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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오렐라 연대기
작가 : 이동글
작품등록일 : 2020.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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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꽃나무의 이름 - 프롤로그 (마지막 편지)
작성일 : 20-08-03     조회 : 309     추천 : 0     분량 : 2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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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이야, 테티스.

  무슨 말을 먼저 시작해야 할까?

 

  테티스···. 테티스···.

 

  너무도 그리운 네 이름을 문득 소리 내서 읽어봤어.

  이렇게 편지를 쓰는 것도, 너의 이름을 소리 내서 발음해 보는 것도 먼 옛날의 일인 것 같아서.

  정말 너무나도 멀고 먼··· 아득한 옛날의 일 같게만 느껴져.

 

  그 사이 넌 숲의 현자가 되었고 그토록 바라던 생명의 뜰 관리인도 됐더라.

  축하해.

  그렇게 갈망하던 일이었는데, 마침내 해냈구나.

  믿을지는 모르겠지만 난 네가 반드시 뜰의 관리인이 될 줄 알고 있었어.

  네가 아니면 또 누가 스승님의 뒤를 이을지 상상이 안 됐으니까.

 

  ···음, 또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너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들이 산더미 같았는데···.

  시간이란 건 참 많은 것을 망각하게 해.

  무언가를 잊었다는 사실조차 잊을 만큼.

 

  어쩌면 당연한 걸까?

 

  200년···.

 

  너에게 마지막 편지를 쓴 이후로 어느새 200년이란 시간이 흘렀으니까.

  너는 나를 기억은 할까?

  테티스, 넌 나처럼 건망증이 심한 아이는 아니었지만 이토록 긴 시간이 흘렀어도 나를 잊지 않고 기억해줄까?

  만약 아직도 날 기억하고 있다면 날 나쁜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아무래도 그렇겠지?

  그날 내가 그렇게 훌쩍 사라져버린 이후, 단 한 번도 소식을 전하지 않았으니까.

 

  그건··· 정말 미안해.

  나름의 사정이 있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사과는 해야겠어.

  넌 나의 사정을 알 리가 없으니까. 넌 내가 아무런 미련도 없이 사라졌고, 너를 까맣게 잊은 채 살고 있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나도 노력은 했어.

  너에게 쓴 편지들이 산더미만큼 쌓여 있는걸?

  정말이야.

  그걸 네가 알아주길 바라는 건 내 욕심이겠지만.

  그 수많은 편지들은 너에게 가지 못하고 여전히 이곳에 남아 있으니까.

 

  다시 한번 미안해, 테티스.

  200년 만에 쓰는 이 편지 역시도 너에게 보낼 수는 없을 것 같아.

  그리고 전하지 못할 편지를 쓰는 것도 이게 마지막이 될 거야.

 

  그런데 왜 일부러 이런 편지를 쓰는 거냐고?

  ··· 사실 나도 이유를 잘 모르겠어.

  그냥 답답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너무 외로웠기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네가 새로운 마법을 익혀서, 내가 쓴 편지를 엿볼 수 있길 바랐기 때문일지도 모르지.

 

  200년···.

 

  짧은 것 같으면서도 긴 시간이야.

 

  우리 종족의 자랑인 기디움이 고작 한 뼘 자라는 시간이면서도, 도미오카가 마침내 현자의 시험을 통과하고 순례자가 된 시간이기도 하지.

  그날은 나도 너무 기뻐서 웃다가 울 정도였다니까.

  네가 내 몫만큼 축하 해줘서 정말 다행이야.

 

  아무튼, 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흐르지만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서 체감되는 시간은 모두가 달라.

 

  나에게 지난 200년은 어땠을 것 같아?

  지난 200년간, 나에겐 하루하루가 10년 같았어.

  그만큼 지루하고 따분했다는 말이 아니야.

  넌 상상도 못할 거야.

  문자 그대로, 난 하루에도 수천, 수만 시간을 살았으니까.

  언젠가 내가 너에게 "스승님은 대체 어떻게 그렇게 바쁘게 살 수 있을까?" 하고 물었던 것 기억나?

  넌 분명 "스승님은 환영 마법을 사용해서 하루가 우리보다 더 긴 시간으로 느껴질 거야."라고 했었지.

 

  나도 정말 그런 줄 알았는데.

  이제는 우리 모두 그 생각이 틀렸다는 걸 알고 있어.

  난 이곳에서 너무도 바쁜 시간을 보냈고, 너 역시 스승님을 닮아 숲에서 아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으니까.

 

  ···가끔은 그런 생뚱맞은 대화를 하면서 보냈던 시절이 너무 그리워.

 

  너도 그럴까?

 

  너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너에게 내 이야기를 더 많이 해주고 싶은데.

  내게 있었던 일들에 관한 이야기는 이 편지에조차 쓸 수가 없어.

 

  사실 아까는 장난으로 이야기했지만, 정말 나를 찾아내고 이 편지를 읽을 수 있는 힘이 너에게 생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게 됐거든.

  넌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콧방귀를 뀌겠지만, 난 그것보다 훨씬 더 말이 되지 않는 상황을 수없이 마주했어.

 

  그리고 깨달았지.

  이 세상에 불가능한 일이란 건 없을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나의 이야기를 해줄 수는 없어.

  미안해.

 

  이곳에서 보고 들은 모든 일은 그저 이곳에 남겨두는 것.

  그게 나의 숙명이고, 나의··· 업보거든.

 

  아, 더는 못 쓰겠다.

  괜히 울적해져서 더 썼다간 왈칵 눈물이 터질지도 몰라.

  우리가 못한 이야기, 그리고 내가 꾹 참고 있는 이야기들은 나중에 직접 만나서 나누자.

 

  모든 일이 끝나면, 그때 우리의 안식처에서.

 

  ···역시 이 말은 꼭 해야겠어.

  정말 큰맘 먹고 적는 거니까··· 만약 네가 정말 이 편지를 읽게 된다면, 부디 흘려듣지 않길 바라.

  정말 중요한, 정말 정말 중요한 이야기니까.

 

  곧 인간들이 이 세상에 태어날 거야.

  그건 순레자들의 입을 통해 너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일 테지.

  명심해.

  인간이 태어난다는 건,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는 걸.

  그들이 이 땅에 나타나기만을 아주 오랫동안 기다려 온 사악한 존재가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할 거야.

 

  내가 말해줄 수 있는 건 이게 전부야.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무엇인지, 또 사악한 존재가 누구인지는 알려줄 수 없어.

  그저 너의 기억 속에 여전히 내가, 그리고 그날의 일들이 남아 있길 바랄 뿐이야.

  그날.

  우리가 헤어졌던 그날···.

  우리가 함께한 날 중, 가장 많은 일이 한 번에 일어난 바로 그날···.

  나의 바람대로 네가 여전히 그날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면 최대한 선명하게 되짚어봐야 해.

  그 기억 속 어딘가에 분명히 그 존재가 있을 테니까.

 

  명심해, 테티스.

 

  그날의 기억을 단 한 순간도 빼먹지 말고 떠올려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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