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높이 솟아오른 건물들도, 자기 갈 길 바쁜 사람들도, 시끄러운 음악소리도 없는 이 곳.
주위는 여름 햇살에 물든 푸른 산과 나무들로 가득했고, 들리는 것은 지나가는 새가 우는 소리 뿐 이었다.
사람이라고는 오직 큰 나무의 그늘 밑에 서 있는 남자 뿐 이었다. 초점 없는 동공으로 어딘가를 바라보던 남자는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자 화들짝 놀라 그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후훗.”
갈색 머리가 허리까지 내려오고, 하얀 피부는 잡티 하나 없이 깨끗하며, 푸른빛의 눈이 보석처럼 빛나는,
동양과 서양의 미를 동시에 지닌 여자가 남자를 보며 소리 내어 웃었다.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웃음소리에 남자도 함께
미소를 흘러 보냈다.
“...방님.”
여자의 목소리가 작지만 또렷하게 들려온 순간,
‘쾅-’
이런 장면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괴상한 소리와 함께, 세상은 180도 돌기 시작했다.
1. 역사는 불타는 토요일 오후에 시작되었다.
“으아악-”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지 않지만 엉망진창이지도 않은 책상, 하늘색 천장과 벽, 어쩐지 쾌쾌한 냄새가 나는 이 곳은,
침대에서 굴러 떨어져 이제 막 잠에서 깬 지혁의 방이었다. 아픈 머리를 감싸 안으며 지혁은 한동안 일어나지
못 한 채 방바닥을 굴러 다녔다. 그때 방문이 큰 소리와 함께 열리며, 발랄한 목소리 하나가 지혁을 반겼다.
“일어났니?”
“엄마? 아직 안 갔어요?”
“당연하지. 오늘이 우리 아들의 18번째 생일인데. 부모로써 그냥 넘길 수 없지.”
앞치마를 두르고 손에 국자까지 든 지혁의 엄마였다.
‘또 시작됐다. 매 생일마다 시작되는 저 엄마 코스프레.’
고고학자이신 지혁의 부모님은 해외 출장에 잦으셨고 때문에 지혁은 유년시절부터 혼자 있는 날이 많았다.
하지만 생일 때 만큼은 달랐다.
“빨리 일어나, 아침 먹으렴.”
매 생일마다 그렇듯 식탁에는 미역국과 함께 계란찜, 고등어조림이 함께 준비되어 있었다.
“어쩜 메뉴가 매년 한결같네요.”
“지혁이도 참~엄마가 할 줄 아는 요리 저게 다 인거 알잖아.”
“자랑이십니다.”
조심스럽게 미역국을 한 입 떠먹은 지혁의 표정을 보며, 그의 엄마는 요리대회 결승전에서
심사위원의 평가를 기다리는 요리사처럼,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때?”
“작년보단 낫네.”
“정말? 꺄-”
“뭐가 그렇게 좋은 건지.”
“엄마 어제 밤늦게 까지 연습했어. 작년처럼 소금 미역국 안 만들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화장실에서 막 나온 지혁의 아빠가 지혁의 옆에 앉았다. 지혁의 엄마도 지혁과 마주 앉았다.
어느 가족에게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장면이었다.
“어때, 18살이 된 소감이?”
아빠의 자상한 물음에도 지혁은 별 다른 표정 변화 없이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20살도 아니고 18살인데. 딱히 별 기분 안 들어요.”
“무슨 그런 소리를? 18살이 얼마나 특별하고 소중한 때인데? 엄마가 18살 때...”
“아빠를 만났다고요?”
“그래. 그리고 19살 때...”
“날 가졌다고요?”
“어쩜, 우리 지혁이는 하나를 가리키며 열을 안다니까.”
‘당연하지. 5살 때부터 들은 소린데. 아니 그것보다 그게 지금 자랑이라고 맨 날 말 하는 거야?
우리 부모님은 정말이지 평범한 거 랑 거리가 먼 사람들이라니까.’
아무리 같은 가족이라 할지라도 지혁은 부모님의 마인드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넌 어때? 청춘이잖아. 좋아하는 사람 있어?”
엄마의 소녀 같은 질문에, 지혁은 순간 멈칫하였다. 누군가가 머릿속에서 떠올랐지만 애써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뇨, 없어요.”
“거짓말. 있는 거 같은데?”
“없다니까요!”
“맞다, 내 정신 좀 봐.”
한 눈에 보아도 낡은 상자였지만, 중앙에 박혀 있는 푸른색 보석은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고귀하고
아름다웠다. 지혁은 엄마가 자신에게 건넨 상자를 받고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였다.
“어때, 예쁘지? 얼마 전에 프랑스 갔다가 받아 온 거야. 사실 이 상자 우리나라에 있었어.
프랑스 학자분이 가져가셨는데, 그 분이 돌아가시고 그 가족들이 우리에게 준 거야. 그런데 그 상자,
아무리 해도 안 열린다고 하더라. 자물쇠도 없는데, 참 신기하지.”
“설마 이거 생일선물이에요?”
“빙고, 역시 지혁이야.”
‘18살 남자 애한테 선물로 이런 상자라니... 정말이지 평범 하고는 거리가 먼 분들이라니까.’
지혁은 남몰래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다녀올게.”
“잘 다녀오세요.”
부모님이 해외출장을 간 토요일. 비록 생일이었지만, 18살 남자 아이한테 부모님과 하루 종일 함께 하는
생일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혁에게는 몇 개월간의 자유라는 ‘선물’을 선사 받는 순간이었다.
현관문이 닫힌 순간, 지혁은 속으로 큰 환호성을 내질렀다. 한참을 날뛰던 그때, 지혁의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이 요란한 진동을 내며 울렸다.
“여보세요?”
“왜 태어났니? 왜 태어났니? 얼굴도 못 생긴 게 - 왜 태어났니.”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요란한 노랫소리에 지혁은 얼굴을 찌푸렸다.
“뒤질래, 한재원?”
“왜. 생일 축하해 준건데.”
“그래, 졸라 고맙다.”
벌써 10년 째 ‘친구’ 라는 이름으로 생일마다 생일빵을 거하게 챙겨주는 재원이었다.
“집에서 궁상맞게 혼자 있지 말고 나와. pc방 가자.”
“네가 쏘는 거냐?”
“미쳤냐? 원래 이런 날은 생일인 애가 쏘는 거야. 너 부모님한테 돈 많이 받았을 거 아냐.”
“얍삽한 새끼. 그럼 네 생일 때는 네가...”
“뭐야, 왜 말을 하다 말아?”
거실 탁자 위에 있는 상자를 본 순간 지혁은 잠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까 분명 부엌 식탁에다 올려놨는데, 저게 왜 갑자기 여기에...’
“야!”
“아, 미안. 뭣 좀 생각하느라. 하여튼 그럼 스타로 간다.”
“알았어.”
전화를 끊고도 몇 분간 지혁은 상자를 응시하였다. 그러다 고개를 돌려 발걸음을 옮겼다.
‘모르겠다. 엄마가 갖다 놨나 보지 뭐.’
현관문이 닫히고, 사람 하나 없는 집안은 조용하였다.
분명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때 pc방에 들어갔는데, 나왔을 때는 노을이 져 가고 있었다. 지혁은 져 가는
노을을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바라보았다.
“뭐야, 너 왜 그래? 저기 뭐 있어?”
“응? 아냐, 아무것도.”
“저건, 분명 무언가에 씐 거야. 아주 악독한 녀석이군... 하지만 상대를 잘못 골랐어. 당장 나와라! 내가 상대해 주마.”
10년 째 지혁과 재원의 친구이자, 모태 중2병인 다원의 말에, 지혁은 헛웃음을 지었다.
“쟤는 얼굴도 괜찮고 성적도 괜찮고 집안도 괜찮은데 어쩌다 저렇게...”
재원도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뭔가 불길해. 김지혁. 너의 그 등 뒤에 아주 안 좋은 게 느껴진다고.”
“맨 날 듣는 소리라 이제는 아무 느낌도 안 든다. 처음 들었을 때는 진짠 줄 알고 엄마한테 달려가 울고불고 했지.”
“너도 그랬냐? 나도 그랬어. 저 녀석 표정이 하도 진지해야 말이지.”
“아냐, 이번에는 진짜 느낌이 안 좋다고. 분명 오늘 안으로 안 좋은 게 터질 거야.”
“어련들 하시겠어. 난 이만 간다.”
“뭐? 더 안 놀아?”
“몰라. 왠지 그냥 가고 싶어졌어.”
“뭐야, 너 진짜 이상해. 진짜 뭐에 홀렸냐? 평소에는 밤늦게 까지 놀자고 조르는 애가.”
등 뒤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시선들을 무시한 채 지혁은 발걸음을 돌렸다.
‘그러게 뭔가 이상해. 난 왜 집에 가고 싶은 거지?’
지나가는 사람들 틈에서 사라져 가는 노을만큼은 또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고개를 들어, 주황색으로 온
세상을 뒤덮은 노을과 다시 한 번 마주한 순간.
“지혁아!”
싱그러운 목소리 하나가 그의 세상을 뒤집어 놓았다.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군지는, 그 목소리를 들은 순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밖에서 보니까 되게 반갑다.”
두 눈에 비치는, 자신 앞에 서 있는 여자에게 지혁은 짧게 ‘응’ 이라는, 말이라고 할 수 없는, 탄식을 내뱉었다.
칠흑같이 검은 머리카락이 어깨까지 내려오고, 머리카락 보다 더 검은, 한 번 빠져들면 헤어 나올 수 없는 블랙홀 같은
눈동자를 가진, 마치 동화 속 ‘백설공주’에서 막 튀어나온 소녀 같았다.
‘안 좋기는 개뿔이다, 온다원. 완전 좋은 일이 생겼잖아. 역시 먼저 가고 싶어진 건 유라랑 만나기 위한 거였어.’
“노을 진짜 예쁘다, 그치.”
“그러게.”
지혁의 같은 반 친구이자, 현재 그가 짝사랑하는 소녀였다. 이름은 신유라. 1학년 때부터 예쁘고 공부 잘하고 성격
좋기로 유명한 아이였다. 그것쯤은 지혁도 알고 있었지만 같은 반이 아니었기에 호감 이상의 감정은 없었다.
하지만 같은 반이 된 첫 날,
‘여기, 샤프.’
샤프를 깜빡하고 안 갖고 온 지혁에게 앞자리에 앉은 유라가 샤프를 건네 준 그 순간, 지혁은 깨달았다.
부모님이 어렸을 때부터 귀가 아플 정도로 얘기해 주셨던 ‘운명적인 사랑’ 이라고.
‘그럼 뭐 해. 그때부터 지금까지 제대로 말 한 번 붙여본 적이 없는데.’
하지만 18년 인생을 ‘여자 경험 無’로 살아온 지혁에게, 갑자기 찾아온 짝사랑은 고난과 고난의 연속이었다.
특히 상대는 자신 뿐 만 아니라 모든 학교 남학생들의 아이돌이었다. 수많은 경쟁자들 속에서 지혁의 존재는 그저
‘같은 반 친구’ 일 뿐 이었다.
‘안 돼. 일단 친해져야 해. 뭐라도 말 해 보자.’
생각은 이렇게 했지만 입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어디 갔다 오는 길이야?’ 라는 쉬운 한 마디가 머리와 입 사이를
왔다 갔다 하였다.
“넌 어디 갔다 오는 길이야?”
지혁이 한 말이 아니었다. 유라의 뜻 밖에 물음에 지혁은 깜짝 놀라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 했다.
“
노, 놀랐니?”
“아니!! 그러니까, 음. 친구들이랑 놀다 오는 중이었어.”
“그렇구나. 나도 그런데.”
한심하도다. 표정은 전혀 아무렇지 않아 했지만 속으로는 당장이지 쥐구멍으로 숨고 싶은 지혁이었다.
“잘가.”
“너도.”
결국 갈림길에서 헤어지고, 유라의 뒷모습이 사라지자, 지혁은 그제야 참고 있던 한숨을 내뱉었다.
조용한 집안은 익숙했다. 하지만 집에 들어선 순간, 지혁은 평소와는 다른 무언가를 느꼈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어색한 분위기를.
‘뭐야 이거...’
조심스럽게 거실 불을 켰지만 이상한 것 은 없었다. 하지만 쇼파 위에 있는 상자를 본 순간, 그 자리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분명 아깐 탁자 위에 있었는데 이게 왜 여기 있는 거야?’
조용한 집안에는 시계 바늘 움직이는 소리가 전부였다.
‘침착하자. 내가 지금 피곤해서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걸 거야. 그러니까 빨리...’
‘부스럭-’
“으아아악!!!”
상자가 소리를 내며 움직이자, 지혁은 소리까지 내지르며 뒷걸음질을 쳤다.
“...방...”
거기다 가녀린 목소리까지 지혁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가.
‘귀, 귀신?’
“방...님...방...”
목소리는 점점 커져갔다. 당장이라도 도망가야 할 순간이었지만 지혁은 다리에 힘이 풀려 쉽게 일어날 수가 없었다.
‘젠장, 진짜 귀신인가 보다. 유라한테 고백도 못 해 보고 이렇게 죽다니. 싫어, 싫다고!’
그 때 마음과는 달리 지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건 또 뭐야?’
마치 누군가의 의해 조종당하는 것처럼, 힘없이 일어나 힘없이 쇼파로 다가갔다.
'대체 내가 왜 움직이는 거냐고?!'
전혀 마음에도 없는 움직임의 끝은 상자를 여는 것 이었다. 지혁의 손길이 닿은 순간,
전혀 열리지 않는 다고 했던 엄마의 말과는 달리, 상자는 너무나 쉽게 열렸다. 그와 함께
“으아아악-”
또 다시 지혁의 크나큰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상자에서 나오는 푸른 색깔의 빛 때문이었다.
그 빛이 너무 눈부셔, 지혁은 잠시 눈을 꼭 감을 수 밖 에 없었다.
“드디어...”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드디어 다시 만났군요.”
지혁의 앞에는 처음 보는, 아니 두 번째로 보는 여자가 있었다.
“당...신은...”
“후훗-”
꿈에서처럼, 여자는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분명해. 이 사람. 오늘 내 꿈에 나온 사람이야.’
한복을 입고 있지만 푸른 눈동자와 갈색 머리카락은 어쩐지 서양의 느낌이 났다. 한 눈에 보아도 우아하고 아름다운 여자였다.
“뭐야 이 아저씨는?”
하지만 뒤이어 들려오는 건방진 목소리에 지혁은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넌... 넌 또 뭐야.”
“뭘 봐? 어린 애 처음 봐?”
머리를 양 갈래로 귀엽게 묶고, 아직 볼 살도 다 안 빠진, 초등학생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 귀여운 여자아이였다.
하지만 눈빛과 말투는 사나워 당장이라도 지혁을 뜯어버릴 것 만 같았다. 아직도 상황파악을 하지 못 한 지혁은 아무
말도 못 한 채 둘을 번갈아 바라보기만 하였다.
“여은아, 그렇게 말하면 안 돼. 아저씨라니.”
“엄마!”
‘엄마?’
여자가 자신의 딸인 여은을 달래는 모습을 보고 지혁은 소리 없이 놀랬다. 여자가 자신의 또래로
밖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저 분이 너희 아빠거든.”
‘네?’
“아빠? 저 사람이?”
‘뭐?’
‘아빠’ 와 ‘저 사람’ 모두 지혁을 말하는 것 이었다.
“그래. 서방님, 아무쪼록 앞으로 잘 부탁드릴게요.”
그리고 이 ‘서방님’ 이라는 호칭까지.
“내... 내가 왜...”
믿을 수 없는 상황 앞에서, 지혁은 큰 소리로 외쳤다.
“내가 왜 네 서방이야?!”
역사는 불타는 토요일 오후에 시작되었다.