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끝을 간지럽히는 노란색 루드베키아가 기분 좋은 향을 내며 살랑인다. 여린 손으로 살며시 가둬도 이내 빛을 찾아 고개를 드는 것이 해바라기와 닮은 모습이었다. 노란 꽃을 유독 좋아했던 화진은 하염없이 루드베키아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해바라기보단 좀 더 여린 꽃이었지만, 굳건하게 화평의 여름을 지켜내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적막을 방해하지 않은 연수는 꽃 대신 화진을 눈에 담는다. 고작 몇 년의 시간으로는 절대 잊힐 수 없는 얼굴이었음에도, 어쩐지 지금의 화진은 낯설었다.
“루드베키아 꽃말이 뭔 줄 알아?”
긴 시간 만에 화진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에 연수는 떨리는 손을 뒤로 감춘다. 꽃을 보고 싶었던 건지, 연수의 눈을 바라볼 자신이 없었던 건지, 화진의 시선은 내내 연수에게 돌아오지를 않고 있다. 주먹을 꽉 쥔 연수가 몇 발자국 앞으로 향한다. 그 탓에 화진의 얼굴에 짙게 그늘이 진다.
“알아.”
“이럴 땐 모른다고 해야 내가 준비한 말을 하지.”
“너랑 한가하게 꽃 얘기할 생각 없어.”
생각보다 더 퉁명스럽고 차가운 연수의 목소리에 화진은 더욱 고개를 숙인다. 키가 큰 그를 보기 위해 늘 고개를 들어야 했던 화진은 그늘을 핑계 삼아 더욱 연수의 시선을 피하는 중이다. 그 탓에 화진의 눈에 보이는 건 쓸쓸한 루드베키아와 그보다 더 쓸쓸한 연수의 손이었다.
“엄마가 있었을 땐, 이곳에 루드베키아가 피지 않았었대. 이 전경을 봤으면 참 좋아했을 텐데.”
“유화진”
유독 낮은 연수의 목소리가 화진의 마음을 쉴 새 없이 울린다. 마른 땅바닥으로 내리쬐는 볕을 피할 수 없는 것처럼, 화진이 아무리 고개를 숙인다 해도 연수의 앞이었다. 화진은 연신 입술을 깨문다.
“아니다. 엄마는 겨울을 좋아했으니까 여름 스키장의 풍경은 몰랐던 걸까?”
“유화진!”
더는 화진의 적막을 기다려주던 연수는 없었다. 화진을 바라보는 연수의 마음은 말라가는 땅과는 비교도 안 되게 갈라지고 있었다.
결국, 연수는 자신의 손으로 화진의 고개를 들어 올린다. 어쩔 겨를도 없이 들려 올려진 화진의 얼굴엔 숨기지 못한 감정만이 여실히 드러났다. 연수의 손은 따뜻했지만, 화진에겐 얼음장보다 차가웠다. 얼마나 깨물었는지 피가 나는 화진의 입술을 뚫어지라 보던 연수가 매정하게 손을 내려놓는다.
“물어봐야지. 내가 왜 여기에 와있는지.”
“물으면? 대답해 줄 거야?”
“당연하지. 몇 년을 연습했는데.”
“싫어. 좋은 이유가 아니라는 거 알아”
“싫어도 들어. 넌 그래야 돼.”
“나한테 이러지 마. 나 연수 너 못 이겨”
“그럼 넌 나한테 왜 그랬니?”
말끝에 툭 하고 걸린 연수의 절절함을 눈치챈 화진은 입을 꾹 다문다. 화진이 키워낸 가시가 아무리 날카로워도 연수를 찌를 순 없었다. 오히려 제 가시에 찔리고 마는 화진이었다. 추위에 떠는 아이처럼, 덜덜 떨리는 손으로 연수의 팔을 잡은 화진은 결국, 눈물을 보이고 만다.
“잘못했어”
사랑했던 여자의 손이 닿은 곳은 따뜻해야 함에도, 연수는 온몸을 자극해오는 소름에 놀라 화진을 밀쳐낸다. 맥없이 밀쳐진 화진이 몇 걸음 뒤로 주춤한다.
“손대지 마.”
“연수야”
“그렇게도 부르지 마.”
“왜 왔어. 왜 널 이렇게 만든 곳으로 왔어?”
“네가 있잖아. 이 지옥 같은 곳에”
“날 꺼내주러 온 거야?”
“착각했구나. 너도 나한텐 지옥 중 하나일 뿐이야.”
맥없이 흘러내리는 화진의 눈물을 더 볼 자신이 없었는지, 연수가 뒤로 돌아선다. 화진에게 연수의 뒷모습은 낯선 것 중 하나였다.
굳은 듯 서 있던 연수가 발걸음을 떼려 하자 화진이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간다. 그녀의 다급
한 발소리에 멈춰 선 연수의 어깨가 눈에 띄게 처져있다.
“어디 가게?”
“거기 서 있어. 오지 마.”
“어떻게 그래? 이미 널 봐버렸는데!”
천천히 몸을 돌린 연수는 있는 힘을 다해 화진과 눈을 맞춘다. 화진은 이제 시선을 피하지 않는다.
“몇 년 동안 한 번도 날 찾지 않아놓고 이제 와서?”
“용기가 없었어. 두려웠어.”
“그럼 지금도 용기 없이 그냥 놔. 그거 네 전문이잖아.”
차가운 말을 마지막으로 돌아선 연수가 루드베키아 사이로 점점 멀어진다. 손끝에 연수의 감촉이 남아있는 화진은 시린 몸을 감싸듯 움츠린다. 하지만 화진의 시선은 연수가 사라질 때까지 한곳만을 응시했다.
*
급하게 차에 올라탄 세진이 자켓을 신경질적으로 뒷좌석에 던진다. 숨을 트이려는 듯 단추 몇 개를 더 풀던 세진이 결국, 운전대 위로 엎어진다. 벌써 열통도 넘게 화진에게 전화를 걸고 있지만, 그녀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화가 나다 못해 진이 빠진 세진이 깊게 한숨을 쉰다. 곧이어 핸드폰 진동이 울리자 급하게 화면을 확인한 세진은 수신자의 이름을 보고는 힘없이 귀 위로 얹는다.
“어. 말해”
[정비서입니다, 이사님! 방금 알아봤는데요, 오늘 낮 두 시쯤에 정연수씨께서 스키장에 방문하셨다고 합니다. 천라이씨랑 같이요.]
“그래서, 만났다는 게 확실해?”
[예. 그 시간쯤에 장실장님, 김여민씨와 함께 유화진씨도 스키장에 계셨다고 합니다. 직원들 말로는 분명 둘이 같이 있었다고…]
“끊어”
힘없이 전화를 끊은 세진이 다시 한번 화진에게 통화를 누르려다 이내 포기한다. 적막만이 가득한 차 안은 세진의 숨소리마저 들리지 않았다. 잠깐의 적막을 깬 건 장실장의 전화였다. 가슴 쪽을 두드리며 겨우 화를 가라 앉힌 세진이 전화를 받는다.
[접니다. 이사님.]
“당신 해고야.”
[이사님. 죄송합니다.]
“대체 언제부터였어? 내가 유화진 연락 안 된다고 길길이 날뛸 때 재밌었나? 이 꼴 보고 싶었던 거야?!”
[오해십니다.]
“어떻게 그런 식으로 만나게 해!”
[그곳에 정연수씨가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신중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식이면 곤란해. 내가 어떤 식으로 유화진을 괴롭힐 줄 알고 죄다 유화진 편이야?!”
[이사님. 일단 진정하시고, 제가 회사로 가겠습니다.]
“집으로 갈 거야. 출장 취소해.”
[중요한 클라이언트십니다. 4개월 전부터 잡은…]
“이젠 내 말이 상사의 말로도 안 들리나?”
[아닙니다. 미루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세진이 핸드폰을 뒷좌석으로 집어 던지고는 거칠게 운전대를 잡는다. 가라앉지 않는 세진의 심정은 다각도로 들끓고 있었다.
집 앞 주차장에 차를 세운 세진이 뒤늦게 핸드폰을 확인한다. 핸드폰에 뜨길 바라는 수신자의 이름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무엇이 세진의 감정을 이렇게까지 뒤흔드는지, 스스로도 감당하지 못하는 감정의 무게에 자꾸만 고꾸라지는 세진은 겨우 운전석에서 내린다.
익숙하지만 언제나 낯선 곳에 발을 들인 세진은 옷을 아무렇게나 집어 던지고 거실 소파에 몸을 눕힌다. 팔로 눈을 가리고, 공허한 이곳에서 애써 오지 않는 잠을 청해보려 하지만, 형광등의 불빛마저 세진의 심기를 건드리고 있었다.
갑자기 울리는 진동 소리에 몸을 일으킨 세진이 핸드폰을 확인한다. 의외의 이름이 떠있는 것을 발견하자 세진이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정연수씨가 이 시간에 어쩐 일입니까?”
[기어이 제집을 빼셨더군요.]
“그러니까 내가 마련한 오피스텔로 가라고 했잖습니까. 큰 집으로 들어오는 건 죽어도 싫다며요.”
[그쪽이 마련해준 오피스텔도 싫습니다. 제 사생활까지 간섭할 생각이에요?]
“이제 내 사람이니까 그 정도는 필요하지.”
[착각을 여러 번 하시네요.]
머리를 짚으며 부엌으로 향한 세진, 물을 꺼내 마시려다 물기가 떨어지는 도마를 발견한다. 세진의 인상이 살짝 구겨진다.
“오피스텔로 가세요. 정연수씨가 구한 월세 집보단 나을 겁니다.”
[참 무례하시네요.]
“큰 집으로 들어오면 더 좋고”
도마에 묻은 물기를 닦은 세진이 천천히 거실로 걸어 나온다. 미세하지만 그때와는 또 달라진 몇 풍경들을 눈에 담던 세진이 넓은 집을 이곳, 저곳 살핀다. 계단 입구 쪽에 있는 벽에 걸린 작은 가랜드를 발견한 세진의 입에서 한숨이 나온다.
“가정부 필요하면 보내줄게요”
[이봐요. 도세진씨!]
“안 그래도 나한테 필요 없는 가정부가 한 명 있거든요. 성가시고 제멋대로인 게 정연수씨랑 딱이겠어.”
[필요 없어요.]
“당신이 필요 없으면 이 가정부는 일자리를 잃습니다.”
[도세진…. 지금 장난해?]
1층을 다 뒤지고 2층으로 올라가려던 세진의 시선이 문득 1층의 작은 방으로 향한다. 불빛이 작게 새어 나오는 방의 문은 그때처럼 살짝 열려있었다. 그저 지나쳤을 세진이지만, 오늘따라 그의 발걸음은 그쪽으로 향했다. 문 앞에 선 세진은 알 수 없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선뜻 문을 연다.
방문 바로 앞에 걸린 생기 띈 루드베키아가 세진을 맞아준다. 그것에 잠시 홀려, 방 한가운데 잠든 누군가를 발견하지 못하는 중이었다.
“루드베키아네.”
[…뭐라고요?]
“루드베키아. 꽃말이 뭔지 알아요?”
[하…. 내가 그걸 당신 입으로도 듣다니.]
“루드베키아는…”
꽃잎을 만지던 세진의 시선이 자연스레 방 한가운데로 향한다. 침대 베드 위에 바람에 날린 장미꽃잎처럼 쓰러져있는 그녀의 붉은 머리칼에 세진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한 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한 손은 주먹을 꼭 쥔 채 옆으로 누워있는 화진의 얼굴이 유독 창백했다.
소란스러운 꿈이라도 꾸는지, 화진의 얼굴엔 인상이 가득하다. 굳은 듯 멈춰선 세진의 눈동자가 떨려오기 시작한 것은, 이윽고 화진의 얼굴이 다시 평온해지고부터였다.
[여보세요. 도세진씨?]
전화기 너머 들려오는 연수의 목소리에도 세진은 꿈쩍하지 못했다. 더 다가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는 걸음은 예전의 그때와 같았다. 화진 앞에만 서면 세진은 늘 벼랑 끝에 선 사람처럼 위태로웠다.
“그렇게 찾았는데…내 품에 있었네.”
[뭐라고요?]
“가정부는 새로 구해야 할 것 같습니다.”
[…]
“절대 줄 수 없는 이유가 생겼거든.”
전화를 끊은 세진이 천천히 화진 쪽으로 다가간다. 다가갈수록 늘 멀어지기만 했던 그녀였다. 잠에 들어야만 볼 수 있는 그녀의 온화한 표정. 세진에겐 가장 익숙하지 않은 화진의 모습이었다.
무릎을 굽혀 앉은 세진이 화진을 뚫어지라 쳐다본다. 늘 올라가 있던 화진의 눈매는 처연하게 감겨있었고, 비수를 꽂는 말만 뱉던 입술은 그저 붉고 도톰했다. 그녀와 가장 잘 어울리는 붉은 머리카락은 얼굴을 간지럽히듯 내려와 있었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은 세진이 화진의 머리카락 몇 올을 귀 뒤로 넘기는데, 그에 반응하듯 움찔하던 화진이 한두 번 뒤척이더니 다시 같은 자세로 잠을 청한다.
“유화진”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화진의 잠을 깨우진 못했다. 어쩌면 깨우고 싶지 않았던 건지, 세진의 목소리는 유독 작고 나긋했다. 화진을 빤히 바라보던 세진은 옆에 내려놓은 핸드폰 액정 속 자신과 눈이 마주친다. 세차게 흔들리는 눈빛은 불안정했다.
“내가 널 이런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니, 우습다.”
하지만 불안정하게 떨리는 눈빛으로도 화진을 담는 세진이었다.
“우리의 평온한 재회는 한쪽이 눈을 감아야만 이뤄지는 건가.”
화진의 옆으로 턱을 괸 세진이 눈을 감는다. 잠깐이라도 시간이 멈춘 것만 같은 이 상황에서, 온화한 화진 만큼이나 역시 편안한 표정의 세진이었다.
은은한 루드베키아 향 말고는 이 둘 사이를 방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