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정한 꿈속에 놓인 화진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있었다. 인상을 찡그리기도, 공허하게 넋을 놓기도 했다. 그렇게 감겨있는 눈 속에 담겼을 화진의 진득한 슬픔은 세준에게도 느껴졌다. 한동안 화진을 멍하니 바라만 보던 세준은 물이 담긴 바구니와 수건을 들고 부엌으로 향한다. 끓고 있는 물의 온도를 맞추던 세준의 손이 맥없이 수건을 놓친다.
갑작스레 끊긴 전화에 놀라 달려온 세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쓰러진 화진을 발견하고는 자신의 침실로 옮겼다. 벌써 네 시간째 일어날 생각을 안 하는 화진의 몸은 식은땀이 식고 오히려 냉기가 돌고 있었다. 복잡한 마음에 덩달아 네 시간째 침묵을 지키는 세준의 안색도 좋진 않았다.
"도세준입니다."
울리는 진동에 어렵사리 전화를 받은 세준이 겨우 한 마디를 뱉는다. 상대는 전부터 문찬과 화진의 주치의였던 강박사였다. 부재중이었던 자신에게 다급한 문자를 보낸 세준의 연락을 받은 강박사는 대답 대신 한숨부터 쉰다.
[화진이는 좀 어떤가요?]
"여전해요. 계속 안 일어나고."
[간호사가 안내한 데로 일단…]
"다 했습니다. 전부요. 정말 병원으로 안 데려가도 됩니까?"
[만성 저혈압이라 간혹 그럽니다. 크게 걱정하실 일은 아니에요]
"깨워보는 건 안 됩니까?"
[자세한 건 제가 방문해봐야 알겠지만, 일단은 그냥 두시는 게 좋습니다.]
"뭐 이렇게 태연해요? 저혈압이 아무리 심해도 사람이 갑자기 쓰러져서 네 시간을 못 일어나고 헤매는데!"
[화진이 주치의만 십 년입니다. 워낙 스트레스가 많은 아이라 그러니 걱정 안 하셔도 돼요]
"그러니까 그 원인 제공을 내가 한 거네"
[두 시간 안에 도착합니다. 상태 잘 지켜보세요]
맥없이 전화를 내려놓은 세준이 다시 침실로 향한다. 다행히 선선한 바람이 창밖에서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바람으로라도 화진의 심기를 달래주고 싶었는지, 세준이 창을 더욱 활짝 열기 위해 커튼을 친다. 평소에 창문 쪽은 건드리지도 않았던 세준은 커튼 안에 숨겨진 드림캐처를 발견한다. 플라워 가랜드를 치워버렸던 세준의 창문 틈엔 이제 바람에 날리는 달 모양의 보석 드림캐처가 고운 소리를 내며 흔들린다.
"취향 하고는"
멍하니 서서 드림캐처를 바라보던 세준의 시선이 화진에게 향한다. 큰 달 문양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이 화진의 나쁜 꿈을 잡아주기라도 한 건지, 화진의 표정은 평온해 보였다. 창문에 기댄 세준은 그렇게 한참 동안 화진을 바라봤다. 크고 텅 빈 이 집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손으로 바꿔 낸 이 방이 세준에게 허락된 단 하나였다. 그곳에 들어온 화진은 이 방의 주인이 누군지도 모른 체 단잠을 이루고 있었다.
드림캐처를 창문 정 가운데로 옮긴 세준이 화진 쪽으로 걸어가는데, 다급하게 열리는 현관 비밀번호 소리에 놀란 세준이 조심스럽게 방문을 닫고 거실로 나온다. 두 손에 장을 본 짐을 들고 있던 여민이 세준을 발견함과 동시에 사색이 되어 짐을 떨어트린다. 복숭아가 굴러오는 걸 빤히 보고 있던 세준이 냉소적인 표정으로 여민을 바라본다.
"뭡니까?"
"이사님께서 어떻게…"
"그야 여기가 내 집이니까요."
짐을 미처 주울 정신도 없었는지 멍하니 세준을 바라보던 여민이 뒤늦게 집안을 둘러본다. 화진의 행방을 찾는 듯했다. 복숭아 한 개를 집어 든 세준이 그녀에게 더 가까이 다가간다.
"뭐냐고 물었을 텐데요."
"화진이가 쓰러졌다고 해서요. 혹시 화진이는 어디 있나요?"
다급해 보이는 여민의 모습에 묘한 웃음을 짓던 세준이 복숭아를 비닐봉지 안에 집어넣는다.
"김비서님, 순서가 틀렸네요."
"네? 그게 무슨…"
"여기가 내 집인 거에 놀라질 않으시네."
당황한 여민이 뒤늦게 바닥에 굴러다니는 재료들을 담기 시작한다. 수상한 그녀의 행동을 팔짱 낀 채 바라보던 세준이 함께 재료들을 줍는다. 그러자 여민이 벌떡 일어난다.
"그래서 화진이는 어디 있죠?"
"내가 어떻게 했을까 봐 걱정돼요?"
"이보세요, 도세준 이사님!"
"근데 김비서님이 이상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네. 화진이가 쓰러진 건 내가 방금 통화한 강박사님과 나 둘뿐이 모르는데, 어떻게 아셨을까?"
"그건…"
"내 주변에 쥐새끼가 숨어 있나?"
"강박사님께서 제가 화진이 보호자인 걸 아니까, 그래서 연락을…"
"이봐요. 김여민씨. 이 어설픈 연기에 유화진은 속은 겁니까?"
주운 재료를 바닥으로 다시 툭 던진 세준의 표정은 차가웠다.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친 여민이 다시 집을 둘러본다. 그러다 살짝 열린 화진의 방문 쪽을 쳐다본다.
"거기 없어요."
"화진이 어떻게 하신 거예요?"
"어떻게는 당신이 했지. 이 집에 들여보냈잖아. 내가 이 집 새로 매매한 주인이라는 거 알면서도."
"무슨 말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네요. 제가 그럴 이유가 없잖아요."
"그거야 차차 알아봐야겠지."
주먹을 꼭 쥔 여민이 세준을 노려보다 작은 방으로 향한다. 세준은 그런 여민의 모습을 여유롭게 웃으며 지켜보는 중이었다. 작은 방에 화진이 없는 것을 발견한 여민의 얼굴은 더욱 사색이 되어가는 중이었다.
"어딨어요. 화진이!"
"난 당신과 유화진을 만나게 해 줄 생각이 없는데?"
"무례하시네요. 저는 화진이의 보호자예요."
"누가 보호자야. 내가 보기엔 지금 당신이 유화진한테 제일 위험해. 과연 이 집에 자신을 넣은 장본인이 당신이라는 사실을 알아도, 보호자가 될 수 있을까?"
"도세준씨의 망상을 화진이가 믿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망상인지 아닌지는 금방 확인해보면 되는데, 내기할래요?"
분에 못 이겨 주먹을 더욱 꽉 쥔 여민은 결국 포기하고 집을 나선다. 여민이 두고 간 비닐봉지를 쳐다보는 세준의 표정도 불안정했다. 재료들을 부엌으로 옮긴 세준이 정리하다 말고 복숭아 하나를 집는다.
"나랑 취향도 참 다르네, 유화진. 난 복숭아 같은 건 먹어본 적도 없는데."
무슨 혼란스러움이 세준의 머릿속을 괴롭히는 건지, 혼잣말을 뱉던 세준이 조용히 복숭아를 바구니에 담아 식탁 위에 올려놓는다. 다시 화진이 잠든 침실로 향한 세준은 소리 없이 조용히 문을 연다.
침실의 공기는 여전히 평온하고 따뜻했다. 그저 화진이 그의 침대에서 긴 잠에 들었다는 이유만으로도, 알 수 없는 포근함이 세준의 침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
한밤중에도 암막 커튼으로 둘러싸인 오피스텔 내부는 어두컴컴했다. 은은한 향이 피어오르는 향초의 불빛만이 작게 침실 쪽을 비췄다. 하얀색 이불을 덮고 누워있던 연수가 상체만 일으켜 등을 기대고 앉는다. 연신 잠을 설쳤는지 수척한 얼굴이었다. 탁상에 미지근해진 물을 한 모금 마신 연수가 다시 누워 잠을 정하지만, 머릿속을 떠도는 화진의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한다.
‘내가 너의 삶을 망쳤으니까.’
화진이 나지막하게 뱉었던 진심을 되새기던 연수가 감각이 둔한 왼손을 바라본다. 아직도 왼손에 힘을 주면 수전증 증상이 심했다. 떨리는 손은 심장과 함께 요동칠 때가 있었고, 그때마다 연수는 끔찍했던 과거로 돌아가야 했다.
가엾은 화진을 안아줄 수도, 바라볼 수도 없는 이유가 연수에겐 분명했지만, 무턱대고 마음을 후벼 파는 화진의 눈빛은 다 잡은 연수를 쉴새 없이 흔들리게 했다.
도어락 소리에 부랴부랴 몸을 일으킨 연수가 암막 커튼을 걷는다. 서울 한복판이 내려다보이는 오피스텔 내부에 은은한 밤의 불빛이 새어들어온다. 부스스한 연수의 모습에 웃은 라이가 나머지 커튼을 전부 치고 불을 켠다.
“또 어둠 속에 있었구나?”
“오늘은 안 와도 된다니까.”
“뭐 먹지도 않고 하루 종일 이불 속에만 있을 거 아는데 어떻게 그래”
“먹었어. 아침에”
라이가 사 온 과일 중 복숭아 하나를 꺼낸 연수가 물에 깨끗이 씻는다. 연수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라이가 이윽고 냉장고에 장본 것들을 채워 넣는다.
“오늘 화진씨 만났다며”
넌지시 묻는 라이의 질문에 복숭아를 씻던 연수의 손이 멈춘다. 누군가 굳이 불러내지 않아도 연수의 마음속을 내내 울리는 이름이었다. 복숭아를 말없이 바라보는 연수의 눈빛이 슬프다.
“이것도 그 애가 좋아했던 거야.”
“연수 네가 가장 좋아하는 과일이 복숭아라며”
“그 애가 좋아하는 걸 따라 하다 보니 그렇게 됐네.”
“원랜 뭘 좋아했는데?”
“모르겠어. 이상하게 그게 기억이 안 나”
식탁에 앉은 연수가 복숭아를 깎기 시작한다. 떨리는 연수의 왼손을 물끄러미 보던 라이는 애써 돕지 않고 연수의 옆자리에 앉는다. 서툰 듯 익숙한 연수의 솜씨는 오랜 연습으로 가능한 것이었다. 그 과정 동안 자신의 떨리는 손을 몇 번이고 원망했을 연수였다.
“가장 끔찍한 기억은 이렇게나 선명한데….”
연수는 곱게 깎은 복숭아를 라이의 앞으로 건넨다. 웃으며 받아든 라이가 연수의 손을 잡고 창 쪽으로 향한다.
서울 한복판 저녁의 불빛들을 이렇게 높은 층에서 바라볼 때면 쓸쓸한 감정이 올라왔다. 세준이 계약 조건으로 마음대로 넣어버린 이 오피스텔은 14평의 모던하고 깔끔한 내부를 자랑했다. 무엇보다 큰 창으로 서울 시내가 보이는 전망은 아침엔 햇살을, 밤엔 달빛을 불러왔다.
연수의 복잡한 심기를 파악한 라이가 창 앞에 연수를 세운다.
“어릴 때 기억이 잘 안난다고 했지?”
“화평에 들어오기 이전의 삶이 더 길었는데, 이상하게 전부 흐릿해.”
“그래서 더 그때의 기억이 괴로운 걸 수도 있어. 예전 기억들이 뚜렷해지면 좋을 텐데”
“좋았을 거란 보장은 없지. 난 늘 혼자였으니까.”
“그래서 앞으로는 정말 좋은 기억만 심어주고 싶었는데”
라이는 연수의 왼손을 바라만 보다가 이내 오른손을 꼭 잡는다. 다친 후부터 왼손을 잡는 것에 민감해하는 연수였기에 라이는 늘 조심히 그를 살폈다. 정작 연수는 루드베키아 밭에서 느꼈던 화진의 온기와 감촉을 기억했다. 아무도 함부로 잡으려 하지 않았던 연수의 손은 늘 비어있었다. 굳이 날을 세웠던 건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였다. 자신의 떨리는 손을 바라볼 누군가의 시선들이 두려워 일부로 먼저 날을 세웠다.
돌이켜보니 연수의 삶엔 숱한 외로움이 함께였다. 유일하게 풍족한 행복을 누렸던 건 화진과의 순간들이었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순간들이 평생의 절망을 불러오기도 했다. 아무도 만지려 하지 않았던 자신의 손을 단숨에 잡았던 화진은 결국 모든 일의 원인과 결과였다.
“연수야. 무슨 생각해?”
“잊지 마. 내가 흔들리면 꼭 잡아줘야 돼.”
라이는 애써 불안한 감정을 숨기고 연수의 오른손을 꼭 잡는다. 평소 같았으면 함께 꼭 잡아줬을 연수였겠지만, 그의 심기는 복잡하고도 미묘해 보였다. 어느 먼 곳에 정신을 둔 사람 같았다.
“내가 이렇게 잡을게”
그를 돌볼 목적으로 붙여졌던 라이는 이제 환자도, 동생도 아닌 남자로 연수를 보고 있었다. 이젠 누군가가 손가락질할 나이 차이도, 도세준의 감시도 두렵지 않았다. 다만, 연수의 마음 온 구석을 차지한 단 한 명의 존재마저 이길 자신은 부족할뿐.
화진은 생각보다 깊게 연수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었고, 나가긴커녕 더 깊은 곳으로 헤집고 들어가고 있었다.
“파티에 같이 가자. 라이”
“내가 가서 뭐하겠어. 관계자도 아니잖아”
“상관없어. 내 사람으로 데려가는 거니까”
“그래. 그게 연수 마음이 편한 방법이라면 그러자.”
어떤 의미로 자신을 동행시키려는 건지, 라이는 알면서도 모른척하기로 했다. 그저 연수의 오른손밖에 잡을 수 없는 사람임에도 만족하기로 한 것이다. 지금 가장 연수에게 필요한 건 누가 뭐래도 자신이라고 자부하니까. 연수에게 있어서 마음의 평온이 되고 싶었던 라이는 미국에서의 소중했던 기억들을 떠올려본다.
같은 공간에 서서 같은 풍경을 바라보면서도, 둘은 다른 순간을 기억했다. 그건 기억이기도, 원망이기도 했다. 연수는 떨리는 왼손에 잔뜩 힘을 준다. 더 세차게 떨려옴에도, 더욱 강하게 힘을 준다. 순식간에 자신의 일상을 망치고 마는 화진을 잊기 위해, 떨치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