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헐적으로 덜컹거리는 곤돌라의 소리 외엔 적막뿐이었다. 셋의 온기가 작은 곤돌라 안을 가득 채울 법도 한데, 어쩐지 그들 사이엔 냉기만이 흐르고 있었다. 어느새 꼭대기까지 올라온 곤돌라는 하차를 준비 중이었다.
“내리시겠습니까? 아, 도세준 이사님!”
하차를 위해 곤돌라 문이 열리자 직원이 상체를 꾸벅 숙여 인사한다. 웃으면서 옷매무새를 가다 듬은 세준이 내리진 않고 손만 뻗어 그와 악수한다. 그 탓에 입구 쪽에 앉아있던 화진이 세준의 품에 안긴 것과 같은 모습이 된다.
“서과장님. 비수기에도 수고가 많으세요.”
이상한 세준의 행동에 얼떨떨하게 웃은 직원이 화진의 눈치를 본다. 분명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랐을 화진이지만 이상하게 조용했다. 세준의 품에 가려 보이지 않는 화진을 바라보던 연수가 기가 차다는 듯 한숨을 쉰다.
“안 내리시게요?”
“지금 저한텐 이 곤돌라 안이 가장 진귀한 풍경이라서요. 다음에 또 들리겠습니다.”
“예. 그럼 내려가십쇼. 이사님.”
문이 닫히자 다시 자세를 똑바로 한 세준이 머리를 정돈하다가 결국, 웃음을 터트린다. 붉게 상기된 얼굴로 창밖만 바라보던 화진이 세준 쪽으로 시선을 튼다.
“눈빛으로 날 죽이겠네? 우리 화진이.”
“도세준. 이 상황이 재밌어?”
“둘은 재미없나? 하차할 수 있었는데 아무도 안 내린 이 상황이 얼마나 재밌어.”
기어이 박수까지 치며 웃어대던 세준이 겨우 진정하고는 눈물을 닦는 시늉을 한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던 화진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려다 연수와 눈이 마주친다. 감정을 읽을 수 없을 만큼 깊은 연수의 눈은 한참 전부터 화진만 담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흐르는 연수의 감정이 화진에게 깊게 침투한다.
“정연수씨의 부탁대로 유화진 화가를 고용했습니다. 내가.”
“무슨 소리야?”
“아, 유화진 작가한테 전후 사정을 말 못 했네. 당신을 고용해달라고 부탁한 게 바로 정연수씨입니다. 당신이 없으면 죽어도 내 제안을 못 받아들이겠다네?”
불안정한 화진의 감정을 보면서도 연수는 태연했다. 평온하기까지 한 모습이었다. 여전히 시선은 화진에게 고정한 연수가 등을 기댄다. 그런 연수를 묘한 표정으로 쳐다보던 세준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연수야. 너 정말 공연 담당자 할 거니? 도세준 꾀에 넘어가지 마.”
“누가 꾀를 부린다고. 나처럼 정직한 사람도 찾기 어려워요.”
“너 정말 왜 이래. 연수야.”
애틋하기도, 절절하기도 한 화진의 목소리에 장난기 섞인 세준의 웃음도 멈춘다. 이제야 겨우 연수와 눈을 맞춘 화진은 간절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걸 모를 리 없는 연수 역시 그녀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감정이 상한 세준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앞으로 우리 셋, 잘해봅시다. 나는 화평 공연장을 무사히 이끌어나가고 싶으니까.”
형식적인 말을 내뱉은 세준이 두 손을 각각 화진과 연수에게 내민다. 이 상황에 악수를 청하는 행동이라니. 불편한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는 화진을 여전히 뚫어지라 보던 연수가 천천히 손을 든다. 악수에 응하는 줄 안 세준이 만족스럽다는 듯 웃는데, 연수의 손은 세준을 지나 화진에게 내밀어진다.
“잘 부탁해. 화진아.”
저조한 듯 평범하고, 묵직한 듯 덤덤한 연수의 목소리가 화진의 가슴을 쿡 찌른다. 언젠가, 그의 입에서 나오는 자신의 이름을 사랑했던 화진은 진심 없는 연수의 목소리에 대답하지 않는다. 그저 그가 내민 손을 묵묵히 바라본다.
“잡아줘. 내 손”
연수는 그녀의 더 가까이로 손을 내민다. 도무지 연수의 의중을 아는 이는 없었다. 심기가 불편한 세준도, 연수의 손을 잡을 자신이 없는 화진도 그저 숨 막히는 적막만 지킬 뿐이었다.
“내가 어떻게 네 손을 잡겠어.”
“두려워?”
돌아온 연수의 질문은 뜻밖이었다. 머리를 맞은 듯 멍하니 바라만 보던 화진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두려워”
“난 널 두렵게 만드는 존재야?”
“내가 너의 삶을 망쳤으니까”
진심을 그대로 내보인 화진도 담담하게 말을 잇는다. 힘없이 떨어지는 연수의 손은, 화진이 지키지 못했던 오래전의 사랑이었고 죄책감이었다.
-과거, 6년 전
새하얀 미니 드레스에 배색 된 녹색의 꽃문양이 화진의 하얀 피부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같은 색상인 녹색의 사파이어가 걸린 깔끔하고 매끈한 목덜미를 지나, 그 위에 웨이브로 말린 반 묶음 된 붉은 머리카락이 보인다.
여민은 보석함에서 진주 귀걸이를 가져와 화진에게 건넨다. 여민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화진이 귀걸이를 귀에 건다. 전신거울 속으로 보이는 그녀의 모습은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침울한 표정만큼은 숨길 수가 없었다.
“화진아 너무 예쁘다.”
“이모. 미안해”
“미안하다니? 화진아, 여전히 마음 정리가 안 된 거니?”
화진을 돌려세워 손을 꼭 잡는 여민. 하지만 냉기만이 흐르는 화진의 손은 지금의 심정을 대변하는 것만 같았다. 그녀의 눈망울은 담담하지만, 결심이 서 있었다.
“나 이 약혼 깰 거야”
“뭐? 화진아!”
“연수랑 떠날 거야”
놀란 여민이 화진의 손을 놓고는 급하게 방문을 닫는다. 부랴부랴 창문까지 닫아 외부로부터 화진의 목소리를 막아내는 여민의 손길은 다급하게 떨려왔다.
“너 그게 무슨 말이야? 연수랑 헤어졌잖아”
“연수 호주로 안 갔어. 나 기다리고 있어”
“화진아. 회장님이 아시는 날엔…”
“그래서 이모한테 너무 미안해. 아빠가 괜히 이모한테 해코지할까 겁나. 근데 나 가야겠어. 보내줘 응?”
“화진아….”
며칠을 울며불며 밤을 지새던 화진은 어느 날, 연수와의 이별을 약속했다며 세준과의 약혼을 받아들였다.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약혼 과정에 모두가 의문을 품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문찬의 강압을 화진이 이길 수는 없다고 여긴 것이다.
화진이 숨겨둔 마지막 방법은 결국 도망이었다. 그 위험한 선택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너무나도 잘 아는 여민은 지금 잡은 화진의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안 돼. 화진아 절대 안 돼! 너도 연수도 다칠 거야. 왜 그걸 몰라!”
“들키면 죽을 수도 있다는 거 알아. 아빠는 그렇게나 모질고 독한 사람이라는 것도 알아. 근데 이모…그냥 이대로 살다간 내가 더 다칠 것 같아. 내 마음이 연수를 못 놓겠어.”
“둘에게 좋은 선택이 아니야. 이번만 이모 말 들어줄 순 없겠니? 연수가 없으면 힘들겠지만, 살아질 거야. 다 잊혀질 거야.”
“살아는 가겠지. 근데 그렇게 살다가도 문득, 도망치지 않은 이 순간으로 돌아오겠지. 그렇게 맨날 과거를 후회만 하면서 가장 소중한 사람을 또 잃고 싶진 않아.”
“네가 가면 회장님은 어쩌고? 유일한 자식이라곤 너뿐이잖아”
“엄마가 죽은 후부터 나한테 여긴 지옥이었어. 나는 엄마처럼 죽고 싶지 않아”
화진의 손을 잡고 있던 여민의 손의 힘이 조금씩 풀어진다. 도무지 여민이 말릴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연수는 어디 있니?”
“만나러 갈 거야. 연수가 있는 곳으로.”
“화진아. 대체 어디로 떠날 생각인 거야?”
“아빠가 못 찾는 유일한 곳”
주먹을 꼭 쥔 화진은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본다. 사파이어의 무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의 마음의 무게를 지니게 된 화진. 이내 목에 걸려 있던 목걸이를 가차 없이 잡아 당긴다.
- 다시 현재
식은땀을 흘리며 부엌으로 들어온 화진이 힘없는 손으로 물을 꺼내 마신다. 얼굴이 창백하고 입술이 마른 화진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대충 의자를 끌어다 앉은 화진이 물을 두 잔 들이켜고는 겨우 숨을 고른다. 멍하니 생각에 잠긴 화진은 연수와의 불안했던 만남을 다시 떠올린다. 곤돌라가 멈추자마자 도망치듯 뛰어나온 화진은 곧바로 집으로 직행했다. 그렇게 죽은 듯 잠에 빠졌던 화진은 이제야 일어나 핸드폰을 확인한다. 세준의 부재중이 세 통, 여민의 부재중이 다섯 통이었다.
터벅터벅 거실로 걸어 나온 화진은 2층 계단 쪽에 떨어진 노란 장미꽃잎 두 개를 발견한다. 주울 힘도 없었는지 그냥 지나친 화진이 세차게 울리는 진동에 핸드폰을 꺼낸다.
“나 일어났어. 이모”
[괜찮아? 이모가 안 가봐도 돼?]
“괜찮아요. 걱정시켜서 미안.”
[내일 아침에 병원 좀 가보자]
“그 정도 아니야.”
방으로 향하던 화진의 발걸음이 거실 테이블에 놓인 빨간색 큰 상자를 발견하곤 멈춘다. 손으로 벽을 짚으며 겨우 이동한 화진이 반질반질한 상자의 겉면을 쓸어본다.
“집에 뭐가 있네. 주인분 건가?”
[집에?]
좀 더 자세히 살펴보던 화진은 상자 겉면 하단에 작은 글씨로 적힌 자신의 이름을 발견한다. 놀란 화진이 상자를 천천히 열어본다.
“이모. 이거 나한테 왔는데?”
[그게 무슨 말이야? 화진이 너한테?]
공들여 쌓인 포장을 풀어본 화진이 놀라 소파에 주저앉는다. 떨리는 화진의 손이 상자 뚜껑을 꽉 쥔다.
[화진아! 왜 그래?!]
“이거…이게 어떻게….”
얇게 올려진 마지막 포장지 한 겹을 떨리는 손으로 벗겨낸 화진은 익숙한 드레스와 마주한다. 새하얀 곳에 물감을 얹듯 녹색의 꽃문양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드레스였다. 화진은 오래전 기억을 더듬는다. 세준과의 약혼식 날, 모든 걸 버리고 연수에게로 향했던 날을.
분명 그때 입었던 드레스와 같은 것이었다. 그 옆 작은 상자 속엔 화진이 부숴버렸던 녹색 사파이어 목걸이도 함께 있었다.
“도세준 짓이야!”
벌떡 일어난 화진은 어지러움에 다시 소파로 넘어진다. 여민과의 전화를 급하게 끊고 다른 곳으로 걸기 시작하는 화진,
늘 화진의 핸드폰을 울려댔던 수신자는 오늘따라 전화를 받지 않았다. 손톱을 물어뜯던 화진이 사파이어 목걸이와 함께 들어있는 작은 카드를 발견한다. ‘파티 초대장’이라 적힌 빨간색의 카드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 안엔 ‘유화진 디자이너’라는 이름도 함께 적혀있었다.
“여보세요? 도세준!”
세 번의 전화 끝에 받은 세준에게 다짜고짜 소리친 화진이 카드를 자세히 살펴보니, 화평 공연장 오픈 기념 파티였다.
[반응이 빠르네]
“너 이거 뭐야? 너 이걸 어떻게…”
[이번엔 도망치지 말고 곧장 와야 할 길로 와]
“도세준 너…”
[어차피 정연수도 올 거야. 손이라도 붙잡고 와보든가]
“내가 여기 산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알고 여기로 보낸 거야?”
[내가 모르는 건 네 전화 수신음이 언제쯤 끊길까, 그거뿐이야]
“말장난하지 마. 나한테 사람 붙였어?”
[아니면 내 손 잡고 갈래? 그럼 파티날 데리러 가고]
분노에 벌떡 일어선 화진은 중심을 못 잡고 바닥으로 추락한다. 핸드폰을 놓친 화진이 손을 뻗어보지만, 말을 듣지 않는 몸은 자꾸만 화진의 정신을 앗아가고 있었다.
이런 순간, 화진은 늘 눈을 감기가 두렵다. 불현듯 찾아올 꿈속의 연수는 또 피투성이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