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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물간 인연
작가 : 유제인
작품등록일 : 2020.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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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엇갈린
작성일 : 20-08-23     조회 : 275     추천 : 0     분량 : 5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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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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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이트 톤으로 정갈하게 도배된 거실을 지나 2층의 큰 방으로 향한 세준은 신경질적으로 넥타이를 벗어 던지고 침대에 눕는다. 큰 방은 거실의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풍경을 자아냈다. 블랙과 네이비로 색감을 맞춘 벽면엔 그 흔한 액자나 화분도 걸려 있지 않았다. 같은 블랙색상의 큰 서랍과 작은 원목 협탁, 킹사이즈의 침대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는 방이었다. 공허하고 텅 빈 침실 방에 홀로 누워있던 세준은 불현듯 떠오른 연수와의 대화에 다시 인상이 구겨진다.

 

 급하게 핸드폰을 꺼낸 세준이 익숙한 번호를 누른 후 협탁 위에 올려놓는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신호음은 당장이라도 세준의 목을 조여오는 것처럼 답답했다. 수신자의 응답이 없음을 확인하고서야 핸드폰을 다시 집어 든 세준이 이번엔 다른 번호로 전화를 건다.

 

 [예. 이사님]

 

 “장 실장은 내 전화에 알람이라도 걸어놨나? 어떻게 두 번 연결음 만에 받지?”

 

 [무슨 일이십니까?]

 

 “그 애도 이렇게 내 전화 좀 딱딱 받으면 얼마나 좋을까”

 

 [화진 아가씨 말씀이십니까?]

 

 멍하니 핸드폰을 바라보던 세준은 뒤늦게 창가 쪽에 걸려있는 작은 플라워 가랜드를 발견한다. 당황한 세준이 누워있던 몸을 일으켜 꽃을 한참이나 살핀다. 생기를 띄는 것이 걸린 지 얼마 안 된 생화였다.

 

 “집에 다녀갔었어?”

 

 [아뇨.]

 

 “내가 집에 너무 오랜만에 왔나?”

 

 가랜드를 한참이나 바라보던 세준은 문득 집에 들어왔을 때를 다시 떠올린다. 크게 달라진 건 없었지만, 어딘가 정돈되어있는 모습이었다. 뒤늦게 현관문 앞에 걸려있던 꽃을 떠올린 세준이 벌떡 일어선다.

 

 “아니. 누가 왔었어! 내가 이 집에 내 손으로 꽃을 걸어둘 리가 없잖아?”

 

 [꽃이요?]

 

 “확실히 집에 안 왔었어? 장실장 말고도?”

 

 [이번에 가정부가 바뀌었다고는 들었습니다]

 

 “누가 바꿨는데? 내가 집에 손대지 말라고 했을 텐데”

 

 [아무래도 김비서님인 것 같습니다.]

 

 “김비서면…설마 김여민? 그 여자가 왜 내 집을 관리해?!”

 

 [죄송합니다. 전에 일하던 가정부가 그만두고 김비서님 주변에 괜찮은 인력이 있다고 하시길래요.]

 

 “김여민씨는 여기가 아직도 유회장 집인 줄 아는 모양이야? 건방지게.”

 

 1층으로 내려간 세준은 뭐에 홀린 사람 마냥 집을 뒤지기 시작한다. 그제야 바뀐 집안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몇 가지의 반찬으로 채워진 냉장고, 계절별로 정리된 옷방, 어두운 커튼에서 하얀색 블라인드로 바뀐 서재의 큰 창, 그 옆에 달린 또 하나의 작은 가랜드.

 

 “가정부가 꽃집이라도 하나? 온 집안을 쑤시고 다녔네.”

 

 [다시 바꾸라고 하겠습니다.]

 

 서재를 나서려던 세준은 문손잡이에 달린 작은 장미꽃 고리를 발견한다. 노란 장미는 생기 넘치는 모습이었다. 열려있는 서재의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장미 향이 감도는 것만 같았다. 그 옆 의자에 앉은 세준의 표정이 쓸쓸하다.

 

 “난 몇 년을 살아도 이 집이 낯선데. 하물며 가정부가 나보다 낫네.”

 

 문찬과 그의 가족들이 살던 집을 그대로 매매한 세준은 크고도 쓸쓸한 집에 발길을 자주 두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들의 흔적이 가득한 곳이었기에, 때론 세준을 옥죄이기도 했다. 그래서 세준은 이 집에 들어온 후로 자신이 자는 방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인테리어에 손을 대지 않았다.

 

 화려한 흉가 같았던 집은 고작 노란 장미 한 송이에도 빛을 발하고 있었다. 빤히 장미를 쳐다보던 세준은 신경질적으로 꽃을 뜯는다. 세준의 한 줌에 잡힌 노란 장미가 바닥으로 흩뿌려진다.

 

 “바꾸라고 하세요. 집도 원래대로 되돌려 놓고.”

 

 [예. 알겠습니다.]

 

 “유화진은 여전히 연락 안 됩니까?”

 

 [그렇습니다.]

 

 “이젠 디자이너로서 찾는 겁니다. 비겁한 방법도 좀 쓰고 그러세요.”

 

 [빠른 시일 내에 찾아보겠습니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던 세준은 손에 아직 남은 장미 꽃잎 하나를 발견한다. 꽃잎은 제집을 잃었음에도 빛을 발했다.

 

 “취향이 유화진하고 같네.”

 

 남은 꽃잎을 주머니에 넣은 세준이 2층으로 올라가려는데, 1층 구석에 문이 열려있는 작은 방을 발견한다. 내내 닫아뒀던 빈방은 문이 열려있는 것은 물론, 빛도 세어나오고 있었다. 의아한 표정으로 한참을 바라보던 세준은 금방 무시하고 다시 2층으로 향한다.

 

 *

 

 납골당 입구에 선 화진이 보라색 가디건을 벗는다. 강한 햇살이 화진의 팔 위로 쬐니, 금방 체온이 올라간다. 멀리서 누군가와 심각한 표정으로 통화 중이던 여민이 급하게 전화를 마무리하고는 화진에게 가까이 와 다시 가디건을 입힌다.

 

 “맨살 타면 어쩌려고”

 

 “좀 타면 어때?”

 

 “사모님이 얼마나 예쁘게 키웠는데.”

 

 “그거 다 우리 엄마 강박이야. 내가 인형도 아니고…. 보란 듯이 여기서 살 다 태워버릴까?”

 

 “못 말린다, 유화진. 너 그런 고집도 사모님 닮은 거 알아?”

 

 “그래서 누구냐고. 나랑만 있으면 심각한 전화 받는 거…나 때문이지?”

 

 말없이 씩 웃은 여민은 화진의 가디건을 정돈해주고 양산을 펼쳐 씌운다.

 

 “이모가 다 알아서 합니다. 걱정하지 마.”

 

 “힘들면 나 놔도 돼.”

 

 “무슨 그런 소리를 해?”

 

 “유회장 눈치 보고, 도세준 눈치 보고. 나 때문에 늘 불철주야잖아.”

 

 “그런 거 아니야. 사모님한텐 가봤어?”

 

 “겨울에 다시 올래. 엄마는 겨울을 좋아하니까.”

 

 “화진아…”

 

 “당분간은 싫어. 이런 모습으로는 안 볼래.”

 

 여민의 팔짱을 낀 화진이 고개를 돌려 납골당 입구를 바라본다. 차마 건네지 못한 노란 장미 한 송이만이 화진의 가방에서 시들고 있었다.

 

 “저기, 화진아”

 

 뭔가를 말하려던 여민의 표정이 멀리서 다가오는 회색 차량을 발견하곤 굳는다. 역시나 함께 차량을 발견한 화진의 표정도 좋진 않았다. 차가 서는 쪽으로 다가간 화진, 장실장이 운전석에서 내리자마자 빠르게 차 안을 살펴본다. 다행히 그녀가 걱정하는 인물은 없었다.

 

 “어쩐 일이세요?”

 

 “모시러 왔습니다.”

 

 “이모가 배신을 했네.”

 

 난처한 표정으로 서 있던 여민도 가까이 다가온다. 화진의 뾰로통한 표정에 웃은 장실장이 뒷문을 연다.

 

 “김비서님께는 제가 특별히 부탁을 좀 했습니다. 이사님은 모르시니 걱정하지 마세요.”

 

 “장실장님은 이미 도세준 사람 다되셨던데요? 제가 뭘 믿고요.”

 

 “저는 그저 사모님과의 오래된 약속을 지키러 온 겁니다.”

 

 애써 장실장의 시선을 피하던 화진의 눈빛이 흔들린다. 비록 사이가 엇갈리긴 했지만, 장실장도 김비서도 모두 화진에겐 가족 같은 사이나 마찬가지였다. 화진의 쓸쓸한 시선이 또다시 납골당 쪽을 향한다.

 

 “엄마랑 무슨 약속을 했었는데요?”

 

 “천천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날이 많이 뜨겁습니다.”

 

 가까이 다가온 진이 화진의 어깨를 토닥인다. 망설이던 화진이 차에 올라타니, 차가운 공기가 가득한 차 안에서 화진의 얼굴이 금세 창백해진다.

 

 장실장은 속도를 내지 않고 천천히 이곳을 빠져나간다. 엄마와 마주치지 못했을 화진을 향한 배려였다. 창가에 시선을 둔 화진은 꽃을 두고 오지 못한 곳에 내내 시선을 맞추다가 이내 거둔다.

 

 “도세준한테 전화 좀 그만하라고 하세요.”

 

 “이사님께서 아가씨를 많이 찾고 계십니다.”

 

 “그러니까요. 찾지 말라고 해요.”

 

 “일단은 아가씨 소식 전하지 않겠습니다.”

 

 “장실장님 대체 뭐예요? 이중 스파이 그런 건가? 유회장 밑에서 참 안 좋은 것만 배우셨네요.”

 

 “오늘은 그저 오래전 사모님을 모시던 장 기사로 온 거니 안심하세요.”

 

 맘껏 비아냥대지도 못한 화진이 괜히 입술만 뜯는다. 비록 지금은 도세준을 모시고 있는 몸이지만, 장실장은 늘 화진 모녀에겐 다정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화진 역시 그를 원망하면서도, 이해하는 중이다. 그가 도세준이 아닌 회사를 지키기 위해 남았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래서 어디 가는데?”

 

 “스키장으로 갑니다.”

 

 “이래놓고 나 도세준 앞에 세워놓으려는 건 아니죠?”

 

 “이사님은 오늘 출장이 있으셔서 그곳에 안 계십니다.”

 

 “스키장은 왜요. 꼴도 보기 싫어.”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은 화진의 창가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는다.

 

 “곧 공연장이 완공됩니다.”

 

 “그래서?”

 

 “화평 공연장에 벽화를 그리는 건 사모님의 꿈이셨습니다. 아가씨의 꿈이기도 하셨잖습니까.”

 

 장실장의 말에 금방 눈을 뜬 화진이 대답 대신 침묵을 지킨다. 전부터 공연장 건설을 위해 애썼던 화진의 노력은 야속하게도 문찬의 손에 꺾어져야 했었다. 무슨 이유인지 스키장을 인수하면서 공연장 건설에 서두른 세준의 추진 덕분에, 오랜 세월 미뤄져만 왔던 공연장은 점차 그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는 중이었다.

 

 “벽화를 그릴 화가를 찾고 있습니다.”

 

 “네~ 열심히 찾으세요.”

 

 “아가씨만한 적임자가 없습니다. 누구보다 스키장을 사랑하고, 아끼셨으니까요. 무엇보다 스키장의 모습을 눈감고도 그리시잖습니까.”

 

 “이젠 죽은 직원 한 명 그려 넣어도 뭐라고 할 사람은 없겠네. 아니다. 도세준이 난리 칠 수도 있겠네요. 딱 보니 유회장을 그대로 닮아가더만.”

 

 “이사님도 아가씨를 우선으로 생각해두고 계십니다.”

 

 “그때 도세준을 내 손으로 잘랐어야 하는 건데!”

 

 다시 창가에 머리를 기댄 화진이 무거운 눈꺼풀을 감는다. 옅어져 오는 무의식 속에서 화진은 스키장을 떠올렸다. 수십, 수백 번을 그렸을 스키장은 장실장 말처럼 눈을 감아도 거뜬히 그려낼 수 있는 곳이었다.

 

 “도착해도 깨우지 말아요.”

 

 스트레스를 늘 잠으로 푸는 화진은 시원한 공기를 베개 삼아 눈을 감는다. 막상 스키장으로 향하는 차의 방향을 돌리지 않는 건 화진에게 남은 미련 중 하나였다.

 

 *

 

 푸른 풀잎들 사이로 고개를 내민 꽃의 향연이 알록달록 조화를 이룬다. 바람에 살랑이는 꽃은 햇빛의 기세에도 고개를 숙이지 않고 있었다. 그 가운데 선 연수가 다가오는 풀 내음에 미소를 짓는다. 멀리서 공연장 건설을 지켜보고 있던 라이의 시선이 연수에게로 향한다. 하얀색 셔츠를 입은 연수는 광활하게 핀 루드베키아와 잘 어울렸다. 야생화 군락지 한가운데 선 연수는 예쁘기도, 슬프기도 했다.

 

 “한 폭의 그림이네!”

 

 라이의 장난 섞인 말투에 웃던 연수의 시선도 공연장으로 향한다. 크고 웅장한 피아노의 기세에 움찔하면서도, 빛을 반사하는 그 모습은 연수의 눈길을 한 번에 휘어잡는다. 하지만 전처럼 자유롭지 움직이지 못하는 손 앞에서, 피아노는 이제 멀고도 먼 길이었다.

 

 “보지마. 애달프잖아.”

 

 “그러길 바라고 세워둔 걸 거야.”

 

 “이제라도 도 이사님 제안 거절하자. 연수야, 이젠 편안하게 살기로 했잖아.”

 

 바람에 맥없이 흔들리는 연수의 옷깃을 잡은 라이는 들려오지 않을 줄 알면서도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라이에게 씩 웃어 보인 연수가 굳은 표정으로 공연장 더 가까이 걸어간다.

 

 “라이. 나는 편안하게 살고 싶은 거지, 도망치고 싶은 건 아니야.”

 

 “도 이사님 속이 너무 뻔해. 두려워.”

 

 “난 그 사람 안 두려워.”

 

 둘의 대화가 끊긴 건 들려오는 차 소리 때문이었다. 천천히 다가오는 회색 차량에 연수의 고개가 돌아간다. 그러다 강한 햇살에 눈이 부신지, 손으로 눈앞을 막는다.

 

 “연수야…”

 

 그 탓에 연수는 불안감이 섞인 라이의 목소리는 못 듣고 말았다. 공연장 앞에 주차된 차에서 내린 사람들을 확인하기 위해 연수는 더 가까이 걸었지만, 햇빛의 힘에 주춤하고 만다. 라이는 그런 연수의 팔을 더욱 꼭 잡는다.

 

 하지만 라이가 잡지 않아도, 연수는 더이상 앞으로 걸을 수가 없었다. 처음 만난 그때처럼, 빛을 받아 더욱 돋보이는 붉은 머리가 바람에 흔들렸으니까.

 

 화진은 늘 강한 햇살을 뚫고 걸어왔다. 자신이 닿을 곳이 어딘 줄도 모르면서, 망설이지 않고 연수에게 걸어왔다.

 

 눈 앞을 가리고 있던 연수의 손이 힘없이 떨어진다. 오랜만에 마주한 화진의 모습은 그때처럼 화사하고 아름다웠다. 그 붉은 머리칼과 창백한 얼굴마저도. 바람은 다시 그들을 괴롭히기 시작한다. 화진의 머리카락을 지나, 연수의 손끝으로 타고 올라온다. 바람이 살랑일 때마다 그들의 마음도 살랑이기 시작했다. 설렘과 두려움 그사이 어디쯤에 머문 둘은, 공허한 스키장 한가운데서 오랜 시간 만에 재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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