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위의 얼음이 다 녹을 동안에도, 세준과 연수는 말없이 서로를 응시 중이다. 유리 벽 너머로 공연장을 빤히 보고 있던 라이는 그 가운데 자리 잡은 피아노를 발견하고 흠칫한다.
“정연수씨 고집 참 심하네.”
결국, 먼저 말을 꺼낸 세준이 커피 앞에 놓여있던 종이를 다시 들이민다. 연수가 몇십 분간 침묵을 고수했던 건 바로 이 계약서 때문이었다.
‘화평 공연장 공연 담당자’라 적힌 문구를 말없이 보던 연수도 천천히 입을 연다.
“제 자리가 아닙니다.”
“미국에서 공연 메이커로 경력 쌓았잖아. 보통 이런 걸 파격적인 인사채용이라고 하죠? 왜 거절하는 겁니까?”
“이유 아시잖아요.”
“여기가 화평이라? 아니면 내가 도세준이라?”
“둘 다요.”
“그럼 나랑 이곳에 들어오지 말았어야지. 정연수씨도 원하는 게 있으니까 화평에 발 들인 거 아닙니까?”
“대체 당신이 원하는 건 뭔데?”
“나야 그쪽이지. 정연수.”
“그래서 공연장 한가운데 피아노를 들였어요?”
눈만 마주치면 침묵 외에 진행되는 건 오로지 신경전뿐이었다. 뒤늦게 자리로 온 라이가 연수의 손을 잡자, 연수가 세준의 시선을 피해 감정을 가라앉힌다.
“화진이 안 만날 거예요?”
화진의 이름에 또 멈칫한 연수가 신경질적으로 세준을 쳐다본다. 세준의 표정은 묘했다. 흥미롭기도, 짜증이 섞이기도 한 얼굴이었다.
“시종일관 냉담한 정연수의 품위는 누군가의 이름 단 두 자에 무너지네.”
“그래서 화진이는 어디 있습니까?”
커피를 마시려던 세준의 손이 연수의 물음에 멈춘다. 비단 멈춘 건 세준뿐만이 아니었다. 연수를 바라보며 노심초사하던 라이도, 장실장도 모두 침묵을 유지한다. 날이 잔뜩 서있던 연수의 입에서 물 흐르듯 나온 화진이란 이름은 절절했다.
결국, 세준의 인상이 확 구겨지고 만다.
“순서가 틀렸는데. 계약이 먼저죠.”
“내 선에서도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근데 묻는 이유가 뭐야?”
“확인해보고 싶었어요.”
“뭘?”
“그 이름 두 자에 당신도 무너지는지, 아닌지.”
제대로 저돌적이었던 연수의 발언에 분위기도 더욱 고조된다. 세준의 심기가 또 나빠질까 우려한 장실장이 어쩔 줄 모르는데, 오히려 세준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갑자기 웃음을 터트린 세준이 기어이 배를 잡고 소리 내서 웃기 시작한다. 그의 반응을 지켜보던 연수가 남은 커피를 한입에 들이킨다.
“그래서 확인이 됐습니까?”
“계약할게요.”
“연수야!”
놀란 라이가 연수의 팔을 붙잡는다. 굳은 결심이 선 듯한 연수는 그제야 계약서를 집어서 읽어본다. 세준은 연수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펜을 꺼내 앞에 내려놓는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이미 충분히 완벽한 조건의 계약서이긴 하지만, 일단 들어나 봅시다.”
생각에 빠져 있던 연수가 문득 유리 벽 쪽을 바라본다. 공사가 마무리 중인 공연장, 그 가운데 피아노를 빤히 바라보던 연수의 시선은 곧이어 텅빈 공연장의 벽으로 향한다.
“저 가운데 벽은 비워두는 거예요?”
“벽?”
연수가 가리킨 곳은 스키장과 맞춰 하얗게 도배해놓은 공연장 가운데 벽이었다. 영문 모르는 연수의 질문에 세준이 고개를 갸웃한다.
“저 벽에 벽화를 그리고 싶어요.”
연수의 제안은 뜬금없었지만, 세준이 알아듣기엔 충분했다. 이내 세준의 눈빛이 바람 앞의 초처럼 힘없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담당해줄 화가가 필요할 것 같은데요, 도세진 이사님.”
“이봐요 정연수씨.”
“고용하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정연수!”
“유화진 화가를 고용해주세요.”
연수가 더 확인하려 노력하지 않아도, 세준은 화진의 이름 두 자에 철저하게 무너졌다. 그것이 여자 유화진에 대한 집착인지, 화평의 딸 유화진에 대한 경계인지는 세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8년 전, 겨울
커튼으로 가려진 창문 틈으로 세밀하게 들어오는 햇빛에 표정을 구긴 화진이 비틀거리며 일어난다. 작업복을 입고 바닥에서 잠들었었던 화진은 주변에 엉망인 작업물들을 쳐다보다가 큰 창의 커튼을 확 친다. 제설작업 중인 화평 스키장 아침 풍경을 바라보는 화진의 얼굴엔 물감이 묻어 엉망이다.
그러나 환하게 웃어 보이는 화진, 스키장을 바라보는 화진의 표정은 늘 밝다.
“역시 햇살은 스키장이지.”
칫솔을 입에 물고 웃던 화진은 주머니에서 울리는 진동에 핸드폰을 꺼내 든다. 화면에 뜬 ‘유회장’이란 이름에 한참 고민하던 화진이 전화를 받는다.
[유화진. 호텔에서 작업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그럼 내 작업실 키 다시 주던가”
[하루 종일 거기만 박혀 있을 게 뻔하지. 당분간은 압수야.]
“장난해? 그럼 화가로 키우질 말던가. 나보고 그림 안 그리면 뭐 하라고? 스키장 벽화 수정 작업도 내가 한다니까 왜 굳이 다른 디자이너를 들이는데!”
[그곳으로 사람 한 명 보냈다. 유화진 네가 그 녀석한테 하는 거 봐서, 스키장 벽화 맡길지 말지 결정하마.]
“나한테 사람 붙이지 말랬지!”
작업복 앞치마를 신경질적으로 벗던 화진, 방문을 두드리는 누군가의 노크 소리에 시선이 돌아간다.
“빨리도 왔네.”
[이번엔 문제 일으키지 마라. 아빠가 아끼는 놈이야.]
입을 헹구던 화진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물감이 묻어 지저분한 하얀색 와이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한다. 머리를 잔뜩 헝클어트린 화진이 입구 쪽으로 걸어간다.
“걱정마. 아주 제대로 대접해줄 테니까”
전화를 끊고 핸드폰을 집어 던진 화진이 검은색 작업복 바지를 벗자, 허벅지를 간신히 가리는 길이의 와이셔츠 차림이 된다. 거울을 보며 만족스럽단 표정으로 웃은 화진이 망설임 없이 문을 연다.
문찬의 심부름으로 화진을 데리러 오는 동안, 안하무인에 싸가지로 유명한 화진을 맞이할 생각에 잔뜩 긴장하고 있었을 세준은 생각보다 빠르게 열리는 문에 당황한다.
놀란 표정이 역력한 세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화진이 문을 활짝 열어준다.
“들어와”
문을 열어두고 침대로 향하는 화진. 천천히 방으로 입성한 세준은 먼저 엉망인 방의 모습을 발견한다. 표정을 감출 줄도 모르는 애송이 수준의 세준을 쳐다보던 화진의 입가로 웃음이 터져나온다. 억지 미소를 지으며 화진의 가까이로 오던 세준이 이번엔 미술 도구들이 널부러진 바닥과 화진이 벗어 던진 옷, 나뒹구는 술병을 발견한다.
애써 시선을 돌리고 웃어 보이던 세준. 하지만 고작 와이셔츠 하나로 몸을 가리고 있는 화진을 발견한 순간, 도무지 넋 나간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인다.
“사장님께서 모시고 오라고 하셔서요”
바닥에 고개를 처박고 얘기하는 세준을 빤히 보던 화진이 침대에서 일어나 가까이로 다가간다. 자신보다 키가 한 뼘 반은 큰 세준에게 다가갈수록 화진의 고개가 올라간다.
“좀 숙여”
화진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다리를 접어 키를 맞추는 세준은 얼결에 가까이에서 화진의 얼굴을 마주한다. 술기운에 얼굴빛은 붉고 볼 여러 곳엔 물감이 묻어 지저분했다. 반쯤 풀린 눈을 자꾸 부릅뜨던 화진이 까치발을 들고 세준의 어깨에 두 손을 올린다
“유회장이 내가 예쁘대?”
“네?”
“아니. 실물 보고 잔뜩 실망한 표정이길래.”
“그런 거 아닙니다!”
“멀대 같은 게.”
화진에게서 풍겨오는 술 냄새에 세준의 표정이 살짝 구겨진다. 웃으며 보고 있던 화진이 까치발을 든 상태로 비틀대다 발을 삐끗하니, 깜짝 놀란 세준이 순식간에 화진의 허리를 잡는다.
“놔”
허리에 올라간 세준의 손을 뚫어지라 바라보는 화진. 부리나케 손을 뗀 세준이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선다. 그러다 살짝 말려 올라간 화진의 와이셔츠를 발견한 세준이 놀라며 양복 자켓을 벗어 그녀의 허리에 감싼다.
“이봐요 도세준씨. 애쓸 거 없어. 어차피 날 통해선 유회장한테 점수 못 따. 다른 방법을 강구 해보도록!”
비틀대다 침대에 앉은 화진이 또다시 세준을 빤히 응시한다. 뭐라 대답할 말을 잃은 세준이 고개를 푹 숙이고는 바닥에 있는 도구들을 정리한다. 그림들이 훼손될까 조심스럽게 만지던 세준은 스케치만 된 화평 스키장 그림을 발견한다.
“전부 스키장만 그리시네요?”
“내 애정이 그렇게나 큰데. 유회장은 감이 없어, 감이.”
“중요한 건 실력 아닌가요?”
스케치 된 그림을 묘하게 바라보던 세준에게서 뜻밖의 얘기가 나오자, 심기가 거슬린 화진이 벌떡 일어선다.
“내 실력이 별로다?”
“그건 아닙니다. 다만…”
“다만?”
“흐려요. 뿌연 창밖을 보는 것처럼.”
어느새 세준의 바로 옆까지 다가온 화진이 쪼그리고 앉아 세준과 시선을 맞춘다. 그녀의 인기척에 놀란 세준이 고개를 돌리자, 묘한 표정으로 웃고 있는 화진과 얼굴이 보인다.
“더 얘기 해봐.”
“네?”
“더 해보라니까?”
화진이 잠시 머뭇대는 세준의 어깨를 눌러 편하게 앉힌다. 어느새 창밖의 스키장 풍경을 바라보며 화진과 나란히 앉게 된 세준은 불편함에 우물쭈물하다가 입을 연다.
“그림은 아름답지만, 그저 아름답기만 합니다.”
“왜 그런 것 같은데?”
“글쎄요. 저도 그거까진…”
“저거 보여?”
손을 든 화진이 창밖 너머 무언가를 가리킨다.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건, 곤돌라의 중간 정착지였다. 설원 한가운데 우뚝 솟은 것처럼 보이는 정차지점, 그곳의 왼쪽 벽면엔 벽화가 하나 그려져 있었다. 멀어서 선명하게 보이지 않는 벽화를 집중해서 응시하던 세준. 자세히보니 화진이 그린 그림과 같은 그림이었다.
“뭐가 더 나은 것 같아?”
“멀어서 잘 보이진 않습니다.”
“스키장 정찰 안 해봤어? 출근한 지 꽤 됐잖아. 유회장이 안 데려갔을 리가 없는데?”
“근데 아가씨께서는 어떻게 저에 대해 다 알고 계시는 겁니까? 아까 제 이름도 아시던데…”
“도세준씨. 순서가 틀렸잖아! 내 질문에 먼저 대답해야지?”
다시 시선을 벽화 쪽으로 돌린 세진은 얼마 전 봤던 벽화를 떠올려본다.
“벽화보단 아가씨가 그리신 그림이 더 아름답습니다. 다만…벽화는 좀 더 솔직했어요. 하물며 제설작업을 하는 직원의 모습마저 담았을 정도로.”
“그걸 봤어?”
“보였습니다.”
말없이 일어난 화진이 침대에 걸터앉는다. 괜히 긴장했던 세준이 작게 숨을 고르며 일어서는데, 어느새 화진의 손에 세준의 자켓이 들려있었다.
“가봐요, 그만.”
당황한 세준을 뒤로한 화진이 바닥에 떨어진 바지를 주워 입는다. 몸을 돌린 세준이 몸 둘 바를 모른 채로 바닥에 시선을 떨군다.
“유회장한텐 유화진이 작업실로 가서 죽치고 있을 거라고 전해.”
“같이 안 가시는 겁니까?”
“도세준 때문에 같이 안 가려고.”
화진의 대답에 당황한 세준이 몸을 돌린다. 어느새 옷을 갈아입은 화진은 거울로 뒤늦게 자신의 몰골을 발견하고는 경악한다.
“네?! 제가 뭐 실수라도…”
“도세준씨. 여기선 그렇게 곧이곧대로 보면 곤란해. 특히 유회장 사람 되려면.”
“죄송하지만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가 어렵습니다.”
“유회장이 보라는 것만 봐. 안 그러면 다쳐.”
물티슈로 얼굴에 묻은 물감 자국을 대충 지운 화진이 머리를 고쳐 묶는다. 문득 그런 화진의 모습을 빤히 보던 세준의 얼굴이 붉어진다. 깔끔하게 올려 묶은 빨간 색의 포니테일은 화진의 하얀 피부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마스카라가 살짝 번진 크고 깊은 화진의 눈매 속엔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담겨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화진을 더 살피기 위해 가까이 다가가던 세준은 화진이 돌아봄과 동시에 멈춰 선다.
“이렇게 우직한데 어떻게 유회장의 사람이 됐지? 혹시 테스트 중인가?”
“테스트요?”
“유회장이 변태 싸이코라 가끔 자기 사람들한테 그런 짓을 좀 해. 일종의 확인 같은 거지. 난 그걸 망치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해?”
“왜요? 아버지시잖아요.”
머리 손질을 완료한 화진이 큰 붓 하나를 들고 세준에게 다가간다. 이윽고 세준의 얼굴에 붓칠을 할 것처럼 장난치는 화진, 하지만 세준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다. 붓을 뒤집은 화진이 까치발을 들어 세준의 어깨를 꾹 누른다.
“그쪽은 유회장이 좋아?”
“신뢰하고 존경하고 있습니다.”
코웃음 친 화진이 한걸음 뒤로 물러나 세준을 쳐다본다. 어쩐지 아까와는 다르게 굳은 표정이었다.
“저 벽화에 그려진 제설작업 중인 직원…죽었어.”
“네?”
“죽였어. 유회장이”
흔들리는 눈빛을 감추지 못한 세준이 다시 정착지 쪽을 바라본다. 멀어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구석 한편에 그려진 직원의 모습을 또렷하게 기억하는 세준이었다.
“그래서 저 벽화를 그린 직원은 해고됐지. 유회장이 보지 말라는 걸 보고, 하물며 그려넣기까지 했으니까.”
“근데 저 벽화가 왜 아직 그대로 있는 겁니까?”
“그녀의 유작이었으니까.”
언뜻 보이는 화진의 눈빛은 슬퍼보였다. 세준은 어쩐지, 이 순간 화진이 가엾단 생각을 한다.
“그분은 어쩌다가…”
“그 사람도 유회장이 죽였어.”
맥없이 떨어지는 화진의 팔, 그 손에 굳게 잡힌 붓은 화진이 끝까지 놓지 못하는 유일한 물건처럼 그녀에게 매달려있었다. 세준은 당장이라도 다가가 그녀의 팔을 잡아주고 싶었다.
“내 엄마야. 저 벽화를 그린 화가.”
스키장이 아닌 그곳에 담긴 엄마의 흔적을 그리고 싶었던 화진은 수없이 같은 풍경만을 그렸다. 세준은 차오르는 감정의 원인을 몰라 복잡해졌다. 그녀에 대한 가여움인지, 불편함인지.
“난 살고 싶었어. 그래서 아빠가 원하는 그림만 그려. 우습지?”
“우습지 않습니다. 저는 다만, 아가씨가…”
“아니. 우스워야 할걸? 당신은 알아선 안 될 비밀을 알아버렸거든.”
당장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만 같은 얼굴을 하던 화진의 입가에 서서히 미소가 번진다. 위태로워 보였던 그녀는 기지개를 피듯 일어나 옷매무새를 정돈한다. 상아색 가디건을 챙겨입은 화진은 반달처럼 말려 올라간 붉은 입꼬리로 세준에게 다가간다. 그녀는 아름다웠지만, 비단뱀처럼 위험했다. 그걸 늦게 직시한 세준은 도망칠 길이 없었다.
“너에 대해 어떻게 알았냐고 물었지?”
꽃 같은 가여움을 품에 돌돌 말고 있던 그녀는 치렁치렁한 겉치레를 벗어던진 뱀처럼 가볍고, 날카로웠다. 세준은 그제야 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깨닫는다. 그녀에게 보여선 안 될 모습을 보이고, 들어선 안 될 것을 들었다고.
“큰 키에 선한 눈은 너뿐이었어. 도세준. 그래서 네가 내 첫 타겟이 된 거야.”
“그게…무슨 말씀이세요?”
“네가 날 좀 도와야겠어. 내가 스키장 벽화 수정 작업을 할 수 있도록”
그녀의 제안에 당황스럽고도 복잡한 이 순간, 세준은 문득 화진의 여유로운 미소를 이길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걸 깨닫는다. 어쩌면 앞으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