준 역시 남겨진 기업을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그의 도움이 절실했다. 그것이 문찬의 사람이었던 장실장이 내쳐지지 않을 수 있는 이유였다.
세준이 진짜 솔직한 대답을 원한다는 걸 눈치챈 장실장이 애써 목을 가다듬는다.
“아가씨라면 이사님께서 하시는 모든 걸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하…….”
그렇다고 또 너무 지나치게 솔직했던 장실장의 답변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세준이 자신의 넥타이를 헤집다 못해 풀어버린다.
“아가씨의 의중은 연락이 닿으면 제가 다시 물어보겠습니다.”
“꼭 이렇게 선한 방법으로 연락을 취해야 합니까? 사람 좀 푸세요. 그러라고 제가 월급 올려서 드리는 겁니다.”
“죄송하지만, 그런 방법은 불가합니다.”
장실장의 거절에 반박할 말을 잃은 세준은 다시 공연장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화평의 모든 걸 손에 얻기까지는 시간문제였지만, 그럼에도 세준의 손엔 도무지 원하는 것들이 잡히지 않았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소식이 불명한 화진이었다.
“빠르게 찾으세요. 화진이가 아주 좋아할 만한 걸 준비했으니까.”
준공의 마지막 단계로 공연장 한가운데 들어온 피아노를 바라보는 세준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지어진다. 명분 없이 그의 말을 거절할 수 없는 장실장은 묵직한 대답과 함께 자리를 뜬다. 세준은 곧 오게 될 미래를 상상 중이었다. 자신이 만든 무대 위에서 재회하게 될 아주 지겹도록 한물간 인연에 대해.
“이사님! 미팅 준비 완료됐습니다.”
멀리서 뛰어온 정비서가 숨을 겨우 고르며 세준에게 미팅 참석 명단을 넘긴다. 흐트러져 있던 넥타이를 손본 세준은 유리에 비치는 자신을 단장 중이다. 어쩐지 흐트러진 건 마음인 듯, 명단을 보는 세준의 표정이 좋지 않다.
“다른 공연 담당자 미팅은 이번 주 내로……”
“아니. 다른 미팅은 전부 취소해.”
“이분으로 확정하시는 겁니까? 경력이나 정보도 알려진 게 거의 없는 사람입니다. 혹시 지인이세요?”
“지인이라…내가 그럴 자격이 되려나.”
“지인도 아니면 대체 누구 시길래요?”
“내 죄책감.”
화평 공연장의 완공이 다가오면서 이미 담당자를 내정해뒀던 세준. 명단 맨 위에 보이는 ‘정연수’라 적힌 이름의 프로필과 마주하자 침착했던 세준의 마음도 흐트러진다.
*
오랜만에 한국 땅을 밟은 낯설음에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연수가 벌써 몇십 분째 전화로 씨름 중인 라이를 쳐다본다.
“그럼 주인하고 직접 통화라도 해보…여보세요? 여보세요!”
일방적으로 끊긴 전화를 맥없이 바라보는 라이의 표정에 상심이 가득하다.
“왜 그래?”
“그때 계약했다던 집. 주인이 갑자기 마음이 바뀌었대. 전화도 안 받아.”
“느낌이 안 좋네.”
작은 양산으로 햇빛을 막고 서 있는 둘 앞에 검은색 세단 한 대가 멈춰 선다. 운전석에서 내린 검은색 양복의 젊은 남자가 선글라스를 벗고 연수 앞으로 다가온다.
“안녕하십니까. 도세준 이사님 비서입니다. 귀국하시는 시간에 맞춰서 온다는 게 그만, 차가 좀 막혀서요. 다행히 아직 여기 계셨네요!”
고개를 꾸벅 숙인 남자가 악수 대신 명함을 건넨다. 냉담한 표정의 연수를 살피던 정비서가 명함의 방향을 라이 쪽으로 튼다.
“뭡니까?”
“짐이 별로 없으시네요? 일단 더우실 텐데 차에 타셔서……”
“뭐냐고 물었습니다.”
“아, 혹시 천라이씨 맞으시죠?”
차가운 연수의 반응에 기가 죽은 정비서가 질문의 방향 역시 라이 쪽으로 틀어버린다. 뭐라 말하려던 연수를 막아선 라이가 정비서의 명함을 받아든다.
“네. 제가 천라이 맞아요.”
“그때 저랑 연락하셨던 분 맞으시죠? 아직 전달을 안 하셨나요?”
라이에게 조심스럽게 묻던 정비서가 다시 고개를 들어 연수의 눈치를 본다. 영문을 모르는 연수만 답답한 표정이다.
“제 뜻 분명 전했습니다.”
“라이. 무슨 얘기야?”
“연수야. 그게……”
“도 이사님께서 정연수님 귀국하시면 편히 지내실 수 있게 큰집으로 들어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천라이씨께 분명 전했는데, 전달을 못 받으신 모양입니다.”
라이 대신 대답한 정비서가 연수의 표정을 살피고는 작은 보폭으로 한 걸음 물러난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상황에 심기가 불편해진 연수의 표정이 구겨진다.
“연수 너한테 말해봤자 싫다고 할 거 아니까, 내 선에서 자른다고 잘랐는데…. 미안해.”
“저기, 혹시 천라이씨. 도 이사님께서 고용하신 분이라고 알고 있는데요. 계속 전화도 피하시고 이렇게 비협조적이시면 좀 곤란……”
“이봐요, 도세준 비서님. 라이가 당신들한테 뭘 협조해야 하는데? 라이 통하지 말고 전할 말 있으면 나한테 하세요. 그리고 라이 뜻이 제 뜻입니다.”
“그래도 엄연히 고용인과 고용주의 관계……”
“그 계약 당장 취소하겠습니다. 위약금 있으면 제가 물 거예요.”
“연수야. 그러지 마!”
“혹시 우리가 새로 계약한 집 주인 구슬린 것도 당신입니까?”
연수의 기세에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던 정비서가 대답을 못하자, 라이가 겨우 연수를 말리고는 둘 사이를 막아선다.
“도세준 이사님과는 제가 얘기하겠습니다. 일단 돌아가세요.”
“죄송하지만, 제가 이대로 돌아가는 건 좀 곤란해서요. 같이 가셔야 합니다.”
쩔쩔매던 정비서가 잔뜩 눈치만 보다 고개를 푹 숙이자, 세워뒀던 세단의 뒷문이 뒤늦게 열린다.
주름 하나 없는 깔끔한 남색 정장의 세준이 차에서 내리자, 놀란 라이가 침을 꿀떡 삼킨다.
“도세준?”
“정연수씨. 우리 비서가 좀 서툴러요. 딱 이럴까 봐 내가 같이 왔어. 시원하게 차 안에서 얘기했으면 좋을 것 같은데, 어때요?”
“내 일정 어떻게 알고 맞춰 온 겁니까?”
“그거 쉽게 캐내려고 천라이씨를 옆에 둔 건데, 천라이씨 마음이 우리 정연수씨에게 기울었지 뭐야. 그래서 어렵고 어렵게 돌아서 좀 알아냈어요.”
“뭐 하자는 겁니까?”
“오해 말아요. 그저 일하자는 겁니다. 그 전에 당신 머물 곳은 있어야 하잖아.”
“내가 알아서 합니다.”
“벽 치지 맙시다. 일전에 세워둔 벽만 해도 넘어가기 벅차요.”
“감히 자꾸 넘어올 생각을 하니까 그렇지.”
8월의 지독한 햇살 아래, 재회를 가장한 신경전이 오가고 있었다.
정비서도 라이도 맥을 못 추는 이 상황에서 먼저 두 손을 든건 세준이었다.
“나 당신한테 갚아야 할 게 참 많아요. 그거 다 갚기 전까진 이기려 들 생각 안 할거고. 대신 벽은 좀 넘어야겠습니다. 우리 곧 파트너 될 사이니까.”
“그 제안을 내가 받아들일 거라 생각해요?”
결국, 세준을 지나치는 연수의 행동에 놀란 라이가 세준의 눈치를 살핀다. 뒤늦게 연수를 따라가려는 라이를 붙잡는 세준.
“천라이씨. 당신 해고에요. 이 편이 천라이씨한테도 좀 낫겠지.”
“도 이사님. 연수 그냥 둬주세요. 부탁이에요!”
“해고라는 말 이해를 못 했나 보네. 정연수씨 일에 끼어들지 말라는 말입니다.”
경고 섞인 말을 내뱉은 세준이 연수 쪽으로 뛰어간다. 다시 한번 자신의 앞을 막아서는 세준의 행동에 연수의 인상이 더욱 구겨진다. 혹여나 또 지나칠까, 이번엔 연수의 캐리어를 집어 드는 세준이다.
“도세준씨 지금 뭐 하는 겁니까!”
“말했잖아요. 우리 파트너라고”
“이봐요. 당신 나한테 갚을 빚 없습니다. 5년 동안 치료비에 생활비에, 그걸로 족해요.”
“그래요? 화진이가 돌아왔는데도?”
짐을 포기하고 가려던 연수의 발길을 잡은 건 딱 하나였다. 그토록 듣지 않길 원했던, 화진의 이름. 그 이름 두 자에 멈춰 선 연수를 바라보는 세준의 표정도 덩달아 구겨진다.
“유화진 이름 하나면 될 걸, 내가 너무 매달렸네.”
신경질적으로 돌아보는 연수에게 캐리어를 건넨 세준이 자신의 옷매무새를 다시 정돈한다. 그리고는 똑바로 연수와 마주한다.
“나도 그랬어요. 유화진 돌아왔다고 했을 때, 딱 지금 정연수씨 마음이었지.”
“당신이 내 마음을 알아?”
“화가 나고 짜증 나는데, 그 모든 걸 합쳐도 이길 수 없는 감정이 하나 있죠. 그리움”
연수의 마음을 읽는단 핑계삼아, 세준은 누구에게도 전하지 않았던 자신의 진심을 내비쳤다. 한땐 연적이었고, 가해자였고, 지금은 이유 모를 동업자의 길에 아슬아슬하게 선 사이의 연수에게.
애써 냉담함을 유지하려 했던 연수 역시 갑작스레 맞닥트린 세준의 진심에 마음이 복잡하게 엉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