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오세요”
쇠문이 열리는 기분 나쁜 소리에 어깨를 움츠린 여민이 모자를 푹 눌러쓴 교도관을 따라 처음 보는 방 안으로 들어간다. 어둠이 짙게 깔린 밖과는 다르게 입구부터 환하게 밝은 내부의 모습에 저절로 눈을 찡그린 여민, 곧이어 익숙한 얼굴이 시야에 들어오는 것을 확인하고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푹 숙인다.
모두가 잠들어야 하는 시각, 적어도 이름 대신 죄수 번호로 불리는 자들이라면 더욱이 눈을 감아야만 하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정 가운데 떡하니 앉아 여유로운 눈빛으로 여민을 보고 있는 문찬에게만은 상황이 달랐다.
늦은 시간인 것도 모자라, 접견실이 아닌 교도관의 사무실이라니. 언뜻 봐도 이곳에서 가진 문찬의 위치를 쉽게 가늠할 수 있었다.
“왔나, 김비서”
익숙해질 법도 했지만, 여민의 어깨는 늘 문찬의 앞에서만 무방비했다. 어쩌면 여민이 아닌 그 누구라도, 그의 살기 어린 눈빛과 저조하고도 탁한 음성 앞에 자동으로 숨을 죽일 것이다.
평소와는 다르게 늦은 시간에 급하게 여민을 호출한 것엔 분명 이유가 있었다. 화진을 속이고 이곳으로 오는 내내 그의 의중을 파악하고자 했던 여민은 불안함을 내색하지 않기 위해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문찬의 앞에 앉는다.
“최근 상황에 대한 보고는 들었네”
“화진이를 옆에서 케어하느라 연락이 늦어졌습니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그건 핑계지”
“……네?”
집중하듯 상체를 더욱 숙여 여민 쪽으로 가까이 한 문찬이 특유의 낮고 묵직한 비소를 흘린다. 눈 둘 곳을 찾지 못해 바닥으로 떨군 여민의 시야에 상처투성이인 문찬의 손이 보인다.
“도세준이 이쪽으로 사람을 보냈었네”
“사람이라면…?”
“김비서와 내가 연락을 주고받는다는 걸 알아챈 모양이야. 최근에 들킬만한 일이 있었나?”
복잡하게 머리를 굴려보던 여민의 뇌리를 스치는 건, 큰 집에서 세준과 마주했던 날이었다. 눈치 빠른 세준이 그 잠깐의 광경만으로 여민의 행동을 의심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민의 인상이 어두워지자, 문찬이 자세를 고쳐 앉고는 여민의 얼굴을 빤히 응시한다.
“약삭빠른 놈이야.”
“더 주의하겠습니다.”
“지금이야 모든 것이 제 손에 있으니 오만하겠지. 바로 그 오만함에 스스로 무너지게 될 거다”
“화진이는 계속 큰집에 둬도 될까요? 도세준이 알아챘다면 화진이도 알게 되는 건 시간문제일 텐데요.”
“어떻게든 화진이를 옆에 두려고 할 테니, 쉽게 알아차리게 두진 않을 거다”
“고양이와 생선을 함께 두는 격입니다, 회장님”
또 다시 낮은 비소를 흘린 문찬이 여유롭게 허공을 응시하며 생각에 빠진다. 고작 셋방살이 정도도 벅찬 위치였던 세준이 화평과 큰집을 장악할 동안, 문찬은 이곳에서 조용히 몸을 숙이고 훗날을 기약했다.
여론의 힘이 아무리 세다 한들, 세준 하나를 어쩌지 못할 문찬은 아니었다. 불길한 그의 여유로움에 지레 겁을 먹은 여민이 곁눈질로 문찬의 눈치를 살피자, 문찬의 무거운 음성이 공기 중의 적막을 깨고 튀어나온다.
“그 정도 비유는 약하네. 호랑이와 고깃덩어리라면 모를까”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흠칫한 여민이 조심스럽게 문찬을 본다. 그런 여민의 상태를 알아챘는지, 문찬의 입 밖으로 호탕한 웃음이 튀어 나온다.
“물론 화진이를 말한 거네. 우리 화진이가 호랑이지”
“…네?”
“둘을 최대한 가까이 둬. 그럴수록 화진이에게 유리하니까”
눈짓으로 대화를 끝마친 문찬이 몸을 일으키자, 여민의 굵은 침이 간신히 목구멍으로 넘어간다.
화진을 속인 것부터 시작해서, 세준의 일과 문찬의 계획까지. 머릿속이 복잡하다 못해 터질 지경인 여민이었다. 그에 보탤 요량으로, 밖을 나서려던 문찬이 다시 여민을 향해 돌아선다.
“참 그 애가 돌아왔다지? 연수 말이야. 그 얘기는 김비서한테 직접 듣고 싶은데”
차마 문찬의 입에서 들려오지 말았어야 할 이름이었다. 피하지 못한 창 앞에 여실히 꿇어앉은 낙오자처럼 힘없이 고개를 푹 숙인 여민이 입술을 앙다문다.
애초에 화진을 지키기 위해 시작한 일이었지만, 여민은 확실한 갈림길에 놓이고 만다. 누구에게 솔직해야만 화진을, 그리고 자신을 지킬 수 있는가에 대한.
**
“소개하겠습니다. 공연장 전체를 담당해주실 정연수 매니저와 벽화 담당 유화진 화가입니다.”
사람들의 함성이 공연장 전체에 울려 퍼졌다. 과정이 어찌 됐든, 성공이란 결과를 도출한 셈이었다.
도세준을 예의주시했던 사람들은 그가 맡은 첫 번째 계획이자 목표인 공연장 완공에 큰 관심을 쏟았다. 그건 화평의 임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유문찬이란 커다란 벽을 무너트린 일등공신이었을지언정, 화평인들에게 세준은 이방인이나 다름없었다. 화평이란 철저한 계급사회 안에서 세준에게 이사 네이밍이 쉽게 붙으리란 어려운 일이었다.
공연장이 어떤 모습으로 완성되느냐에 따라, 그가 정말 화평을 무너트리고자 했던 스파이었는지, 일등공신이었는지가 판가름 나는 상황이었다. 화진을 앞세워 성대한 파티를 열었던 것 또한 세준이 세운 계획의 일부였고, 제대로 망치고자 했던 화진의 계획과는 달리 정 의외의 인물이 파티의 막을 성공리에 끌고 간 것이다.
문제는 마무리였다. 문찬의 힘으로 기사 한 줄 나가지 않았던 화진과 연수의 사이를 이곳에 모인 사람들이 알 턱은 없었지만, 대충 봐도 둘의 사이가 썩 매끄러워 보이진 않았을 테니까.
하는 수없이 모두가 모인 곳에서 연수와 화진을 공연 담당자와 벽화 담당 화가로 소개하고만 세준은 한차례 쏟아지는 기자들의 질문을 해결해야만 했다.
그 시각, 만취한 와중에도 사람들 앞에서 고개 숙여 인사하는 정신력을 보였던 화진은 차에 도착하고부터 지금까지 죽은 듯이 뻗어있는 중이었다. 세준과 함께 기자들에게 붙잡힌 연수로인해 졸지에 갈 곳을 잃은 라이가 혼자 비틀대며 걷는 화진을 발견하지만 않았더라면, 차가 아닌 스키장 한복판에 뻗어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탓에 화진과 단둘이 차 안에 남게 된 라이는 바깥의 상황을 연신 주시하면서도, 혹여나 화진이 잠에서 깰까 곁눈질로 살피는 중이다. 상황을 키워놓은 장본인이 이렇게나 곤히 자는 모양이라니. 하지만 차라리 라이에겐 그편이 나았다. 그저 연수에게만 몇 번 듣고 어림짐작해야만 했던 존재가 화진이었으니, 깨어있었다면 숨 막히는 불편함이 작은 차 안을 메웠을 것이다.
소문 무성한 것과는 다르게 자는 모습은 한없이 평온하고 어렸다. 그런 화진을 보는 라이의 마음도 어쩐지 착잡해진다.
“물……”
혼자 초조한 적막을 견디고 있을 즘, 갑작스레 들려온 화진의 읊조림에 당황한 라이가 창문에서 시선을 떼 조심스럽게 화진을 응시한다.
잠꼬대인가 싶어 그저 넘기려던 찰나, 화진의 눈이 번쩍 떠진다. 제대로 놀란 라이가 어깨를 흠칫하며 ‘헥’소리를 내고 뒤로 물러서자, 게슴츠레 뜬 눈으로 대충 차 안을 둘러보던 화진의 시선이 라이에게 꽂힌다.
“물이요….”
“저기 화진씨?”
“물 좀요”
물만 세 번 외치다 고꾸라지듯 고개를 처박고 다시 기절해버린 화진.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라이가 정신 차리듯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다급하게 차 문을 열고 나온다.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라이의 머릿속을 스친 건 파티장 한켠에 놓였던 정수기였다. 정신없는 기자들의 틈을 이리저리 피해 겨우 파티장으로 다시 들어온 라이가 정수기 앞에 종이컵을 들이대려던 순간, 누군가의 손이 덥석 라이의 어깨를 잡는다.
“천라이씨”
“깜짝이야. 도 이사님…?”
“화진이 봤어요?”
“아 네! 차 안에 있습니다”
“차요?”
“제가 차를 몰고 왔거든요. 비틀대면서 걷길래 일단 그 안에……”
“설마 저 차에요?”
라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차갑고도 낮게 깔린 세준의 목소리로 되물음이 뱉어진다. 성심성의까진 아니더라도, 나름의 호의를 베푼 것인데 왜이리 또 성이 난 건가 싶어 그가 가리킨 쪽을 돌아보던 라이의 시야로 차가 한 대 쑥 지나간다.
그러니까 저 차는 분명 라이가 가져온 차였다. 근데 저게 왜…?
“저 안에 있냐고 묻잖아!”
“네, 네? 네 맞아요. 분명 저 안에……”
“정연수씨 음주 상태 아니에요? 당장 찾아요!”
놀람과 당혹스러움에 정신없이 핸드폰을 꺼내려던 라이, 곧 핸드폰 역시 차 안에 있었다는 걸 깨닫고는 좌절한다.
“무슨 일입니까?”
답답한 라이의 행동에 한숨을 쉰 세준이 거칠게 넥타이를 풀고는 핸드폰을 꺼내려던 찰나, 등 뒤로 익숙한 음성이 들려온다. 세준 뒤의 존재를 먼저 확인한 라이의 얼굴이 사색이 된다.
천천히 뒤를 돈 세준의 앞에 서있는 건 연수였다.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취기가 오르기도 전에 가셨던 연수는 식은땀을 흘리며 겨우 그들을 상대하고 벗어난 상태였다.
연수와 화진이 단둘이 있는 걸 누구보다 싫어할 세준이었지만, 지금이라면 상황이 달랐다. 영문모를 얼굴로 둘을 번갈아 응시하는 연수가 이곳에 서있다는 건, 저 차 안에 화진을 태우고 달리는 인물이 제3의 인물이란 뜻이다.
“연수야…!”
“왜 그래?”
“당신 왜 여깄어”
“무슨 소리예요. 아까까지 같이 기자들한테……”
“그럼 저 차 안에 있는 건 누구냐고!”
겨우 감췄던 세준의 성미가 참지 못하고 폭발하자, 근처에 서있던 몇 사람의 눈에 띄고 만다. 성공리에 마쳐가려던 파티의 마지막 순간이었다. 그걸 까맣게 잊을 정도로, 세준의 눈빛은 이성을 잃고 있었다.
“알아듣게 얘기해요”
“연수야. 누가 방금 내 차를 몰고 갔어. 근데 그 안에……”
겨우 감정을 가다듬고 있었던 건 연수도 마찬가지였다. 비즈니스를 하기로 작정한 이상, 적어도 이곳에서 연수의 악의가 있는 그대로 드러날 필요는 없었다. 좋고 싫고를 떠나 이젠 도세준과 비즈니스 파트너가 되어버렸으니.
하지만 라이의 입에서 채 뱉어지지도 않은 말은 연수의 정돈된 감정을 서서히 흔들고 있었다.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연수의 눈빛이 겨우 라이에게 닿음과 동시에, 다급하게 떨리는 라이의 입술이 열린다.
“화진씨가 타고 있어”
“……뭐?”
“미안해. 내가 물 좀 떠다 주려고 잠깐 나온 건데, 그러니까 시동을…”
말을 잇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는 라이에게서 곧 울음이라도 쏟아질 지경이었다. 아직 상황파악이 되지 않아 넋을 놓고 있는 연수를 지나, 다급하게 명호 쪽으로 뛰어간 세준이 상황을 전하고 급하게 핸드폰을 든다.
넋이 나가 있는 연수의 팔을 조심스럽게 잡은 라이가 미안함에 고개를 숙인다.
“나는 화진씨가 비틀대길래, 어디에라도 앉혀야 할 것 같아서”
사방에 신경질을 쏟아내는 한이 있어도, 절대 연수의 화가 닿지 않을 곳이라면 딱 한 명 라이었다. 그런 라이에게마저 웃어주지 못할 정도로, 지금 연수의 신경은 온통 어딘가로 향했을지 모를 차 안으로 쏟아진다.
**
“야 한기자! 대박 기삿감이야. 내가 지금 누구랑 있는 줄 알아?”
스키장을 벗어나 고가도로를 달리는 라이의 차 운전대를 잡은 건, 군색 모자를 푹 눌러쓴 이름 모를 남자였다. 고속으로 달리는 탓에 멀미가 나기 시작한 화진의 인상이 점점 일그러지는 것도 모르고, 새로운 기삿거리를 건진 것에 신난 남자가 성의 없이 운전대를 휙 꺾는다.
“유화진이라고! 유문찬 외동딸!”
형편없는 운전 실력에 제대로 토기가 올라온 화진이 간신히 몸을 일으키려던 순간, 소음처럼 들려오는 낯선 이의 목소리를 눈치채고는 실눈을 뜨고 운전석을 주시한다.
누구라도 쉽게 겪을 리 없는 상황이었지만, 어릴 때부터 천지에 적을 뒀던 아빠를 둔 탓에 화진에게만은 그리 낯선 일이 아니었다. 취기가 가시지 않은 와중에도 대충 상황파악이 완료된 화진이 한숨을 푹 쉬며 조심스럽게 몸을 더듬는데, 찾고 있는 핸드폰이 있을 리는 만무했다.
“그래 화평 스키장! 거기 담당 화가로 소개됐다니까? 단독 인터뷰 딸 절호의 기회라고. 알겠냐?”
듣자 듣자 하니 짜증이 확 솟구치는 상황이었다. 보통 같았으면 몸 사려서 차가 멈출 때까지 지켜봤을 화진이지만, 제멋대로 꺾이는 운전대로 인해 취기가 제대로 오른 상태라면 상황이 달랐다. 벌떡 몸을 일으킨 화진은 운전자가 놀랄 새도 없이 온 힘을 다해 모자를 벗기고 머리를 쥐어 뜯는다.
“악, 으악! 이 미친!”
그 탓에 안 그래도 제멋대로였던 운전 실력이 더 형편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화가 잔뜩 오른 화진이 남자의 머리를 쥐 뜯으며 더 큰소리로 소리친다.
“차 세워!”
“으악!!”
화진의 인정사정없는 공격에 맥을 못 춘 남자가 도로 한복판에서 덜컥 운전대를 놔버리고 만다. 화진이 정신을 채 차리기도 전에, 갈피를 잃은 차 헤드가 커다란 기둥을 향해 돌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